나르시시스트 어머니와 지적 장애 아버지.






화목한 가정과 가정학대의 경계선에서 머물던 한 가족이 있었다.






아이가 열일곱 번째 생일을 맞던 날, 아이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버리고 사라졌다.






흔하디 흔한, 불우한 가정사를 가진 소년의 이야기.


내 어린 시절은 그렇게 평범하게 불행했다.






인서울 대학 정도는 충분히 붙고도 남을 성적이었지만, 부모가 물려준 빚 때문에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학교를 자퇴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선 학교를 다니며 수능을 준비할 때 나는 공사장에 있었다.






안 해본 알바가 없었고, 죽어라 일하며 열심히 빚을 갚아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빚을 갚았을 때 내 나이는 스물 넷이 되어 있었다.






죽어라 달렸건만 그럼에도 너무 늦었다는 허무함은 내게서 삶의 의지를 빼앗기에 충분했다.






중졸이라는 초라한 학력과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지나간 시간들.






노력한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일지도 모르지만, 20년이 넘는 세월을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더이상 미래에 투자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품어 왔던 꿈은 가슴에 묻어 두고, 현실과 타협하며 그저 따뜻한 곳에서 먹고 잘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유복했다면 어땠을까.






내 부모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면.






하다 못해 빚이라도 남기지 않았더라면 내 20대에 애먹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뭐, 이미 난 어른이 된 걸 어쩌겠는가.






오늘도 아픈 마음을 다독이며 편의점을 들러 집에 가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진,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저 부른거에요?"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네."






내가 의문을 담아 눈을 살짝 크게 뜨자, 잠깐 우물쭈물하던 아이가 대답했다.






"죄송한데, 며칠만 재워 주실 수 있을까요?"






한 마디만 들어도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들어나 보자는 마음으로 잠시 손에 든 비닐봉투를 내려놓고 몇 걸음 떨어진 벤치에 앉아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게..제가 부모님이랑 사이가 별로 좋은 편이 아니라서요.


아니, 그냥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어릴 때부터 맞고 자랐는데, 그날은 진짜로 죽을 지도 모르겠어서 도망쳐 나왔어요. 며칠 있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또 엄청 맞고... 다시 나와서 지금까지 몇 달 동안 이렇게 살고 있어요."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이런 게 선행도 아니고, 걸리면 그거대로 문제가 생길 거다.






"죄송해요.. 제가 말주변이 없어서.."






그러나 내 아픈 과거의 기억이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공감이란 감정을 불러냈다.






나름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기에, 이 아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일단 따라와요."






이건 선행도 연민도 아닌, 그저 세상에 대한 반항이다.






꼭 과거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기에, 또 다른 누군가는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저지르는.






"...감사합니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오며 그제서야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래 생각했어도 아마 같은 결과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학생은 이름이 뭐에요?"






"아! 김얀순이고 18살이에요. 아저씨는요?"






"김얀붕이요. 그냥 편하게 아저씨라 불러도 괜찮아요."






깔끔한 성격이어서 평소에 청소를 깨끗하게 하는 편인지라 따로 집 안을 정리할 건 없었다.






아, 물론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이 아이를 데려온 건 아니었다.






계약직이긴 해도 일단 직장은 있고, 딱히 취미 같은 것도 없어서 돈은 남아돈다.






고등학생 한 명을 데리고 생활하는 것 쯤은 문제없다.






"창고로 쓰고 있는 방이 하나 있으니까 내일 비워줄게요. 전 거실에서 잘 테니까 오늘은 제 방에서 자면 될 거 같아요."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칫솔을 하나 꺼내 주고서 인터넷에서 침구를 찾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집이라서 마땅히 줄 만한 이불이 없었다.






적당해 보이는 걸로 쿠팡에서 로켓배송으로 주문하고, 잠시 얀순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잠들었다.


















토요일 아침.






평소 같았으면 두 시간 정도 늦잠을 잤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방에 쌓아 뒀던 각종 택배 박스와 안에 든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고, 쓸 만한 전자제품 몇 개는 중고거래로 처리할 생각으로 현관 한쪽에 쌓아 두었다.






자전거는 아파트 공용 거치대에 주차해 두고 책들은 거실에 있는 책장으로 옮기며,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정리가 끝났다.






문 앞에 도착한 이불과 매트리스를 방에 넣어두고 빠르게 씻고 나와서 아침을 만들었다.






기름이 지글거리는 소리에 얀순이도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일어났어요?"






"네...안녕히 주무셨어요..."






얀순이가 세수를 하고 나오자, 식탁에 의자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제가 서서 먹을게요."






"괜찮아요. 방에 의자 하나 있으니까 그거 가지고 올게요."






일단 책상용 의자를 임시로 쓰기로 했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집밥인지... 잘 먹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 요리 잘하시네요! 진짜 맛있어요."






-------------------------------------------------------------------------------------

나는 불행했다.




지구 어딘가에 분명 나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있겠지만, 내가 불행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 친구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가족과의 일상이 나에게는 없었다.




아버지와 동물원에 가 보지 못했고, 어머니와 영화관에 가 보지 못했다.




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런 친구들조차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멀어져 갔다.




노래방도, PC방도, 나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내 부모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자식이 아닌, 자신을 위한 훈육.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당해 왔다.




부모의 노예로 십칠 년을 살아 왔고, 가장 따뜻한 곳이었어야 할 곳에서 뛰쳐나와 차가운 현실로 도망쳤다.




그러나 사회는 냉정했고,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기대했던 어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어른이 되었어도 스스로를 책임지기도 힘겨워하는 사람들과 내 이야기를 우습게 보며 그깟 게 뭐가 힘드냐며 비웃으며 내게 잘못을 돌리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은 선량한 사람인 척 검은 속내를 숨기고 접근하는 사람들.




나는 더 상처받기 전에 이 사람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원하는 걸 얻어내면 가차 없이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났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던 어느 날,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흑심을 품기는 커녕 나의 아픔을 조금도 무시하지 않았다.




이미 꼬여버렸다고 생각했던 내 인생을 곧게 펴 주었다.




마음을 접어 둔 지 오래였던 꿈들을 실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치 아버지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아버지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내 아버지는 이런 선인이 아니었으니까.




어쨌건 그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의 도움으로 잠자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고, 남들과 같이 대학생활을 즐길 수 있었고, 행복할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이 남자를 연모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와 언제나 함께했고, 앞으로도 계속 함께할 테니까.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임을 느끼며 더 행복했다.

-------------------------------------------------------------------------------------






이런 날들이 지나며 며칠은 자연스레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되었다.






얀순이는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서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수능 점수도 나쁘지 않아서 누구나 알 법한 대학에 입학했다.






용돈 몇십만 원 정도는 줄 수 있다는데도,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면서 알바와 공부를 병행하며 스스로 모든 걸 해결했다.






기특하면서도, 어릴 적의 나를 보는 것 같아 가슴아픈 모습이었다.










얀순이가 대기업에 취직하고, 내가 서른 번 째 생일을 맞이하던 날이었다.






"아저씨! 앞으로는 내가 다 책임질테니까 걱정마! 이제 행복하게 해줄게!"






"에이, 무슨 소리야. 너도 이제 네 인생 살아야지.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안 그래도 최근에 벌인 사업 잘되고 있으니까 걱정마"






얀순이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응? 아니, 평생 이렇게 살거야? 이젠 ㄴ.."






"당연하지. 그럼 내가 아저씨를 떠날 줄 알았어?"






"얀순아 난 이제 결혼할 나이도 됐ㄱ.."






"뭐?"


순간, 얀순이가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얀순아 왜그러는거야..?"






얀순이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서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나를 뒤로 자빠뜨리고 내 배 위에 올라타 목을 졸랐다.






저항하려 했지만 잦은 과로로 망가져 약해진 몸으로는 얀순이의 근력을 이길 수 없었고 이내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너무 무리해서 쉬고 싶다 하시더라고요. 네네. 요즘 계속 일만 하셨죠. 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읍..읍읍!"






"아저씨... 아니 얀붕아."


얀순이가 내 입을 막아둔 청테이프를 떼며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아저씨는 내 전부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아저씨를 잃을 순 없어. 그러니까, 나를 떠나게 두지 않을거야.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