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피해야 하겠느냐."


내 담담한 대답에 하얀 옷을 입은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팍팍 쳤다.


"그 미친 년이 다가오고 있다고요! 신님도 얼른 피하셔야 합니다!"


"허허, 그러니 어디로 피해야 하겠냐고 물어보는 것 아니겠냐."


나는 읽던 책에 책갈피를 꽂아넣고 아이에게 다시 물었다. 내 물음에 아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오른팔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내 집을 두고 어디를 가겠느냐. 너라도 네 목숨을 챙기거라."


아이는 입술을 꽉 깨물고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마 속으로는 '바보 같은 신'이라며 나를 탓하고 있겠지.


'저 아이에게 마음의 짐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건만.'


자리를 박차고 나간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던 것이 가슴 한 켠을 아프게 한다.


어쩌면 저 아이에게 죽을 때까지 남을 마음의 짐을 얹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역시.


아이가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미닫이 문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은 점점 커져간다.


이윽고 바깥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카드득- 솨악-


나무로 된 미닫이문이 시푸른 칼에 의해 순식간에 잘려나간다. 어설프게 쌓아져있는 문의 조각들을 걷어차며, 그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스흡- 후우-


투구 너머에서 새어나오는 거친 숨소리는 이 아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 못내 안타까워졌다. 


"앉거라. 차라도 한 잔 내어주마."


"..."


대답 없이 거친 숨만 내쉬던 아이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무언가를 방바닥에 내던졌다.


"..."


경악과 분노로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또 다른 아이의 수급이 어떤 존중도 없이 방바닥을 구른다. 움직이는 물체에 반응하여 눈길이 잠시 머물지만, 이내 거두어 여전히 제자리에 서있는 아이의 투구 너머를 바라본다.


"아이야. 차라도 한 잔 하자꾸나."


습- 후- 습- 후-


투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더 빨라진다. 분노를 다스리려고 하는 인간들의 습관임을 알고 있기에 아이를 바라보며 평온함을 담은 미소를 지어준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아이의 신경을 거슬렀는지, 아이는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한 손에 들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에 피를 머금은 듯한 붉은 눈. 날카로운 눈매와 단정한 눈썹. 분노를 억누르느라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어 입술은 조금이지만 하얗게 질려있었다.


"...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으십니까."


이윽고 분노를 겨우 죽여 애써 담담한 말투로 아이가 물어왔지만, 나는 그녀에게 되려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무어라 말을 해야겠냐, 아이야-"


"나는 아이가 아니야!"


쾅-!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투구를 바닥에 내던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에게 빌붙어 당신의 피를 빨아먹는 그 수많은 '아이' 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나는 아이가 내던진 투구를 잠시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찻잔 두 개를 꺼내어 앉은뱅이 책상 위에 올렸다. 아이는 여전히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에게는 인간들이 모두 아이처럼 보이거늘, 어찌하여야겠느냐."


내가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바라보자 그게 되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아이는 이를 뿌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갈았다.


그리 한참동안 분노에 떨며 서있던 아이는 내가 자신의 분노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는 듯 자포자기하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길한 붉은 철로 이루어진 갑주를 몸에 두르고 있음에도 제 몸인 것처럼 움직이는 걸 보아하니 아이가 여태껏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이 간다. 


오른손으로 찻주전자를 들어올려 아이의 잔에 먼저 따라준 이후 내 잔에 따르다 차가 잔을 넘치고 말았다.


나는 어린 아이들이 실수를 한 뒤에 짓곤 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한 쪽 팔을 내어준 뒤로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구나."


아이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책상 위에 올린 제 두 손을 꽉 쥐며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태연하게 흘러내린 차를 방금까지 읽고있던 책으로 닦아냈다.


"...재밌게 읽으시던 책 아닙니까."


아이의 질문에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오늘 이후로 읽을 수도 없지 않겠느냐."


아이의 목적을 알고 있다는 뜻이 담긴 말에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아이는 책상 위에 놓인 자신의 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차를 반 정도 마신 아이는 잔을 내려놓으며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간들이 '향수'라고 부르는 감정을 느끼고 있는 얼굴을.


"차 맛은 마음에 드느냐. 오랜만에 마시는 것일 터인데."


"...거짓말이 느셨군요. 제 이름도 기억 못하시면서."


"이름이 곧 네 전부를 이야기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내 대답에 아이는 한 방 먹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나 금방 자신이 내 말에 웃었다는 것에 스스로 분개하며 찻잔을 책상 위에 뒤집어 엎어놓았다. 아까 닦아낸 것이 무색하게 책상 위에 차가 흥건하게 고였다.


더 이상 차를 마시지 않겠다는 과격한 표현에도 오른쪽 손으로 잔을 잡아 내 잔에 담긴 차를 차분히 마시기 시작했다. 


아이는 나에게서 다른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 한참 나를 노려보다가 질문을 툭 던졌다.


"제게 화나지는 않으십니까."


늘 듣곤 하는 질문. 어찌하여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느냐, 자신이 밉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인간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나를 믿고 따른 '아이들'은 종종 불안하다는 듯 내게 이리 묻곤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의 대답은 같았다. 같을 수 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화를 내야하느냐."


"제가 이 년을 죽였으니까요."


아이는 방구석을 구르던 머리를 가리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숨기지 못한 분노가 여실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당신의 왼쪽 팔을 받아내, 그 힘으로 떵떵거리며 스스로를 용사라 참칭하던 어리석은 년임에도. 당신은 이 년을 사랑해 팔을 내어주셨을 테니까요."


나는 찻잔에 담긴 차를 전부 마신 이후 한 잔을 더 따라낸 뒤, 방금 따라낸 차의 윗부분에 맴도는 향기를 천천히 즐겼다. 이윽고 차의 온기와 향기가 서서히 흐릿해질 무렵, 그녀의 말에 대꾸하였다.


"나는 어떤 아이도 사랑하지 않는단다, 아이야. 그저 원하는 것을 내어주었을 뿐이지."


"...거짓말쟁이."


아이는 이를 으드득 갈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았지만, 아이가 뽑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개의치 않고 차를 한 모금 목 너머로 넘겼다.


"나는 당신을 원했는데 당신은 나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잖아."


"..후우."


입안에 맴도는 뜨거운 공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찻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아이의 눈을 바라본다.


광기, 분노, 그리고 미처 감추지 못한 사랑과 증오가 가득 배어있는 눈.


'내가 밉다기 보다는.'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았으면서, 스스로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섬기는 척한 아이에게는 팔을 내어준 나를 원망하면서도 대답을 원하는 눈. 


"아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단다."


"거짓말! 나는 당신의 사랑을 원했-"


"나를 사랑했고, 내 사랑을 원했지. 그러나 그 이상으로 아이는 내가 다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느냐."


정곡을 찌르는 말에 아이는 입을 콱 다물었다. 명백한 감정으로 끓어오르던 눈은 그 한 마디에 빛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더 목구멍 너머로 넘긴다. 몸뚱아리가 삐그덕대는 탓에 맛은 느껴지지 않지만, 아직 향기는 맡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참 멍하니 제자리에 주저앉아있던 아이는 자조와 한탄이 담긴 웃음을 픽 짓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을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로 새빨갛게 물든 검에서 미처 닦지 못한 핏물이 방바닥을 어지럽힌다.


"그래, 그랬지.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당신이 다치는 게 그 무엇보다 싫었으니까."


아이가 쥔 검에 시커먼 마력이 흐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이르기 위해 삿된 것들과 손을 잡은 탓에 백색을 띄고 있던 아이의 마력은 새카맣게 물들어버렸다.


그러나.


후르륵-


아무 말 없이 한쪽만 남은 팔로 찻잔을 바닥까지 비운다. 아이는 태연한 내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는 사냥개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던 당신이."


스르릉-


검이 공기를 가르며 내 목 바로 앞에 멈춰선다. 개의치 않고 잔을 책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그 빌어먹을 년에게 팔을 그리 내어주는 걸 바란 건 더욱 아니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이의 눈을 바라본다.


안에 담긴 끈적이는 감정을 바라본다.


억지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 불태우는 분노.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은- 


'사랑.'


눈을 천천히 감는다. 최후의 최후까지도-


'인간들의 감정은 이해하기 어렵구나.'


"마지막 말은, 없어?"


"아이야, 나의 최초의 신도야."


천천히 입꼬리를 밀어 올려 웃는다. 


"내가 할 말은 늘 같단다."


몸에 천천히 힘을 뺀다. 찾아올 죽음을 받아들인다.


"원하는 것을 가져가려무나. 그리하여 원하는 것을 이루려무나."


"....크흣."


목소리에 담겨있던 분노는 사라진다. 드러나는 것은 사랑이지만, 그 위를 뒤덮는 것은 질척하기 그지없는 욕망이었다. 


모두에게 바보같이 제 몸을 내어주는 신. 자신이 제일 먼저 믿고, 제일 먼저 따랐으며, 제일 먼저 사랑했음에도, 자신의 사랑을 무시한 각박한 신.


자신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했음에도, 멍청하게 다른 여자에게 몸을 내어준 신.


"..이제, 영원히 함께랍니다."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며, 신도들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던 신의 머리가 어떠한 저항도 없이 바닥에 나뒹군다.


여자는 피조차 흐르지 않은 채 서서히 가루로 변해가는 신의 몸을 내버려둔 채, 머리를 집어들어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신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여자에게는 신이 눈을 뜬 채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신의 머리를 품에 안은 채로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자신이 그 무엇보다 사랑했음에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은 신. 


끝끝내 자신의 손으로 죽여서야 자신을 사랑해준, 어리석은 신. 


여자는 신을 품에 안은 채 그리 한참 앉아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종적을 감췄다.


그 뒤로 여자를 보았다는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생명이 발을 들일 수 없는 황무지에서 가끔 그녀를 보았다는 소문이 들리곤 했지만 이내 황량한 바람에 쓸려 사라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