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때처럼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퇴근길을 걷는다.


자취방은 회사 근처, 걸어서 15분 거리.


사실 근처라고 하기엔 애매하게 먼 위치.


"하암..."


피곤함에 하품이 나온다.


지금은 오전 8시 40분.


그렇다. 나는 어제 마감 때문에 날을 새고 이제 퇴근하는 것이다.


벌써 날은 다 밝았고, 나를 스쳐 지나가는 출근 행렬.


'빨리 자고싶다...'


집까지 15분거리가 이럴때는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이러다 걸으면서 졸겠네...'


눈이 스르르 감긴다.


"흡!"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번쩍 뜨고 숨을 크게 들이 마셨다.


그런데...


억지로 크게 연 눈에 방금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 보였다.


익숙한 빌딩 숲이 아닌, 진짜 숲이.


"엥?"


너무 당황스러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만다.


"꿈인가?"


'걸으면서 잠들어버렸고 지금은 꿈?'


아니, 그럴리가 없지.


서서 잠들었으면 넘어져서 꿈에서 깨지 않을까?


일단은 걷는다.


주변은 열대 우림처럼 우거진 숲이 아닌, 드문 드문 나무들이 서있고,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였다.


"도대체..."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감각.


그때.


"누구세요?"


전방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누, 누구세요?"


나는 바보처럼 되묻는다.


그러자 앞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에서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후줄근한 옷차림에 마치 이슬람 히잡처럼 눈만 내놓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그 손에는 시위가 매겨진 활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화살 끝은 나를 향해 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무기로의 위협에 나는 약 2초의 딜레이를 거친 후, 양 손을 번쩍 들었다.


'장난감이 아니다. 강도야 뭐야?'


예리한 화살촉이 햇빛을 받아 번쩍인다.


"저, 저기 일단 말로..."


"인간이 왜 여길...?"


놀란듯한 그녀의 목소리.


'인간이라니?'


살면서 나를 지칭하는 명사로는 처음 들어보는 종족명, 인간.


너무나 상식밖의 상황의 연속에 뇌의 처리 속도가 쫓아 가질 못한다.


"어.... 음. 말씀 좀 묻겠..."


내가 입을 열자 그녀는 활 시위를 잡은 손에 힘을 더 했다.


나는 급히 한발짝 물러나며 양 손을 더 높이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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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200살 먹은 엘프 얀순은 오늘도 생필품을 구입하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


나뭇잎이 깔린 길을 지날 때도 발소리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엘프지만, 지금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다른 인간 마을에 가봐야 할까..."


사실 이 곳도 그녀에겐 3번째 이사를 한 곳이다.


그녀의 외모는 추악한 엘프들 사이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였기에, 엘프 마을에서조차 추방 당했다.


그렇기에 혼자 생활한지 벌써 수십년이 지났지만, 자급자족이 어려운 옷이라던가 기타 생필품은 인간 마을에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프인것을 들키면 인간 마을에 출입을 금지 당하기 일쑤.


이번 마을도 그녀의 복면을 수상하게 여긴 잡화점 주인에 의해 정체가 밝혀지고 말았다.


"하아..."


한숨을 쉬며 자신의 복장을 내려다 보는 얀순.


군데군데 누덕누덕 기워진 옷은 거의 한계였다.


불현듯 서러운 감정이 치솟아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언제까지 이렇게..."


의미 없는 삶을 이어가야 할까.


라는 뒷말은 차마 입밖에 내지 못했다.


얀순은 비참했지만 아직 삶의 욕구를 놓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나타날거라고, 200년 동안 버텨온 것이다.


누덕누덕한 옷 소매로 눈가를 슥 닦은 얀순은 다시 걸음을 띄었다.


숲속의 외딴, 자신의 쓸쓸한 오두막 집을 향해.


그런데 집을 조금 앞둔 곳에서, 얀순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침입자?'


얀순은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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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가세요."


나는 복면 여자에게 화살이 겨누어진 상태로 그녀의 오두막으로 연행 되었다.


들어 올린 팔이 이젠 저릴 지경이다.


내가 입을 열 때마다 그녀가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 했기에, 이젠 아예 입을 다물고 있다.


들어간 오두막 집 내부는 살풍경했다.


필수적인 가구만이 몇 개 덩그러니 놓여있는 집안.


그나마 침대는 꽤 호화로웠는데, 그 크기가 킹사이즈 이상은 되어 보였다.


'동거인이 있나?'


"여기 앉아요."


그녀가 가리킨 식탁으로 보이는 테이블 앞에 앉는다.


그러자 그녀는 나즈막히 알아들을 수 없는 뭔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읊조림이 끝나자 그녀는 활을 놓았다.


"으악!"


나는 반사적으로 양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내 팔에는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양 팔을 내리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 엉?"


눈 앞에는 화살이 매겨져 나에게 겨눠진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활이 보인다.


'뭐야 이게...'


"쓸데 없는 짓 하면 바로 발사 될거에요."


어느새 오두막 구석으로 이동한 그녀는 장롱같은 곳을 뒤져서 로프를 가져왔다.


"가만히 있어요."


그리고 내 몸은 의자에 칭칭 묶여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만약 꿈에서 아픔을 느낄 수 없는게 사실이라면 이건 확실히 현실이다.


손목 살을 파고 드는 밧줄에 통증이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으며 활을 치워 주었다.


"후우..."


그제서야 긴장이 좀 풀린 나는 한숨을 내쉰다.


"당신은 누구죠?"


그녀는 아까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나는 선택권이 없음을 알았다.


여기에서 우위는 그녀에게 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알 방법은 그녀에게 묻는 것 밖에 없어 보였기에,


나는 최대한 진실된 답변을 하기로 했다.


"저는 김얀붕이라고 합니다. 회사에서 퇴근하던 길에 갑자기 이 숲에 뚝 떨어졌어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 정보를 캐내기 시작했다.


10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내가 알아낸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트럭에 치이지도 않고 이세계 전이라니...'


평소 서브컬쳐물을 즐겨 봤던 나는 이 상황에 사실 익숙했다. 간접 경험적으로.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여자는 스스로를 엘프라고 했다.


아까 활을 띄우는 마법을 직접 봤으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얼굴을 저렇게 칭칭 가리고 있지?'


그러고 보면 경황이 없어 눈치 채지 못했지만, 복면 사이로 유일하게 보이는 그녀의 눈은 굉장히 아름다웠다.


계속 보고 있으면 혼을 빼앗겨 버릴 것 같을 정도로.


'옛날에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인생이 피곤해서 베일을 쓰고 살았다던데, 그런 느낌인가?'


아무튼 지금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물었던 말에 대답을 해야 한다.


"저는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더니 나를 묶은 밧줄을 순순히 풀어주었다.


'이렇게 순순히 믿는다고?'


물론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레 변한 그녀의 태도에 의아해졌다.


"엘프는 말의 진의를 느낄 수 있어요."


나의 마음속 의문에 그녀가 답을 주었다.


'살아있는 거짓말 탐지기인가...'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는 것도 정말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일단은 사람들의 도시나 마을에 가야겠지. 그것부터 물어보자.


"저기..."

"저기!"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먼저 말씀 하세요."


내가 양보한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나에게 제안했다.


"가, 가실 곳이 없으시면 당분간 제 집에 머무셔도..."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진듯, 그녀의 말끝이 흐려진다.


"흐음..."


그러고보니 지금 나는 극한의 피로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워낙 이상한 사건들이 터지다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저... 그럼...."


나는 조심스레 요청사항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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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순은 200년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 겪어 보았다.


고대 문헌같은 곳에서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에 대한 정보를 접해보긴 했지만, 그것들도 그저 허황된 주장일 뿐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확실한 이세계인이 자신의 눈 앞에 있다.


언젠가, 남성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넉넉한 사이즈로 맞추었던 침대.


그런 헛된 희망의 아픈 증거물이었던 이 가구가 드디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을 김얀붕이라 소개한 이세계인은, 무방비하게 자신의 침대에서 골아 떨어진 것이다.


그녀가 얀붕을 이세계인이라고 확신한 것도 바로 이 행동 때문이다.


'엘프 앞에서 이렇게 무방비 하게...'


이 세계의 인간이라면 절대 이런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얀순은 그의 자는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코앞까지 접근 시켰다.


평생 이렇게 가까이 남성을 접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자신에 대해 적의가 없는.


"하아....하아..."


얀순의 눈에 핏발이 돌기 시작했다.


조용히 복면을 벗고 혀를 내밀었다.


'핥고싶어. 핥고싶어. 핥고싶어....'


얀순의 길게 뻗은 혀가 얀붕의 볼에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