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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그녀는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저 둘을 죽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단검을 날을 서로 갈아가며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일단 너 먼저."


"아아아악!!!"


연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던 마수는 자신의 옆에 다가온 어린 소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수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 번 두 뿔에 오염된 마나를 응축하기 시작했다. 마수의 의지에 따라 전과 비할 수 없이 흉악한 기세로 넘실거리던 마나는 파티마를 향해 그 분노를 표출했다.


"씨발새끼가 지금 내 남편을 건드려 놓고 화내는 거야?"


'저건 못들은 걸로 하자.'


그녀가 작은 소리로 뭐라 한 것 같았지만 지금은 괜히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이레사아와의 기억이 맞물려 공포가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꺽!"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마수의 반항에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마수의 뿔을 잡고 그대로 꺾어 부러트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제압했다. 오염된 마나가 제어를 잃어버리고 공중에 흩어지자 마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애벌레나 다름없는 몸으로 몸부림 치기 시작했다.


"지랄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푹


"끼이이이!!"


하지만 그녀는 마수의 양 옆구리에 단검을 박아 넣는 것으로 그 작은 움직임조차 냉혹하게 차단했다. 그러자 마수는 이번에는 구멍이 뚫린 폐를 쥐어 짜 신음을 내뱉어 끝까지 그녀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들이켜."


-...


끈질긴 마수의 반항에 마침내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는지 허리춤에 매달린 호리병을 꺼내 뚜껑을 따고 작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호리병의 입구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마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시이이! 이이이!"


마수는 그 예민한 짐승의 감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깨달았는지 필사적으로 척추를 비틀며 호리병에서 멀어지려 했지만 이미 다 죽어가는 몸으로 도주가 가능할 리 없이 맥 없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까불고 있어, 버러지 새끼가."


게임에서 본 것과 같이 은근히 입이 험한 그녀는 이번에도 욕설을 조용히 내뱉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는 당연하게도 크레오메가 있었다.


"잠깐, 파티마!"


마수가 당한 끔찍한 취급에 잠시 같이 정신을 놨던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내 부름에 다시 반대로 고개를 돌리 그녀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흉신악살의 얼굴에서 가녀린 소녀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네, 당신! 무슨 일이신가요?"


"그 마족은 내가 필요해서 이용하고 있던 놈이야. 아직 필요하니까 살려줘."


"예?"


마른 침을 삼키며 크레오메를 살리기 위해, 아니 내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에게 거짓말을 내뱉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아주 거짓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나중에나 따질 문제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돌아왔는데 정말 이런 것이 필요하시다고요? 저를 사용하시면 되잖아요."


"뭐...?"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말을 되물었다. 잠시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잠시 후에야 뜻을 이해하고 황급히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절대 아니야! 그런 의미가 아니고 내 목적에 저게 꼭 필요해서 그래!"


파티마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크레오메의 명칭도 인격체가 아닌 물건 따위를 부르는 호칭으로 격하 시켜 불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파티마가 당장에라도 크레오메를 담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말해주세요. 도대체 이 창녀가 당신께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건가요? 굳이 인간으로 변장 시켜서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건가요?"


"일단 자리 먼저 옮기자. 그 마수를 쫓는 추적대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건 알지? 우리 모습을 들켜서 좋을 건 없어."


"알지요. 하지만 그것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죽여드릴 테니까 그것들 때문에 당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마수 토벌대 대장이 여기 영주 아들이야. 추적대를 몰살 했다가는 영주는 물론이고 밀리아나한테 보고가 들어가. 그러면 그녀한테 네가 나를 찾았다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는데?"


"...밀리아나?"


"아."


방금 전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겨우 수습해 놓고 또 비슷한 짓을 벌인 나는 내 멍청함을 탓하며 스스로 혀를 잘라내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이름을 불러주셨군요."


과연 파티마는 내 입에서 밀리아나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이미 어두웠던 그녀의 눈동자가 무저갱과 다를 바 없이 한없이 깊어지며 조용히 나를 압박했다. 그녀의 살기를 감지한 나는 이레시아 때의 대처를 상기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제 것이 아니고 가지고 놀던 년의 이름을."


"잠... 큭!"


깐만이라 외치려 했지만 이리저리 굴러가던 파티마의 빛 없는 눈이 다시 나를 향하자마자 시야가 뒤집히며 어느새 내 사지가 그녀의 사지로 결박 당해 있었다.


"미안해! 너무 오랜만이라 실수했던 거야! 일단 진정 좀 해!"


"거짓말! 저 북쪽에 있는 창백한 년한테도 분명 같은 말을 했겠죠! 그런데 겨우 도망쳐서 저한테 달려와 놓고도 아직도 다른 것들을 못 잊으신 게 분명해요!"


중간마다 도대체 뭔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돼 대답이 늦어지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깔아뭉갠 내 몸 위에서 들썩이며 혼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수 없게 그녀의 움직임 때문에 나와 그녀의 몸이 자꾸 마찰 되어 생리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이를 감추기 위해 지면과 몸을 더욱 밀착 시키자 그녀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더욱 몸을 붙였다.


"이것 봐요! 말로는 아니라면서 몸은! 몸은... 아!?"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를 숨기려는 내 노력은 아주 쉽게 발각 당했다. 내 저항에 맞춰 몸을 흔들던 그녀의 복부에 내 것이 그대로 닿은 것이다. 처음에는 뭔지 모르는 듯 신경 쓰지 않던 그녀는 이내 그 독특하고 뜨거운 감각 때문에 말을 멈추고 조용히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말을 하시지, 바보."


'억지로 해 놓고 어디서 뻔뻔하게 헛소리냐, 갈!' 하고 큰소리를 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진짜 죽도 밥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천천히 올라오는 그녀의 시선에 맞춰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네가 몸 부딪쳐서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일단 놓고 얘기 좀 해보자."


"안돼요!"


"...왜?"


"이런 걸 그냥 놔두면 제대로 사고를 못 해서 제대로 판단을 못 내린다고요!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고 보죠!"


"아니 왜 말이 그렇게 흘러가!"


"아내로서 당연한 겁니다!"


놀라울 정도로 환장할 의식의 흐름에 어안이 벙벙해진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가 뜻을 접는 일은 없었다. 정말 백주대낮에 야외에서 해버릴 것처럼 한 손으로 나를 붙잡고 나머지 손으로 내 상의의 어깨 부분을 꽉 잡았다.


"자! 그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깡


"...내, 내 친구 놔줘!"


"...튀라고."


동정을 잃기 직전 가만히 있던 크레오메는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위험에 빠진 내 모습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와 조리용으로 가져온 후라이팬으로 파티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동시에 경쾌한 소리가 그녀의 뒤통수에서 울려 퍼졌지만 나는 안도감 대신 싸한 느낌이 뒤통수에서 시작해 전신을 타고 내려갔다. 신경이 나한테 쏠린 틈을 타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지 도대체 왜 딱 봐도 강해 보이는 파티마를 친단 말인가.


"이번에는 친구 못 잃어! 야, 허접! 당장 도망쳐!"


"허접...?"


"아 그거 나 아니고 너한테 한 말이야, 파티마! 아직 어려서 그런 거니까 제발 한 번만 봐줘!"


게임 설정 상, 그리고 실제로 본 바 히로인들은 자기 목숨보다 주인공의 안위 하나하나를 훨씬 중요하게 여기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크레오메가 내 면전에 대고 나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자마자 파티마의 얼굴이 급속도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냥 놔뒀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에 필사적으로 소리치며 그녀들을 말렸지만 누구 하나 물러날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너도 있었지... 너는 일단 혓바닥 먼저 조금씩 토막 치는 게 좋을 것 같아."


"해봐! 내 친구 두 번은 못 가져가!"


"..."


파티마는 나를 묶던 것을 풀어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어넣었던 단검을 다시 뽑아 그녀와 대치를 시작했다. 두 미친년의 악바리를 지켜본 나는 그만 정신을 잃...지는 않았고 급히 일어나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