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반역자였던 아버지에게

 

 

 

 

 

“아, 투구……어디다 두고 왔더라?”


점호 시간이 바로 코앞인데, 이거 일이 귀찮게 됐군.

 

아무리 발톱이라도 점호 시간에 투구도 안 쓰고 오는 건 문제가 있다.

 

나는 오늘 돌아다녔던 곳을 한 번씩 둘러보기로 했다. 

 

“젠장,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조금 있으면 점호도 해야 하는데…….”


그 때, 저 멀리 복도에서 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는 그게 누구인지 깨닫고

 

곧장 무릎을 꿇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자수정 같은 눈동자, 어떤 남자라도 한 눈에

 

반할 미모를 지닌 여인. 리제타 왕비님이셨다.

 

“미천한 소인이 왕비님께 문안 인사드립니다.”


“와아, 당신이 이번에 새로 임명된 발톱이군요? 진짜 어리네요.”


“저…….”


“일어나세요. 그나저나 이거 혹시 당신의 물건인가요?”


왕비님이 들고 있던 건 내 투구였다. 나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네? 아뇨, 저도 맨날 온갖 물건을 잃어버리거든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자.”


나는 투구를 받아 머리에 썼다. 확실히 내 투구였다.

 

“감사합니다.”


“너무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그렇지, 이것도 인연인데 저랑 친구하실래요?”


“저 같은 천민이 어떻게 감히……말씀만으로도 황송합니다.”


“그럼 명령할게요! 저랑 친구가 되어주세요, 루크마이어 엔더스.”


왕비님이랑 친구라고?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었다.

 

“명 받들겠나이다.”


“그럼 저랑 같이 산책갈래요? 정원에 가던 중이었거든요.”


“하, 하지만 점호가…….”


“왕비의 명령인데도?”

 

“……왕비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미안하다, 오늘 점호는 나 없이 잘 넘겨줘.

 

나는 마음속으로 동료들에게 사과한 뒤, 왕비님을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 있던 정원사들이 왕비님을 보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무릎을 꿇었다.

 

“아이 참, 다들 할 일 하세요. 저희는 그냥 놀러온 거니까.”


“……왕비님, 저들에게 존댓말을 쓰실 필요는 없사옵니다만.”


“그렇지만 반말을 할 필요도 없잖아요?”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왕비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정했다면 그저 따를 뿐이니.

 

아직 봄이 오지 않아 정원은 그다지 볼품없었다. 하지만 꽃봉오리가 잔뜩 있는 걸 

 

보아하니 봄이나 여름이 되면 훨씬 아름다운 장소가 될 것 같았다.

 

“편히 앉아요, 루크마이어.”


“저……저보단 시녀들과 함께 하심이…….”


“그 애들이랑 노는 것도 좀 질렸거든요. 그리고 기사랑 친구가 된 건 처음이고요!”


왕비님이 내게 홍차를 따라주셨다. 나는 그것을 받아마셨다.

 

“맛있습니다.”


“그죠? 아무튼 최연소 기사단장이 된 기분을 들어보고 싶어요.”


“굉장히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저보다 기량이 탁월한 자도 많거늘 저 같은

 

애송이가 감히 대장 자리에 오른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전 발톱이 추천한 거잖아요? 전 그 사람을 믿어요.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상냥한 분이니까요. 아, 이런.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자꾸 그렇게 사과하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여자랑 이렇게 오래 대화한 것도 처음이고, 그 상대가 하필이면 왕비님이라

 

온 몸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긴장됐다. 전투를 할 때도 이 정돈 아니었다.

 

“왕비님께선 어떤 생활을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맨날 밥이나 축내는 게 제 일과에요.”


왕비님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사실 전 귀족 출신도 아니에요. 저희 부모님은 초장이였어요.”


“촛불 만드는 사람 말입니까?”

 

“네, 그거요. 전 단지 얼굴이 예쁘단 이유로 왕비가 된 거예요.”


이상할 것도 없었다. 로이어 전하의 색정적인 성격은 이웃 나라에서 알 정도였다.

 

“사실상 창녀와 다를 바 없죠.”


“그, 그건 아닙니다!”


“맞아요. 전 왕비라 불리지만 그저 고급 창녀에 불과할 뿐이에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대체 뭐라 위로의 말씀을 올려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전 당신이 부러워요. 자기 능력으로 거기까지 올라온 거잖아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운도 실력이에요. 때론 행운이 운명을 바꾸기도 하는 법이죠.”


그 때, 누군가가 정원에 헐레벌떡 들어왔다. 내 부관인 로멜드였다.

 

“대장님! 점호 시간인데 여기서 뭐- 와, 왕비님! 죄송합니다! 결례를 용서해주시길……!”


“가봐야겠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왕비님, 전 말솜씨가 부족하여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모릅니다만…….”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왕비님은 절대로 창녀 따위가 아닙니다.”


“……고마워요, 루크마이어.”


우리는 자리를 떠났다. 그 날, 나는 왕비님의 친구가 되었다.

 

그 누구도, 그것이 우리들의 운명을 영원히 바꿀 줄은 몰랐다.

 

 

 

 

 

 

 

 

 

*****

 

 

 

 

 

 

 

 

“건배!”


“건배.”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우리는 하지(夏至)제를 맞아 이틀간 휴가를 받았다.

 

그 덕분에 조나스 형님께 붙들려 이 외진 술집까지 끌려 나왔다.

 

“캬! 이거지, 이거. 하여간 그 영감은 술을 못 마시게 해서 죽을 뻔했다니까.”

 

조나스 형님은 나와 같은 스승을 둔, 사실상 친형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6살이나 많은데다 키도 크고 힘도 좋았다. 호탕하고 훤칠한 외모

 

덕에 여자한테 인기가 많았지만, 주황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정력이 약하다는

 

속설 때문인지 아직 부인이 없었다. 아니면 그냥 성격 탓일지도…….


“스승님을 영감이라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형님.”


“영감을 영감이라 부르지 뭐라 불러? 하여간 루크마이어 너는…….”


“제가 뭐요.”


“됐다, 됐어. 아, 여기야! 이 형님이 널 위해서 예쁜이들을 불러왔지. 흐흐.”


그 말대로, 웬 아리따운 처자들이 다가와 우리 옆에 앉았다. 

 

“어머, 얘 되게 귀엽게 생겼다. 몇 살이니?”


“네? 저, 16살입니다만…….”


“16살인데 황금 사자단에 들어간 거야? 진짜 대단하네!”


“그냥 들어간 게 아니라 대장 중 한 명이 됐다고. 그게 바로 내 동생이다 이 말씀!”


“그래봤자 친형제도 아니잖습니까.”


“난 친동생처럼 생각하니까 문제없지!”

 

곧 술과 안주가 나왔다. 나는 여자들한테 질문 공세를 받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 했지만.

 

“루크마이어, 너 요즘 왕비님이랑 친하다고 하던데.”


“왕비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주시는 것뿐입니다.”


“설마 불륜?”

“아닙니다! 그, 그거 누가 듣기라도 했다간 저희 둘 다 목이 날아갑니다!”


“농담이야 멍청아. 너 같은 외골수가 여자한테 마음을 줄 리도 없고.”


“그나저나 왜 자꾸 루크마이어라고 부르는 겁니까. 옛날처럼 룩이라고 부르시지.”


내 말에 형님이 껄껄 웃었다. 

 

“넌 이제 대장이잖아. 나 같은 일개 기사가 별명으로 부르면 어떻게 해?”


“형님은 형님이니 상관없습니다.”


“됐어! 얕보이지 않게 조심이나 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너한테 불만 가진 놈도 많아.”


“형님은요?”


그 말에 이번엔 술집이 무너지도록 크게 웃었다. 하여간 술만 들어가면 이렇다니까.

 

“내가? 내가 왜? 오히려 동생이 출세했는데 기뻐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렇지만…….”


“나도 조만간 대장이 될 거니까 신경 안 써! 어디, 송곳니라도 노려볼까?”


“막시무스 대장을 이길 수 있습니까?”

 

“아, 역시 안 되겠지. 그 영감은 칼도 없이 싸우는 미치광이니까.”


하지만 검을 찬 기사들보다 훨씬 강하다. 벌써 20년째 송곳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막시무스 대장은 나보다도 강할 터였다.

 

“이제 뭘 하고 싶어?”

 

“네?”


“황금 사자단의 대장이 됐잖아. 이제 뭘 하고 싶어?”

 

형님이 손짓하자 여자들이 물러났다. 술자리엔 우리 둘만 남았다.

 

“열심히 단련해서 대장 자리를 지켜야죠.”


“아니, 그거 말고. 가족을 만들 생각은 아직 없는 거냐?”


가족? 그런 건 생각도 안 해봤다. 나는 맥주를 홀짝였다.

 

“저 같은 고아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감사해야죠. 가족이라니, 그런 건…….”

“넌 강하고 젊어. 게다가 지위도 있지. 너 좋다는 귀족 여자애들도 꽤 많다?”


“됐어요. 가족은 형님 한 사람으로 충분해요. 그것도 벅차다고요.”


“난 조만간 결혼할 여자를 찾아볼 거야. 제대로 된 가족을 가져보고 싶어서.”


“형님 성격을 견딜 여자가 있어요?”


“시끄러!”

 

형님이 내게 꿀밤을 먹였다. 옛날부터 할 말이 없으면 곧잘 나를 때렸다.

 

“헤, 스승님이 지금 저희를 보면 자랑스러워하겠죠.”


“그 영감 성격이면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술이나 마시냐면서 두들겨 팼을 거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스승님을 위하여.”


“발 헛디뎌 우물에 빠져죽은 멍청이를 위해서.”


우리는 한참 술을 마시다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취기를 가라앉히려고 숙소 근처를

 

잠깐 걷기로 했다. 벌써 다들 자고 있는 새벽이라 궁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때,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바람 소리가 아니라 누가

 

우는 소리였다. 혹시 우는 소리로 남자를 유혹해 잡아먹는다는 벤시 아닐까?


나는 조심스레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곧 나무 뒤에 앉아 우는 여인을 

 

발견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그녀가 왕비님이라고 말해주었다.

 

“왕비님? 이 늦은 밤에 왜 울고 계십니까?”


“아, 루크마이어…….”


왕비님이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한 꼴을 보였네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하, 하지만 왜 이런 곳에서 울고 계시는지……?”


왕비님이 고개를 들어 궁전을 보았다. 그 중에서 아직 불이 켜진 곳이 있었는데, 저긴

 

전하의 침소였다. 나는 곧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전하께서 새 첩을 들이셨군요.”


“그런 모양이네요.”


로이어 전하께선 거의 두 달에 한 명 꼴로 새로운 첩을 만들었다.

 

그러다 질리면 내쫓기도 했지만, 벌써 궁전에 들인 여자만 100명에 가까웠다.

 

그 100명을 입히고, 먹이고, 사치를 부리게 해주는 비용은 어마어마했다, 이미 회의에서

 

전하께 새 여자를 들이는 건 멈춰달라고 청원했으나 그 분은 듣지 않으셨다.

 

“전 괜찮아요. 하지만 이 아이는…….”

“아이?”


“임신했어요. 저도 얼마 전에야 깨달았어요.”


그러고 보니 왕비님의 배가 약간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그런가, 이제 곧 전하의 후계자가 태어난다. 하지만 전하께선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를

 

범하는 재미에 맛이 들려 저러고 있으니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이름도 벌써 정했어요. 아들이면 엘렌, 딸이면 엘리자베스. 어때요?”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하께선 아이보단 아직도 여자를 더 사랑하시는 모양이네요.”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차라리 당신이 이 아이의 아비가 되어준다면 좋을 텐데.”


나는 그 말에 얼른 무릎을 꿇었다.

 

“아,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농담한 거예요. 매번 그러는 것도 피곤하지 않아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전 그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한단 말입니다.”


“후후, 귀여워라.”


왕비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약 제 아이가 태어나면, 이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신하가 아니라 친구가 되어주세요. 그게 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나 같은 게 왕비님의 아이와 친구가 될 순 없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건 맹세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

 

 

 

 


 

 

 

 

추수제가 시작되었다. 궁전 바깥의 도시에선 밀짚모자와 허수아비를 태우며 행진하는

 

축제가 며칠이나 계속됐다. 다른 기사들도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기강이 해이해졌기에

 

나는 더 엄하게 훈련시켰다. 이런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한참 기사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중에, 느닷없이 형님이 찾아와 내게 말을 걸었다.

 

“루크마이어! 큰일이다!”


“네?”


“왕비님이 체포되셨다!”


“……왕비님이 체포당하셨다고요?”


나는 얼른 형님의 뒤를 따라 궁전으로 향했다. 확실히 분위기가 이상했다.

 

“왕비님이 무슨 잘못이라도 하셨습니까?”


“그건 아니야. 하지만 전하께서 왕비님께 반역죄를 물으셨다.”


“반역……! 그, 그건 무조건 사형 당하는 죄 아닙니까!”


“일단 가서 상황을 보자.”


우리는 행정관을 찾아갔다. 그는 전하의 오른팔로 업무 대부분을 처리하는 분이셨다.

 

“행정관님, 왕비님이 체포당하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행정관님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만, 생각보다 빨랐군.”


“무슨 뜻입니까?”


“왕비님께선 이전부터 계속 전하께 진언하셨다. 첩을 그만 들이고 사치를 멈추라고.”


“고작 그런 이유로-”

 

“로이어 전하께선 천민 출신인 왕비가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게 거슬렸던 모양이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황금 사자단은 어떠한 경우에도 궁의 일에 관여해선 안 된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세. 이 일은 전하께서 결정하신 것, 기사인 자네들에겐 관여할

 

의무도 권리도 없다네.”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황금 사자단은 기사, 왕의 명령에 충성하며 왕을

 

지키는 게 유일한 임무. 정치에 관여할 권한 따윈 없었다.

 

“그럼 왕비님은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법률상 왕, 왕비였던 사람을 처형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탑에 가둬놓고 굶겨

 

죽이는 건 문제없지.”

 

“그, 그런……하지만 아이는! 전하의 후계자는-”


“새로 만들면 그만이지. 전하께선 그렇게 생각하실 게야.”


행정관님이 우리를 내쫓았다. 말도 안 돼, 왕비를 그렇게 죽이는 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루크마이어, 우린 할 수 있는 게 없다.”


“…….”


“전하께서 진정하시면 곧 풀어주실 거라 믿- 잠깐, 어디 가?”


“전하께 갑니다. 전하께 말씀드려 마음을 돌릴 겁니다.”


“너도 같이 죽고 싶은 거냐!”


“죽더라도 틀린 일을 못 본 척 넘어갈 순 없습니다. 형님은 따라오지 마세요.”


나는 형님을 뒤로 하고 전하의 침소로 향했다.

 

아직 대낮이었지만 안에선 여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크게 문을 두드렸다.

 

“전하! 황금 사자단의 발톱, 루크마이어 엔더스가 전하의 용안을 뵙고자 왔습니다!”


“돌아가라, 난 지금 바쁘다.”


문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전하, 왕비님은 반역자가 아니옵니다. 부디 진노를 가라앉히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왕비님의 죄를 사하여주시옵소서. 그 분께선 절대 반역자가-”

 

“돌아가라 말했다. 그 여자는 시건방지게도 짐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그것이 반역이 아니면 뭐란 말이더냐? 너도 죄를 묻기 전에 돌아가라.”

 

“하오나-”

“돌아가라 말했다!”


목소리가 끊겼고, 곧 여자 신음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문을 열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왕비님이 갇히고 보름이 지났다.

 

행정관님의 말대로 전하께선 그 분을 굶겨죽일 생각으로, 탑에 가둬놓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지난 며칠간 잠을 전혀 자지 못해 죽을 것만 같았다.

 

“대장님, 접니다.”


“들어와.”


나의 부관 로멜드가 들어왔다. 바깥에 비가 오는 건지 홀딱 젖어있었다.

 

“엊그제부터 한숨도 안 주무셨잖습니까. 부하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왕비님이 탑에 갇혀 죽을 지경에 처했는데 신하가 어찌 잠을 자겠어.”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그럼 전하께서 하는 일은 절대 틀리지 않는단 말이냐?”


“틀리지 않아야 합니다. 틀리더라도 저희는 따라야합니다.”


“그렇겠지.”


로멜드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어딘가 지쳐보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왕비님은 대장님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죽어도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


“마음이 불편하다는 건 이해합니다. 제가 하는 말이 냉혹하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


“하지만 사실입니다. 왕비님과 대장님은 고작 말 몇 마디 나눈 사이-”


“그렇더라도 그 분은 나의 친구다. 내게 친구가 되자고 하셨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로멜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해할 거란 기대는 안 해. 네 말대로야, 왕비님이 돌아가셔도 내 인생엔 아무 문제도 없지.

 

하지만 나처럼 천한 인간에게도 친구가 되자고, 훗날 태어날 분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신 분이다. 너는 그런 분이 탑에서 굶어죽는 걸 내버려두라 말하는 것이냐?”


“……대장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아시잖습니까.”


“정말 그럴까?”


나는 벽에 걸려 있는 내 검을 보았다. 내가 스승님께 받고 지금껏 쓴 두 자루의 검을.

 

“부관 로멜드, 너에게 있어 나는 어떤 사람이었지?”


“솔직하게?”


“솔직하게.”


“빌어먹을 애송이 주제에 쓸데없이 딱딱해서 싫었습니다.”


“그런 내가 이런 일을 두고 볼 거라 생각해?”


“그럴 리 없죠.”


나는 검을 찼다. 그리고 갑주를 입고 마지막으로 비상식을 먹었다.

 

“너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뒷일은 맡길게.”


“부하로서, 전 당신을 말려야합니다.”


로멜드가 씩 웃었다. 그가 웃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친구로서, 전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이 바보 같은 외골수야.”


“고맙다.”

 

나는 병영을 나왔다. 오늘은 폭풍이 거세고 달빛도 없었다. 딱 좋은 날씨다.

 

탑은 병영에서 멀지 않았다. 경비병들은 날 막지 않을 테고, 왕비님을 데리고 얼른

 

말에 타 수도를 빠져나가면 될 일이었다. 잡히면 나도 죽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가는 길을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15분 만에 탑에 도착했다.

 

“왔냐?”


“……형?”


그러나 탑 앞에,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사형, 조나스가.

 

“왠지 오늘 네가 여기 올 거라 생각했다. 내 직감도 쓸 만하지?”


“어느 쪽이야?”


“널 막는 쪽.”


“비켜.”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돼.”


형님이 롱소드를 꺼냈다. 나도 그에 따라 검을 뽑았다.

 

“지금의 넌 반쯤 미쳐버린 거야. 그래서 이러는 거라고. 냉정하게 생각해라, 루크마이어.”


“난 멀쩡해. 형이야말로 거기서 비켜.”


“만약 날 죽이고 왕비님을 구출한다고 치자. 그 다음엔? 어디로 도망칠 거냐? 도망치면

 

평생 반역자로 쫓겨야 하고 잡히는 날엔 온갖 고문을 당할 거다. 그리고 죽겠지.”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폭풍이 더욱 거세져, 당장에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우뚝 솟은 탑을 등지고 선 형제. 

 

귀를 때리는 천둥과 검의 날에 반사된 벼락.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린다. 구름으로 덮인 하늘엔 달빛조차 보이질 않는다.

 

“다들 틀렸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럼…….”


“하지만 그걸 알고도 바로잡지 않는 건, 그게 너무 위험하고 무모하기 때문이다.”


조나스 형님이 자세를 잡았다. 

 

“부탁이다. 그냥 돌아가라, 너와 싸우고 싶진 않아.”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이게 멍청하고 무모한 짓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이것이 미친 짓이라는 걸 당사자인 내가 모를 리 없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저 눈 감고 모르는 척 해야 하는 거야?”


“루크…….”


“모두가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몸을 지키려고 모르는 척 하는 게 옳은 거야!?”


천둥소리에, 목소리가 파묻힌다.

 

“그게 올바른 일이라면, 그것이 충성이라면, 나는 반역자가 되겠다!!”


번개가 번쩍였다. 검과 검이 교차하며 쇠의 비명을 내지른다.

 

“멍청한 놈. 너의 그 올곧음이 널 죽일 거다.”


형과 나는 같은 유파의 검술을 배웠지만, 동시에 전혀 다른 성질의 검을 다룬다.

 

나는 두 자루의 검을 각각 아래와 위로 두었다. 형님은 검을 어깨 위로 둘러매듯 들었다.

 

“참 무서운 재능이야. 양손잡이라는 거.”


그 말대로, 나는 태어날 적부터 양손잡이였다. 남들은 배우는데 몇 년이나 걸리는

 

이도류를 난 몇 달 만에 터득했다. 그것만으로도 난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강해졌다.

 

나는 뒤로 물러나며 형님의 공격을 피했다. 형님이 휘두르는 롱소드는 갑주를 통째로

 

찢어버릴 만큼 강력하다. 한 대라도 맞았다간 뼈가 부러진다.

 

“진심으로 안 하면 죽는다.”


형님이 검을 반대로 쥐고 살격을 내질렀다. 그것을 검으로 튕겨냈지만 이걸

 

몇 번이나 받아냈다간 검이 먼저 부러진다. 할 수밖에 없다.

 

롱소드가 내 오른손의 검을 쳤을 때, 나는 왼손의 검으로 옆구리를 베었다.

 

제 아무리 튼튼한 갑옷이라도 빈틈은 얼마든지 있다. 몸을 들었을 때 배의 밑 부분,

 

겨드랑이, 무릎 위, 목, 투구 사이의 틈, 무릎 뒤- 그 모든 게 약점이다.

 

“큭!?”

 

형님이 몸을 날려 바짝 근접했다. 그리고 박치기를 날렸다.

 

위험해-

 

나는 얼른 검을 들어 방어했다. 내리찍는 공격을 막는 동시에 한 손으로 목을 노렸지만

 

형님이 목을 뒤로 빼 피했다. 그 다음 힘으로 밀어붙여 나를 짓눌렀다.

 

“……!”

 

“왜 그래? 대련이랑 다른가 보지?”


형님이 날 발로 걷어찼다.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다시 공격이 이어졌다. 형님이 풍차를 돌리듯 검을 휘두르며 전진했고, 나는 그걸 막으며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지금은 힘을 아껴야한다.

 

“읏.”


한 순간, 빗길에 발이 미끄러졌고- 검이 내 머리를 찍었다.

 

그 충격이 투구가 찌그러지며 튕겨나갔다. 나는 정신을 붙잡고 검을 교차시켜 검이

 

가속을 받기 전에 막았다. 동시에 오른손의 검을 빼면서 형님의 왼쪽 겨드랑이를 찔렀다.

 

‘부족해!’

 

퍼억- 주먹이 날아와 안면을 강타했다. 나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 탓에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빼앗겼다. 너무 얕다, 이 정도론 무력화시킬 수 없다.

 

“우라아아!!”


형님이 달려들어 한 팔로 내 검을 감싸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다른 한 손으로 검을

 

휘둘러 내 어깨를 강타했다. 갑주가 찌그러지며 뼈가 부러지는 게 느껴졌다.

 

“으극!”


상단 내려찍기! 나는 남은 한 팔로 형님의 폭풍 같은 내려찍기를 방어하며 물러섰다.

 

강하다. 똑같이 갑주를 입고 싸우는 상태라면 롱소드가 유리하고, 형님은 나만큼이나 강하다.

 

왼팔을 못 쓴다. 하지만 그건 형님도 비슷하다, 방금 찌른 상처가 아픈 것인지 아까보다

 

힘이 빠졌다. 게다가 처음에 찌른 배에서 출혈이 멈추지 않는 것도 보인다.

 

힘을 빼야한다. 형님은 벌써 지쳤다, 점점 기술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우오오오오!!”


“으라아아아!!”


동시에 격돌한다. 형님이 살격 자세로 내리찍었고, 거기에 걸린 검이 튕겨나갔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나는 그 상태로 달려들어 형님과 엉겨 붙었다.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형님의 위에 올라타, 마구 주먹을 내질러 박살낸다.

 

형님이 팔을 들어 방어하지만 이미 체력이 빠진 상태라 제대로 방어하질 못했다.

 

나는 떨어트린 투구를 주워 그걸로 마구 내리쳤다. 그러나 형님이 정신을 차리고

 

내 어깨를 붙잡은 후 또 박치기를 날렸다. 한 순간 눈앞이 번쩍였고,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검을 잡으려고 했을 땐 이미 검이 내 목에 닿아있었다.

 

“3살……아니, 네가 2살만 더 많았으면 날 이겼을 거다.”

“허억, 허억…….”


“넌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날 덮쳤고, 죽었다. 반역자가 되진 않겠지.”


“형……!”


“날 용서하지 마라.”


그 순간, 벼락이 형의 등 뒤로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 0.1초, 그 잠깐의 지연을 놓치지 않고 나는 단검을 꺼내 달려들었다.

 

푹.

 

단검이 형의 왼눈을 꿰뚫었다. 

 

“미안해, 형. 미안해……날 용서해 줘…….”


형이 나를 보았다. 그 눈엔 그 어떤 분노나 원망도 없었다.

 

“……옳다고 생각한 길이라면 망설이지 마. 뒤돌아보지 마, 후회하지 마.”


“응.”


“왕비님을 부탁한다, 룩.”


그리고 그가 쓰러졌다. 나는 내 유일한 가족을, 하나뿐인 형을 죽였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반역자가 되었다. 이게 옳다고 믿었기에 반역하길 선택했다.

 

탑으로 올라가, 병사들을 기절시킨 후 철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배만 불룩하게

 

부푼 여자가 누워있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왕비님이 거기 있었다.

 

“불충한 신하를 용서치 마시옵소서. 왕비님을 모시러 당신의 기사가 여기 왔나이다.”


“……신하는 용서치 못해도……친구는, 용서할 수 있어요.”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죽어가는 그녀가 날 안아주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거기서 도망쳤다. 한 때 내가 머물렀던 마을로,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름조차 없는 장소로. 그럼에도 그곳에 이름을 붙인다면 ‘고향’이라고 부를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스승님과 형님을 만났던 그곳이었다.

 

왕비님은 탈출하고 한 달을 더 사셨다. 임신에 독감이 겹쳤고, 심지어 보름을 먹지 못해

 

몸이 심각하게 망가진 상태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살리려고 했지만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하지만 아이, 아이는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어느 버려진 오두막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루크마이어 엔더스……나의 기사님, 마지막……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듣고 있습니다.”


“나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세요.”

“…….”


“저는 이미 끝났습니다. 살 수 없다는 건 루크, 당신도 알고 있겠지요.”

 

“제가 무슨 수를 써보겠습니다.”


왕비님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당신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어요. 저를 위해 반역자가 되었고, 형제를 죽였고,

 

남은 삶을 포기했지요. 이제 됐어요, 친구여. 저는 당신에게 너무 많은 걸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왕비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이 미련한 신하를, 용서해주십시오…….”


“용서는 제가 당신에게 구해야겠죠.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나는 단검을 꺼내 왕비님의 배를 갈랐다. 그리고 아이를 꺼내 탯줄을 잘랐다.

 

그녀는 그 모든 걸 지켜보았다. 죽어가는 눈빛으로, 새로이 태어난 생명을 보았다.

 

“……아들……딸……?”


“딸입니다. 이름은 엘리자베스, 아니……엘리자로 하겠습니다.”


“아이의……아버지…….”

“되겠습니다. 이 아이의 삶을,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지키겠나이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 아이가 울고, 나도 울었다. 눈물이 흐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기사는 반역자가 되었다.

 

나는 친구가 되었고, 살인자가 되었고, 농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가 되었다.

 

 

 

 

 

 

 

 

 

 

 

 

 

 

 

야 1편 대회로 못 내서 프리퀄로 이걸 대회로 내기로 함, 고닉은 임시로 판 거임

2편 아니고 외전/프리퀄이다. 그러니까 대회로 내도 됨, 아마두. 주최자가 안 된다 그러면 어쩔 수 없고.

그나저나 어제 시험삼아 고기 조금 먹었다고 칠연설 했는데 오늘까지 안 나으면

대학 병원 가서 링겔 좀 맞아야 할 듯. 체중이 며칠 만에 50Kg대까지 떨어졌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