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껏 연기를 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없었던 소녀가 변화를 맞이한 것은 - 그 해 3월의 일이었어.


그 날이라면 평소처럼, 작년처럼 벚꽃이 온 거리에 만발했었을 시기였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꽃은 아직 개화를 맞지 못했어. 겨울이 지난 뒤 날씨는 풀렸지만 공기는 여전히 쌀쌀했기에 꽃들은 봉오리만을 맺은 채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지.


언젠가 집을 잘못 찾아가 문을 두드렸을 때 만났던 - 그 하타노라는 사람과의 관계를 매듭 짓기 위해 소녀는 붉은 기모노를 입고 집을 나와 거리를 걸어 갔어. 오후의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 해가 보이지 않는 회색 빛을 하고 있었기에 소녀는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어. 


『花は何時頃咲くのだろうかな。』


소녀는 길가에 심어진 식물들이, 푸른 잎 위에 꽃봉오리만을 맺어 두고 쌀쌀한 날씨 탓에 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언제쯤 꽃이 피어날지 걱정했지. 저 구름만이라도 걷히면 햇빛이 비치면서 날씨가 따뜻해질 거라고 생각하며, 소녀는 하늘 위를 올려다 보았어.


『雲だけでも晴れたら良いのに。』


하늘에 낀 회색 구름은 여전히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 소녀는 그저 날씨가 따뜻해지기만을 바라며, 하늘의 구름에는 신경을 끈 채 다시 하타노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지.


하타노, 하타노 요시하루(秦野吉春、はたのよしはる). 봄이라는 이름(吉'春')과 맞게, 소녀는 그 사람을 작년의 바로 오늘- 쇼와 12년 3월 13일에 처음으로 만났어. 언제나 그렇듯 소녀는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것을 알고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 생각해 의도적으로 이사를 온 그 사람의 집에 찾아갔지. 


동네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교토(京都) 출신의 대부호 집안의 장자라고 했어. 나이대는 소녀와 같은 17세 정도라고 했었고 대학에 갈 나이가 되어서 도쿄로 왔다고 했어. 소녀가 하타노라는 사람에게 간 이유는 오로지 그 사람이 대부호 집안의 장자라는 사실 뿐이었지.


「京都出身、大富豪家の息子。其れに長子。其の話が事実なら全ての財産を相続する事が出来る筈だ。私があの人と結婚したら豊かな生活が送れるんじゃないかな?」


교토 출신 대부호 집안의 아들, 그것도 장자라면 모든 자산들을 전부 상속받을 것은 확실했어. 소녀는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설렘과 반가움을 연기하며 그 사람의 집으로 달려갔어. 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든, 싫어하든 아무런 관심도 없었어. 그저 소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너무나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어.


처음으로 다가가 하타노 - 秦野 - 라 써진 문패가 달려 있는, 크고 아름다운 화옥의 대문을 두드리며 그를 불렀어. 이내 문이 열리고, 그가 모습을 비췄어. 소녀는 그 사람의 얼굴은 집을 나오자마자 바로 잊어버릴 정도로 관심이 전혀 없었기에 기억이 나지 않았지. 소녀가 오로지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사람의 재산, 소녀를 풍족하게 해 줄 재산 말고는 없었어.


처음에는 이미 이사를 떠난 옛 집의 주인이 있냐고 물어보며,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사과를 했지.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선물 하나를 주었어. 금박이 입혀진 나비 모양의 장식이 달린 금속 책갈피였지. 그 이후로 소녀는 종종 하타노의 집으로 찾아가며, 실제로는 전혀 느끼지 않는 사랑과 친근함, 친절함을 연기하며 그 사람이 자신이 연기하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하타노는 소녀와 친해지며 친구 정도로 관계가 성장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며칠, 몇 주, 몇 달이 지나도 관계는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 하타노라는 사람이 자신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기 싫어한다고 생각한 그 날 밤, 소녀는 주저 없이 하타노와의 관계를 끝내 버리기로 결정했어. 하타노가 어떤 감정을 느꼈든, 소녀를 어떻게 생각했든, 관계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더 이상 소녀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어.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에서 소녀의 관계와 연기는 이미 끝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으러 가기 위해 소녀는 길을 나섰어. 자신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완전히 사라진 채로, 이제는 더 이상 연기를 하는 것조차도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비난받기는 싫다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기심' 으로 가득 찼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기에 어떻게든 마지막까지는 차갑게 느껴지지 않도록 마음 속으로 연기를 준비하고 있었어.


소녀가 집을 나와 수백 보를 걷고 또 걸은 뒤, 마침내 소녀는 하타노의 집 앞에 도착했어. 몇 번이나 와 봤던 이곳이었기에 문패를 확인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소녀는 문을 두드렸지. 그런 뒤 이것이 마지막이었어야 할, 그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를 냈어.


『すみません、中にいらっしゃいますか?』 


실례합니다, 안에 계신가요? 처음으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한 말도 그것이었어. 소녀는 이제 곧 하타노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자신의 행동과 말을 전부 세세히 계획하며, 표정 하나하나까지도 완벽히 연기를 하며 관계를 끝내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어.


「今日は、貴方に伝えたい事がー 有ります。」


오늘에 전할, 하타노와의 관계를 끊어야만 한다는 말의 시작은 최대한 은유적으로,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몹시 안타까운 듯이 말을 길게 늘이며 주저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もう此れ以上は、貴方と会える事は出来ないようです。」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타노와의 관계와 보낸 시간들을 천천히 말해 주며 그를 기억하는 척을 한 뒤 길게 뜸을 들이며, 주저한 끝에 처음으로 내뱉을 말은 그것이어야 한다고.


「本当にごめんなさいー どうか私よりもっと優れた女性に会う事を願います。」


당신과 더는 관계를 이을 수 없어서 정말로 미안한 듯이 연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며 부디 나보다도 더욱 뛰어난 여자와 만나기를 빈다고 말하며 관계를 완전히 끝맺어야 한다고-




『何方様でしょうか?』 




하지만 대문을 열고 나온 남자의 모습을 보자, 하타노가 아닌 다른 목소리 - 낮지만 조용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목소리 - 를 듣자, 소녀가 계획하던 완벽한 연기와,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완벽한 연기가 완전히 깨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어. 열린 대문에서 소녀 쪽으로 불어 오는 바람에 소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구름이 살짝 걷히며 햇빛이 아주 잠시 동안 드러났어.


소녀의 연기가 깨져 버린 것은 단순히 그 남자가 하타노가 아니었다는 당황심뿐만은 아니었어. 원래대로 하타노가 이사를 갔다면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며 좋아했을 테지만, 이제 더 이상 하타노는 소녀에게 중요한 사람도, 중요한 재산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어. 순식간에 문을 열고 나온 남자에게 한 순간에 머릿속의 생각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으니까.


큰 키에, 햇빛과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흰 피부. 바람에 흩날리는 짧은 흑발과 너무나도 완벽하게 위치해 있는 눈, 코, 입과 귀. 조금의 거짓이나 연기도 섞이지 않은 그 진실하고도 아름다운 외모와 표정과 말투는 순식간에 거짓된 소녀의 모습을 완벽하게 없애 버렸어. 마치 얼음이 여름의 뜨거운 태양 빛 아래에서 몇 분 만에 녹아 물이 되어 버리듯이.


마치 호수처럼 깊은 흑색 - 약간의 푸른색도 섞여서 -을 띄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는 거짓 없이,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눈빛으로 소녀를 비추고 있었어. 평정하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듯한 감정을 감추고 있는 듯한 목소리에는 한 치의 연기도 없이 울리고 있었지.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약간 슬퍼 보이고 덧없는 듯한 -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 표정을 한 남자는 너무나도 진실된 거짓 없는 완벽한 모습이었어.


소녀는 그 순간 진심으로, 거짓 없이 남자의 모든 것이 알고 싶어졌어. 재산도, 집안도, 학력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어. 그저 진심으로 거짓 없이, 연기조차 하지 않고 처음으로 호감과 호기심을 느끼게 된 사람이었으니까. 거짓된 소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순수하고도 진실된 남자의 모습과 소녀의 연기로 이루어진 지루하고도 무기력한 일상을 한순간에 없애 버린 남자의 정체를, 미칠 듯이 궁금해 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소녀는 말했어.


『此れを受け取って下さい。』 


이것을 받아 달라며, 소녀는 아름다운 유리 구슬을 건넸어. 그것은 전의 책갈피처럼 환심을 사기 위한 계략도 무엇도 아닌, 순수하게 그 남자 - 얀붕이에게 선물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그것을 전했어. 본래 하타노에게 이별을 할 때, 자신의 연기가 거짓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선물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연기를 할 필요는 없어졌기에 소녀는 주저 없이 그것을 남자에게 줄 수 있었어. 그저 순수하게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元々は秦野さんに差し上げなければならない品物ですが、もう差し上げ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ので。。代わりにあなたに差し上げます。』


더는 하타노에게 줄 수 없게 되어 남자에게 선물한다는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처음 느껴 보는 설레는 감각을 느끼며 야나기 - 柳 - 라고 적힌 문패가 달린 대문을 닫고 빠르게 거리를 달렸어. 더 이상 남자의 얼굴을 쳐다본다면 연기 없이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자신의 모습이 완벽하게 드러나 버릴 거라는 마음에 소녀는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지.


이게 무슨 감정이지? 소녀는 생각했어. 18년 동안 살아오면서 이렇게나 심장이 빠르게 뛰고, 몸이 더워진 적은 없었으니까. 소녀는 자신이 아는 단어를 전부 조합해서 이 기묘한 감각의 정체를 찾아내기 위해 고민했어.


기쁨? 슬픔? 분노?고통? 기대감? 부유감? 전부 아니었어.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낀 소녀는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처음으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에 어딘가 기쁜 듯한 감각이 들었어. 동시에 지금까지 연기만을 하며 살아온 자신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느꼈고, 저 남자를 만나지 않고 의미 없이 살아 갔다면 고통스럽게 살아 갔을 거라는 생각에 고통을 느꼈어. 앞으로 저 남자를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과 부유감을 느끼며, 소녀는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어. 


『愛。。。』


사랑. 그것은 사랑이었어. 소녀는 이렇게나 아름답고 심장이 뛰며, 새로운 세상을 살아 가게 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너무나도 사랑한 채로 처음으로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남자, 얀붕이를 사랑하며 자신의 방의 창 밖으로 얀붕이의 집을, 해가 지고 불이 켜졌다가 다시 꺼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보았어. 


이제 더는 소녀의 마음 속에 공허함은 존재하지 않았어. 사랑한다는 감정만이,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아 버린 얀붕이를 사랑하는 감정만이 마음 속에 가득 찬 채, 처음으로 느껴 보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지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