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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경이 차를 몰아 코리의 작업실에 도착하니 시간은 아직 3시가 되지 않은 2시 52분이었고 차문을 열자마자 초여름의 더운 공기가 확 들어왔다.


"내가 뭐 물어볼지 알지?"


 하고 코리가 아직도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했고,


"2턴 리밋 몰라?"


 하며 정윤경이 대꾸했다.


 현장에서 뛰어본 적 없는 코리로서는 다른 곳에서 일하며 들어봤을지 어쩔지 모르나 그걸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리는 없었고 목표 차량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정윤경이 천천히 설명해줘야 했다.

 물론 사정을 듣는 것과 사정을 이해해주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럼 뭐, 다음주까지 기다려야 돼?"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그놈도 뭔가 눈치챈 것 같아. 다음 인출 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어."


"애들 눈치챘는지 안 챘는지는 뭐 애들 메시지 감청하다 보면 다 알 수 있는데."


"그러니까 더욱 기다려봐야지."


 하며 정윤경이 코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짐을 챙겼다.


"어디 가려고?"


"나 일 있어."


 더 미련 두지도 않고 정윤경은 "다음주에 봐."라는 인사만 남기고서 작업실을 나왔다.


 어차피 상관없었다. 일주일 쯤이야 그녀는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고 기왕 일찍 끝났으니 아이를 일찍 데려다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침 등교하는 길 정유진의 모습이 계속 신경쓰이고 있었다.


 '...나 갈게.'


 그 말만 남기고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던 정유진은 마치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 같았다.


 ...도망친다고.


 항상 그랬다. 그 납치 사건 이후로 아이는 기를 쓰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려 발버둥을 치고 자신은 그걸 막고 붙잡고 타이르는 데 급급한 모양새였다.

 억지로 붙잡고 서류를 조작해 진짜 누나가 되었지만 아이의 마음까지는 아직까지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머리가 아플 정도로 느끼고 있는 그녀다. 굳이 이런 방법으로 또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어차피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왼뺨을 내민 건 무엇 때문인가….


"......"


 시동만 걸린 채 공회전하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정윤경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왼뺨을 문질렀다.


 정유진은 언제쯤이면 자기를 진짜 누나로 인정해줄까 하는 질문은 질문하는 그 자체로 고통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픈 부위를 굳이 또 찌르고 긁어보며 거기가 아프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습관.


 그리고 그 치료법은 아이를 놓아주고 자기는 뒤편으로 사라지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 또한 그녀는 안다.


"......후우."


 차 안이 점점 추워지는 것을 깨달으며 정윤경이 뺨에서 손을 뗐다. 30분 전 차를 몰았을 때의 냉기가 아직 남아 있어 벌써 공기가 차가워져 있었다.


'그런 치료는 필요 없어.'


 정윤경은 차라리 아픈 것을 선택했다. 정유진을 데리고 있는 순간마다 그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해도 그녀는 감당할 수 있었다.

 적어도 아이를 정희은 손에 들려 떠나보냈을 때의 고통보다는 나을 것이기에.


 시계가 3시 정각으로 바뀌는 것을 보며 정윤경은 기어를 넣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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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각.

 정윤경이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을 모르는 정유진은 가까운 PC방으로 향하는 이창훈을 돌려보내고 드디어 홀로 학교 밖에 나와 처음 느끼는 해방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뭣모르고 마구 도망치다 붙잡힌 지난번의 탈출과는 달랐다. 정해둔 계획이 있고 그대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만족감이 아이에게 이유모를 안정감을 함께 부여해주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시내로 걸어간 정유진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윤채영이 소개해준 아동복 가게였다. 때아닌 시간에 꼬마아이 혼자 가게에 들어오자 종업원들의 낯선 시선이 정유진에게 집중되었고 어느 직원의 "아가, 혼자 왔니?" 하는 질문에 아이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윗옷이랑 바지 하나씩 사러왔어요."


"혼자 사러 온 거야? 이야, 다 컸네~"


 하며 아이를 귀여워한 여직원의 안내에 정유진이 따라갔지만 잘 어울릴 거라며 그녀가 꺼내온 건 알록달록한 여아용 셔츠와 바지가 달린 치마였다.


"저 남잔데요..!"


"어어? 어머머, 미안해 미안해! 이모가 아가 여자앤 줄 알았어. 잠깐만…"


 사방에서 귀여워하는 시선과 말들이 오가는 동안 정유진 스스로 옷을 고를 기회는 없었고 도리어 직원들이 나서서 뭐라도 더 입혀보려는 걸 하나하나 거절하는 통에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결국 정유진이 "가장 평범한 거, 제가 입고 있는 거랑 비슷한 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고 나서야 정유진이 원하던 옷들을 잡아볼 수 있었다.


 옷을 입어보면서도 주위에서 '여자애였어?' '쟤 이번 신상 들어온 원피스랑 딱 어울리는데..' '몇 살이래? 너무 귀엽잖아.' 하는 여직원들의 목소리가 탈의실 문을 넘어 정유진의 귀에 들어왔지만 아이는 무시하고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옷과 함께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5만원 받았습니다~"


"저기…"


"응응? 우리 애기 왜?"


"혹시 여기서 입고 갈 수 있을까요?"


 굳이 가게 밖으로 나와서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정윤경이 예전에 사줬던 티셔츠와 반바지를 벗고 흰색 긴팔 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은 정유진은 입고 있던 옷을 가게에서 받은 쇼핑백에 대충 넣어두고 가게를 나섰다.


"다음에 또 와~"


 하는 목소리가 유리문이 닫히며 묻혔다.


 이제 옷도 갈아입었으니 다음 계획은 남은 현금으로 누나의 집까지 가는 일이었다.


'택시…'


 그러나 시내 번화가 좁은 도로까지 택시가 들어올 리는 없었다. 일단 차가 많이 다니는 대로로 나가야 했다.


'근데 이건 어떡하지..?'


 손이 무거웠다. 정유진의 힘도 약했지만 어깨에 가방을 메고 한손에 쇼핑백을 들고 도망을 친다는 것부터가 우스꽝스러운 짓이었다.


'..어차피 더 필요 없잖아.'


 상점가를 걸어가던 정유진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쓰레기 봉투들이 모여 있는 전봇대에 툭 던져놓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입고 있던 옷을 던져버리니 뭔가 과학 수업 때 배웠던 곤충의 허물 벗기가 떠올라 괜히 웃음이 났다.


 이제 택시를 잡는 것만 남았다.

 그러나 대로변으로 나오기만 하면 금방 잡힐 것만 같았던 택시는 대로를 따라 걸어가도 이상하게 보이질 않았고 한결 가벼워졌던 마음은 곧 정윤경이 쫓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더 무거워지고 말았다. 어쩌다 택시가 몇 대 지나갔으나 모두 '빈차' 표시가 꺼져 있거나 반대 차선이었다.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하염없이 걸어가던 정유진은 길가의 버스 정류장에 달린 전자 표지판으로 벌써 시간이 3시 20분이 된 것을 보고서야 택시 잡기를 포기했다.

 일단 택시보다도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자 표지판에서 버스 한 대가 곧 이 정류장으로 도착할 예정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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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이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코리의 작업실이 학교와 멀리 떨어진 탓에 여기까지 오느라 벌써 20여 분을 소비했고 이제 막 학교에 도착했지만 정유진의 휴대폰이 꺼져 있어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교무실에 불려갔나…?'


 하는 생각에 교무실에 가 봤지만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담임교사도 그녀의 물음에 자기도 아이가 집에 간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때부터 그녀의 예감이 이상했다. 스파이 앱을 켜봤지만 휴대폰의 마지막 위치는 분명 이 학교였고 정확히는 아이의 교실 안이었다.


'교실 안에 있으면 담임 선생님이 모를 리가 없는데…?'


 하는 의문도 그 예감을 더 키우고 있었다.


 교실 문을 열었지만 정유진은 보이지 않았고 안에는 여학생 몇만 자기 부모님이나 학원을 기다리는 듯 자기네들끼리 공기놀이를 하며 놀고 있었다.


 갑자기 드르륵 문 열리며 들어오는 검은 정장의 여성을 여학생들이 돌아봤으나 그 시선을 무시하고 정윤경이 정유진의 이름이 적힌 자리와 사물함을 찾아 뒤졌다.

 이윽고 정유진의 사물함 안에서 정윤경이 전원이 꺼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예감은 들어맞았다.


"...도망갔어."


 자기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 여학생들을 의식하지도 않고 정윤경이 혼잣말을 뇌었다.


 그녀는 확신했다. 다른 이유도 없이 아이가 자기 휴대폰을 놓고 갈 리도 없고 그럴 일이 있다고 해도 자신에게 알려줬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반항심이 생겨나 그녀에게 알릴 생각도 없이 어딘가로 갈 일이 있었을 지 모르나 그것도 결국 도망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전원 꺼진 휴대폰의 상처 없는 액정이 정윤경을 비추었고 그녀는 그 반사된 상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언니가 그 유진이 누나예요?"


 그때 등 뒤에서 여학생의 당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나였다.


"...어?"


"유진이 찾고 계시잖아요. 누나 되시는 분이죠?"


"근데 왜?"


 말투에 가시가 돋았다. 다른 날이었으면 유진이의 친구는 누구든 무조건 살갑게 대하며 아이에게 잘 해달라고 당부했을 정윤경이었으나 이미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녀에게 눈앞의 꼬마아이는 자신의 시간을 갉아먹는 방해요소밖에 되지 않았다.


"유진이 여기 없어요. 나간지 꽤 됐는데요 뭐."


 뭐라고 돌아올 대답을 기대하는 한유나와 달리 정윤경은 그 말을 듣고서는 입을 닫은 채로 정유진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교실 문을 열어젖혔다.

 나간지 꽤 되었다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 언니, 잠깐만요!"


 하고 한유나가 겨우 불러서야 정윤경은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여학생 쪽을 돌아보았다.


"뭐."


"아니, 그.. 유진이한테 8시 통금 있다는 게 진짜예요?"


 그녀의 얼어붙은 눈빛을 마주하자 한유나도 살짝 기가 죽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나랑 약속했으니까."


"그래도 여행 정도는 가도 괜찮..잖아요. 유진이도 이제 5학년인데 그것도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집 사정이야.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듯 정윤경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버릇없기는.." 하고 들리지 않게 홀로 뇌까리며 그녀가 아이를 찾아 교실을 나가려는데,


"정말 여자앤가, 외모에, 통금에, 오늘은 옷까지 사러 나가고…."


 하는 혼잣말이 정윤경의 귀를 건드렸다.


 그녀가 홱 뒤돌아보았다.


"...방금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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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정류장은, 화진대학교입니다.]


 복잡한 도심을 통과하며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났는지 잊을 지경이 되는 동안 버스 안 시계가 3시 44분을 가리켰다.


 버스 노선이 너무도 복잡했다. 집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면 전체적인 노선도가 필요했지만 여긴 지하철이 아닌 버스였고 지하철로 환승하려면 여기서 세 정류장을 더 지나가야 했다.

 시내를 마구 돌아다니는 버스 안에 있으니 여기가 어디인지 아이조차도 모를 정도였다. 정유진은 경로를 검색해볼 수 있는 휴대폰을 학교에 두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계획이 꼬여버리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까지 나름 잘 계획해온 정유진이었으나 갑작스러운 변수에 부딪쳐 너무 깊게 고민한 탓에 단순하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해결책들을 아이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세 정류장을 더 지나 버스에서 내린 정유진은 지하철역으로 내려와 복잡한 노선도를 읽어보았지만 집에서 이렇게 멀리 나가본 일 자체가 손에 꼽히는 정유진으로서는 노선도만 보고서 집에서 가까운 역이 어딘지를 알지 못했다.


 세 번째로 노선도를 훑다 지친 정유진이 가방을 벗고 아무 의자에 가 앉아서 쉬고 있을 때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은 바로 공중전화 부스였다.


'...전화!'


 누나한테 전화한다는 계획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었다.


 정유진이 가방을 다시 둘러메고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 수화기를 잡았다.


'전화번호…'


 휴대폰을 두고 가는 대신 아이는 정희은의 전화번호를 따로 쪽지에 적어놓고 지갑 안에 넣어두고 있었다. 그 쪽지를 꺼내려 아이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하지만 지갑을 뒤져보아도 쪽지가 보이질 않았다.


'어..?'


 아이가 지갑을 탈탈 털었다.

 모아 뒀던 돈과 정윤경이 준 카드, 그리고 도서관 대출카드가 안에 든 전부였다.


"어..어디에…"


 정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산 지 1시간도 안 된 새 옷 주머니까지 털고 있었고 가방 주머니도 모조리 열어봤지만 보이는 종이라고는 공책 한 개뿐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아이는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 학교에서 자기가 지갑에서 쪽지를 꺼내 다시 보고는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바지는 쪽지가 함께 들어간 채로 쇼핑백에 구겨들어가 전봇대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


 공중전화 부스 벽에 기대며 아이가 주저앉았다.


 사정을 깨달았으나 너무 늦었다. 그 먼 거리를 다시 돌아갈 시간도 없을뿐더러 정희은의 전화번호를 지금 당장 다시 떠올리거나 알아낼 방법도 없다.


 정유진의 손에서 수화기가 미끄러져 내려와 덜렁거렸고 주저앉은 아이의 귀 바로 옆에서 띠띠띠 하는 통화 중단 신호음을 끝없이 내보냈다. 꼭 아이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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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유진이가 갔을 곳'이라고 한유나에게서 전해들은 이 가게는 정윤경이 아이를 위해 옷을 사준 적이 몇 번 있었던 곳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 바로 위에 달린 벽시계가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이제는 시간이 촉박했다.


 정윤경이 서둘러 종업원 하나를 붙잡아 정유진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아이 본 적 없느냐고 물었고 직원은 그 귀여웠던 정유진의 모습을 알아보며 그 아이는 1시간쯤 전에 여기서 옷을 사서 갈아입고는 그대로 나갔노라고 전해주었다.


 하지만 단서를 잡긴 했어도 행방을 알 길은 없었다. 다른 가게의 CCTV들이라도 찾아야겠다 싶어 가게를 나선 정윤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때 만약 그녀가 더 늦게 여기에 도착했더라면 그 쇼핑백은 누군가 가져갔거나 쓰레기 더미에 뒤덮이거나 해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정윤경에게 익숙한 옷가지가 담겨있는 모습을 그녀의 눈앞에 보여줄 일은 어쩌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주워가지 않은 채로 전봇대 아래 엎어져 내용물을 보여주고 있는 이상 그 낯익은 옷가지들을 정윤경이 그대로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바로 오늘 아침 자기가 아이에게 입혀준 옷들인데 그녀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쇼핑백과 옷가지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낚아채 반바지와 티셔츠를 찾아낸 정윤경은 그 안에서 다른 단서를 찾기 바빴고 바지 왼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쪽지 한 장을 찾아내는 건 시간 문제였다.


 낯선 전화번호였다.


 정윤경은 아이가 두고 간 휴대폰의 전원을 다시 켰다. 자기가 모르는 번호라면 정유진이 아는 전화번호일 것이었다.


"010…"


 하고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입력하자 번호를 다 적기도 전에 등록된 연락처가 바로 나타났다.


[누나]


 표시된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누나? 누나라고?"


 정윤경의 눈이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번호가 아닌 '누나'의 번호라면 그 '누나'가 누구인지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그 찢어죽일 년한테 갔다 이거지……?"


 왼손에 쥐어진 쪽지가 콱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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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시간 정도가 더 지났다.


 겨우 마음을 다잡은 정유진은 전화를 하지 못하더라도 직접 누나의 집에 닿기만 하면 된다는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겨우겨우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다.

 정유진이 도착한 곳은 원래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는 어느 공원이었고 거기서 다시 택시를 얻어탄 끝에 정희은의 집이 있는 아파트 앞까지 닿을 수 있었다.


 초여름이라 아직 해가 지려면 1시간도 더 남았지만 정유진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시야가 어두워지는 걸 느꼈다. 2시간 동안의 강행군으로 아이의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절대 이대로 엎어질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를 뒤쫓는 정윤경은 자신과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을 것이었다.


 엎어지더라도 누나 앞에서 엎어져야 했다.


"누..나…"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에 닿은 정유진이 진이 빠진 목소리로 겨우 자신의 친누나를 부르며 간신히 단지 문을 열었다.


 조용한 로비 안에서 홀로 켜지는 센서등이 아이의 고된 여정을 축하했다.


"5..층… 507호…"


 아이의 입이 자신의 진짜 집주소를 오랜만에 뇌었고 이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이 꾹 눌렸다.


 6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잠깐 멈칫하더니 서서히 지상으로 내려왔고 아이의 심장박동 소리도 그 움직임을 따라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누나가 지금 집에 없어도 상관없었다. 집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고만 있으면 누나가 오고 도움이 올 것만 같았다. 지쳐버린 정유진의 머릿속에는 오직 집에 들어가 정희은을 만날 생각뿐이었다.


[▲ 1]


 차임이 들리며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안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눈앞의 기계가 꼭 자신을 데려다 줄 호박 마차라도 되는 것처럼 정유진이 기대에 찬 혼잣말을 했다.


"내가 갈게.. 내가 갈 테니까.. 기다려--"


 그러나 기계는 아이의 혼잣말을 다 기다려주지 않았고 1초의 오차도 없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휘황한 엘리베이터 조명이 센서등이 꺼진 로비 안으로 새어들어왔다.













"왔어?"



 검은 정장을 입은 누나가 대신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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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던 누나

그것은 정윤경이었구여





에휴 연출 망함 시바


2막 종료까지 아마 앞으로 2편인데 연출을 압축해서 해야쓰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