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러니까, 오늘 이후로 너 자유라고."

퇴사 준비 반 년 전, 갑자기 회사 쪽에서 해고당했다.

"왜? 싫어? 너 그렇게 돌아가고 싶었잖아."

"아니, 싫은 건 아닌데 뭐랄까, 자존심이 상한달까... 아니 그보다 유리는 어쩌려고?"

앞으로 반 년, 해외에 미리 간다거나 조용히 살면 문제야 없겠지만 이제 막 수능끝난 고삐 풀린 고딩한테 그게 과연 가능할까?

"솔직히 까봐, 니가 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방치할 리는 없을테고, 뭔 이유 땜에 날 풀어주는 거야?"

나라고 정이 없는 건 아니다.

7년.

어쩌면 내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인생을 함께 보낸 유리에겐 3년간 좀 구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동생 처럼 아끼고 있다.

그걸 표현한 적은 없지만.

십탱이, 아니 지섭 아재는 그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들, 너를 아들 처럼 아꼈거든."

"뭔 개소리야."

"너야 자기 부모님을 납치하고 자기를 7년간 떨어져서 죽을 위기로 내몬 십탱이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난 항상 너한테 미안해했거든."

뭐야, 갑자기 낮간지럽게.

"너, 니 몸 돌아본 적 있냐? 니 몸에 난 그 많은 흉터들, 만약 내가 널 보디가드로 쓰지 않았다면 그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거야. 그냥, 이제와서 죄책감이 든 거고 이제라도 책임을 질 뿐이야."

"..."
"대학교 같은 건 걱정마. 학비건 자취건 유학이건, 니가 원하는 대로 다 지원해줄게. 니가 지금까지 유리 목숨값 지켜준 거 생각하면 너희 빛 다 빼도 넘치니까."

"음, 그래. 그렇게 말해준다면야."

"언제 돌아가게?"

"음, 내일?"
"엥? 너 학교는..?"

니가 잘라놓고 내일 나갈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십탱이는 바로 평소의 얼탱이 없는 표정이 되었다.

"수능 끝났는데 뭐하러 가."

"아니, 미친놈아, 수능 보고 더 있을 거 아니야, 면접이라던가, 졸업식이라던가."

"면접은 수시 안 썼고, 졸업식은, 뭐, 그때가서 졸업장만 받으면 되지 뭐."
"너 아까까지 왜 자르냐고 따지지 않았냐...?"

"아, 그건 그거고! 이제 막 놀아도 된다는데 마다할리가 없잖아!"

오늘부터 못 한 게임들 다 깬다!

"아니 저 미친새끼 진짜...."

"아, 그리고 십탱아."

"야, 너 진짜 그 호칭 좀 고칠..."
마지막이니까, 나도 솔직하게 나가 줄게.

"7년간, 어머니 아버지의 빛을 갚을 기회를 주시고 먹여주고 재워주신 은혜, 절대 잊지않겠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배웠다.

은인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평소에 아무리 부끄러워서 욕하고 험하게 굴어도 마지막 만큼은 솔직하게, 절을 하고 감사를 표하라고.

"...그래."

내 몸에 이제 익숙해진 와이셔츠를 벗고, 가방에 넣어뒀던 셔츠로 갈아입었다.

역시 양복도 멋지긴 하지만 나는 티셔츠가 편하다.

"..."

뭐랄까, 항상 이날을 기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오늘이 오면 어떤 기분일까 틈만 나면 상상했다.

기뻐하겠지, 막 좋아서 방방 뛰겠지.

아니면 아쉬워할까, 미련이 생길까.

그런데 막상 다가오니 내 기분은

"나, 이제 끝났구나."

물론 아쉽기도 기쁘기도 아쉽기도 하지만 생각보다 큰 동요는 안 느껴진다.

오랫동안 해서 그런 걸까.

마치 중학교를 졸업했을 때 처럼 아, 끝났구나 뿐.

그런 내 감정에 당혹스러워 하며 어느새 1층에 도착해있었다.

"주인니임~!"

"아, 진짜 그렇게 좀 부르지마."

수능이 끝났음에도 얘는 왜 내 곁에 붙어있는 걸까...

"야, 앵기지마."

"아잉~ 왜 그러세요."

틈만 나면 내 팔을 끌어안으려는 수아를 밀어내며 휴대폰으로 택시를 예약하던 중, 내가 내일 집에 돌아가면 얘는 어떻게 할지가 돌연히 궁금해졌다.

"야."

"네, 주인님."

"호칭 그 따구로... 아니 그건 있다 얘기하고, 나 말이야, 드디어 보디가드에서 해방됐다."

"네?! 진짜요! 축하드려요! 이제 저도 주인님 곁에 마음껏 있어도 되는 거네요!"

아니, 왜 그게 그렇게 이어지는데.

"그보다, 나 오늘 짐 싸서 내일 고향으로 내려갈 거거든? 넌 어떻게 할 거야?"

왠지 따라올 것 같긴 한데...

"그러게요, 어떻게 할 까요?"

"어?"

의외로 고민하네.

맨날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녀석이 이런 걸로 고민하는 건 처음이다 보니 살짝 당황스럽다.

사람 참 간사하다더니, 들러붙을 땐 그렇게 싫었는데 떨어지니 또 살짝 아쉽네.

"주인님은 버스랑 기차 중 어느 쪽이 좋으세요? 아, 짐도 다 싸가실거면 버스가 좋지 않을까요?"

"그 얘기였냐..."

하긴 니가 그렇지.
"에휴, 니 맘대로 해라."

엄마랑 아빠한텐 뭐라 말해야지...아, 몰라 그때 생각해.

"그리고 너, 만약 나 따라오겠다면 하나 약속 해야할 게 있어."

"뭔데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정확히 어떻게 사시는 지 몰라, 내가 일부로 숨겼거든. 그리고 나도 내일부터 뒷세계에서 가능한 손 땔 생각이야. 그러니까 너도 나 따라오겠다면 뒷세계에서 손 씻을 생각해."

말은 쉽지만 뒷세계란 건 담배나 약처럼 한 번 빠져버린 인간은 다시 벗어나기 힘들어진다.

법보다 폭력으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고 협상보다 협박으로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다.

5년 넘게 몸을 담구고 산 나는 물론이고 아예 뒷세계에서 교육받고 살아온 수아는 더 힘들겠지.

그 힘듬을 스승님께 배웠기에 유리에게 내 일을 보이지 않으려던 것도 있었다.

그렇기에 수아도 이번엔 쉽게 확답할 수 없었...

"주인님이 원하시면 그럴게요."

야,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라 좀.

"너 진짜 할 수 있어? 쉽게 할 수 있는 거 아닌 거 알잖아."

"전 말이에요, 살인이라던가 암살이라던가, 전부 아버지한테 사랑 받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익혔어요.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후엔 남들이랑 영원히 친해지는데 썼고요. 아, 물론 가끔 돈 벌이나 제 몸 지킬려고 쓰긴 했지만 솔직히 있으니까 쓴 것 뿐이에요!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어요. 왜냐면, 전 이제 영원히 주인님의 물건이니까요♥

"...어우."

왠 소름이...

"...어, 어쨌든, 오늘 일 마지막으로 난 이제 손 떌거야."

"오늘 일이요? 유리를 노리는 사람은 못 봤는데요?"

"유리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일이야."

방을 나간 순간 십탱이 아재한테 문자가 왔다.

내 인생을 망친 주범의 위치.

놀랍게도 작년부터 몰래 밀입국으로 귀국해서 지금 조선족들이랑 약 장사한다지.

마침 택시도 온다.

"타, 마지막 일 하러가야지."
"네~! 주인님!"

"주인님이라 부르지마!"

"그럼 주인님, 주인님은 뭐라 불리고 싶으신가요?"

"...어, 그게..."

막상 생각해보려니까 딱 떠오르는 게 없네...

오빠가 제일 무난하긴 한데.

"아, 일단 오빠라곤 안 부를 거에요."

너무 식상하다고 그것만은 옹고집을 부린다.

좀 세게 밀어붙이면 될 것 같긴한데 그 순간 얘의 고삐가 풀릴 것 같아서 자제 중이다.

경험담이니까 반론은 안 받는다.

"그러게, 그럼...이건 어때?"
옛날에 할아버지가 어떤 아저씨한테 들은 호칭.

좀 구닥다리 같지만 난 어째 마음에 들었다.

"어르신."

"정말 그게 좋으세요?"

"응, 어르신이라 불러."

"주인님도 취향 참 특이하세요."

"너한테 듣고 싶지않아. 아무튼 얼른 타!"








"하아~"

개새끼, 지가 잘못한 거면 곱게 죽을 것이지 총을 쏘고 앉았어.

다친 데가 없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경찰에 잡힐 뻔 했잖아.

"너, 어디갔다 이제와?!"

대문을 열자마자 마당에서 유리가 잡옷 차림으로 뛰쳐나왔다.

"아, 아가씨."

그러고보니 애 얼굴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려나.

"보디가드가 경호 대상을 두고 어디 가는 건데!"

"저, 아가씨."

"왜!"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끄러! 변명하지마!"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 몰라 나 피곤해, 내일 얘기해!"

얘가 평소에 안 이러더니 왜 이러지?

무슨 일 있었나?

"아가씨."

"아, 내일 하자고!"
"유리야."

"어, 너..."

만난지 7년, 본인 앞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자, 유리는 짜증내던 것도 잊고 눈이 크게 떠지고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유리야, 저, 아니 나 말이야, 사실 오늘로 보디가드 그만둬."

"...뭐?"

"사실 천천히 말해주고 좀 더 있다 가려했는데 일이 좀 생겨서 내일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어."
"...왜?"

"그러니까, 어쩌면 내일 못 만나고 해어질 수 있으니까 오늘 인사 미리 해둘게. 지금까지 7년동안 건강하게 살아남아줘서 고맙다."

"왜, 떠나는 건데...?"

"그건, 개인적인 사정이야."

"왜, 왜 그러는 거야... 도, 돈이 급한 거야? 얼마나 필요한데, 내가 빌려줄게, 부족하면 아빠한테 말해서라도 줄게...!"

"그런거 아니야."

처음엔 돈 때문이 맞았지만 이젠 아니다.

"그럼 왜 떠나려는 건데? 혹시 나 때문이야? 내가 요즘 짜증내고, 힘들게 일만 시켜서 그런거야?"

"그것도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정말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야."

"그럼 난? 너가, 오빠가 떠나면 난 어떻게 하라고? 보디가드 없이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거야?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굴어!"

"걱정마, 너희 아버지가 나 대신할 보디가드 구해 줄 거..."

"안돼, 나보고 이제와서 모르는 아저씨한테 내 목숨을 맡기라고? 싫어, 너도 싫잖아, 응? 나 7년동안 지켜줬잖아, 약속했잖아, 나 지켜준다고 충성한다고. 그런데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응? 말해봐, 그렇게 투정만 부리지 말고 뭐가 싫은 지 말해봐 좀!"

"그런 거 없다니까! 정말로 본가에 가야해서 가는 것 뿐이야! 아무튼 난 내일 가게 돼."

점점 격해지는 말과 가까이에서 내 팔을 붙잡으려는 그녀를 피하며 집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뭐야, 쟈 왜 저래...?"

7년 동안 오빠처럼 보던 보디가드가 갑자기 그만둔다 해도 놀란 걸까.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필요 이상으로 나를 붙잡는데 필사적이라고 해야할까

지금까지 날 성가셔하던 유리가 아쉬워 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쿨하게 보내줄 줄 알았다.

개인적으로 떠나긴 해도 연락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너무 예상 외다.

이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7년 동안 나는 그녀의 금간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파제를 맡고 있었고 그 방파제가 하루 아침에 사라짐으로써 떠남으로써 순식간에 감정이 무너져버린다는 걸.

하지만 이때의 나도, 그녀도 그 사실을 몰랐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급하게 방의 짐을 싼 나는 편지 몇 장과 함께 마치 도둑처럼 조용히 집을 나왔다.

"싫어...안 돼, 두고가지 마...약속했잖아...!"

그리고 유리는 다음날 아침 어제까지만 해도 분명히 존재했으나 이젠 빈 공간이 되어버린 내 방과 작별편지를 보고, 망가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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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소서 다 쓰고 이제 다시 글 잡게 되었는데 일주일만에 써서 그런가 더럽게 안 써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