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년 동안, 리원에게 진시는 구원자이자 행운의 신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를 만난 날부터 아버지의 사업은 점점 잘 풀려가 순식간에 빚을 모두 갚았다. 상황이 개선될수록 진시를 사랑하는 마음은 점점 커져갔고, 둘이 함께하는 시간도 더 늘어갔다.
감정표현이 거의 없는 진시였지만, 리원은 굳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랑의 감정이 커질수록 집착은 심해졌다. 그에게 인사하는 여자들이 거슬렸다. 그에게 다가오는 갈보들이 미웠다. 그에게 고백하는 걸레들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진시의 외모 덕분에 절대적인 수는 적었으나, 상대적인 마음의 크기만은 모두 거대했다. 그녀의 행운의 신을 뺏어가려는 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방해했다. 사각지대를 이용해 도로에 밀어버렸다. 편지를 불태워버리고 결투장으로 바꾸어 전달했다. 애꿎은 여자들은 변을 당해야 했다.
중학교 졸업식, 집착과 사랑이 가장 커질 무렵, 진시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졌다. 백방으로 수소문 해봐도 중국으로 떠났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10년 후, 진시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무림맹주의 급사로 인해 후계자였던 진시는 꼬박 10년 일해야 했다, 과거의 중국이었다면 훨씬 쉬웠겠지만, 문화대혁명 이후로 무림의 세력들은 허수아비를 앞에 세워두고 모두 자취를 숨겼다. 온 중화를 돌아다니며 후계자임을 밝히고, 책임자를 찾느라 급히 의무 교육만 마치고 떠나야 했다.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고, 오랜만에 밟은 한국 땅은 각별했다.
“진시야----!”
만족할 만큼 고향을 만끽하기도 전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왠 여자가 달려오고 있다. 자세히 보자 왠지 익숙한 얼굴이다. 순식간에 달려온 그녀는 진시의 가슴팍에 뛰어든다.
“진짜보고싶었어말도없이어디갔던거야나쁜새끼그래도사랑해”
“천천히 말해.”
“사랑해. 보고 싶었어.”
거구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리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잠시 생각하던 진시가 입을 연다.
“그런데 나 오는거 어떻게 알았어? 중요한 일이라 아무한테도 안 알리고 갔는데.”
“그...그게..”
“너 또 사람 풀었냐?”
리원이 멋쩍게 웃는다. 진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너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고...나는 너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거 알잖아. 중국으로 간 것까지는 어떻게 알아서 사람 몇 명 시켜서 지켜보게만 했어. 그렇게 보지마! 진짜 아무도 안 다쳤다니까...”
깊은 한숨이 땅을 덮는다.
“그래. 아무도 안 다쳤으면 됐다. 그럼 다음에 보자.”
“어? 어디가? 만난지 10분도 안 지났는데?”
“재산 문제로 할 일이 조금 있어서.”
“우...우리 회사 회계팀이 해줄 거야! 그냥 놀자. 응?”
“흠.”
사실 진시도 쉬고 싶었다. 하지만 자산 관리는 본인이 해야 한다는 신념과, 꼬박 10년을 일했는데 하루는 놀아도 되지 않겠냐는 욕망이 충돌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욕망이 신념을 이겼다.
“그래.”
진시의 한 마디에 리원은 뛸 듯이 기뻐했다. 자신을 껴안고 하고 싶은 일들과 가고 싶은 곳들을 속사포 같이 쏟아내던 그녀를 잠시 멈춘다.
“일단 짐 좀 찾아올게.”
“어?”
품에 안겨있는 리원을 들어서 바닥에 내려놓고 공항 직원에게 수하물은 언제 받을 수 있는지 묻는다. 각 문파의 수장들이 챙겨준 물건이 많아 택배로 부쳤는데, 도착하는 날짜를 까먹었다. 자칫 잘못하면 도둑맞을 수도 있으니 관리는 철저히 해야했다. 여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진시를 보는 리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입으로는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다.
“10년을 기다려줬는데, 바로 다른 년한테 가서 들러붙어? 아니지. 진시가 잘못한게 아니야. 저 걸레 같은 년이 내 사랑한테 꼬리를 친거야. 저 개 같은 년. 찢어 죽일 년....”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말을 중얼거리던 리원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 달려든다.
“죽여버릴거야!”
칼끝과 직원의 거리가 세 걸음 정도 남았을 때, 리원이 맥없이 쓰러진다. 영문을 모른채 당황하는 직원에게 연거푸 사과한 다음, 리원을 업고 그녀와 동행한 검은 양복과 함께 차로 향한다.
커다란 밴 안에서, 진시는 리원의 이마에 딱밤을 먹인다. 자기 기준에서는 계란을 다루듯 했지만, 리원에게는 꽤 큰 충격이었던 것인지 이내 정신을 차린다. 토라진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을 건다.
“야.”
“...”
“진짜 아무 말 안 할거야?”
“...”
“내가 사람 다치게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
“그..그건.”
“그건 뭐.”
“자꾸 다른 년들이 너한테 꼬리 치잖아...”
다시 깊은 한숨. 이마를 부여잡으며 진시가 말한다.
“몇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여자한테 큰 관심이 없어. 나 좋다고 오는 사람들도 네 얼굴봐서 다 거절하는 마당에, 말도 못 걸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래도...”
대답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다. 이대로 놔둔다면 분명히 일을 저지를 것이다. 한두 번 정도야 재력으로 해결할 수 있겠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손으로 셀 수 있는 정도를 넘어가면 그녀도 곤란해진다. 한참을 생각하던 진시가 문득 제안을 한다.
“그럼 나하고 내기 하나 하자.”
“싫어.”
“진짜? 네가 이기면 너하고 바로 결혼해줄건데?”
정적이 흐른다. 당황한 리원은 허둥대며 할 말을 찾다가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륵 숙이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한다.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이기기만 한다면 진심으로 사랑해줄게.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고 평생 너만 보면서 살거야.”
“진짜?”
“응. 그럼 성립한거지? 지금부터 설명할게.”
진시가 제안한 내기는 간단했다. 리원이 한 번이라도 24시간 이상 진시를 포박해 놓는다면 그녀의 승리였다. 어떤 방법을 써도 된다. 돈으로 해결사를 고용하든, 약물을 사용하든, 심지어는 총기까지 허용되었다. 진시의 승리조건은 단 하나. 상관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말 것. 만약 리원이 평범한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것으로 진시는 승리하고 리원과의 모든 연을 끊기로 하였다. 거기다 만약 시도가 실패할 경우, ‘벌’을 주기로 하였다.
리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진시가 얼마나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던, 결국은 인간이었다. 총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출력을 높인 전기 충격기만 사용해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상은 시원하게 빗나갔다.
그가 책을 읽고 있을 때, 통상 물건보다 출력이 5배는 높은 전기충격기로 뒷목을 지졌다. 아주 길게, 적어도 10분 이상. 아무런 반응이 없기에 기절했다고 생각한 리원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제 그를 옮기고, 약물로 잠재우기만 하면 됐다. 구속구 같은 것은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전기와 화학의 공격에 버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진시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책을 치운 그녀가 본 것은 같잖다는 표정이었다.
“실패했네?”
“어...어떻게?”
“시도는 좋았어. 느낌으로 봐서 정상적인 것보다 4~5배는 강한 물건이었겠지. 그런데, 나한테는 조금 따끔하기만 하더라고.”
평생을 수련을 빙자한 고문을 받아온 진시는 고통의 역치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았다. 아마 인두로 직접 지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약속대로 벌을 받아야겠지?”
리원이 마른 침을 삼킨다. 그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진시는 따뜻하지만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무슨 벌을 줄까? 한 달 접촉 금지? 자위 금지? 이건 포상인가? 혹시 벌을 빙자한 상을 주려는건 아니겠지?‘
“일단 너희 집으로 가자.”
’진짜? 상인가? 그런데 그걸 보여주기는 조금...‘
“저..저기...”
“왜?”
“집은 조금 그런데...”
“벌은 벌이야.”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리원은 강아지 같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의 집으로 안내했다. 넓은 마당에 커다란 건물.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법한 그런 집이었다. 여자 혼자 살기에는 너무 넓었지만, 방마다 속속들이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게 느낀 진시가 문을 열어보려고 하자 리원이 크게 당황한다.
“안돼!”
코웃음 치며 문을 연 진시를 맞이한 것은, 빼곡히 차 있는 그의 물건들이었다. 발 디딜틈 하나 없이, 모든 곳에 그와 관련된 것들이 가득했다. 벽에는 진시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단순히 길을 걷는 모습부터 침대에서 자고 있는 모습까지. 심지어 샤워하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넓은 방의 한쪽 벽면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책장에서 책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사용했던 펜, 커피를 마시고 버렸던 종이컵, 그리고 사용한 휴지까지. 이 정도였을 줄 몰랐던 진시는 리원을 돌아본다.
“너 진짜...”
“버리긴 아깝잖아. 네가 썼던 것들인데. 나한테는 보물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야.”
고개를 몇 번 휘젓고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옷장으로 다가선다. 리원이 쪼르르 달려와서 그를 가로막는다.
“이건 진짜 안돼!”
리원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를 옆으로 치운다. 옷장 문을 열자, 온갖 옷들이 쏟아져 나온다. 자세히 보자 전부 그가 입고 다녔던 것들이다.
“어쩐지 중학교 때 계속 옷이 없어지더라니...”
“새 옷으로 바꿔 놨으니까 괜찮지 않아?”
리원이 뻔뻔하게 말한다. 어이없다는 듯이 한번 바라보고는 계속 옷장을 뒤진다. 간단한 티셔츠, 교복, 청바지에 운동복, 그리고...
“속옷은 왜 있냐?”
리원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힌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발끝을 꼼지락 대고 있다. 다리는 배배 꼬고 있고 갈길 잃은 시선은 바닥을 향하고 있다.
“너 설마... 아니다. 밖에 쓰레기 봉투나 가져와.”
“쓰레기 봉투는 왜?”
“다 가져다 버릴거야.”
리원의 몸이 굳는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를 진시가 재촉한다. 결국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쓰레기 봉투를 가져오는 리원. 진시와 함께 집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물건은 쓰레기통에 직행했기 때문에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어있는 바닥이 워낙 좁아 청소기는 돌릴 필요도 없었다. 대략 4시간 정도 후, 집은 완전히 깔끔해졌다. 말 그대로 있는 것이 없었다.
“야, 진짜 내 팬티로 뭐했냐?”
“....위....”
“뭐?”
“자위 했다고 멍청아!”
“이야... 너는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