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항상 정의로웠다사람들은 항상 그녀의 정의로움을 칭송하고 두려워했으며어느 순간에도 치우치지 않는 공평함은 그녀의 명성을 더욱 높였다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에게 받은 물건인 은색 천칭은 언제나 반듯했으며 날카로운 롱소드는 언제나 그녀의 뜻에 따라 죄인에게 겨누어졌다그녀가 재판할 때는 눈을 가리고 오로지 천칭과 검만을 가지고 판결을 내렸다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그녀의 이름에 도움이 되었지 절대 누가 되지 않았다그녀는 항상 자신의 뒤에 붉은 장막을 세워놓았는데 붉은 장막은 그녀가 직접 정의를 집행했을 때 튄 피로 붉은색이 짙었다.

 

어느 날그녀는 잠깐 산책을 하다 갑작스러운 무리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그녀의 판결에 앙심을 품은 이들의 습격이었다여신을 모시는 이였기에 어느 정도 싸움은 가능했지만 이렇게 떼로 몰려오면 아무리 신의 힘을 받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었다상처를 입은 그녀는 결국 쓰러졌다.

 

크윽... 네 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래봤자 인간이 나대긴빨리 죽여.”

얼굴 좀 반반하지 않냐?”

그렇긴 하네.”

 

그렇게 시작된 음담패설은 그녀를 향한 욕망 어린 손길로 변해 뻗어왔다더럽혀질 바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나으리라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혀를 깨물려 했다그 순간이었다그녀의 붉은 드레스를 벗기던 남자가 머리에 칼이 박히더니 그대로 쓰러졌다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골목에 있던 사람들 중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그러는 와중에도 쓰러지는 남자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그들 중 반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습격자들은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야!”

저기으아악!”

 

그들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날아드는 검에 쓰러져갔다마지막으로 도망치는 자까지 쓰러뜨리고 나서야 범인은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인상적인 흑발에 녹색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그는 널부러진 시체들을 밟으면서 쓰러져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누구냐.”

이런구해준 사람에게 그렇게 날 세워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을 텐데요.”

으윽...”

 

그녀는 침음을 흘렸다남자는 코트를 벗어서 그녀의 앞에 섰다그녀는 무방비한 그의 틈을 노렸으나 나름 단련된 자의 눈으로 봤을 때그것은 모두 허였다천천히 몸을 숙인 남자는 코트를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덮어주었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다 벗고 있으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 !”

 

그녀는 순간 자신이 어떤 꼴인지를 인지했다그녀의 아름다운 붉은 드레스는 반쯤 끌어 내려져 있었고 안으로 그녀의 하얀 속살이 보이고 있었다그녀는 코트로 몸을 가리면서 움츠러들었다.

 

제가 뭐 하실거라고 생각하시나 본네전혀 아닙니다아가씨.”

“...원하는 게 필히 있을 거다원하는 게 뭔가.”

 

그녀는 아름다운 녹색 눈으로 앞에 선 남자는 노려보았다.

 

없는데요.”

그럼 그렇지너도... ?”

없다고요.”

감히 여신을 모시는 자 앞에서 거짓을 고하느냐?”

 

그녀는 날이 선 목소리로 남자를 추궁했다그러자 남자는 별 꼴을 다 본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속고만 사셨나 보네아가씨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한 자들은 전부 자신의 욕망을 청탁했다.”

하이고야진짜네.”

 

남자는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것을 내뱉고는 벽에 기대 쓰러져있는 그녀를 일으켜주었다상처입은 그녀는 남자의 완력을 이길 수가 없었다순순히 그의 의도에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남자는 그녀를 가볍게 제압해 피가 흐르는 그녀의 팔을 지혈하고는 어깨에 들쳐멨다.

 

꺄아아악이거 내려놓거라!”

저택으로 데려다 드릴테니 좀만 참으시죠아가씨.”

 

어떻게든 그에게서 벗어나려 한 그녀였지만 꿈쩍도 않는 그에게 지쳐 결국 포기했다말 없이 골목을 나아가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근데 어쩌다가 여기서?”

“...산책하다가 습격을 받았다.”

산책도 하세요?”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게로구나.”

그야피도 눈물도 없다고 불리잖습니까아가씨.”

으윽...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그렇지만...”

신에게는 못 이기죠.”

 

피식 웃은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인생 얘기 하셔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한 그의 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는 북방의 이민족 출신으로 세상을 둘러보다가 여기유스테아가 마음에 들어 이곳에 눌러앉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겁니다저는 첸이라고 하는데아가씨 이름은요?”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된다.”

이름 알려주는 것도 여신이 막으시덥니까?”

그건 아니긴 하다만...”

이름 하나 말해주는 것 가지고 노하시진 않겠죠.”

“......”

 

사실 그녀에게 이름이나 사소한 것들을 물어보는 사람은 그녀가 가문에서 대를 이어 신을 모시는 자가 된 이후로 그가 처음이었다그랬기에그녀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당황했다그녀가 꿀 먹은 곰처럼 입을 다물자 첸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입술을 깨물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유포리아.”

행복?”

유포리아.”

헹복님?”

....”

아이고 행복 아가씨~”

...!”

 

유포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첸을 벌주려고 했지만 어깨에 매달려 있는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는가한참을 애를 쓰며 탈출을 시도한 유포리아는 갑자기 첸이 자신을 내려놓자 당황했다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어깨에서 내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첸에게 놀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그녀가 말하기 전에 첸이 선수를 쳤다.

 

다 왔습니다아가씨.”

 

바닥에 발을 딛은 그녀는 몸을 돌려 첸이 가리킨 방향을 보았고 그곳에는 창을 겨눈 병사들이 자신과 첸을 향해 있었다

 

아가씨야만인입니다물러서십시오!”

너무 충성스러워도 문제네아가씨전 갑니다다친 데 잘 챙기시고몸조심 하시고.”

 

첸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가 나왔던 골목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병사들은 급하게 그를 쫓으려고 했으나 유포리아가 그들을 말렸다

 

“..첸이라고 했지.”

아가씨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레이첸이라는 사람을 조사해줘당장.”

.”

 

그녀는 급하게 나온 집사장에게 자신을 구해주고 사라진 남자에 대한 조사를 명령했다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도 궁금했고처음 느껴본 감정을 다시끔 느끼고 싶었기에집사장은 상당히 유능한 사람이라 조사를 마친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이곳에서 이민족은 드룸었기 때문에 조사가 한결 수월했다유포리아는 집사장이 가져온 자료들을 한 장씩 넘기며 천천히 읽어내렸다그가 말한 것에서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유포리아는 정직한 그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가 황급히 표정을 지웠다신을 모시는 자는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면 안됐기에자료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그녀는 자신을 데리러 온 시녀를 따라 정원으로 갔다오늘도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제발 살려주세요!”

그게 죽을 죄인지 알면짓지 말았어야 하지 않나?”

제발....”

 

오늘은 강력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들예를 들면 살인자나 반역자를 재판하는 날이었다그들이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은 확실했고 유포리아의 긴 검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은 범죄자를 욕했고 그녀를 칭송했다어느덧 시간이 흘러 재판이 끝났다.

 

후우.. 사람을 죽이는 건역시 힘들군.”

수고하셨습니다유포리아 아가씨.”

 

그녀는 겉으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마지막에 처형을 집행한 자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도 행복하지는 못하리라!’

 

그는 부농을 죽인 소작인이었다말도 안 되는 이자로 부농은 소작인을 착취했고 참다못한 그는 결국 부농을 살해한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이런 것을 막기 위해 법령과 관청이 존재했으나 그는 직접 죽이는 것을 택한 것이다안타까웠지만 결국은 살인자일 뿐이었다

 

행복하지 못한다.. 행복... 나에게 행복이랄 것이 있었나?’

 

그녀는 시녀들이 준비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서 지나가는 투로 생각했다행복이라그녀는 이때껏 살아오면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그녀가 신관으로 선택이 되고 가문은 그녀를 철저히 신관으로 키웠다오직오직 그랬을 뿐이었다잠시 생각하던 유포리아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한 사람이 생각났다.

 

...”

 

그녀는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그녀의 나라에서는 쓰이지 않는 이름이라 더욱 생소하면서도 기억에 깊게 남았다유포리아는 곁의 시녀를 불러 집사장에게 첸이라는 남자를 저택으로 데려오라고 말했다

 

다음 날, 누군가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풀어진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유포리아는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허둥지둥 채비를 갖추었지만 문을 두드린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더 빨랐다.

 

아가씨오우야.”

당장 나가!!!!!”

 

그녀는 얇은 하얀색 블라우스만을 입고 있었는데 단추도 제대로 닫지 않아 그녀의 풍만한 몸매가 여실없이 드러나 있었다첸은 별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예상 외의 눈호강을 즐겼고 유포리아는 당연히 고성과 함께 집기들을 던지며 그를 내쫓았다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화난 목소리로 첸을 불렀다.

 

들어오도록.”

~”

 

첸은 유포리아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그녀를 대했다그 모습이 그녀를 더욱 화나게 했지만 유포리아는 불난 속마음을 가라앉혔다.

 

후우... 이번 일은 실수로 넘어가지이민족이라 모르는 것 같군노크를 하고안의 사람이 허락을 하면 그때 들어오는 거다알겠나?”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럼 왜?”

사람을 불렀는데 그렇게 입고 계실 줄은 몰랐죠.”

....!”

 

유포리아는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그를 부른 것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입술을 깨물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 코트...”

“...이거말이느냐.”

 

그녀의 어깨에는 녹색 코트가 걸쳐 있었다첸이 그녀의 몸을 가릴 때 사용한 것이었다

 

돌려주시는 겁니까?”

아니나에게 바친 것이 아니었느냐?”

아니....”

 

아까의 소소한 복수도 할 겸 유포리아는 뻔뻔하게 나갔다골 때리는 듯한 그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뭔가 야릇한 감정이 기어나왔다.

 

그래서저를 왜 부르신 겁니까?”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불렀다.”

무슨..?”

네 나라에서는 죄인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해서 말이다.”

 

첸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견문을 넓히시는 겁니까?”

그렇다.”

 

사실은 핑계였다유포리아의 안에서는 그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그 마음에 고민했지만 그를 보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실제로첸을 다시 눈에 담으니 그녀의 마음은 평안해졌다오히려 그게 문제였지만 말이다첸은 헛기침 한 번 하고는 천천히 자신이 살던 곳에서의 법과 제도를 입에 담았다재치있는 그의 말 덕분에 유포리아는 그녀의 흥미를 한층 더 높였다괜찮은 것들을 종이에 적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그렇게 그를 그저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은 그와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마음으로 변했고 그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그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말을 멈췄다그가 말을 멈추자 유포리아는 안타깝다는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뭔가 귀여운 그녀의 반응에 첸은 필터링 없이 떠오른 생각을 바로 말했다.

 

아가씨도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

아닙니다실언이었습니다.”

 

갑자기 험악해진 그녀의 표정에 눌린 첸은 말을 취소했다유포리아는 그의 말에 언짢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그의 말 때문이 아니라그가 말을 취소한 것 때문이었다뭔가 어두운 기운을 내뿜는 그녀를 보고는 첸은 급한 일이 있다며 자리를 떴다아니뜨려 했다빠르게 사라지려 했지만 여기는 그녀의 저택저택을 나가지 않는 이상은 그녀의 손바닥 안일 뿐이었다그녀에게 뒷목을 잡힌 그는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 아가씨갑자기 일이 생각나서.”

“.........”

 

유포리아는 첸을 한 번 노려보더니 탁하고 그의 옷깃을 놓았다

 

또 올 수 있겠느냐?” 

부르시면 와야죠.”

그럼 됐다.”

 

유포리아는 대답에 만족했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첸을 보내주었다. 살짝이었지만 아름다운 미소에 그가 넋을 잃은 건 덤이었다. 그렇게 신관과 이민족의 만남은 계속 되었다. 유포리아는 그를 향해 점점 커져가는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고 첸은 이곳에서 자신과 얘기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에 그런 것 상관없이 그녀를 찾았다

 

하루는 유포리아가 무슨 짓을 해도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산책을 나섰다자신에게 예를 갖추는 사람들 사이에 익숙한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첸이었다그녀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그런데그의 옆에 환하게 웃는 여자가 있었다반갑고도 기뻤던 유포리아의 마음은 순식간에 식었다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그녀의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역시첸 씨는 대단해요!”

아니이것 가지고 대단한 건 아닌데.”

그래도요.”

 

확실히 자신을 대할 때보다 표정과 말투가 밝았다유포리아는 표증을 굳히며 그들에게 다가갔다웃는 얼굴로 얘기하던 첸이 그녀가 온 것을 알고 아는 척했다.

 

아가씨여긴 어쩐 일로?”

아가...신관님!”

 

첸과 대화를 하던 여성은 뒤를 돌아보고는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나라에 명성이 자자한 그녀였기에 당연한 것이었다평소였으면 억지로라도 인사를 받아주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유포리아는 더더욱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첸의 옆에 서 있던 여성은 친근하게 그녀에게 다가섰다.

 

신관님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거에요?”

“...잠깐 들렀다아는 사이인가?”

얘는..”

제 연인이에요!”

 

그 말에 첸과 유포리아는 각기 다른 얼굴로 얼굴을 굳혔다첸은 이 꼬맹이가 뭔 소리를 하나 싶었고 유포리아는 순간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그녀의 예쁜 손톱이 하얀 손바닥에 파고들어 붉게 물들였다

 

넌 뭔 소리를... 아가씨?”

신관님?! 손에 피가..!”

“..당장 따라와라당장.”

 

갑자기 변해버린 유포리아의 분위기에 압도된 그는 걱정하는 여자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별 말없이 그녀를 따라갔다그 모습을 흘낏 쳐다본 유포리아의 마음은 더욱 불타오르기 시작했다그녀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유포리아는 무서운 기세로 첸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 여잔 누구냐.”

그냥...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그거 그 녀석이 장난친 거에요.” 

거짓말하지 마라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유포리아는 믿지 않는다는 듯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다시 그를 몰아붙였다

 

이렇게 거짓말까지 해서 관계를 감추고 싶나부끄럽지도 않아?”

왜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단정지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아가씨.”

“....?”

 

첸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의와 균형의 여신을 모시는 신관이왜 편견을 가지고 계시는 건지 물어봤습니다.”

 

그 말에 유포리아는 입을 다물었다확실히 자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를 몰아세우고 추궁했다하지만그것을 넘어설 정도의 감정이 그녀를 정당하게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당당하다는 건가?”

전 언제나 당당합니다.”

나가라당장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유포리아는 최악의 방법을 썼다분명 더 좋은 방법이 있었지만그것은 그녀의 알량한 자존심과 여러 복합적인 것들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발소리를 울리며 저택을 떠났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빌러 올 줄 알았다분명 그랬어야만 했다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첸은 저택에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그에 대한 증오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녀는 그와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불안해져 갔다

 

혹시라도 영원히 이곳을 떠났으면 어떡하지.’

그 여우와 같이 떠났으면..’

아니야그럴 일 없어.’

정말로?’

‘...........’

 

유포리아는 날이 갈수록 커지는 그리움과 참을 수 없는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날이 많아졌다예전과는 다른 그녀의 모습에 저택의 사람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그러던 그녀는 결국 첸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천천히 사정을 들어봤으면그의 말을 믿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텐데지금 여기서 차를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왜 그랬을까.


 

그가 준 유일한 물건인 코트를 붙잡고 이런저런 후회를 하던 그녀의 마음속에 남는 건 언제나 이것 하나였다그가 잘못했다며 증오를 불태워도 이유는 자신에게 있었기에 마음은 부서져 갔다그를 생각하며 스스로 수음을 해봐도 남는 건 허전함 뿐이었다마음을 그제서야 깨달은 유포리아는 급하게 집사장을 불러서 그를 찾으라고 명했지만 그의 인맥과 정보를 전부 동원해도 첸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하루 그리움에 사무치던 유포리아는 오랜만에 들어온 재판을 맡기로 했다그녀를 걱정하던 고용인들의 권유였다오랜만에 걸친 칼집과 천칭이 그녀에게 간만의 평안을 가져다주었다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판을 시작하지.”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사건 소개인이 냉큼 말했다.

 

이 자는 반역을 모의했습니다자신의 부족을 끌어들여 이곳 유스테아를 기점으로 하나씩 도시를 점령하는 계획이 우리 왕국 기사단에 들어왔고그것을 토대로 주모자인 이 자를 체포해왔습니다.”

부족이라이민족인가?”

북방의 야만인입니다.”

 

그 소리에 유포리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눈이 보이지 않으니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부족을 욕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계속하라.”

저를 포함한 대법관들이 토론한 끝에신들의 나라인 우리나라를 침공할 목적과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님의 도시유스테아를 발판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저희는 신관님께서 직접 목을 베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법관들은 사형을 구형했다말이 끝나자마자 정원을 둘러싼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그들의 의견이 맞기도 했고신들의 국가와 도시를 침공하려는 것은 사형 이상의 중죄였다증거들을 건네받은 유포리아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죄인에게 말했다

 

증거는 확실하다죄인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기사단이 체포할 때 턱을 부쉈기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합니다그리고 반역죄인에게 어찌 항변할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대법관은 살짝 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빨리 죽이기를 바라는 목소리였다유포리아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사실 유무를 알기 위해 천칭을 들어올렸다죄를 나타내는 접시가 완전히 기울어졌다그 모습에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고 대법관들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내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결과에 따라 죄인에게 다가간 그녀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어올렸다강한 바람이 불었다그녀가 검을 내리치고 무언가 베었다라고 느끼는 순간 유포리아의 눈을 가리던 천이 바람에 매듭이 풀려 흘러내렸다그리고.

 

?”

 

그녀의 눈에는 목이 잘려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첸의 머리가 들어왔다법관들이 말한 대로 턱은 부서져 있었으며 다시 감을 수 없는 눈은 절망에 물들어있었다전혀 상상치도 못한 광경에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이게.. 무슨....”

아가씨이 자는 반역자입니다어찌 무릎을 꿇으십니까?”

아니야.. 아니야... 아닐 거야.. 다 꿈....”

 

너누나도 큰 충격에 유포리아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겨우 눈을 뜬 유포리아는 자신이 한 짓을 깨닫고는 비명을 내지르며 스스로와 방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그녀의 고운 손은 피로 적셔졌으며 황금을 녹인 듯한 금색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피로 물들어갔다고용인들이 와서 그녀를 말리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어느새 피로 범벅이 된 그녀는 자리에 쓰러져 눈물을 흘렸다한참을 그렇게 있던 유포리아는 힘이 풀린 다리로 부축을 받아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병사들만이 남아 엄중한 경비 속에 첸의 시체와 그녀의 검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유포리아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까와 같았지만, 달랐다. 전혀.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린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눈물을 다 흘렸는지 핏발이 선 그녀의 녹색 눈에서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피로 그를 살려보자는 생각이었지만, 목이 잘린 시체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는가


유포리아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대로 날을 새버린 그녀는 비틀거리고 몸을 일으켰다. 첸이, 자신이 사랑했던 첸이 반역을 꾀할 리는 없었다. 누군가의 모함일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유포리아는 뭔가에 홀린 듯 서럽게 울던 그 모습은 사라지고 전에 없이 잔인하게 변했다

 

그를 모함한 이들을 싸그리 잡아 죽일 것이다.’ 

내가 그를 베게 한 자들을 찢어 죽일 것이다.’

 

그녀가 일을 몰아친 덕분인지 조사는 빠르게 끝났다. 결과는 처참했다. 유포리아의 가문이 커져가는 것을 시기한 무리가 한 소행이었다. 그들은 첸이 유포리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알아내고 그를 반역죄로 몰아가면서 유포리아가 그와 내통했다는 것을 빌미로 삼았지만, 유포리아가 더 빨랐다. 사건은 엮이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몸을 불렸다. 다른 신의 부패한 고위 신관과 대법관들, 그리고 자신과 적대하던 무리들까지


그들을 직접 죽인 유포리아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그런 미소였다. 한바탕 피바람이 지나고 사건은 점점 잊혀져갔다. 인간의 그릇된 농간으로 신을 모시는 이가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했다. 이민족 하나 죽인 것 가지고 그녀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삶의 일부를 스스로가 죽인 것과 같았으며 그 괴로움과 죄책감은 끝없이 유포리아를 병들게 했다피의 복수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한 소식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신관 유포리아자살.’

 

간결했지만 강렬했다. 유포리아는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그에게 용서를 구했다. 썩어가는 첸의 시체를 앞에 두고 그를 베었던 검으로 자신의 목을 스스로 찔러죽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의미 모를 미소가 지어져 있었으며 그녀의 붉은 드레스 위에 녹색 코트를 몸에 걸치고 있었다

 

실로, 그녀의 이름에 맞는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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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에 얀을 붙이려다가 좀 억지가 된 느낌.  나중에 쓰는 사람 없고 시간 남으면 8번 힘이나 18번 달로 써볼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