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검의 주인

 

 

 

 

“도련님, 시간이 됐습니다.”


“아버님이 부르시더냐?”

 

“네.”


그가 눈을 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가겠다고 전해다오.”


늙은 집사가 머리를 숙인 후 자리를 떠났다.

 

그런가, 벌써 그 날이 왔는가. 글라디우스가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복도를 지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계승의 방으로 향했다.

 

“어머, 도련님. 오늘이 바로 그 날인가요?”


“그렇다.”


“도련님이 후계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했어요. 물론, 아가씨도 훌륭하시지만…….”


“나보단 누님이 적합하겠지. 어쨌든, 고맙다.”


뚱뚱한 하녀가 머리를 숙였다. 

 

복도를 지나며 만나는 이들마다 그에게 머리를 숙이며 그를 응원했다.

 

‘나는 후계자의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자신보단 그의 누나 아미스가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은 그저 검을 휘두를 뿐.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후계자 또한 될 수 없다.

 

그가 계단을 올라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던 중 그녀와 마주쳤다.

 

“안녕, 글라디.”


“밤을 새셨군요. 눈 밑이 검습니다.”

 

“그런 건 알고도 모른 척 해주는 게 좋을 거야.”

 

아미스가 그의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쓰다듬으며 웃었다.

 

두 명의 계승 후보자. 누나, 아미스와 그녀의 동생 글라디우스.

 

두 사람은 뭐든지 정 반대였다. 아미스의 머리카락은 검은색 장발에 흰 새치가 섞여있었고

 

그는 정반대로 흰 단발에 검은 머리카락이 섞여있었다. 그녀는 호쾌하고 털털했으나

 

글라디우스는 웃거나 울지 않았다. 심지어 태어난 날조차 울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누가 후계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


“당연히 누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 가식 떨지 말고.”

“제가 농담하는 걸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미스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늘 그렇듯 귀여운 맛이 없는 녀석이라 생각했다.

 

“가자.”


“예.”


두 사람이 계승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은 평소에 수호자 본인만 들어올 수 있는 방이었으며, 내부엔 무수히 많은 잠금 장치와

 

함정이 있어 왕국 최고의 도둑도 쉬이 들어올 수 없는 감옥이었다.

 

“왔느냐.”


그런 투박하고 으스스한 장소에, 그들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호자 테투라. 그는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버님.”


“괜찮다. 자, 두 사람 다 무릎을 꿇어라.”


그 말대로 두 사람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 가문의 업이 무엇인지는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주받은 검과 갑옷을 지키는 일입니다.”


아미스가 말했다.

 

“그렇다. 먼 옛날, 남매가 있었다. 갑옷을 입은 오빠와 검을 쥔 여동생. 두 사람은 

 

흉폭하고 강대한 힘으로 세상을 어지럽혔다……. 그리고 각자 사용하던 무구에 봉인 당했지.”

 

테투라가 손가락을 튕기자, 몇 겹으로 뒤덮인 거대한 철제 상자의 입구가 열렸다.

 

왼쪽의 상자엔 갑옷이 있었다. 옅은 푸른빛으로 빛났으며, 단 하나의 흠집조차 없었다.

 

오른쪽의 상자엔 검이 있었다. 짙은 붉은빛으로 빛나며, 마치 살아있는 듯 촉수를 꿈틀거렸다.

 

“오늘 너희 둘 중 한 사람이 나의 뒤를 이을 수호자가 된다.”


““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수호자는 이 성과 나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 유일하게 왕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거부의 권리’가 주어진다. 우리의 임무는 이것을 지키는 것뿐이다.”

 

왕의 명령조차 무시할 수 있는 권리. 두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권리인지 알고 있었다.

 

“……아미스.”


“네, 아버님.”


“미안하다.”


테투라가 글라디우스의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반지를 빼 건네주었다.

 

“글라디우스, 수호자의 의무를 짊어지겠다고 맹세하겠나?”


“맹세하겠나이다.”


“그럼 그리 될 것이다. 너는 오늘부터 수호자다.”


그의 아버지가 반지를 끼워줬다. 글라디우스는 진심으로 놀라 몸을 가볍게 떨었다.

 

“아버님…….”

“왜 그러느냐.”


“저보단 누님이 더 적격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미스도 자신이 될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선택했다.

 

“널 선택한 것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미스.”

“……네.”


“수호자가 되지 못한 자손은 어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이름을 버리고 집을 떠납니다. 그리도 다신 돌아오지 못합니다.”


“하루 시간을 주마. 작별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라.”


그녀가 대답하지 않고 벌떡 일어선 후, 뒤로 돌아 나갔다.

 

“누님…….”


예상치 못한 일.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

 

 

 

 

 

 

 

흐트러진 마음을 검으로 다잡는다.

 

그는 춤췄다. 춤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짓이었다.

 

글라디우스가 검을 쥐고 훈련을 할 때면 사용인들이 슬쩍 그걸 훔쳐보았는데, 도저히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누님이 아니라 내가 되었는가.’

 

그는 각오하고 있었다. 이름을 버리고 한 사람의 낭인으로서 살아갈 준비도 되어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아닌 그를 선택했다.

 

왜?

 

“글라디우스, 여기 있었느냐.”


“아버님.”


그가 검을 집어넣고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내게 고개 숙이지 마라. 오늘부턴 네가 수호자다, 내가 아니라.”

 

“저는 수호자가 아닌 아들로서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테투라가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뒤를 따라갔다.

 

“왜 널 선택했는지 묻고 싶을 것이다.”


“네.”


“너의 작은 할아버지가 어찌 죽었는지 아느냐?”


그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글라디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과거엔 수호자가 되지 못한 형제나 자매도 함께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너의 작은 할아버지가 배신했다. 수호자가 되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유혹에 넘어갔지.”


마검과 마갑주의 유혹. 어린 시절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격전 끝에 검이 탈취되는 것은 막았지만, 그 대가로 당신께서도 치명상을 입고 돌아가셨지.”


“그것과 제가 선택된 것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있다. 글라디우스, 너는 검이다. 인간보단 검에 가깝다.”


글라디우스가 걸음을 멈췄다.

 

어릴 적 종종 듣던 말이었으나, 그것을 아버지가 직접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넌 태어난 날에조차 울지 않았지.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넌 울지 않고, 아무리 기쁜 일이

 

있어도 웃질 않았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으며 침착했지.”

 

그렇기에 네가 선택되었다.

 

그는 그제야 이해했다. 

 

“무구의 유혹을 이기려면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각오가.”

 

“하지만, 전 그럼에도 누님이 더 잘 하리라 믿습니다.”


“그 아이는 감정에 너무 솔직하다. 그런 점은 네 어미를 닮았지.”


그의 아버지가 글라디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우리의 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강해져라, 아들아.”


“강해지겠습니다, 아버지.”


테투라가 자리를 떠났다. 그는 우두커니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 아침이 되면, 누님은 영영 떠나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

 

슬프진 않았다. 어쨌든 예견된 작별이었으니.

 

그가 2층에 있는 아미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누님, 접니다.”


“…….”


기척은 느껴졌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동생에게 얼굴도 비추지 않으실 겁니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는 문에서 한 발자국 떨어졌다.

 

“비록 일이 이렇게 됐으나, 저는 여전히 누님이 저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검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합니다.”


무어라 말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전할 수 있는가.

 

그는 춤출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은 갓난아기처럼 서툴렀다.

 

“언제, 어디서든. 저는 누님을 그리워하겠습니다.”

 

글라디우스가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대답은 듣지 못했다.

 

 


 

 

 

 

 

*****

 

 

 

 

 

 

 

 

그녀는 거기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지만 낯이 익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알몸의 여인.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그리고 마검.

 

“너는 누구냐.”


그가 말했다, 그러자 검이 대답했다.

 

“반대로, 넌 뭐야?”


“나는 검이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일지도 모르겠어.”

 

이것은 선문답인가?

 

아니면 그저 시시한 잡담에 불과한가.

 

그가 다음 말을 이어했을 때, 눈이 번쩍 뜨였다.

 

“아니, 우리 둘 다 검에 불과하다.”


새벽이었다. 여명조차 뜨지 않은 깜깜한 밤이었다.

 

마음이 술렁거렸다. 느낌이 안 좋았다, 불길했다.

 

그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을 때- 짙은 피의 향기를 맡았다.

 

시체.

 

어제까지만 해도 인사하고, 일하고, 웃던 그의 하인들이 모두 죽어 너부러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이것은 악몽인가? 그가 얼른 방으로 돌아와 검을 가지고 왔다.

 

침입자가 온 것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애초에 그들이 사는 성은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어 아무나 올 수 없는 요새에 가까웠다. 대체 누가, 어떻게?


그보다도 누님과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그가 성을 돌아다니며 생존자가 있나 살펴보았다.

 

하지만 모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심지어 어린아이마저 참혹한 시체로 변한 뒤였다.

 

“누가 됐든 용서치 않겠다.”


피와 시체를 넘어, 그가 계단을 올라 계승의 방으로 향했다.

 

만약 침입자가 저주받은 무구를 노리고 온 것이라면, 어쩌면 아직 거기 있을지도 몰랐다.

 

“열려 있다……하지만 이 방은 수호자의 반지로만 열 수 있을 터인데……?”


반지는 그의 손에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누님! 아버님!”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보았다.

 

푸른 갑주를 입은 괴한이, 테투라의 목을 꺾는 장면을.

 

“너는……너는 누구냐.”


“…….”


갑주를 입은 괴한이 그에게 다가왔다.

 

“……누님?”


“글라디우스…….”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은, 아미스였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왜……왜 아버님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결국 너는 검이니까.”


“누님……!”


그녀가 돌진했다. 

 

그가 피하면서 검을 휘둘렀으나- 갑주에 닿자마자 그것은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갑옷이 누님을 홀렸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된 겁니까?”


“아니. 이걸 입은 건 나의 의지였어.”


“왜?”


“말했지, 넌 이해하지 못한다고.”

 

서걱-

 

스친 것만으로도, 살점이 떨어져나간다.

 

그 갑옷은 방어구이면서 동시에 무기였다. 

 

온 몸에 돋은 가시와 칼날은, 그저 팔과 다리를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갑옷을 치명적인

 

무기로 변모시켰다. 글라디우스가 피했지만 도저히 궤적을 읽을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아미스가 고함을 내지르며 돌진했다. 그가 피하려고 한 순간, 뒤꿈치가 턱에 걸렸다.

 

“누님!”

 

퍼억-

 

몸이 붕 떴다, 글라디우스는 자신의 오른팔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갑주는 인간이 만든 무기론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바닥에 쓰러진 그를 아미스가 들어올렸다. 그리고 목을 쥐었다.

 

“그만, 두십시오…….”


“…….”


이럴 리 없다.

 

글라디우스가 눈을 감았다. 그의 기억 속엔, 아미스는 언제나 빛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검을 가르쳐 준 사람.

 

처음으로 세상이 무엇인지 말해준 사람.

 

처음으로, 너는 인간이라고 말해준 사람.

 

“너는 그저 검에 불과해. 그러니, 이건 내가 가져가겠어.”


“저는-”


“작별이다, 동생아.”


벽이 무너지며, 추락한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울고 있던 아미스의 얼굴.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몸이 지면에 닿을 때의 충격.

 

“……커헉…….”


죽음.

 

모두에게 오는 공평하고 냉정한 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비를 본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허무, 하구나.”


이토록 쉽게 죽는 것이 사람이다.

 

이렇게 허무하고 덧없이 사라지는 게 생명이다.

 

누님은 앞으로 어찌 될까.

 

원망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의 술렁거림도 가라앉았다.

 

이대로 죽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복수하고 싶어?”


“……아니.”


꿈에서 들은 여인의 목소리.

 

사신의 목소리인가. 기대했던 것보다 꽤 괜찮은 목소리였다.

 

“네 누나가 널 배신했잖아. 복수하고 싶지?”


“애초에……누님의 것이었다.”


다만 이런 식으로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이제 네 누나는 오빠의 갑옷으로 날뛸 거야.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겠지.”


“…….”


“자, 말해. 너의 힘을 원한다고.”


삶에 미련 따윈 없다.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운명의 뜻.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무언가가 되고 싶다고 꿈꾸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맹세했다.

 

“나는……수호자로서……지켜야한다. 검과, 갑옷을…….”


“그럼 지킬 힘을 줄게. 자, 글라디우스. 나를 잡아.”


그가 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검은 촉수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로 뭉쳐, 검이 되었다.

 

“나의 이름은 마검 자카리에스……그렇지만 앞으론 날 레나라고 불러줘.”


“레나…….”


“줄곧 기다렸어. 날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남자를, 나만의 왕자님을. 넌 나의 것. 난 너의 것.

 

자아, 베고 찌르자. 죽이고 또 죽이자. 세상이 전부 피로 물들 때까지!”

 

광녀의, 악녀의, 마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빗속에서, 두 검이 각자의 주인이 되었으니.

 

분명 이는 비참한 비극이었다.

 

 

 

 

 

 

 

 

 


 

 

얼른 은여우나 완결내고 쓸 것이지 또 단편이나 쓰고 앉았군

앞으로 뭘 연재할까 고민될 땐 일단 1편을 써보는 게 좋다

이거 꿀팁임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