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이제 막 20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한 김현우는 몸을 부르르 떨며 강의실에 들어갔다.

 

“어, 왔어?”

 

오자마자 반겨주는 동기, 유현승.

저번에 OT에서 친해진 이후 대부분의 강의를 같이 듣는다.

 

“응.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춥냐.”

“주위에 커플들이 많아서 그런가.”

 

그 말대로 오는 길에 현우가 마주친 커플만 해도 10쌍이 넘었다.

봄이 되면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는 입시 때문에 누가 사귀고 그런거엔 일절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야야, 저기 이아영이다. 말 이라도 걸어봐.”

“개소리하지마. 쟤는 내 이름도 모르는데.”

“이참에 친해지는 거지. 저번에 술 마시면서 좋아한다고 노래부르더니.”

“아, 좀!”

 

그건 김현우가 잊고 싶어하는 흑역사였다.

사건은 OT에서 발생했다.

막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과 새로운 환경에 들뜬 김현우는 술에 취해 아무말이나 마구 뱉었다.

그게 업보가 되어서 이렇게 돌아오고 있다.

 

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그만 우려먹을 때가 된 것 같은데.”

“푸하하, 이렇게 재밌는데 그만하라고?”

“난 하나도 재미없거든.”

 

이아영은 학과에서도 그 미모로 유명한 여자다.

OT에서도 말 마디 걸어보려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 셀 수도 없다.

지금도 그녀를 몰래 힐끔 쳐다보는 시선들이 꽤나 많다.

 

“교수님 왔으니까, 책이나 펴.”

“그래. 그래.”

 

-자, 오늘은...

 

교수가 들어오고 재미없는 강의가 시작된다.

정치철학.

이 과목의 교수님은 자장가를 불러주기로 유명하다.

그 목소리와 특유의 낮은 톤이 수면을 유도하는 것이다.

아침 수업인 것도 있어서 김현우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

.

.

“벌써 결혼 1주년이네.”

 

‘...응?’

 

“기억나? 우리 첫 만남?”

 

여자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번쩍차린 김현우.

그가 깨어난 장소는 잠을 퍼질러 자던 강의실이 아니었다.

분위기 있게 꾸민 어둑한 부엌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난생처음 보는 가정집에 모든 게 어색하고 낯설기만 하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현실이라기엔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침착하자, 방금까지는 강의실에 있었어.’

 

그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디지?

 

‘그리고 눈 앞에 여자는 누구야?’

 

식탁에 놓여있는 거울을 통해서 본 자신은 어딘가 늙어보였다.

눈가에 미세한 잔주름이 늘어나 있고 입가에도 마찬가지로 자잘한 주름이 있다.

 

“여보, 왜 그래?”

“아, 아니야.”

“긴장이라도 한 거야?”

“그런건 아니고. 그냥 첫 만남 기억이 잘 안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김현우는 일단 맞춰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미모의 여자에게 여보라고 불리는 경험을 쉽게 놓칠 수 없었다.

그 만큼, 김현우는 사랑이라는 것에 목말라 있었다.

 

“뭐야? 부끄러워서 기억 못하는 척 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 지 알아?”

 

여자는 술로 목을 한 번 축이고 말을 이어갔다.

 

“갑자기 와서는 오늘은 집에만 박혀있으라는 둥, 괴한한테 습격당할거라 했었잖아?”

“괴한?”

“응.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 있기는 했지. 스토커 때문에 학교가 시끄러웠잖아. 나중에 잡히긴 했는데.”

 

괴한이라 하니,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다.

여자의 말 대로 지금 학교는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다른 학과에서 한 여학생이 스토커 때문에 자퇴를 했다는 소문.

 

‘근데 어떻게 아는거야?’

 

자신에게 살갑게 여보라 불러주고 결혼 1주년 이라며 같이 술을 마셔주는 여자.

심지어 외모도 지금껏 본 여자 중에 가장 이상형에 가깝다.

이쯤되자, 슬슬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진 김현우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우리 학교 이름이 뭐더라? 오래 돼서 기억 잘 안나네.”

“뭐? 우리 S대 철학과 같이 나왔잖아. 이거 마시고 술에 취한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여자.

처음엔 긴가민가 했던 김현우는 방금 말로 거의 확신했다.

S대 철학과에 같은 학과.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아영이 10년 정도 나이를 먹으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싶었다.

 

‘진짜 이아영이 나랑 결혼했다고?’

 

그걸 딱 깨달은 순간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어, 어라?”

“수업 끝났어. 아주 코까지 골고 푹 자더라.”

 

유현승은 한숨을 쉬고 책가방을 챙겼다.

그의 말대로 시간은 어느 샌가 수업 시간을 넘겼고.

다른 학우들은 이미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현실과 분간이 안 되는 상태의 김현우는 몽롱한 상태로 유현승을 따라 나갔다.

.

.

.

 

“그만 좀 쳐다봐라. 아무리 이아영이 좋다지만 하루종일 보고 있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학생식당.

김현우는 열심히 주위를 살펴서 이아영을 찾았다.

도저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꿈에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 학교에 스토커가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진짜야?”

 

일단은 꿈에서 본 내용이 들어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밥 먹다 말고 뜬금없이 내뱉은 질문에 유현승은 착실하게 대답해줬따.

 

“아, 그 사람? 우리랑 같은 강의실 쓰던 학과였는데. 이번에 스토킹한거 들켜서 자퇴했잖아.”

“그래?”

 

학교 생활에 집중하는 유현승 답게 그의 입에서 소문에 관해 술술 나왔다.

 

“매일 똑같은 후드입고 음침하게 생겼었잖아. 너도 몇 번 봤을걸? 집주소까지 알아내서 따라다녔다는데.”

“스토킹 당한 여자애는 어떻게 됐는데?”

“듣기로는 트라우마 때문에 집에서 안나온다더라.”

 

여기까지 들은 김현우는 한 가지 확신했다.

스토커가 보통 악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여간, 꼭 미친 놈들이 있다니까.”

 

여기까지 들은 김현우는 밥을 대충 때려 넣고 유현승과 헤어졌다.

 

‘이걸 그냥 대놓고 말할 수도 없고.’

 

꿈에서처럼 괴한이 습격할예정이니, 집에 꽁꽁 숨어있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상한 놈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지.

김현우의 신경은 온통 이아영에게로 쏠렸다.

 

미래에 아내가 될 사람이 위험에 쳐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남자가 어딨겠는가.

한참동안 제자리를 빙빙돌며 생각하던 김현우가 내놓은 결론은 정면돌파였다.

 

그건 며 칠전에 봤던, 나비효과에 관한 영화 때문이었다.

나비의 작은 날개짓 한 번에 미래가 바뀔 수 있다.

 

김현우의 머리로는 그냥 설득하는 방법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좋아. 시도나 한 번 해보자.’

 

혹시나 미래와는 다르게 믿어줄지 누가 아는가?

 

“누구세요?”

“아, 같은 학과의 김현우에요. 그게 요즘 세상도 흉흉한데 집에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떠세요?”

“...아, 어...네.”

 

누가봐도 당황한게 역력한 이아영의 얼굴.

김현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도대체 무슨소리를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제가 좀 바빠서 가볼게요.”

“...”

“하, 씨. 밥 좀 빨리 먹을걸. 이상한 놈이나 꼬이고.”

 

지금 김현우의 심정은 쥐구멍이 있다면 바로 들어갈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얼굴을 짚고서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래, 뭐. 그냥 개꿈일 수도 있고 진짜라도 난 할거 다 했어.’

 

자기합리화.

쪽팔려서 얼굴이 새빨개진 김현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누군가 김현우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꿈은 현실이 되었다.

 

늦은 밤.

심란했던 김현우는 번화가 근처 편의점에서 혼자 소주를 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엠뷸런스 소리가 울려퍼졌다.

무슨일이 생겼나 싶어서 나간 곳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여성과 칼을 든 채로 붙잡힌 남성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주위에선 안타까운 목소리가 하나, 둘 들려왔다.

 

-저 남자, 우리 학교 스토커 아냐?

-맞아. 그 스토킹 당하던 여자애가 아영이랑 비슷하게 생겼잖아.

 

경찰관에게 붙잡힌 남성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 난 아무잘못 없어! 저 년이 날 거부한게 잘못이지! 괜히 비슷게 생겨가지고!”

 

-삐이이이이.

 

김현우의 귓가에 이명이 들려온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있다.

손발이 벌벌떨려오면서 눈가엔 눈물이 차오른다.

 

‘이럴거면 부끄러운거고 뭐고 달라붙어 있을걸.’

 

죄책감.

분명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못 했다는 후회가 온 몸을 감싼다.

 

‘다시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김현우는 간절히 바랐다.

신님, 부처님, 누구든 좋으니까. 저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누군가 그의 바람을 들어준 것 일까.

김현우가 눈을 감은 그 순간 풍경이 바뀌었다.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와 낯익은 풍경.

오늘 아침의 강의실.

시간은 이미 교수님의 강의가 끝난 시간이다.

 

“유현승...?”

“수업 끝났어. 아주 코까지 골고 푹 자더라.”

 

유현승은 한숨을 푹 쉬고 책가방을 챙겼다.

 

.

.

.

.

 

또 다시 찾아온 한 번의 기회.

유현승과 밥을 먹고 헤어져서 이아영을 찾았다.

 

‘멀쩡하구나.’

 

전에 봤던 피투성이로 쓰러진 모습이 거짓말처럼 평소의 이아영이다.

 

김현우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아영에게 다가갔다.

 

“...누구세요?”

“오늘 집에서 나오지마세요. 특히 번화가 쪽에 술집은 절대로 가면 안 돼요!”

“...어, 아...네.”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거기 위험하다고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좀 바빠서 이만...하아.”

 

전혀 믿어주는 눈치가 아니다.

이아영은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서 멀어지려고 했다.

 

“정말로요. 오늘은 집에만 있으세요.”

“아영아, 뭐해? 빨리 가자.”

 

이아영의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멀리서 손짓한다.

“아, 금방 갈게! 친구가 불러서...”

 

멀리서 이아영과 그 친구가 하는 대화가 조금씩 들려온다.

 

-뭐야? 또 헌팅?

-음, 그런가? 좀 이상한 사람이던데. 

-하아, 인기 많은 것도 피곤하겠다.

 

김현우는 답답해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만약 죽는다면 사인은 답답사였다.

아직도 그녀가 죽는 장면이 생생한데 상대방은 믿어주질 않으니 미칠 노릇이다.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네.’

 

말이 안 통하면 몸으로 떼우는 방법 뿐이다.

적어도 김현우의 머리로는 그랬다.

어차피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도 대충 알고 있다.

그러면 직접 스토커를 상대로 막으면 된다.

쉽지 않은가?

 

.

.

.

.

늦은 밤의 번화가는 온갖 불빛으로 화려하게 빛난다.

이런 아름다운 장소에서 오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걸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이아영이 있는 술집은 생각보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보기에도 시끌벅적한 대학생들 모임.

그 중간에 이아영도 있었다.

 

“여기 소주 한 병이랑 김치찌개 주세요.”

 

김현우는 주위를 한 번 스캔했다.

이런 술집같은 경우에 혼자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찾았다.’

 

후드티를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후즐근한 청바지를 입은 남자.

저 남자다.

이아영을 칼로 찔러 죽인 범인.

 

‘실수는 안 돼.’

 

김현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스토커 자식이 다가오면 남자랑 몸싸움을 하던 뭘 해서 막을 생각이다.

 

하지만 김현우는 생각보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걸, 얼마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꺄아아아악!

-여, 여기 사람이 찔렸어!

-119! 빨리 구급차 불러!

 

“...어째서? 왜, 날 감싸줬어요?”

“그, 그러니까. 집에서 나가지 말라고...했잖아요.”

 

이아영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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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있다면 아마도 김현우의 편이라 생각된다.

정신을 차린 병실에서 의사가 말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위험한 상태는 지나갔습니다.”

 

꼼짝없이 칼에 찔려서 죽을 줄 알았던 김현우였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간 상태를 더 지켜보다가 괜찮으면 퇴원하랜다.

“하, 진짜 위험했네.”

 

의사가 나가고 혼자 남은 병실.

한참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의문이 있다.

 

‘그러고 보니, 독방은 비싸지 않나?’

 

보통 응급환자라도 다 같은 병실을 쓰기 마련이다.

돈이라도 더 주지 않는 이상.

그러한 의문에 김현우가 어리둥절할 때, 병실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아영은 병문안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과일을 들고서 찾아왔다.

척 보기에도 진해진 다크써클과 수척해진 얼굴로 그간 마음고생을 했다는 게 보였다.

 

“아, 아니에요. 제가 괜히 나선거 아닌가...”

“아니에요! 그 날, 현우 씨 말만 들었어도 이런 일, 안 생기는건데.”

“괜찮아요. 저 였어도 안 믿었을텐데.”

 

화기애애한 분위기.

처음 안 좋은 얼굴로 이아영이 들어올 때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심각한 얼굴이었다.

 

“저기, 괜찮으면 과일 드셔보세요.”

“감사합니다.”

 

병실에 누워 이아영이 깎아주는 사과를 먹으며 자신의 행동에 괜스레 뿌듯해졌다.

 

김현우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가질 않는다.

 

‘칼빵당한건 예상밖이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다행인가.’

 

가볍고 좋은 분위기로 한 시간정도 이야기를 하고 이아영이 병실을 나갔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몸조리 잘하세요.”

“네. 아영씨도 조심히 가세요.”

 

이렇게 오늘은 한 시간 정도 같이 있고 헤어졌다.

김현우는 괜히 아쉬운 마음에 사과를 더 집어먹고서 잠에 들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퇴원하기 직전날.

 

“내일이면 퇴원이네?”

 

어느 샌가 이아영과 친해져서 말을 놓은 김현우.

첫 날은 한 시간이었지만, 날이 지날수록 그녀가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오늘은 하루종일 같이 있었다.

벌써 시간은 늦어서 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렇긴한데...언제가게?”

“응? 네가 여기 있는데 어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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