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화하니까 기분이 좋네. 손목은 아프다



안녕하세요. 저는 얀붕이 여자친구 얀순이에요. 


얀붕이는 중3때부터 만나고 지금까지 사귀고있어요. 

저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활동 중이고, 얀붕이는 2년차 사원이에요. 동갑이지만 저는 아파서 대학교 1년을 쉬었고 얀붕이는 졸업하자마자 회사에 취직을 했거든요.


저는 집착이 심하지만 중학교때부터 쭉 사귀고 있는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얀붕이는 저를 받아들여줬답니다. 제가 가진 성향을 이해하면서 조심하고, 오히려 제 기질을 조금 치료해줬어요.

저도 사회를 의식하면서 살다보니 독점한다던가 하는 위험하고 반사회적인 충동을 참고 있는데, 얀붕이는 이걸 건전하고, 때로는 불건전한 방식으로 온전히 풀게 해줬죠. 그 덕에 저는 빨간줄 없이 이렇게 지낼 수 있었어요. 물론 얀붕이의 용서와 이해도 있었으니까요. 피는 안봤어요. 정말이에요. 딱 한번만 빼고.


같이 있으려고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대학교도 같이 들어갔어요. 학과는 다르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직업을 위해서 고른거고, 이것도 물론 같이 있으려고 그랬어요. 대학교 들어가면 역시 한집에 살려고 했지만 그것까진 무리였어요.


한 반년 전에 얀붕이가 저한테 돈을 모으자고 했어요. 더 큰 집에서 같이 살자면서. 

저는 아직 취준생이었고, 돈을 모으려면 알바 뿐인데 그러면 얀붕이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우게 될것 같아서 거절했어요. 그런데 본인이 말하길 이러려고 입사 빨리했다고, 그러니까 상관없으니 마음만이라도 같이 해 달라고했어요.

저는 울면서 좋다고 했죠. 가뜩이나 병약해서 대학교 1년 쉬었는데 더 기다려주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렇게 저는 알바를 병행해서 취업활동을 했죠.


그런데 얼마전부터 얀붕이를 만나는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어요.

3달전 까지는 자주 만나줬죠. 밤 늦게 걔 집에서 머무르다가 자고 가기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원래는 매일매일 했던거지만 그러려면 이런저런 돈이 많이 드니까 그것도 줄이려고 했죠. 은근히 간식이나 콘돔이나 이런저런거 가격이 꽤 들더라구요. 전부 한 집에서 언제나 볼 수 있다는걸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어요.


한달쯤 전 부터는 만나는 것도 해주지 않아요.

읽씹은 안하지만 대답은 짧고, 저녁에 집에 찾아가도 없어, 전화를 하면 왠지 가라앉은 목소리에 주말에도 시간을 내주지 않았죠. 집에 찾아가려는건 꾸욱 참았죠.


분명 일하는게 피곤하겠지, 싶은데 마음속으로는 의심과 공포를 감출 수 없었어요. 예전에도 걔가 이럴때마다 큰 일이 있어서 그랬는데, 다시는 그렇게 굴지 않기로 생각했는데... 

하루, 이틀, 일주일. 참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넘어버리니까, 저는...

왜 이렇게 날 안봐주지? 다른 여자가 생겼나? 나보다 중요한게? 아니야, 예전에도 내가 오해했던거였는데. 고등학교때 그 일이 있고나서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했는데. 아, 그래놓고선 졸업할때, 대학교때, 걔 취직하러 다닐때, 한번씩 다 했잖아. 설마 이것 때문인가? 지긋지긋해졌나? 아니야. 그러면 진작에 그랬겠지.

그럼... 한 번 더... 쯤은 괜찮겠지? 사회가 아니라 내가 독점하는거야. 주말동안은 상관없잖아? 아무도 못만나도 회사 짤리진 않을테고. 

나도 알바하면서 돈 열심히 모았어. 나도 열심히 했다고. 그런데 나도 열심히 하는데 왜 안만나주는거야? 돈, 집 같은거 다 중요한데 그것보다 내가 위에 올 순 없는걸까?


나도 돈 이만큼 모았는데, 사고쳐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걔 집에 찾아갔어요. 미리 준비한 열쇠로 문을 열고 걔 침대 위에 앉아 있었어요. 만약 저녁에라도 돌아오면 마음이 풀렸을거에요.

하지만 8시, 9시, 10시, 그리고 11시가 되서도 돌아오지는 않았죠. 의심은 충격으로, 충격은 슬픔을, 슬픔은 계획을 만들었어요. 

사실 계획이라고 해봤자 숨는게 다고, 거기다 얀붕이는 어떻게 아는지 저를 항상 찾아내거든요. 그냥 거실 식탁이랑 의자 뒤에 앉아있던게 다에요.

얀붕이가 집에 들어와서 저를 못알아채고 바로 안방으로 들어갔어요. 여기서 또 충격을 받았죠. 주방에서 식칼...을 꺼내진 않고 미리 준비한 긴 천을 가지고 걔 바로 뒤로 갔어요. 그랬는데도 저를 눈치채지 못하다니, 평소답지 않았어요.

곧바로 침대로 밀쳐내서 넘어트리고, 배와 가슴으로 침대로 밀어붙이고, 한 손으로 양 손목을 구속한 후, 나머지 한 손은 등 뒤로 옆구리에 감은 채로 말을 했어요.


"(대충 흥분이랑 훌쩍임으로 말을 절면서)

너... 너 때문이야. 너 나 이러는줄 알면서 만나잖아. 알잖아.

다른사람이 생긴거야? 아니, 아닌건 알지만. 그래도 내가 이런생각을 하기 전에 날 봐줄 순 없던거야? 이런 생각을 하게 둬서 날 괴롭게 하네?

전에 이러고 다시는 안하기로 했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젠 못참겠어. 널 못느낀지 너무 오래됬어. 그만큼 널 채워야겠어. 어쩌면... 주말동안에도 나와 함께 있자. 아무도 방해 못하게 전화도 꺼버리고 둘이서만.

아, 모르겠어. 그냥 아예 못벗어나게 확실히 남겨놔야지... 내 뱃속에"

그렇게 쉬지 않고 말하고나서 저는 가슴에 얼굴을 파뭍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어요. 익숙하고 감미로운 땀냄새 외에는 별 향이 안났어요. 다행이죠. 그리고 다음은 목, 다음은 귀 밑과 뒤...















퇴근시간, 얀붕이가 일하는 회사.


"야, 얀붕아. 먼저 퇴근할게."

"엉. "

"근데 너 야근 왜이리 많이하냐? 주말 잔업도 계속 자기가 한다고 했잖아."

"돈주잖아."

"내 기억으로만 3, 4개월째다. 안힘드냐?"

"힘들긴 한데 돈 좀 빡시게 모으게"

"? 급한일이야? 돈 땡겨줄까?"

"그런건 아니고, 내가 통장에 0좀 쌓이면 프러포즈 하려고 했거든."

"오. 상남자. 살신성인. 근데 일은 너만 하는거냐?"

"아니. 걔도 알바하면서 돈은 모으고 있는데 역시 나만큼은 안모이겠지, 싶어서.

어차피 서로 합의 하고 만나는거, 돈쓰는거 줄이기로 했는데 요즘은 진짜 피곤해서 통 상대해주질 못했네."

"근데 너 여자친구 집착 심하다며. 그... 얀데레라던가? 걔 못만나다가 그러다 죽거나 감금당하는거 아니야?"

"응. 저번에도 해봤어. 일부러 그러는거야."

"오... 위험한새끼. 좋은...ㅋㅋㅋ 주말 보내고"

"다음주에 보자."

"못볼 수도 있겠지 ㅋㅋ 적당히 해라. 니 일까지 맡기는 싫거든"

"걱정말고."


오늘의 야근도 끝났다. 내일부터 잔업신청은 그만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집가는 길에 나섰다.

손가방 대신 쓰는 에코백에 고히 모셔둔 통장을 펴서 집 근처ATM에 넣고 통장정리를 했다. 


얼마가 들어있을진 이미 알지만 심호흡을 하고 따끈한 통장에 적힌 숫자를 세어본다. 하나, 둘, 셋... 여기에 더해 중고딩때 들었던 적금, 초딩때부터 엄마가 넣어준 주택청약, 고딩때 얀순이가 날 덮치고 나서부터 책을 읽으며 구성한 금융 포트폴리오까지. 

이정도면 때가 되었다. 하는 마음을 품고, 예전에 금은방에서 몰래 맞춘 은반지(한두푼 아껴야하지만 그래도 반지는 있어야지 구색이 맞지 않겠나)를 통장과 함께 가방 얕은 곳에 위치시킨다.


집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거리에서 집으로 들어가기까지 언제 어떻게 프러포즈를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옷을 벗는 중에 얀순이가 침대 위로 밀어 넘어트리는걸 막을 수 없었다. 원래라면 미리 눈치챘을 테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기도 했고.


아, 오늘이구나. 

얀순이가 이리저리 내뱉는 말을 하나 둘 가슴에 간직하면서,

얀붕이는 통장과 반지를

1.꺼낸다?

2.안꺼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