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은 변방의 작은 영토를 다스리는 귀족가의 자식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알렌의 어머니가 귀족가의 시종. 본래 약혼 상대가 아닌, 불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아버지. 가주는 로맨틱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욕망을 알렌의 어머니에게 풀고선 알렌의 어머니와 아들 알렌을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알렌의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버린 자기 자식을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어머니는 홀몸으로 알렌을 키웠다.

그런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친절한 주변 사람들 덕에 알렌은 남을 도울 줄 아는 올바른 사람으로서 자랄 수 있었다.

 

 

 

 

 

 

 

***

 

 

 

 

 

 

알렌에게는 친구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어머니가 홀몸으로 내려왔을 때 어머니를 도운 경비병의 딸 엘리였다.

엘리는 되게 입이 험한 아이였다. 애어른 구분하지 않고 매번 폭언을 내뱉는, 말로는 도적떼보다 더 흉폭함을 자랑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본심은 나쁘지 않았다. 틱틱대면서도 항상 도움이 필요할 때는 손을 내미는 착한 아이였다.

이런 심성을 아는 어른들에게 엘리는 고슴도치처럼 귀엽게 보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눈앞의 것만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에 엘리의 친절함은 엘리의 가시에 찔렸을 때 생기는 통증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한 거였다.

그 결과 엘리의 곁에 다가가는 아이는 없었다. 단 한 명, 선천적으로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알렌을 제외하고 말이다.

 

“너, 왜 혼자 있어?”

 

그런 알렌과 엘리가 그 무엇보다 끈덕한 관계의 소꿉친구가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

 

 

 

 

 

시간이 흘렀다. 낮은 키와 함께 좁은 시야를 가졌던 어린아이는 이제 14살의 청소년이 되었다.

하고 싶은 것을, 각자의 꿈을 찾아 길을 걷는 시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알렌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찾아왔다.

본래 귀족가의 자제였다지만, 아기였을 때부터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알렌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귀티 나는 마차.

그곳에서 내린 기사들과 딱 봐도 높아 보이는 사람은 알렌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 혼돈으로 물들어버린 세상을 구하기 위한 용사로서 여신에게 선택받았습니다.”

 

알렌은 물론, 그 부모님조차 태어나기 이전, 전설과도 같은 세상을 구하는 용사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서나 들을 수 있던 용사로서 알렌은 선택받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알렌은 뭔가 틀린 게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알렌은 힘이 세고 재빠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밭일과 수렵에 해당하는 거지. 괴물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부분엔 해당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알렌의 대답을 예상하였다는 듯 높아 보이는 사람은 알렌이 용사라는 증거를 하나하나 밝혔다.

 

“여신께서 내린 예언에 따르면, 이곳 변방에 검은 머리와 녹색 눈을 가진 소년, 용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알렌은 밤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흑발과 녹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둘 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외모이기에 부정할 수 없었다.

 

“여신께서 내린 축복의 검입니다. 자격을 가진 용사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뽑을 수 없게 되어있지요.”

 

이것이 그 무엇보다 결정적인 증거였다. 알렌이 조금 힘을 쥐자, 태산의 암벽같이 굳건했던 검이 스르륵 빠져 나와 밝은 녹색 빛을 내뿜는 것이다.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로서, 앞으로 용사님은 왕국의 수도에서 특별한 훈련을 받게 되실 것입니다.”

 

조금 이름 있는 귀족이 명령해도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왕을 넘어 신의 예지가 명령한다.

아마, 여기서 알렌이 이를 거부했다간 그들은 설득, 그다음엔 협박을 이어갈 게 뻔했다.

치가 떨릴 정도로 불합리하지만, 알렌으로서는 이를 받아들이는 길밖에 없었다.

 

“출발은 일주일 뒤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남는 것이 없도록, 잘 마무리해주시길 바랍니다.”

 

시골에서 부모님을 도우며, 언제 나와 같은 농사일을 하며 지내길 바랐던 알렌의 인생은 180도 뒤집히고 말았다.

붙잡을 수 없이 흘러만 가는 시간에 점점 고향을 떠날 날이 다가오는 것에 침울해져 침대에서 시간을 보내니, 일주일은 금방 지났다.

으리으리한 기사들에게 충성을 받으며 마차에 오를 즈음 알렌은 문득 떠올렸다.

 

“아, 엘리...”

 

어렸을 때부터 검을 잘 쓰고 힘도 좋아서 같은 나이에 마을을 지키는 사람 중 하나가 된 엘리.

약초를 팔기 위해 잠시 도시로 떠난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였다.

아쉬움과 미안함에 알렌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만……

 

덜컹!

 

이미 마차의 문은 닫혔고, 말들의 발굽과 함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국, 알렌은 친했던 친구와 마지막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

 

 

 

 

 

 

5년이란 긴 시간이 흘렀다. 19살. 어른이 된 아이는 어렸을 적 고른 꿈을 길로 삼아 그것을 걷는 때가 되었다.

용사가 되기 위한 특별한 훈련. 성검의 힘을 끌어 올리고, 그를 몸에 적응시키고, 죽도록 몸을 혹사하는 등 5년이란 시간을 보낸 알렌 또한 용사로서 완성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용사로서 예언에 따라 옛날에 죽은 마왕이 남긴 잔재를 없애 버리는 여정을 떠나는 것뿐.

그렇게 여정을 떠나기 전, 알렌은 앞으로 등을 맡기게 될 동료들과 만났다.

자신처럼 여신의 예언에 따라 여신의 힘을 받고 교회에서 특별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그 탓에 5년 전부터 안면식이 텄던 성녀.

4년 전 어린 나이에 기사단에 들어와 공을 세우고, 현재 검 실력만 따졌을 때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기사.

그렇게 사람도 다 모였겠다. 더, 이상 지긋지긋한 수도에 있을 필요도 없다 여긴 알렌이 나가자고 하려는 순간, 갑자기 기사가 머리를 덮어 쓴 후드를 벗었다.

피를 바라보는 것처럼 붉은 머리가 흩날린다. 그와 함께 드러난 얼굴. 사람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하는 눈도 똑같은 붉은색이다.

여행을 같이 떠날 기사의 민낯. 이제는 추억이나 다름없는 과거의 기억 속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 얼굴을 본 알렌은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오랜만이야. 겁쟁이 알렌. 그 멍청한 얼굴은 5년이 지나도 그대로네.”

 

어린 나이에 기사단에 들어와 수많은 마수와 범죄자를 처벌한, 인간이면서도 괴물이라고 별명이 붙은 기사.

앞으로 자신과 함께 여행할 동료는 5년이란 시간이 지나 어엿한 여성이 된 엘리였다.

 

“엘리..?”

 

알렌은 5년이란 시간 동안 떠올리고 싶어도 떠올릴 수 없던, 고향의 그리움을 다시금 느꼈다. 

 

 

 

 

 

 

 

 

***

 

 

 

 

 

 

 

5년 만에 만난 소꿉친구. 엘리가 여정을 함께할 동료라는 사실에 알렌은 미친 듯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묵묵히 용사로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괴로운 시간이건 뭐 건 악착같이 버틴 이유.

어머니와 고향 사람들 그들이 있는 곳을 지킨단 명목 때문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나 위험한 여정에 제 몸 던지겠다는 고향 친구 엘리에게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렇게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당장이라도 한 대 때릴 것 같은 알렌의 모습에 당황하던 성녀가 어떻게든 말리려는 순간.

 

“아, 듣자 하니 좆 같네.”

 

여태껏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면서 듣고 있던 엘리가 과열된 분위기에 폭탄을 터뜨리는 듯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네 말대로면 시발. 왜 알면서. 존나 뭣도 없는 년이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생떼를 부리냐는 거지?”

 

“알렌 이 개새끼야. 너 지금 내 자존심, 실력, 기사로서 여태까지 휘둘러온 검들을 전부 모욕한 거야 알아?”

 

“그래도..!”

 

화를 내야 할 건 알렌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분위기의 주도권이 엘리한테 가기 시작했다.

이에 질 수 없던 알렌이 이야기를 계속하려는 순간, 서슬 퍼런 소리가 그들이 있는 공간에 울린다.

검집에 있는 검. 상대를 쓰러트리고 죽이기 위한 무기를 엘리가 뽑아 든 것이다.

 

“그놈의 마을. 마을. 무슨 혼자 모든 걸 희생하기로 마음먹은 놈처럼 이야기하는 거 더는 못 들어주겠다.”

 

“기사님. 이게 무슨…….”

 

“성녀님. 저는 제가 여태껏 쌓아온 명예, 공적, 그리고 제 의지까지 모욕당했습니다. 당장 저 빌어먹을 용사에게 결투를 신청해도 정당하다는 거죠.”

 

하지 말라는 뜻으로 걸어온 성녀의 말을 유연하게 받아넘기면서 엘리는 뽑아든 검의 끝을 알렌에게 향하였다.

 

“성검이든 뭐든 빨리 뽑아. 5년 전보다 배는 더 멍청해진 그 대가리에 내 실력을 제대로 새겨 줄 테니까.”

 

알렌은 당황스러웠다. 흘러가는 분위기가 마치 자기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심판을 받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내 이것은 기회임을 깨달았다. 고향 친구를 위험한 길에 빠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그럴 리는 없지만, 검으로 너한테 지면 용사의 여정은커녕 기사까지 다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내려갈게. 이러면 할 생각이 있나?”

 

“물리기 없기다.”

 

당당하게 검을 들고 자세를 잡은 엘리처럼 알렌에게 진다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마왕이 남긴 잔해. 세상을 더럽히는 그 위험한 것들을 처리하기 위한 용사로서 받은 훈련은 평범한 소년을 인간 병기로 만들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졌는데, 친구 하나 고향으로 못 돌려보내면 안 된다. 알렌은 등에 매여져 있는, 녹색 빛을 뿜어내는 성검을 뽑아 들었고.

 

카앙!

 

수십 초 뒤, 성검은 알렌의 손을 떠나 허공을 날았다.

용사로서의 힘.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 성검의 능력을 쓰지 않았다고 한들 5년을 단련한 검이 허무하게 패배를 승낙했다.

알렌으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엘리에게는 당연했다.

애초에 알렌보다 검술이 뛰어난 엘리여서 여행의 동료로 선택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렸을 때부터 몸 쓰는 일에서 엘리가 알렌에게 진 적은 없었다.

즉, 처음부터 엘리는 알렌에게 이겨서 어떻게든 동료가 될 생각으로 결투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물리기 없다고 했다. 병신아.”

 

그렇게 험난한 여정을 떠나는 시작점부터 용사는 패배를 맛보면서 동료를 하나 얻었다.

 

 

 

 

 

 

***

 

 

 

 

 

 

마왕이 세상에 남긴 잔해를 없애는 여행. 처음부터 쓰라린 패배를 맛본 여정을 시작한 지 4달이 지났다.

도적으로 인해 곤란에 처한 마을, 갑작스레 늘어난 괴물들, 마왕으로 인해 생긴 재해 등. 온갖 문제 거리를 없애면서 용사, 알렌 일행은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바로 일주일 전까지는.

마왕이 세상에 남긴 잔해 중 하나. 온갖 끔찍한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탑. 

그것을 부수기 위해 수많은 괴물과 맞서 싸우던 도중 기사, 엘리가 여태껏 없던 큰 부상을 얻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본래 목적인 탑도 성공적으로 파괴, 엘리도 목숨은 건졌다.

 

“무, 뭐야 이거 손이...”

 

말 그대로 목숨은 건졌지만, 여태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큰 부상에 엘리는 후유증을 얻고 말았다.

바로 검사로서 가장 중요한 손이 심각하게 떨려오는 수전증.

더, 이상 용사의 동료이자 기사로서 이 여정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쐐기가 엘리에게 박히고 만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 만에 자신을 의미하는 모든 걸 잃었다는 것을 엘리는 부정하였다.

 

“아니야. 아니라고. 멀쩡해 난 아직 멀쩡하단 말이야!”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서 애써 떨리는 손으로 검을 붙잡고, 이를 휘두르려는 엘리.

그녀가 그때 선보인 검은 물 흐르듯이 움직여 매섭게 적을 처단하는 칼날이 아닌, 술에 취한 망나니의 것에 더욱 가까웠다.

 

“알렌님. 아무래도 더, 이상 엘리님은 여정에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옆에서 이를 함께 바라보던, 어두운 안색의 성녀가 하는 말에 알렌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더, 이상 엘리는 이 여정에 함께 할 수 없고, 그녀가 인생을 바치면서 만든 검까지 부서지고 말았다는 것을.

처음 그녀가 동료로서 함께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말에, 검에 이기지 못한 약해 빠진 알렌 때문에 말이다.

 

“미안해...”

 

그렇게 소중한 고향 친구의 인생을 망쳤다며. 알렌은 자책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알렌, 그게 무슨 소리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엘리의 붉은 눈동자와 목소리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린다.

알렌은 이미 늦어버릴 대로 늦어버린, 여행이 시작될 때 해야 했던 말이자, 방금 전 엘리에게 한 말을 번복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엘리. 더, 이상 너는 함께 할 수 없어.”

 

“시발!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씩씩. 어깨까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정도로 격하게 성을 내는 엘리.

당장이라도 사람 죽일 듯한 날카로운 눈매와 함께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감정에 알렌은 마치 칼에 찔린 듯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지금, 그녀를 이렇게 만든 건 전부 내가 약했기 때문이니까. 알렌은 4달 전에 자신이 부족했던 만큼의 확고함을 더해 말하였다.

 

“더, 이상 검을 잡을 수 없잖아. 그런 몸으로 앞으로의 일을 버틸 수가 없어. 네 목숨이 위험하다고.”

 

“아니라고 말했잖아! 나는, 나는 아직 더 싸울 수 있어. 내가 없으면 병신 같은 네 뒤를 누가 지키는데?!”

 

‘성검이든 뭐든 빨리 뽑아. 5년 전보다 배는 더 멍청해진 그 대가리에 내 실력을 제대로 새겨 줄 테니까.’

 

여행을 시작할 때. 당당했던 엘리와는 정 반대. 거의 매달리듯, 애원하며 현실을 부정한다.

힘든 것이겠지. 여태껏 살아온 인생. 쌓아온 것들. 자랑스러워했던 점이 모두 사라졌다니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렌은 엘리에게 그러한 현실을 인지시켜야만 했다.

그것이 그녀가 바라지 않는다 해도, 그 때문에 나를 미워한다 해도.

드러낸 상처에 약을 뿌려서 소독하는 것처럼 필요한 일이다. 

동료가 되겠다는 그녀를 말리지 못한 알렌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시끄러!”

 

콰악! 알렌의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듯 엘리는 손을 뻗어 알렌의 멱살을 잡아 강제로 말을 끊는다.

항상 엘리의 정론에 알렌이 아무 말도 못 한 것과는 반대. 

한 번쯤은 바랐던 장면에 알렌은 통쾌함이 아닌 속이 쓰리는 것을 느꼈다.

 

“그 제 역할 못 하는 눈 크게 뜨고 제대로 보라고. 내가 못 싸운다고? 그럴 리가 없어. 몇일만 있으면 다시 검을 잡을 수 있어. 아무렇지 않게 돌아올 수 있다고.”

 

엘리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이 살짝 조인 알렌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옷감을 통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의 흔들림. 알렌의 옷을 붙잡은 엘리의 오른손이 그녀의 눈동자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성녀, 아니스의 말대로 검을 쥐고 싸울 수 있는 손은 아니었다.

 

“……알렌. 왜 아무 말도 안 해..? 그러네. 내가 잘못 봤다. 좀만 더 기다릴게. 라고 왜 말을 안 하냐고!!”

 

침묵이 긍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본인의 재기불능을 부정하는 말이 알렌의 입에서 나오길 바랐던 엘리는 화풀이를 하듯 알렌의 멱살을 흔들었다.

숨이 약간 막혀올 정도의 압박. 그에 불구하고 알렌은 꿋꿋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든 말하라고. 제발. 부탁이야. 제발...”

 

이내 부상자라는 말에 어울리듯 엘리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진다.

그와 함께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서 그 무엇보다 서글프게 우는 엘리. 그 모습에 알렌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미안... 정말로 미안해...”

 

 

 

 

 

 

***

 

 

 

 

 

 

“아, 알렌님.”

 

울다가 지쳐 쓰러진 엘리를 침대에 누이고 나오는 길. 부상자인 엘리를 돌보기 위해서 피곤한 건 매한가지인 몸을 이끌고 나온 성녀 아니스와 알렌은 마주쳤다.

알렌은 곧바로 고개를 숙이면서 정중히 말을 건네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스님도 충분히 힘드실 텐데 이렇게 무리를 시켜서.”

 

“아, 아니에요. 동료가 힘든 데 미천한 제 손이라도 필요하면 빌려드려야죠. 그보다, 그 옷은?”

 

아니스의 물음에 알렌은 고개를 들었다. 성녀라는 말이 어울리는 새하얀 피부와 함께 하나의 꽃을 닮은 아름다운 외모. 은발의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가진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곳.

방금까지 엘리가 안겨서 울어댄 탓에 젖어버린 알렌의 옷이었다.

 

“더는 함께할 수 없다는 말에 엘리가 많이 슬퍼해서 말입니다. 품에 안겨서 운 탓에 옷이 좀 젖은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아, 그래. 이거라도 입으세요. 알렌님.”

 

어딘가 묘한 눈길로 눈물 자국을 바라보던 아니스는 손에 들고 있던 물수건이 담긴 통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온갖 마법 처리가 되어서 추위와 더위를 버티게 해주는 망토. 그것을 알렌에게 건넨다.

순간, 아니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챈 알렌은 곧바로 손을 뻗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게 까지 하실 필요는...”

 

“젖은 옷으로 돌아다니면, 안 좋아요. 엘리 님보다는 아니지만, 알렌 님의 상태도 좋지는 않으니깐요.”

 

아니스는 완고했다. 마치, 이 망토를 두르지 않으면 길을 비켜주지 않겠다는 듯 알렌의 앞을 계속 가로막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망토를 건네받은 알렌이 이을 몸에 두른다.

그에 만족했는지, 아니스는 빛이 나온다는 착각이 드는, 성녀라는 이름에 충실한 미소를 짓는다.

 

“다른 분들을 챙기시는 것도 좋지만, 본인의 상태도 신경 써주세요. 알렌 님은 이 세상에서 단 한 분밖에 없는 용사님이시니깐요.”

 

“아, 네...”

 

물통을 들고 엘리의 방으로 들어가는 아니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알렌은 묘한 느낌에 머리를 긁적였다.

 

“용사는 분명, 나 말고도 과거에 몇 명 있었을 텐데.”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알렌. 하지만, 이내 자리에서 벗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아니스의 말대로 알렌 또한 부상을 입은 몸. 충분히 피로에 찌들어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휴식을 취해야 했다.








얼음 불 써야 하는 데 전개 막혀서 단편 쓰려다가 또 나눠짐. 난 뭐 장편병이라도 걸린 건가. 

이미지는 게임 엘소드의 캐릭터 엘리시스 1차 전직인 다크 나이트임. 이거 처음 쓸 때도 저거 생각하고 썼으니 저렇게 생겼다고 보면 됨. 이름이 비슷한 것도 아마 그런 듯.

언제나 구린 똥글 봐주는 얀붕이들아 고맙다. 그리고 얼음 불은 좀 더 늦어질 거 같아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