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눈을 떴다. 몽롱해진 정신으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위화감이었다. 넓었던 병실이 좁아졌다. 가습기에서 나오는 수증기로 인한 수분감과, 꽃병에 꽂힌 꽃의 은은한 향기가 나지 않았다. 비싸보이던 가구도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가 없었다.


 "얀순아?"


 불안을 떨쳐 내려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 순간, 내 자신이 무언가로 포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요?"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나는 얀순이의 병실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병실에서 깨어나지 않았는가.


 "누구 없어요?"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누군가 있기를 기도하며 나는 애타게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헛수고였다. 이제는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가? 무슨 이유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얀순이의 사생팬이 저지른 일인가? 하지만 그녀가 있는 병실은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어 언론에도 노출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수로? 도대체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무엇보다도 얀순이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나를 납치한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최소한 나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기억은 없다. 그러면 역시 내가 얀순이랑 가깝게 지낸 것이 문제였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발소리의 음량이 커져감에 따라 내 가슴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전해져 오는 느낌으로 추측컨대 몸집이 큰 사람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몸이 구속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부디 대화가 통하기를 기도하며 문이 열리기만을 한없이 기다렸다. 발소리가 계속해서 커졌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쓸데없이 크게 느껴졌다. 발소리가 멈췄다. 쇠가 건조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열렸다. 잔뜩 긴장을 한 내가 맞이한 상대는,


 "안녕하세요, 선배?"


 언제나 그대로의 미소를 띄우고 있는 얀진이었다.




 "야, 얀진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지의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닌, 익숙한 후배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너무나 다행이었다. 그녀가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한 민소매 차림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나는 바보같을 정도의 순수함으로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서 소리쳤다.


 "구하러 왔구나!"


 "……" 


 "나 지금 묶여있어서 그런데, 혹시 풀어줄 수 있어?"


 얀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특유의 신비한 미소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부터였다.


 "얀진아?"

환희의 감정은 사라지고 서서히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얀순이가 있는 병실을 아는 존재. 나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존재. 그녀가 등장했던 시점에 항상 느껴졌던 위화감. 그녀가 건넸던 커피를 마시고 잠든 나……. 모든 점과 점의 연결은, 명백히 단 하나의 사실만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야?"


 "후후, 이제 이해하셨나 봐요. 선배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도 안 돼……."


 "하지만 이게 현실인걸요."


 "얀순이는? 얀순이는 어떻게 됐어?"


 "쉿."


 그녀가 내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듯 내 입술을 막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칼날같은 싸늘함이 담겨 있었다.


 "정말……이 지경이 되어서도 얀순 선배부터 생각하시는 건가요? 대단한 사랑이에요, 정말."


 "……"


 박수를 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무섭도록 섬뜩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얀순이에 대한 얘기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어떻게 옮긴 건데? 아무리 날 기절시켰다고 해도……."


 "다른 분들의 도움을 조금 받았죠."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얀진이는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녀는 의자에 묶인 내 앞에서 다리를 쭈그려 앉았다. 그녀는 원하는 먹잇감을 손에 넣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민소매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새하얀 살결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선배가 너무 얀순 선배랑 가까이 지내서, 예요."


 "뭐?"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저는 선배가 그렇게 자상한 남자인줄 몰랐어요. 그런 사랑의 말도 속삭일 줄 알고."


 "뭐……?"


 "앗, 죄송해요. 제가 좀 엿들었거든요. 두 분의 대화."


 마치 사소한 장난을 치고 나서 용서를 구하는 철없는 딸처럼,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그것만이 아니예요. 제가 재밌는 거 하나 보여드릴까요?"


 도청. 이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짜잔!"


 선물을 개봉하는 것처럼 그녀가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약간 뿌연 화면에 어두운 공간이 찍혀 있었다. 드넓은 방, 큰 침대, 더없이 익숙한 공간이었다.


 '병실……!'


 "어때요? 제 선물, 감쪽같았나요?"


 온몸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일을 계획했던 거지? 내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건 말건 영상은 재생되기 시작했다. 곰돌이가 바라본 시점에는 멍청하게 퍼질러져 있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잠옷으로 갈아 입은 얀순이가 나를 보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뭐야, 벌써 잠들기나 하고…….]


 뾰루퉁한 표정으로 그녀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포박되어 있는 와중에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은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얀순이의 표정에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하아…….]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걱정의 한숨은 아니다. 안타깝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가 내 얼굴을 응시한다. 무언가를 갈구하듯 그녀의 입이 뻐끔인다.


 [응……으응…….]


 어딘가 아픈 것처럼 앓는 소리를 낸다. 까닭 모를 그녀의 신음소리가 내 말초신경을 흥분시킨다. 그녀가 자신의 비부로 손가락을 향한다.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져 온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내 눈은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그녀의 자위행위를 선명하게 녹화했다.


 [응하앗……응응…….]


 그만하라는 말이, 멈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홀린 듯이 화면을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행위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나의 감정이 서서히 고조된다. 그녀는 자고 있는 내가 뒤척이는 것에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에 집중한다. 마치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듯이. 본 적 없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나 역시 느낀 적 없는 흥분을 느꼈다.


 "그만해! 지금 뭐 하는 거야!"


 자랑스럽게 도촬한 영상을 보여 주고 있는 그녀를 향한 분노였는지, 아니면 그 영상을 보고 흥분해 버린 자신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성이 끊어질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얀진이는 그런 나를 재미있다는듯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선배도 남자였네요! 영상을 보던 선배의 표정, 조금 야했답니다?"


 "왜,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일상과 괴리된 일에 머리가 어질어질한 나와는 달리, 얀진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하게 서 있다. 독특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녀는 명백히 정상을 벗어난 범주의 인간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네가 이런 짓을 해서 얻고 싶은 게 뭐냐고!"


 "……?"


 얀진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 외침은 공허하게 울릴 뿐, 그녀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이런 관계였다.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항상 그녀로부터 시작되는 관계였다. 무언가 조금씩 어긋난 관계. 마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퍼즐 한 조각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예요? 선배를 사랑하니까요."


 "뭐?"


 이번에 이해하지 못한 쪽은 나였다.


 "좋아한다가 아니예요. 사랑해요. 머리털부터 발톱 때까지 전부."


 그녀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잔혹할 정도로 진실된 사랑의 눈이었다.


 "……선배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예전부터……."


 혼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그녀의 눈에, 일순간 가련한 슬픔이 지나간 것 같았다.


 "지금은 선배가 잠깐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만, 제가 꼭 제대로 이끌어 줄게요."


 지금껏 그녀가 해왔던 행동들이,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는 건 얀순 선배 쪽이에요. 소꿉친구에다가 기억상실인데, 선배만을 기억한다니. 애초에 저는 경쟁 상대에 끼지도 못하잖아요."


 그녀가 덜덜 떨고 있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지방의 감촉이 얼굴 전체에 전해졌다.


 "그래서 저도 이럴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해 주실거죠, 얀붕이 오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걱정 마세요 선배.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앞으로 선배가 제 말을 잘 듣기만 한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그녀는 나를 완전히 지배했다고 생각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돌아올테니까 허튼 생각 하지 마세요. 얀순 선배의 야릇한 영상이 퍼지는 게 싫다면, 얀순 선배의 인생이 산산조각나서 부서지는 게 싫다면 말이예요……."


 서큐버스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협박을 남긴 뒤, 그녀는 문을 닫고 조용히 사라졌다.




 전부 내 잘못이었다. 얀진이를 경계하지 않았던 탓에 얀순이가 피해를 입었다.


 '설마 곰인형에 그런 장치를 해놨을 줄은…….'


 도청기와 몰래카메라를 설치해서 선물한다니,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하지 못 할 대담한 수법이었다.


 '……자책해 봤자 늦었어.'


 스스로를 아무리 탓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어떻게라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크윽……!"


 나는 몸에 힘을 넣어 의자에 붙은 채로 조금씩 문에 가까운 벽면으로 향했다. 아까 얀진이와 대화하면서 눈여겨본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벽에 유난히 날카롭게 튀어나와 있는 못이었다.


 '제발, 닿아라……!'


 다행히 그녀가 나를 꼼꼼하게 포박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어떻게든 의자와 붙어 있는 테이프를 저 못으로 잘라내기만 한다면 될 것 같았다.


 "윽!"


 한 번에 많은 거리를 움직이려다 몸이 중심을 잃고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손으로 얼굴을 방어하지 못한 탓에 쓰라린 감각이 일었다. 통증에 아파할 겨를은 없었다. 나는 의자에 붙은 채 못을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기어 갔다.


 '얀순이를, 만나야 해……!'


 이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봤자 문이 열리지 않을 수도 있고, 얀진이에게 들켜버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가만히 앉아서 얀진이 생각대로 모든 일이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스스로가 밟혀서 꿈틀거리는 지렁이에 불과할지언정 발버둥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허억, 허억……!"


 몸을 뒤집어 다리와 의자를 붙이고 있는 테이프를 못으로 찢었다. 다리가 자유로워진 뒤에는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곧바로 나는 의자 뒤로 묶여 있는 구속을 풀었다. 생각보다 허무하게 내 몸은 자유를 되찾았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고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얀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그녀 혼자만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나는 길지 않은 복도로 빠져나와 출구로 보이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 앞에 놓인 풍경을 마주했다.


 '여, 여긴…….'


 병원 근처에 있는 골목.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하늘을 보니 벌써 저녁이 가까워진 듯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나온 곳을 뒤돌아보니, 한참 전부터 망해 있던 식당의 간판이 자리잡고 있었다.


 '얀진이는 어떻게 이런 곳을…….'


 폐업한 식당으로 위장한 곳에 이런 지하실이 있는 것도, 그녀가 이런 공간으로 나를 데려온 것도 신기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궁금해 할 여유가 없었다.


 '빨리 가야 해……!'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부여잡고 전속력으로 병원을 향해 달려갔다.




 끊어질 것 같은 숨을 억지로 들이쉬며 달려가는 사이 나는 생각했다.


 내가 도망친 게 들키면 어떡하지?


 그 사이에 얀진이가 영상을 유포해 버린다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좋을까?


 우선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하나?


 이대로 얀순이를 만나러 가도 괜찮은 걸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지?


 '……답은 하나밖에 없어.'


 우선 얀순이를 만나야 한다. 그녀를 만나서 내가 당한 일을 모두 알려야 한다. 그녀와 함께라면 어떤 해결책이라도 떠오를 것이다.


 설령 내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녀를 지킬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얀순아!"


 한달음에 달려간 병실에는 다행히도 그녀가 있었다. 벌써 퇴원할 준비를 마친 모습이었다.


 "……얀붕아."


 "다행이다. 어제 혼자 잠들고, 또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


 "……응."


 나는 거칠게 숨을 고르다가, 문득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 무슨 일 있어?"


 "……"


 불안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내게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내가 방금까지 갇혀 있었던 공간과 비슷한 회색 방에, 침대와 이불로 보이는 것이 일부 찍혀 있었다.


 "이게 뭐……."


 얀순이는 말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화면이 움직이고,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한 명은 얀진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당연하게도 나였다.


 '뭐……야.'


 절망적인 예감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항상 적중했다. 기절해 있는 나와 멀쩡한 정신의 얀순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같은 침대에 있었다.


 [오빠, 좋아?]


 [응, 좋아.]


 얀진이가 내 고간의 자신의 고간을 문지르며 농염한 목소리로 내게 묻고, 나는 녹음기로 녹음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얀붕아……너 내가 잠든 사이에 어디 갔었어? 그리고 뭐 했어?"


 하지만 얀순이는 내가 이 영상 속에서 기절해 있었다는 걸 모른다. 이 영상이 내가 기절한 사이 얀진이의 독단으로 찍힌 거라는 걸 모른다. 그녀가 내 핸드폰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이 영상을 편집해서 보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치부가 찍힌 영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 이런 걸 나한테 보냈어? 응? 왜?"


 나는 충격에 빠진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를 피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곰인형은 여전히 생생하게 눈을 뜨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허튼 생각 말라는 건……이런 뜻이었나.'


 헛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나한테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벽에 박힌 못 따위를 고려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아니지? 이거 너 아니지? 이 여자도 내가 봤던 그 후배 아니지? 그치?"


 나는 변명은 커녕, 그녀의 절박한 현실 부정에 동의조차 할 수 없었다.


 "제발, 설명해 줘. 이게 뭔지, 왜 나한테 이걸 보냈는지……응?"


 "……너 바보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얀순이를 향해 나는 무심한 척을 하며 말했다.


 "이미 볼 꼴 못 볼 꼴 다 봤고, 옛날에 너한테 차이기까지 했는데, 아직도 내가 너한테 감정이 남아 있을 줄 알았어?"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게 뻔한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아주머니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잠깐 어울려 줬던 것 뿐이야."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처음부터 너한텐 관심도 없었어."


 이게 얀진이가 원하는 거라면, 얀순이를 지키기 위한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기억을 못 찾은 건 아쉽네. 그럼 잘 퇴원해. 연락하지 말고."


 거짓말에 약하다는 거짓말. 그녀 앞에서는 솔직한 모습만 보이겠다는 나의 맹세는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말았다.


 "왜, 왜 그랬어?"


 차갑게 돌아서는 나를 향해 얀순이가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한텐, 너밖에 없어……너 말고는 다 필요 없어……. 근데 왜 날 버려……버리지 마……제발……."


 나는 듣지 못한 척 했다. 하지만 발걸음까지 멈추지 않을 수는 없었다.


 "부탁이야……가지 마……얀붕아……."


 애처로운 그녀의 흐느낌을 뒤로 하고, 나는 병실을 나섰다.




 "잘 생각했어요. 수고했어요."


 병원 밖에는 얀진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공허함과 무력감만이 가득했다.


 "이제 선배는 저만의 것이에요."


 그녀가 나를 상냥하게 끌어안았다. 나를, 얀순이를 망가지게 한 장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온기는 따스했다.


 "세상 모두가 선배를 버려도 상관없어요. 제가 그 모두를 대신해 줄게요."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듣고 싶었던 말을, 가장 증오스러운 이에게 듣고 있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저랑 영원히 행복해요, 선배……."


 나는 한동안 서 있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그녀의 어깨에 한참을 기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