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이른 아침부터 최악의 기분이었다.


 찌뿌둥한 삭신. 흐리멍덩한 머리. 머리맡에서 쉴 새 없이 울어대는 휴대폰까지.


 아무런 자극 없는 평화로운 기상을 선호하는 나로선 앓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성이었지만. 


 아직 못 갚은 대출이자를 생각하니, 의식은 자연스레 말똥말똥해졌다.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잡은 뒤, 어그러진 청광빛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오전 7시. 


 출근 시간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지만, 메신저 아이콘에 쌓인 메시지 수를 보니, 늦장은 어림도 없어 보였다.


 부재중 전화가 76건. 안 읽은 메시지 250통.


 어쩐지 알람을 맞춘 기억이 없는데도 휴대폰이 끝없이 울리더라니.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내심 그러지 않을까 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니, 착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후우····."



 음울한 숨을 내쉬며, 메일함의 메일을 차례대로 읽어 내렸다.


 발신인의 정체는 바로 얼마 전에 연수를 마친 우리 회사의 새내기.


 잠수와 탈주가 빈번한 이 업계에서 드물게 심지가 곧고 끈기도 있어, 여러모로 눈여겨보고 있던 인재였지만.


 절박하고 언뜻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 메일 내용으로부턴, 입사 당시의 그 당찬 모습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인은 넌지시 짐작이 갔다.


 십중팔구. 뭐든 맡겨만 달라는 신입의 요구에 어제부터 내 대신 맡겼던 '그 업무' 때문일 테지.


 아주 잠깐 일손을 돌린 것이라 별 탈 없을 줄 알았는데. 하루를 못 가서 이 사달이 날 줄이야. 판단이 안일했다.


 부우웅. 부우웅. 또릉.



「시, 실장님! 흐흑! 윽! 으흑!」


"그래, 알았어. 잘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울음부터 그치고 말해····."



 전화를 받자마자, 어린아이처럼 훌쩍거리는 신입을 차분하게 어르고 달랬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제 막 학생 티를 벗은 사회초년생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을 맡겼던 것 같다.


 당장 나조차도, 그걸 상대할 때마다 온몸의 진이 다 빠져버릴 지경인데, 무엇 하나 익숙한 게 없는 신입은 오죽했을까.


 관두겠다는 소리가 안 나온 것이 용했다.


 

"메일 봤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는 대충 알겠으니까. 현장 일은 나한테 맡겨두고, 이쪽으로 와서 사무 업무나 마저 봐줘."


「흐읏! 흐끅! 네, 네엣!」


"고생했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죄, 죄송! 윽! 흐극! 죄송합! 우웃····.」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계속 울먹거리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시달린 모양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뒤, 소파에 뉘어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실로 간만에 발 뻗고 잠에 든 건데.


 덜어낸 육체적 피로만큼, 정신적 피로가 새롭게 쌓이니, 마음이 개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이전보다 더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나를 죽여라. 그냥····."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무심코 읊조린 혼잣말.


 그 뒷맛은 담뱃재를 한 움큼 집어삼키기라도 한 듯, 씁쓸하고 텁텁했다.




◈◈◈




"어서 와. 매니저. 기다리고 있었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한 사람에게 이 가증스러운 낯짝을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외형만 놓고 본다면, 우아함과 고상함을 겸비한 더 없이 아름다운 미소다. 


 그 점 하나만큼은 나 역시도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정작 내용물이 저 모양이니, 모처럼의 근사한 미소도 한낱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이번만 특례로 친히 집까지 모시러 와줬다. 바깥에 차도 세워놨어. 자, 빨리 준비해."


"무려 하루 만에 보는 건데, 만나자마자 일 이야기라니. 이건 좀 많이 섭섭한걸? 가볍게 커피 한잔할 시간 정도는 괜찮잖아? 특별히 자네 것도  타줄게."


"캔 커피 사 올 테니. 차에서 마시든가."


"자네는 운이 좋아. 때마침 최상급 원두를 손에 넣었거든. 이참에 같이 한번 마셔보자고."


"필요 없어."


"걱정하지 마. 자네가 어떤 커피를 선호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분명, 블랙에 설탕 7스푼이었지. 아마? 그 나이에 너무 달게 먹으면 몸에 안 좋으니, 될 수 있으면 좀 줄이는 게 좋을 거야."


"····."



 내 말을 개무시하며, 유유히 커피를 타러 가는 원수의 뒷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봤다.


 흥에 겨운 콧노래 소리. 그 리듬에 발맞춰 하늘거리는 은빛 머리카락.


 그 모든 것들이 듣기 거슬리고, 보기 거슬렸다.

 

 어쩌면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그녀의 차림새 때문일지도 몰랐다.

 

 골반까지 내려오는 펑퍼짐한 후드티 아래에는 그 어떤 의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덕분에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하얗고 두툼한 허벅지 살이 맞물리고 쓸리는 게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 좀처럼 눈 둘 곳을 찾기 힘들었다.



"····옷은 좀 똑바로 입지?"


"응?"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바깥에서 일할 땐, 굳이 말 안 해도 본인이 알아서 잘하니까. 딱히 주의를 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본인의 자택이라곤 해도, 손님을 앞에 두고 반나체나 상태로 서성이는 집주인의 행태를 보고 있으니, 도무지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성희롱이라고 뭐라 하면, 그러라지. 


 설령 이 일로 호감도가 떨어진다 하더라도, 오히려 바라든 바였다.



"아항~ 보아하니, 내 옷차림을 신경 쓰고 있는 거구나? 후훗, 안심하도록! 보다시피 아래쪽도 똑바로 입고 있으니까. 자, 봐."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 핀잔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린 그녀가 제 손으로 상의를 들쳐 올렸고.


 그로 인해, 펑퍼짐한 상의가 감추고 있던 새하얀 속살이 만천하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천만다행히도, 바지는 제대로 갖춰 입고 있었다.


 문제는 고작 바지를 입고 있단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배꼽 주변까지 옷을 올렸다는 부분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뒤, 아예 고개까지 비틀었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광경은 안검 안쪽에 짙게 눌어붙어,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다.


 발자국 없는 눈밭처럼 새하얀 복부. 골반의 라인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매혹적인 돌핀 팬츠.


 한시라도 빨리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었지만, 내 안의 야속한 남성성은 그걸 전력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당혹스러웠다. 그 이상으로 불쾌했다.


 눈앞의 저걸 한시나마 여성으로 느꼈다는 게.



"아하하! 재밌군 재밌어~ 아무리 집이어도 그렇지. 상식적으로 후드티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리가 없잖아. 보기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로군. 우리 매니저는~♪"


"아가리····."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한창 잡념을 다스리자고 있자, 기고만장한 웃음소리가 신경 머리를 긁어댔다.


 외간 남자 앞에서 제 웃통을 깐 게 뭐 그리 즐겁다는 건지.


 아무래도 하도 오랫동안 선머슴 짓을 하고 다녀서, 여자로서의 수치심이 죄다 증발해 버린 게 아닐지 싶다.



"후훗, 만일 내 몸에 흥미가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나도 나의 이 완벽한 몸매를 함께 찬미할 동지가 때마침 필요하다고 생각한 참이니까. 자네 정도라면 충분히 믿을만하지! 아, 참. 팬들한테는 비밀이야♪"


"어,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


"별말씀을!"



 내 추태를 비웃는 조롱은 내린 커피가 먹기 좋게 시그러질 무렵이 돼서야 비로소 잠잠해질 수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최고급 원두를 썼다는 게 무색하게도 커피 맛은 그저 평범했다.


 내가 막입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평소에 먹는 싸구려 커피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맛은 좀 어때?"


"그저 그런데."


"하핫, 신랄하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 붙여줬던 신입이랑 무슨 일 있었냐."



 잡설을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간략한 자초지종은 이미 신입한테서 전해 들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양측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했다.



"아니? 딱히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후우····."



 차마 욕을 할 수 없어서 그냥 한숨만 쉬고 말았다.


 그래, 이번에도 시치미를 뗄 작정인가 보구나.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자세한 사정은 신입한테서 이미 듣고 왔다. 듣자 하니, 신입이 무슨 말을 해도 입도 벙끗 안 하고, 계속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면서? 예정된 스케줄도 전부 멋대로 캔슬하고 말이야."


"····."



 신입이 문자로 전한 그간의 자초지종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내가 하는 말에 일일이 말꼬투리를 잡아댈 땐 언제고, 다짜고짜 묵언수행이라니.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괴롭힘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번 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가 지나쳤다. 



"아침 댓바람부터 울면서 전화 오더라. 자기가 뭔가 심기를 건드려 버린 것 같다면서."


"흐응~ 그 아이와는 서로 아침부터 연락하는 사이구나. 내 연락처는 진작 차단했으면서."


"말 돌리지 말고, 묻는 말이나 대답해. 그리고 그건 네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랑 문자질 해대니까 그런 거잖아."



 매일 아침마다 본인 셀카를 수백 장씩 찍어 보내고, 별 영양가도 없는 연락을 그 두 배 가까이 해대는데, 차단 안 하고 배길까.


 오히려 그런 악질적인 괴롭힘을 무려 2주 가까이 버틴 게 기적이었다.

 


"여성에게는 차별 없이 신사적으로 구는 것이 신조라고 하지 않았나?"


"그야 물론이지. 이 세상의 모든 여성의 내 잠재적인 팬이나 다름없으니까. 그 아이에게도 최대한 많은 배려를 해줬지."


"꼬박 하루를 병풍 취급하는 게 배려라고?"


"그럼, 배려고말고."



 틀렸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혹여나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대타도 일부러 외모가 수려한 여자로 뽑아 붙여줬던 건데.


 혹시, 나 빡치라고 일부러 저러나.


 그간의 행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게 무서울 따름이었다.



"일단 오늘 하루는 내가 다시 일 봐 줄 테니까. 내일부턴 다시 둘이서 잘 좀 해봐. 너도 알다시피, 요새 우리가 일손이 미치도록 부족하거든? 너 말고도 내가 봐줘야 되는 인재가 많아."


"····."



 미간을 주무르며, 차분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내 본래 직책은 어디까지나 실장. 


 그녀의 매니저 일은 단순히 일손이 부족해 임시로 겸업한 업무가 엉겁결에 연장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번 업무 인계만 잘 풀리면, 빽빽하기 그지없는 업무 일정에도 약간의 숨구멍 정도는 확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 그럴 터였다.


 

"좋아♪"


"휴····."



 상큼한 미소가 곁들여진 승낙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그래도 이걸로 한시름 덜었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한참은 더 실랑이를 벌였을 텐데. 


 내키지 않아 보이긴 해도 승낙은 한 걸 보면, 그래도 일말의 양심 정도는 남아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하루치 지랄을 다 해서 성이 풀렸던가.



"진작 그렇게 나오면, 좀 좋····!"



 휘청. 


 하지만 바로 그때, 선명했던 시야가 느닷없이 새하얘지고, 몸을 곧추세우고 있던 힘이 송두리째 뽑혀 나갔다.



"크윽!"



 우당탕! 쨍그랑!


 지지대를 찾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봤지만, 힘이 실리지 않는 손으로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서, 설마····!"



 서서히 흐려지는 시야에 바닥에 엎질러진 커피가 보였다.


 모든 정황이 단 하나의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커피에····!"



 지금 당장이라도 끊어지려는 의식의 끈을 붙잡으며. 간신히 목을 울렸다.


 하지만 물에 빠진 듯 먹먹해진 귀구멍으로부턴, 자신의 심장 소리 말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 기력을 쥐어짜 내,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고대하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여인이 나를 음험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



 군침을 닦아내듯, 제 입가 주변을 더듬는 가느다란 손가락.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