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너 이 씨발새끼... 그거 내려놔. 

 그냥, 당장 내려놔 이 새꺄."

여자가, 무선 송수신기를 들고 있는 남자를 회유한다.


"Hey Sis. 왜이렇게 호들갑이야.

 이게 그렇게 비싸고 중요한거라도 돼?

 웬일로 내가 월척을 건졌구만."

남자는 송수신기를 한번 던졌다가, 되받는다.


"지금 농담할 때 아니라고!!

 내려놔. 그 리모콘 나한테 주고.

 이번에도 그냥 순순히 잡혀가자.

 내가 형량 작게 나오게 해줄테니까..."


"아니, 티비 리모콘처럼 생긴 이게 뭐라고 다들 그렇게 난리야.

 누르면 무슨 금은보화라도  하늘에서 뚝 떨어져?"


"누르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누르지 말고.

 그대로, 천천히, 나한테 주는거야. 알았지?

 착하지...착하지..."


"진짜야? 미다스의 리모콘인가?  어디."


"아앆 이 새끼 눌렀어?

 이 씨발새끼. 니가 지금 뭔 짓을 한지 알기나 해? 아아아아아앍!!!!"


여자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절규한다.


"왜왜. 평소에 Sexy 하고 이지적인 아가씨가 왜 이러셔. 이게, 뭐라도 돼?"


 남자는 리모콘 버튼을 두세번 더 누른다.


"몰라...이 씨발새끼...망했어...다 끝났다고!!"


"뭔지 설명좀 해보라니까. 이게 도대체 뭔...

오...Holy.... God damn'it...."


이윽고, 사이렌이 울린다.

대피방송이 도시 전체에 울려퍼진다.

도심의 하늘 저 멀리서, 소련 시절 만들어진 핵미사일이 날아온다.


주방위군 미사일 요격체계가 핵미사일을 공중에서 폭발시킨다.

 핵분열로 발생한 EMP가 도시를 감싸고, 정전이 일어난다.


남자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살아남은 미사일 한 발이, 도심에 낙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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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대 갈등의 시대 '였다'

종교로 갈등하고,

성별로 갈등하고,

이념으로 갈등하고,

나이차이로 갈등하던 인류는 결국.

인류가 인류를 대상으로 무차별전쟁을 일으켰다.


동시다발적으로 범죄자들이 들끓는다.

테러리스트와 다를바 없는 자들이, 각자의 신념과 정의를 가지고.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죽이고

노인을 죽이고, 어린아이를 죽이고

이단을 죽이고. 광신도를 죽이고

명품을 훔치고,

금붙이를 훔치고

현찰을 훔치고

자동차를 훔친다.


범죄율이 치솟는다.

시민들은 자신과 이해관계가 맞는 범죄자들을 오히려 지지한다.

경찰들이 할 수 있는 치안활동을 아득히 벗어난다.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자들이 군벌을 일으키고, 거병을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범죄를 일으키는 빌런이 되기도 하지만,

기존의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 자경단을 꾸리기도 한다. 


시민들은 그들을 옛 만화에서 이름을 따와, 히어로라 부른다.


 "아니, 세상에 누가 그게 모스크바행 플루토늄 특급 배송 시스템인줄 알았겠냐고"

 

"제발 그 입좀 닥쳐.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뭐.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남자의 어이없는 실수로 세계는 핵전쟁을 시작했다.

100년 전 과학자의 예언대로

차기 세계대전은 분명, 나뭇가지와 돌도끼로 할 것이다.


인류 문명은 완벽하게 소실되었다.


"너... 그게 뭔 줄 알고 훔친거야?"


최강의 히어로라 불린 여자가, 남자에게 질문을 한다.


"아니. 철통같이 지키길래, 뭐 비싼건가 했지."


남자는 빌런이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잡범이다.

머리도 좋지 않고,

하는 일도 어수룩하고

힘도 성인 남성 평균치고

특별한 능력도 없다.


헌데, 끈질기다.


꼴랑 잡범수준인 그를 세계 최강의 그녀가 쫒게 만든 이유가. 그 끈질김에 있다.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어떻게든 손에 넣는다.

목표가 된 사람은, 죽일 때 까지 쫓아다닌다.


유치장에 잡혀들어가고

코뼈가 부러지고

감옥에 수감되고

총에 맞아도.

숨을 쉰다면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군부대엔 어떻게 들어간거야?"


대통령이나 들고다닐법한 휴대용 핵발사기가 동네 마트에 있었을리 없다.

51구역에 준하는 군사보안시설

첨단 경비장치와 수많은 군사인력이 상주하고.

접근하는 거수자를 살상하도록 훈련받은 초병,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엔 드론같은 무인장비가 배치되고

각 게이트마다 필요한 보안카드와 비밀번호.

영화에서 볼 법한 홍체, 지문인식은 보안성이 떨어지기에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남자는 혈혈단신으로 요새를 함락시킨 것이다.


"군부대에서만 통하는 마법의 단어가 있지, 계집애들은 몰라요 그걸"


"한 번만 더 씨부리면, 어금니를 두 개쯤 뽑아주겠어"


"간부다. 문열어"


"...뭐?"


"진짜라니까? 적당히 군복 차려입고, 계급장에 말똥 3개 박은 다음에. 


간부다. 문열어


그려면 다 비켜준다니까?"


"시발...말도 안돼.  보안카드는? 비밀번호는?"


"카드는 놔두고 왔다니까 경비초소장이 빌려주고. 

 비밀번호는... qwerty? password? 1q2w3e?

 군부대 비밀번호야 다 고만고만하지"


"시발...시발..."


망할 만 했다.

여자가 바라보기엔 세상은 망할 만 했고, 잘 망했다.

지금까지 그딴 새끼들을 위해 일해온 사실에 부아가 치민다.



“자자. 지나가버린 과거따윈 잊어버리고.”


“그게 니 새끼 입에서 나올 소리냐?! 어?! 어?! 어떡할꺼냐고오!!!”


폭발한 여자가, 남자의 멱살을 부여잡고 뒤흔든다.



“어쩔 수 없잖아, 여기 반경 100km 내에서 살아남은건 너랑 나, 단 둘뿐인걸”


남자의 목 근육이 머리를 전혀 지탱하지 못한다

여자가 흔드는데로 좌로, 우로, 앞으로, 뒤로 흔들리길 반복한다.

힘이라도 주어서 버티다간, 오히려 경추가 부러진다.

흐름에 맡겨 위기를 넘긴다.


핵전쟁의 긴박한 순간에서, 여자가 지킬 수 있었던건 이 남자, 단 하나뿐이다.


가까운 방공호의 위치를 상기하고 있던 것도 여자 뿐이고

때문에, 드넓은 대피소에 안착할 수 있던것도 남자와 여자뿐이다.


여자가 남자를 땅바닥에 내팽겨친다.


방공호 첫째 날, 먹을 수 있는 물자, 전력, 통신장비를 확인한다.

C-레이션과 건조식이, 수 십명이 몇 년은 먹을 수 있는 분량이 비축되어 있다.

전기시설과 통풍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통신장비는… 어떠한 지역도 연결하지 못한다.


둘째 날, 

남자가 계속해서 여자에게 말을 건네지만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식수와 처리수도 넘쳐날 정도다.

번갈아가며 샤워를 하고

드넓은 방공호 끝과 끝에서 잠에 든다.


셋째 날, 대피소의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가이거 계수기는 아직 고점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한다.

여자가, 생각없이 문을 열기위해 다가간다.


“안돼. 열지마.”

남자가, 여자와 문 사이를 가로막는다.


“무슨 소리야, 누군가 살아있다는 거잖아”


“이런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살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래서, 그냥 내비두자고? 미쳤어?”


“문을 열면 너도, 그리고 나도, 모두 죽는다. 가이거 계수기를 봐”


“씨발 그럼 어쩌라고, 나보고 저 소리를 무시하고 가만히 있으란거야?”


“...”


“씨발!!...씨발씨발… 저 사람들, 니 새끼가 죽인거라고. 알고나 있어?”


“자자, 쓸데없는 과거는 덮어두고”


“미친 소시오패스새끼, 네 엄마가 니 낳고 치킨수프를 마시긴 했냐?”


“...”


“씨발…나보고 도대체 어쩌라는거야!!!!”


남자가, 여자와 방폭문 사이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의 앞에서 날뛰기만 한다.

성을 내고, 욕하고, 소리지르고, 남자를 탓한다.


남자는, 자신의 등 뒤에서 울리는 문의 진동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여자에게, 이 소리가 조금이라도 작게 들리도록.


나흘 째, 여자는 다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어제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남자는 바람이나 무너진 돌무더기가 문을 두드리던 거라고 변명한다.

역시나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레째, 통신시설은 아직도 괴상한 백색소음을 내뱉는다.

C-레이션의 종류가 단 한가지

건조식도 한 두가지.

영양학적 측면에선 전혀 문제가 없지만.

정신력이 깎여나간다.



열다섯날 째

혼자 계속해서 떠들어대던 남자도 이제는 조용하다.


서로 어떠한 말도 나누지 않는다.

C-레이션도 각자가 알아서

화장실과 생수도 각자가 알아서

잠을 자는 것도 각자 알아서

할 필요가 없는 통신대기도 하고 싶은 각자가 알아서.


고독이 힘든건 여자도 매한가지다.


국가에서 정식으로 승인 받진 않았지만, 

여자도 자경단의 일원으로 도시의 치안을 지키고 범죄자들과 싸웠다.


범죄자에 잡범이면서도 세계 최악의 테러리스트인 남자와

친하게 지내라는건 무리다.


그래도, 저 남자와는 자주 마딱드려 싸웠고

알음알음, 이름과 개인사정도는 알고 있다.


소매치기를 하고, 하이재킹을 하고, ATM을 털고

보석을 훔치고, 사람을 쏘고, 기물을 파손하고


도망가는 남자를 붙잡으면

남자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여자에게 내뱉으며 기회를 노린다.


자기가 어릴 땐 알래스카에 살았다던지

어제 먹은 3번가 포크 커틀릿의 맛이 죽여줬다던지

아무래도 위층에 사는 젊은 여자가 마약에 손을 댄 거 같다던지

새로 나온 디스코 팝이 자기 취향에 딱 맞다던지


등 뒤로는 묶인 수갑을 풀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도

앞으로 보인 얼굴에선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건네는게 저 남자다.



이제는 저 남자마저도 말이 없다.

과연, 이 세계멸망의 이유가 저 남자때문일까?


본래는 경찰이 해야하는 치안 업무를

자신이 자경단을 자처하면서 나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밖에서 숯검둠이가 되어버렸을 사람들은

이미 수많은 이유로 서로가 치고받고 싸우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그들에 비하면 오히려 건전한 축에 속한다.


남자의 말을 빌리자면

냉전이 끝난지 한참이나 되었는데도

소위 ‘플루토늄 특급 배송 시스템’의 목적지가 왜 아직도 모스크바로 설정되어 있을까?

빨갱이들은, 왜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핵무기를 쏘아보냈을까?


펜타곤 가장 깊숙한 곳 지하벙커나

백악관 대통령실에 있는게 어울리는 핵발사장치가

왜 한낮 주방위군 소속 군사시설에 보관되어 있을까?


비밀번호는 또 왜 그따구일까?

최첨단 경비를 자랑하던 시설이

그런 허접한 방법에 뚫렸을까?


비단, 이게 남자의 잘못만이긴 한가?


여자가 지금까지 감방으로 보내버리거나

수면제보다 효과가 좋은 12게이지 산탄을 

뱃속 한가득 먹여서 재워버린 범죄자들이

그 주방위군 캠프 연병장 2열종대로 꽉꽉 채우고도 남는다.


그들은 남자보다 똑똑하고, 힘도 강하고, 성질도 사납다.

남자가 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엔 누군가가 훔쳐서 눌렀을지도 모른다.


‘데우스 볼트’ 라던가

‘알라 후 아크바르’ 라던가

버튼을 누르며 외치는 문구가 남자에 비해 멋드러졌을 것이다. 


여자는 왜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자문한다.


고독함에 몸부림치다 못해

남자에게 말을 걸기위한 구실을 찾는건가?


세상에 남은게 아담과 하와마냥 남녀 한짝이 오도카니 남아선

남자에게 관심이라도 끌고싶은건가?


어떻게든 남자를 착하게 만들어서

자신이 말을 걸 수 있는 정당성을 만들고 싶은건가?


자기합리화를 하는건가?



그것도 아니면…


꼴에 자경단이라고

지키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이 다하지 못한 책무때문에 

1.8m 눈앞에서 버튼이 눌리는걸 막지 못한 사실에서 도망가기위해


꼴랑 버튼 하나 눌렀을 뿐인 남자에게 그 모든걸 덮어씌우고

자기합리화를 하는건가?

 

여자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남자를 노려본다.


남자는 아까부터, 한참동안이나 캐비닛을 뒤진다.


도대체, 뭘 하는거….


“찾았다! 공무원 놈들 센스 하고는, 만화라도 볼래?”

장장 2주만에,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방공호는 최소 수개월에서 수년을 보낼 걸 상정하고 만들어진다.

식량, 식수, 위생, 공기정화, 산소, 의약품

인간이 먹고, 자고, 싸는데 필요한 그 모든 물품이 구비되어 있다.


물론, 비좁은 공간에서 지루함을 달랠 수 있는 무언가도.

구비되어 있는게 상식이다.


남자는, 한물 간 여아대상 마법소녀 만화 테잎을 여자에게 내민다.


“...그게 뭔데?”


“Holy. God! 정말 이 만화를 모르는거야? 사내새끼인 나도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니까. 그게 뭔데 그러냐고”


“만화잖아 만화! Manga!, Anime! Comic! 어릴 때 안봤어?”


“......안 봤어”


 “젠장, 부모님이 YMCA 이사님이라도 하셨어?”


“제발 그 입좀 닥치자. 응?”


여자는, 방금까지 대화에 대해 한참이나 고민하던 자신을 저주한다.

남자와의 대화에 금방 진절머리가 난다.


“난, 너의 어린 시절을 바꿔야할 의무가 있어.

 당장 통신기기 앞에 앉아서 이 만화를 시청하도록 어른이!

 세상에, 만화영화 하나 안 본 삶이라니. 그러니까 저리 성격이 꽉 막혔지”


“그래, 알았어, 왼쪽과 오른쪽중에 골라,

난 자비로우니까, 어금니 딱 하나만 뽑을게”


 


“힘내. 핑크… 힘내라고”


스무날 째. 

여자가 티비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자자. 아가씨, TV를 시청하실 땐 멀찍이 떨어져서 보아야해요.

 건조식도 그만 내려놓고.”


“어어. 알았어. 좀만 이따가”


“지금 과자를 그렇게 먹으면, 나중에 밥은 어떻게 먹으려구요.

 TV 그만보고, 여기 책이라도 읽자?”


“잠깐만. 지금 중요한 장면이란 말야”


남자가 어린아이를 달래는 부모마냥

여자를 디스플레이 한참 뒤편으로 질질 끌어낸다.


그 와중에도, 여자는 건조식을 감자칩마냥 씹으며, 시선을 영상장치에서 떼지 못한다.


“자꾸 그러면, TV 꺼버린다?”


“아 왜. 지금 한창 재밌단말야”


이 여자가 정녕 자신과 동년배의 어른이 맞긴 한가?

수 많은 범죄자들을 죽이고, 잡아넣은 그 자경단이 맞긴 한가?

혈혈단신으로 군대에 필적한다 불리던, 세계 최강의 히어로인가?


이제는 남자의 머리가 아프다.


“운동도 좀 하고, 몸도 움직여야지

 그러다 배나온 아저씨처럼 늙으려고?”


“괜찮아, 내 체중과 체형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아”

여자는, 건조식을 입으로 집어넣는다.


“하아...됐다”


남자는 여자를 말리는 걸 포기한다.

여자의 옆에 앉아 만화영화를 같이 시청한다.


핑크머리 여자애가 마법을 가장한 폭력을 행사한다.

마법봉 주변으로 여러 효과가 생기더니, 그것으로 나쁜 악당의 두개골을 쪼갠다.


다른 악당이 기습을 가한다.

노랑머리 동료가 핑크머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방패로 내세운다.


노랑머리가 쓰러진다.

쓰러진 동료를 핑크머리가 감싸고 운다.


힘내라던가, 지지말라던가, 격려의 말을 핑크머리에게 남기고

노랑머리의 팔이 축 처진다.

눈을 뜨지 않는다.


핑크머리는 눈물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발, 내딛는 걸음이 무겁다.

이내 핑크머리 주변을 스파크가 감싼다.

내딛는 발걸음에 대지가 움푹 파인다.


악당이 연달아 공격을 날린다.

투사체가 핑크머리의 몸에 채 닫기도 전에 녹아 사라지거나

속절없이 튕겨나간다.


악당이 공포에 몸서리친다.

자신이 가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을 주인공에게 가하지만

핑크머리는 피하지 않는다.


공격을 그대로 받고서

밀려나지 않는다.

버틴다.


[이 때를 기다렸어!]


핑크머리의 눈이 밝게 반짝인다.


사정권 내에 드디어, 악당이 들어온다.

자신의 최대출력을

자신의 최대의 기량을

여신님이 내려주신 마법봉에 모두 담아서

나쁜 악당에게 힘껏 휘두른다.


단순한 물리적인 공격인데

미사일이 날아온 것 마냥 폭발이 생기고

빛의 기둥이 용솟음친다.


폭심지 한 가운데 위치한 악당이

분자단위로 쪼개진다. 소멸한다.

분자마저 가해진 에너지를 버티지 못하고

플라즈마화 되어 흩어진다.


“...내가 지금 보는거… 마법소녀 맞지? 드래곤볼 아니지?”


“정말 멋져! 여자들의 우정. 힘. 그리고 마법이란!”


여자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다.


마법…이라.

요새 여아용 만화영화의 추세가 이런가?


분명 남자가 기억하는 계집애들용 마법소녀는

사랑과 치유의 힘으로 악당을 정화하고

용서와 평화가 이야기의 주된 주제다.


이런 화염과 찬란한 이펙트보단

꽃잎과 하트무늬가 효과로 날아다니는게 더 어울린다.


여자는 흐르는 눈물을 살짝 닦아낸다.


“물리력으로 저렇게 폭발을 일으키려면 얼마나 힘이 세야 할까?

 나도 할 수 있을까?


호승심이 오른 여자가, TV 앞에서 주먹을 휘두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남자의 귓가에도 들린다.


“자자. 위험하니까. 격한 운동은 하지 말고”


남자가 여자를 어른다.

3일전에만 해도 대화 한마디 없던 원수들이

이제는 TV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서른 다섯날 째


"정했어, 밖에 나가면 가장 먼저 할 것"


여자는 오셀로 판 위에 흑돌을 놓는다. 

우르르, 남자의 백돌이 뒤집어진다.


"뭐. 가고싶은 데라도 있어?"

남자가 자신의 백돌을 들고 고민한다.


"비디오가게에 갈거야! 그리고 저 시리즈가 더 있는지 찾아볼거야"

여자가 두 눈을 반짝인다.


구비되있던 만화영화는 이미 모두 시청했다.

아직 보지 않은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도 많지만 여자에겐 별로 흥미가 없다.


젠가나 오델로같은 보드게임을 꺼내

남자와 시간을 보낸다.


"그래, 나가면 한 번 해보자."


가이거 계수기의 수치가 낮아진다면 말이지…

남자는 쓴 웃음을 짓는다.


이론적으로, 방사능 낙진은 2~4주면 가라앉는다.


고 한다.


가이거 계수기가 망가진건가

아니면 발사된 핵무기가 너무나 많은 것일까?


한 달이 넘게 지나가는데.

변하는 게 없다.


C-레이션은 질리디 질리고.

건조식은 딱딱하고

물은 넘쳐나는데, 물 말고 마실 음료가 없다.

그나마, 지루함을 달랠 놀잇감들이 다양한 것이 다행이다.


"넌, 뭐 하고싶은 거 없어?"

여자가, 남자의 희망사항을 묻는다.


"글쎄…"


"하고 싶은게 있을거 아냐, 

 그래서 돈을 모은거 아니였어?”


“알래스카에… 돌아가려고”


“하. 여기까지 와서 또 거짓말이냐?”


“진짜라고. 어릴 때 알래스카에서 자랐단 말이다.”


“...정말?”


“보통 생각하는 얼음만 있는 땅덩이가 아냐.

 관목림이 있고. 야생동물이 살고

 끝없이 펼쳐진 평야.

 개썰매, 쇄빙선, 연어잡이.

 한 겨울에 마시는 코코아 한 잔… 


 워낙에 시골이라 핵이 떨어졌을리도 없고

 설령, 떨어졌다 해도. 그 넓은 지역이 모두 오염시킬 순 없어.”


“도대체 거기서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든거야?”


“어릴 땐 몰랐지. 그 곳이 파라다이스이란걸.

 영화관도 없고, 춥기만 하고, 겨울에 먹는 거라곤 냉동보존식을 푹 고아낸 것 뿐이고…

 도시로 가면, 모든게 잘 풀릴 줄 알았어”


“...”


남자는 자신의 돌을 내려놓지 않고 감상에 잠긴다.



“넌, 가족이라든가 없어?”


“없어. 혼자야”


“Stop kidding me, YMCA 이사 직함을 달고 있는 어머니는 어디있고?”


“하…제발, 개소리좀 집어 치워”


“갈데 없으면, 나랑 같이 알래스카로 가자”


“...여기서 거기까지 어떻게 가려고”

여자는 남자의 허튼 소리가 영 미덥지 않다.


“캐나다 지나서, 북쪽으로만 똑바로 가면 돼.

 나머지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여자애 하나 정돈, 먹여살리는데 문제 없다고”


그래, 이 남자는 원래부터 그랬다.

계획이랄 것도 없고, 막무가내다.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하고, 그때 그때 임기응변만 해나간다.

큰 뜻이나 포부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소박한 꿈을 위해 주변 모든 것을 망가뜨리기 일쑤다.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끈기 하나 만큼은 세계 1등이다.

저렇게 말을 뱉었으면, 시체라도 알래스카에 당도할 것이고

여자를 굶기지 않을 것이다.


저 남자는, 그런 남자다.


“집에 TV하고 비디오 정도는 나왔으면 좋겠는걸”


여자는 남자의 제안을 부정하지 않는다.


“가는 길에 쇼핑몰이라도 털어야겠는데?”

남자는 그제서야, 자신의 돌을 내려놓는다.



—-


60일 째


“심심해!!!!”

여자가 방공호 바닥을 이리 저리 굴러다닌다.

지루함에 온몸을 베베 꼰다.


가이거 계수기가 드디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직, 레드존을 벗어나지 않은 게 흠이다.


“끝나지 않는 일요일 주말이구만. 

 이리 와서 크리스마트 특선 영화라도 보자고”


남자가 개봉한지 수십년은 된 영화 비디오를 흔들어보인다.


“... 별로, 재미 없어보여”


여자는 고개를 돌려 방공호 벽면을 바라본다.


“애냐, 만화는 순식간에 다 봤으면서”


“그렇다고 내 나이보다 많은 영화를 진득하니 볼 생각은 없네요”


“참 내… 그럼 주말엔 뭘 하고 지냈던거야?”


“출동. 너 같은 놈들 잡으러”


“쉬는 건?”


“글쎄다. 범죄자들 안 나오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지”


물론, 남정네 같은 범죄자들은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계속 출몰했다.

쉬는시간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릴 땐 도대체 뭘 하고 논거야?”


“유리벽 바깥을 나온지 얼마 안됐거든”


“....유리벽?”


“몰라. 어릴 때부터 실험실 안에 있었어.

 흰 가운을 입은 아줌마가 매일 매일 건강 검진을 하고

 신체 능력을 확인하고, 싸우거나 총을 쏘는 법에 대해서 배우고


 머리에다 전극을 꽂아넣거나, 이상한 맛이 나는 약을 마셨지”


“무슨 개조인간도 아니고…”


“맞아, Super Human Project. 줄인 건 아니지만 캡틴 아메리카 작전”


“하하, 분명 만화 좀 본 Geek 새끼가 기안한거구만?”


“뭐야, 캡틴 아메리카가 만화 이름이였어?”


“젠장, YMCA 이사님이 네 부모가 아니었다는 게 너무나 놀랍다”


“하아… 화낼 기력도 없다.”


“헌데, 너만한 여자는 남자를 통틀어서도 너뿐이잖아. 실험이 중단되기라도 했어?”


“힘이 좀 세져 봤자 결국은 인간이라고, 고릴라가 될 순 없었지.

 수천만 달러를 들여서 만드는게 고작 미스터 올림피아를 나가던 로니 콜먼에도 못미치니


 프로젝트는 그대로 폐기.

 시제품이자 시작품이자 유일한 양산형이

 지금 방공호 지하에서 바닥이나 뒹굴러 다닌다."


 여자는 대자로 누워 기지개를 편다.

히어로로 불리고 있지만, 정작 사람 됨됨이는 빌런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운 잡범인 남자에게도 밀린다.


시험관에서 만들어지고, 배양된 인간이라 부모도 없다.

남자처럼 고향이라 할 만한 장소도 없고

어린 시절의 추억도 없다.


지금까지 죽인 사람의 수도 남자의 수십배는 된다. 

그들이 범죄자라 해도 사람이 아니지는 않다.


오히려, 부모도 가족도 인성도 없는 괴물이 실은 여자가 아닐까?


"흐음. 그럼 디즈니 영화도 안봤겠군"


"그건 또 뭔데?"


"인어공주. 백설공주는 들어 봤어?"


"뭐…불공정계약에 물거품이 되거나, 왕위계승권을 다투느라 계모와 암투를 벌이는 거? 나도 시사 상식은 있다고"


"젠장. 내 에리얼은 물거품이 아니라고! 계집애가 되가지고 디즈니 프린세스를 모르다니!"


"이리 와, 오늘에야 말로 니 거시기를 뽑아 계집애로 만들어주겠어"


여자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올린다.

남자는 방공호 구석에서 방어자세를 취한다.


—-


[끼이이이익]


남자가, 조심스레 방공호의 문은 연다.


인류 멸망 97일 째.

여자와 데이트를 즐긴지 100일이 되기 전에 

남자와 여자는 방공호를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가이거 계수기가 드디어 Safe 존을 가리킨다.


토양의 오염이 사라지진 않았겠지만

공기중으로 방사능 낙진을 들이마실 위험은 없다.


“자. 정하자고

 여기서 C레이션이나 먹으면서 버틸지

 아니면 밖으로 나가서 안전한 지역을 찾을지”


남자는 다시 한 번, 여자의 의중을 묻는다.

방공호만큼 안전한 지대를 찾기는 힘들다

심지어 식량도 많고, 전기도 들어오고, 안전한 식수까지 구비된 장소는 그리 많지 않다.


낙진이 가라앉았다 한들, 위험하긴 매 한가지다.


“...넌 어쩔건데?”

여자는, 평생을 남의 결정대로 행동했다.


메뉴얼에 따라 성장해왔고

메뉴얼에 따라 범죄자를 잡아들이고

메뉴얼에 따라 행동방침을 정한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남자의 의견을 묻는다.


“말했잖아, 난 내 고향, 알래스카로 간다. 

 너도 같이 갈래?”


 “그래 좋지.”


배낭에 가이거 계수기와 여분의 식료품을 쑤셔넣는다.

남자가 앞장서서 가는 길을 여자가 따라나선다.


지도도 없고, 길도 잘 모른다.

남자의 말대로, 북쪽의 방향을 곧장 따라 올라간다.


가다 보면 캐나다가 나올 것이고, 

캐나다를 지나면 북극이든 알래스카든 나올 것이다.

만약, 방위를 잘못 잡아 캐나다 북동부에 당도하더라도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러시아 빨갱이들 쪽으로 걸어가면 된다.


남자는 무계획적이고 허황된 이야기를 계획이랍시고 늘어놓는다.

여자는 영 못미더운 남자를 믿고서 뒤를 따른다.





“자 5번 고속도로를 따라서 시애틀을 지나면 캐나다 밴쿠버가 나올거야

 그 뒤엔, 바닷가를 따라서 쭉쭉쭉 올라가면 되겠지”

 

 남자가 얄팍한 지리상식을 토대로 장황한 계획을 연설한다


“그래, 우리가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에 있고

 벤쿠버까진 적어도 1,500km를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만 빼면 완벽하네.”


“열심히 걸으면 한 달 안에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자동차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이래선 걷는게 더 낫지 않겠어?”


남자는 3달 전 자신이 만든 참상을 관망한다.

미국 서부는, 동부 못지 않게 최첨단 산업이 집약되어 있다.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각종 IT산업, 생명공학, 군수산업 등등등…


중부 이이오와의 콘벨트 라고 멀쩡할 리 없겠지만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폭삭 주저 앉았다.


멀쩡한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찾아보기가 힘들고

듬성듬성 보이는 시체들은 완벽히 방사능 살균이 되어서 

미이라마냥 쪼그라져 있다.


바퀴 네짝이 온전히 붙어있는 자동차라곤 없고

그나마도 EMP때문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수동 쉐보레 픽업트럭이나 멀쩡할텐데

그런 건 아이오와주에 가서 찾는게 훨씬 빠르다.


남자는 여자와 장장 5,000km의 도보데이트를 시작한다.


물론,

가는 길에 오염되지 않은 생수도 찾아야 하고

잠을 잘 수 있는 장소도 몰색해야하고

먹을 수 있는 식량도 찾고

미국 답게, 호신용 총기도 챙겨야 한다.


“그럼, 비디오가게부터 들릴까?”

남자는 만사를 제쳐두고 여자의 소원부터 챙긴다.


“제발… 그건 나중에 찾아도 되니까”

자신이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우선순위란게 있다.


콘크리트 잔해들을 해쳐나간다.

하루에 50km를 걸어야 1달 뒤에 꼴랑 벤쿠버에 당도하는데

이래선 30km나 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관심가는 물품은 모두 찔러본다

마지못해 여자가 우선순위를 정한다.


“자, 머저리. 오늘 밖에서 방사능 낙진이랑 뒹굴거리고 싶지 않으면

 총이랑 잠 잘곳부터 찾아야해”


“넌 3달만에 나온 바깥이 상쾌하지도 않아?

 난 막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그거 방사능 때문이야, 가이거계수기 대봐”


“재미없기는 정말”


“제에에발, 여기서 알래스카까진 5,000km는 된다고!

 우린 오늘 꼴랑 5km도 못갔는데!”


“자자, 화내지말고, Take it easy”


“으으으으으으… 너 이새끼 두고 봐”


여자는 남자를 보며 이를 바득 바득 간다.


경찰차에서 먼지가 묻은 샷건과 12게이지 탄약을 찾는다.

플라스틱 생수병을 가게마다 보이는대로 챙긴다.


군데군데, 방사능으로 살균된 시체들이 즐비하다.

남자도 여자도, 애써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여자다!"


"씨발 여자다!"


"물과 음식도 있다!"


"찢어, 죽여!"


너댓 되보이는 생존자들.

무장 상태도 빈약하고

영양 상태도 빈약하고

위생 상태도 좋지않고

복장에 통일성도 없고

우호적이거나 협력적이지도 않다.


“와… 병뚜껑 버리지 말고 모아둘걸. 진짜로 저런 게 나오네”

남자는 약탈자 무리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한다.


“병뚜껑? 또 이상한 영화이야기야?”

약탈자들의 제 1 목표물이 된 여자는, 산탄통의 펌프를 잡아당긴다.


상대방은 5명, 아군은 2명.

아군의 무장은 방금 찾은 샷건 하나와 12게이지 3발.

그리고 지천에 널린 콘크리트 돌멩이, 철근.


쪽수도 딸리고, 무장도 밀린다.


“있어, 옛날에 유행한 게임”


남자는 Geek마냥 구구절절히 설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치기 싫으면, 머리카락도 안보이게 잘 숨겨”


평범한 상황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복을 하거나

부리나케 도망가야 한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아니, 여자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말이지.


“살살해, 이제 집어넣을 구치소도 없다고 Lady”


남자는 세계 최강의 히어로를 뒤에서 응원한다.




“우웩. 이런 걸 먹는다고?”


전리품 목록이라곤

.357 권총탄 4발

리볼버 한 정.

플라스틱 병에 들은 탁한 물.

생물체의 단백질과 지방을 다져서 굳힌 덩어리 몆 개….


여자는 부디 삐져나온 저 더듬이가

바퀴벌레가 아니길 바란다.


“역시, 세상은 망해버린걸까?”

남자는 머리가 짓이겨진 채로 움찔거리는 시체를 툭툭 쳐본다.


그래도 대도시 한복판이다.

정부가 존재한다면, 생존자들을 규합하고 이끌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점조직의 소규모 약탈자 무리가 대뜸 나타나진 않는다.

설령 강도단이 활개친다 하더라도

군대나 자경단에게 제압당하는건 순식간이다.


군대의 힘은, 무장상태가 아니라 머릿수와 대열에서 나온다.

기관총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가 나온 뒤에도

군대에서 제식훈련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가 말해줬잖아, 쓸데없는 생각은 덮어두고. Right?”


“그래, 우리도 우리 갈 길을 가야지”


꿈과 낙원이 펼쳐진 남자의 고향 알래스카를 향해서

어쩌면 1년이 걸릴 지도 모르는 5,000km의 대장정을 나선다.


해가 뜨면 물자를 수색하고, 탐색에 나선다.

총탄, 무기, 날붙이, 통조림, 과자, 초콜릿, 음료수, 술, 담배

지도, 라디오, 옷가지 등등


깨끗하고 쓸만한 물품은 모두 그날의 임시 거처로 모은다.


필요한 건 챙기고

필요 없는건 버리고

먹을 수 있는건 먹는다.


체력을 온존해서, 알래스카를 향한다.


가끔 만나는 생존자들은 되도록 피해서 도망간다.

신뢰할 수 없는 군식구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고

애초에 적인지 아군인지 조차 알지 못한다.


덤벼오는 약탈자 무리는 여자가 손수 으깬다.

그들이 가진 무기와 물자는, 다음에 만날 약탈자 무리를 죽이는데 쓰여진다.


남자라고 먹을 것만 축 내며 뒤에서 노는것은 아니다.


기어코 비디오방에서 찾아낸 마법소녀 시리즈의 극장판 DVD를 여자앞에 내민다.

당연히 구동시키려면 DVD플레이어와 TV와 가장 중요한 전력이 필요하다.



“Hey, 알래스카엔 이런거 절대 없다고, 지금 챙겨놔야지!”

쓸모도 없는 잡동사니를, 여자를 위한 거라며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집어넣는다.



쓸데 없는 장난감을 가져오고.

여자와 잡담을 나누고

여행의 목표를 정하고. 일정을 조율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요한 일은 여자가 하고

남자는 뒤에서 응원이나 하는 듯 하지만

어쨌든 남자도 가만히만 있지는 않는다.


겨울에도 춥지않고

여름에도 덥지 않은 캘리포니아의 4계절


남자와 여자는 하루에 30km도 채 못가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여자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


군데군데 핵무기가 폭발한 크레이터가 보이는게 흠이지만.

말로만 들었던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끝없이 펼쳐진 농경지.

바다만큼 커보이는 호수들…


트럭커들을 위한 모텔에서 잠을 자고

군데군데 멈춰진 차와 시체가 널브러진 도로를 걸어나간다.


조금만 일이 틀어지면

약탈자들 무리에게 총을 맞고 비명횡사하거나

오염된 음식을 먹고 탈이 나거나

그마저도 없어서 탈수와 탈진으로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자는 걱정이 되지 않는다.


시끄러운 남자가 항상 옆에서 지껄인다


“어떻게된 되겠지”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고”


“자자, 쓸데없는 과거는 덮어두고”


“이게 얼마나 맛있는건데, 정말 안먹어봤어?”


“저어~기 보이는게 뭔지 알아?”


“짜잔, 오늘 저녁은 쌩으로 굶을 예정이랍니다.

 대신, 내일은 사슴고기를 먹을거야”


“알래스카에가면, 팔뚝만한 연어가 있는데 말이야”


“음…신경쓰지 말자고 친구”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것 같다.

무슨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5번 고속도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레딩을 지나

포클랜드를 지나

괜시리 길을 돌아 주립공원을 통과하기도하고

시애틀로 들어가야하는걸

킹스턴으로 잘못 들어서서 남자와 싸우기도 한다.


바다를 건너서 가느냐

걸어서 돌아가느냐 옥신각신하다가

쪽배를 타고 여자를 위협하던 약탈자 무리를 여자가 말 그대로 갈아버린다.


쪽배를 수선하고 남자가 노를 젓는다.

시애틀로 들어가려는데 가이거계수기가 요동을 친다.


하는 수 없이 쪽배를 타고 시애틀 북쪽 끝자락에 내린다.


지도가 있고 지리를 안다면 이대로 알래스카만을 향해 배를 몰면 되지만

구태여 무리하지 않는다.


한달 반이 넘게 걸려서,

캐나다 국경을 넘는다.


“비버는 너네나 가져라. 빌어먹을 메이플시럽들아!”


남자가 괜시리 소리를 친다.


“저스틴 비버? 괜찮지 않았어?”


여자가 기억하는 저스틴 비버는, 

식당가나 잡화점에서 자주 틀어주는 노래를 부르던

반반하게 생긴 남성 가수다.


“오, Please, 아니라고. 차라리 레드넥 새끼들이 문샤인에 취해서 부르는 노래를 듣겠어”


“왜 이래, 그냥 가수일 뿐이잖아”


“아니, 걘 아냐, 적어도. 미국에서는 아닐거야.”


아직,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지나가지도 못했다.


알래스카로 향하려면

워싱턴주 두배만한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종단해서

그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두배만한 유콘 주를 가로질러야한다.


갈 길은 까마득하고, 날씨는 추워진다.


그나마 유콘 주를 건너 알래스카에 당도한다고 해도

지금까지 건너온 주 모두를 합한것 만큼 넓은 알래스카에서

남자의 이름도 모르는 고향 동네를 찾는건 불가능하다.


그래, 저 멍청이 남자는 알래스카에서 자기 고향이 어딘지도 모른다.

알래스카 전체가 지 고향인 것 마냥 떠들어대는데

그곳이 텍사스주의 두 배나 된다는 걸 알기나 할까?


“자, 난 주변에 정찰하고 올테니까.  넌 여기 모텔이나 지키고 있어”


여자는 레이더에게서 빼앗은 단발 엽총을 어깨에 맨다.


“왜, 아무도 없었다며. 괜찮겠지”

남자는 먼지구덩이 침대에 몸을 던진다.


2인 1조 행동은 기본이다.

한 명이 위험에 빠졌을 때, 구해줄 사람이 없다.

헌데 여자는 항상 정찰을 혼자서 나선다.


가정집을 개조한 2층짜리 숙박업소.

오늘 거처로 정한 이 모텔이 안전한지 수색을 한 것도 여자 혼자다.

.

안전이 확인된 방에서만 기거하고, 다른 방문을 열지도 못하게 한다.

혹여나 부비트랩이 있다면, 여자라도 감당할 수 없다.


“그건 니 생각이고, 꼼짝말고 짐정리나 하고 있어”


여자는 도로 너머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향한다.

커다란 사슴…엘크라도 잡으면 좋다.

휴대가 가능한 보존식은 끽해야 3일분이다.

고기가 남더라도, 가방 뒤편 장대에 걸어서 말리면 된다.


애초에 신선한 고기를 먹어본지가 언제인지!


자신들을 노리는 약탈자 무리는 없는지

우호적이고 협조적이더라도, 방해가 될 생존자 집단은 없는지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 숲을 꼼꼼히 확인한다.




“으아아아아아앙”


“...”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


함정일 수도 있지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여자는 인기척을 숨기고, 조심스레 소리의 진원지로 향한다

 

미국의 주요 우방국인 캐나다라고, 핵전쟁에서 살아남은건 아니다.

하지만, 방사능에 쩌들어 발도 못들이던 시애틀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벤쿠버에도 방사능에 살균된 미라들이 즐비하긴 매한가지지만

이곳은 사람 사는 흔적보다 울창한 숲과 나무가 훨씬 많다.


생존자들이 무리지어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으아아앙.  엄마아아아. 아빠아아아. 어디있어어!!!”


숲 한가운데 다리를 접질려 걷지도 못하는 여자아이가 한 명.


주변엔 다른 인기척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가 애타게 찾는 엄마와 아빠도 보이지 않는다.


위험이 없다는걸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여자는 등 뒤로 총을 돌려맨다.


“얘야, 무슨일이니?”


여자는 풀숲에서 나와 여자아이를 달랜다.

울음소리는, 부모를 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약탈자들에게도 들릴 염려가 있다.


“흐윽.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있었는데. 

 숲속에 다람쥐가 보여서, 따라왔다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구요. 


 으아아아아앙”


제대로 설명을 하지도 못한다.

말에 앞뒤가 있지도 않고

다시 울기를 반복한다.


“뚝. 뚝. 착하지, 언니가 엄마아빠 같이 찾아줄테니까. 알았지?”


“….정말요?” 

여자아이는 눈물을 훔치며 여자를 바라본다.


“그럼. 너는 어디서 왔니?”


“뉴웨스트민스터에서 왔어요”


“밴쿠버 남동부라.. 멀리서 왔네. 엄마랑 아빠는?”


“할머니가 있는 프린슨조지로 갈거라고, 같이 나왔는데…”


“마지막에 어디서 엄마아빠를 봤니?”


“도로 옆에 이층 집에서 잘거라고. 아빠가 그랬는데. 어딘지 모르겠어요”


“혹시. 벽이 하얀색 나무로 돼 있는 그 집?”


“벽이 하얗긴 했는데…”


“한 번, 같이 가보자. 엄마아빠가 기다리실지도 몰라”


“정말요?”


“그럼. 언니만 믿고 따라와”


여자는, 자신의 허리깨나 올법한 아이의 손을 잡고

숲을 헤쳐나간다.



………

“왔어? 저녁 차려놨다.

 오늘 메뉴가 뭔지 알아?”


남자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여자를 반긴다.


“어제 먹다 남은 건빵이겠지.”


여자는 지쳤는지, 남자의 농담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바로 맞췄어! 대신 내일은 강가에서 연어라도 찾아보자고.

 알래스카 연어만 하진 못하겠지만, 먹기는 좋을거야”


“낚을 준 알고?”


“튼튼한 두 다리와 손만 있으면 충분하지”


“허풍은.”


이제는 여자가 먼지구덩이 침대에 걸터앉는다.

남자가 건네주는 건빵을 씹으며 휴식을 취한다.


“뭐 찾은건 있고?”


“아니. 아~~~무것도 없어. 나무. 숲. 벌레새끼 한마리 안보이더라

사슴이라도 있으면 잡아왔을거다”



그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알래스카까지 겨우 1/3을 왔을 뿐이다.


이 가정집을 개조한 2층짜리 민박집에서

딸아이를 애타게 찾던 부모의 존재도 남자는 알지 못한다.


숲속에서 울고불고 생떼를 부리며 부모를 찾던

여자아이의 존재도 남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면 원래부터 없던 것이나 다름없다.


목표는 정해져 있다.


남자와 함께 알래스카로 간다.


남자가 이야기하는 알래스카산 연어를 구워먹고, 쪄먹고, 볶아먹을 것이다.

남자의 가방 가장 아래쪽 소중히 보관되어 있는 마법소녀 DVD를 남자와 시청할 것이다.


발전기든, DVD플레이어든, TV든, 

남자의 말대로 그런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개썰매를 타고

얼음구덩이를 뚫어 낚시를 하고

산딸기와 블루베리를 먹고

바다표범인지 바다사자인지 그놈이 그놈같은 짐승도 사냥할 것이다.


어쩔 땐 하루 24시간이 지루하다 못해 시간이 가지 않고

어쩔 땐 그 24시간이 모자라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해야 한다.


겨울엔 극심한 추위와 싸워야 하고

여름엔 겨울을 보낼 식량을 모아야 한다.


코코아가 있을진 모르지만, 따뜻한 음료 한 잔이 어울릴 것 같다.


지금까지 여자에겐 알지 못했던 생활이다.


유리벽 속에서 연구원들이 건네주던 벽돌맛 프로틴 바를 먹던 생활도 아니고.

하루종일 범죄자들 배때지에 납구슬을 쳐박아주던 생활도 아니다.

머리카락에 엉겨붙은 화약과 피를 씻어내지 못해 잘라야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강간범인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부모도 없다.

괴물이라고 욕하는 자경단 동료들도 없다.


죽인 사람이 천 명에서 천 한명이 되든, 천 두명이 되든 변하는건 없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장애인이든, 아니면 어린아이이든 

죽은 사람의 종류가 달라진다고 해서 변하는것도 없다.


어차피 핵폭탄에 죽은 사람의 수가 수억명을 넘어가는데,

그딴게 무슨상관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지긋지긋한 오늘을 죽지못해 살아가는게 아니라.

천혜의 자연환경에서 남자와 내일을 꿈꾼다.


캐나다 중북부만 해도 이정도로 아름다운데, 알래스카는 과연 어떤 곳일까?


남자의 얼토당토 않은 계획이,

여자가 미래를 꿈꾸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니까


그것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없다.



“연어는, 정말 맛있어?”


여자가, 건빵을 씹으며 남자에게 질문한다.


“기다려, 내가 내일 사람 팔뚝만한 걸 잡아다 줄테니까”


남자가 아직 잡지도 않은 연어를 가지고 허풍을 떤다.

여자는 남자를 보며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