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





사람이 태어났을 때 심장병을 가지고 태어날 확률은 2%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기적적이게도 그 2%의 확률을 뚫고 태어났다.


나는 심장이 너무 약해서, 뛰기는 커녕 빠르게 걷는 것 조차도 할 수 없었으며, 조금만 심장이 빠르게 뛰어도 자리에서 쓰러질 정도로 허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키는 160도 되지 않았으며, 팔 다리도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이 앙상했다.


덕분에 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병원에서 링거를 꼽은 채 보내야 했으며, 학교에 가거나 시내에 놀러 나가거나 친구들과 운동을 하는 등, 다른 사람들이 하는 평범한 즐거움조차 누리지 못한 채 우울한 인생을 보내야 했다.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시지만, 내 병원비를 벌기 위해 두분 다 직장에서 일을 하시느라 바쁘시며, 주말에도 늦은 시간까지 알바를 하시기 때문에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힘들다.


이렇게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나지만, 이런 나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


그건 바로 나와 동갑의 여자애인 얀순이다.


얀순이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크게 다치신 뒤, 나와 같은 병원에 입원했고, 장시간의 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얀순이는 엄마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른단 생각에 병원 복도에서 목놓아 울고 있었고, 나는 그런 얀순이를 위로해 주었다.


다행히 얀순이의 어머니는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고, 나와 얀순이는 이 일을 계기로 친구가 되었다.


얀순이는 비실비실하고 허약한 나에게도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병문안을 와 주었고, 내가 심심하지 않도록 함께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기도해 주었으며, 학교에 직접 가지 못하고 인터넷으로만 수업을 듣는 날 위해 학교에 소식에 관련된 프린트나, 시험에 관한 정보도 내게 전달해 주었고, 시험기간에는 나와 함께 공부도 해 주는 등, 내가 외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또 내가 병세가 심해져서 끙끙 앓고 있을 때에는, 바쁜 부모님을 대신하여 나를 성심성의껏간호해 주기도 하였다.


그런 얀순이에게 어떻게든 보답해주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몸이 이렇다보니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





그날은 고등학교 새학기가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줌 수업을 듣던 중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더니, 부모님과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엄마? 아빠? 지금 일하고 계실 시간 아니에요? 어떻게...."


"얀붕아!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소식이요...?"



의아해하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얀붕 군에게 딱 맞는 심장이 구해졌습니다. 이식 수술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정말요?"


"네, 이례적이게도 아주 건강한 심장이 구해 져서....수술 마치고 재활 운동만 열심히 하시면, 아마 일반인과 다를 거 없는 몸을 가지게 될 겁니다. 물론 근육량이나 신장 등은 본인이 노력하셔야 겠지만요."



나는 순간 기쁜 마음이 북받쳐 올랐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근데 엄마....수술비는 어떻게 해요....?"


"아들, 돈은 걱정하지 마. 마침 좋은 조건으로 빌려주신다는 분이 있어서, 그 걱정은 안해도 괜찮아."


"정말요? 대체 누가...."


"얀붕아, 너는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어. 엄마하고 아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알았지?"



나는 부모님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하기에, 아무 의심 없이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고, 이제 건강한 몸을 얻는다는 설렘에 잠긴 채로 얀순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돌이켜 보면, 이때 내가 부모님께 수술비에 대해 끝까지 물어보지 않은 것은 내 인생 최고의 실수였다.....





***





"얀붕아 나왔어~"



오늘도 얀순이가 병문안을 와 주었다. 



"얀순아! 좋은 소식이 있어!"


"뭔데?"


"나 수술 받는다?"


"또 대체 혈관 심어야 한대? 어떡해.... 근데 그건 안좋은 소식 아냐?"


"아니아니 그거 말고, 이식 수술 받을 심장이 구해졌대,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수술 받고 재활훈련만 잘 하면 일반인처럼 살 수 있을 거래!"


"저...정말?"


"응! 진짜로!"


"그럼...이제 우리 학교 같이 다닐 수 있는 거야...?"


"학교도 같이 다닐 수 있고, 이제 같이 놀러 나갈 수도 있어!"


"정말....?"


"정말로!"



얀순이는 그 말을 듣더니,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흑...흐극.....!"


"야...얀순아? 너 울어?"


"아니...나는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아니까....그런데....이제 얀붕이가 건강해져서....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감정이 북받쳐 올라서...."


"얀순아..."



얀순이가 나를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있었다니...


얀순이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낀다.


이제 몸이 건강해지면, 나도 얀순이가 그동안 나에게 해줬던 만큼 갚아줘야겠지...



"고마워 얀순아, 이렇게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줘서..."


"응...."


"내가 몸만 건강해지면, 지금까지 네가 나한테 잘해준 거, 전부 보답해 줄 테니까....앞으로도, 나랑 같이 있어줄꺼지?"


"약속하는거지...? 앞으로도 나랑 계속 같이 있어주겠다고.."


"당연하지, 약속!"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새끼 손가락을 얀순이에게 내밀었고, 얀순이는 아직 눈물이 맺힌 눈으로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내 새끼 손가락에 고리를 걸었다.


얀순이보다 착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친구라고는 하지만 남에게 이렇게 자기 시간과 노력을 다해서 보살펴 주다니....


새삼 이렇게 나를 진심으로 기쁘게 해주는 페이ㅋ 아니 얀순이가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나는 얀순이와 함께 몸이 좋아지면 무엇을 하고 놀지, 함께 어떤 것들을 해 볼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나는 수술을 마쳤다.


얀순이는 친절하게도 내가 재활 훈련을 하는 것도 도와주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얀순이의 그...발달한 부분들이 내 몸에 닿아서 곤란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나는 재활 훈련 역시 성공적으로 마쳤고, 마침내 병실이 아니라 집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일은 얀순이와 함께 학교에 가기로 한 날.


부모님과 함께 교복도 사고, 책가방도 준비를 하며, 이제껏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을 하니 신선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앞으로 펼쳐질 학교생활이 너무 기대가 된다... 친구는 몇 명이나 생길까? 선생님은 줌으로는 많이 봤는데 실제로는 어떤 느낌이실까?


수업을 교탁에 앉아서 듣는다는 건 또 어떤 느낌일까?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




다음 날, 나는 교복을 차려입고 책가방을 맨 채로 집 밖을 나섰다.


이렇게 학생다운 복장으로 등교를 하니, 내가 평범한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게 실감된다.


나는 얀순이와 만나기로 한 버스 정류장에서 얀순이를 발견했고, 기분좋게 그녀에게 인사를 했는데...



"얀붕아 안녕!"


"어...아, 안녕...."



얀순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해 주었다.


그런데...얀순이의 교복 치마가...너무 짧고 타이트했다.


얀순이의 치마는 정말 중요한 부위만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어서, 그녀의 매끈한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였고, 치마는 몸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몸의 굴곡도 그대로 보였다.


얀순이가 내 병문안을 올 때는 항상 사복으로 갈아입고 왔기 때문에, 그녀의 교복 차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지금까지 얀순이가 이렇게.....그...좀 그런 복장으로 학교를 다녔다고 생각하니...뭔가 복잡한 기분이다.



"얀붕아 뭐해? 학교 안 가?"


"어? 어어....가, 가야지...응...."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얀순이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




"자, 이쪽은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함께 하기로 한 얀붕이라고 한다. 얀붕이는 몸이 약한 친구니까 너희가 잘 챙겨주고~"



학교에 도착하자, 선생님이 나를 반 아이들에게 소개해 주었고, 나는 자기소개를 한 뒤 선생님이 정해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어디보자....얀붕이는....그래, 저기 얀진이 옆에 앉아라. 첫날이라 교과서는 없을 테니까 같이 보도록 하고."



나는 내심 얀순이와 같이 앉기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얀순이가 아닌 다른 여자애와 앉게 되었다.



"안녕? 얀...붕이 라고 했나?"


"어? 어..안녕...너는 얀진이 라고 했지?"


"맞아, 어떻게 알았어?"


"아까 선생님이 얀진이 옆에 앉아라 라고..."


"아 맞다 ㅎㅎ 근데 아까 선생님이 몸이 아프니까 잘 챙겨주라 그러셨는데 어디가 아픈 거야?"


"아...나는 태어났을 때 부터 심장병이 있었거든..."


"심장병?! 그럼 지금 이렇게 학교 다닐 수 있는 거야?"


"이식 수술 받고 재활훈련도 해서 괜찮아."


"그랬구나...많이 힘들었겠다..."


"이젠 건강하니까 신경 안써도 돼."


"그래도 심장병이면 좀 불안할 것 같은데? 뭐 불편하다거나 그런 건 없어?"


"뭐....굳이 말하자면, 예전에는 잘 걷지도 못할 정도로 허약해서....키도 작고 근육도 없는게 좀 그렇긴 하지..."


"에이 뭘 그런걸 신경 쓰고 그래 난 지금 얀붕이도 귀엽고 매력있다고 생각하는데?"


"어? 어....고마워....."



나는 약간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원래 여자애들은 처음보는 남자한테 귀엽다는 소리를 하나? 어떤 거리감으로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얀진이는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그렇게 얀진이와 이런 저런 잡담을 하던 중, 나는 갑자기 어디선가 싸늘한 시선이 느껴져서 주위를 돌아보니....


얀순이가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껏 저런 표정의 얀순이를 본 적이 없었는데....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얀순이의 나를 향한 싸늘한 시선은 계속되었다.


쉬는 시간에 다른 애들과 얘기하며 친목을 넓힐 때도, 수업 시간에 공부를 할 때에도, 점심 시간에 밥을 먹을 때도 얀순이는 나를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볼 뿐,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거나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락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던 중, 얀순이가 갑자기 문자로 나를 학교 뒤편으로 불러내었다.


나는 왜인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얀순이가 말한 대로 학교 뒤편으로 향했고... 그순간 내가 본 것은.....




얀순이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다른 반의 여자애들 몇 명과 함께 얀진이를 구타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야, 베짱도 좋다? 얀순이 남친한테 꼬리를 쳐?"


"너 처음부터 존나 맘에 안들었어."


"니 이제 학교생활 재밌어지겠다?"



그리고 무리들 뒤에 서서 묵묵하게 담배를 피우며 지켜보던 얀순이는, 나를 발견하더니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땅에 버린 뒤, 나에게 달려왔다.



"얀붕아~ 왔어?"


"야...얀순아? 이...이게... 도대체......"


"아~ 이거? 내가 우리 얀붕이 대신 저년 혼내주고 있었어!"



저...년? 얀순이가 입에 욕을 담다니....내 앞에선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너도 기분 나쁘지 얀붕아? 저 찐따같은 년이 주제도 모르고 꼬리쳐대는게 얼마나 역겨웠겠어....보는 나도 속이 쓰리더라구..."



그렇게 말하는 얀순이 뒤로는, 소위 말하는 일진으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얀진이에게 욕을 하거나, 침을 뱉고,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리는 등 차마 두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얀...얀순아...이게 지금 뭐하는 거야....."


"왜그래 얀붕아?"


"이건...이건 아니잖아 얀순아...너 학생인데 담배도 피우고....그리고...어떻게 친구한테 저렇게 심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얀붕아....그게 무슨 소리야....?"



얀순이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저런 년이 왜 내 친구야 얀붕아...."


"뭐...뭐?"


"얀붕아...너한테 주제 모르고 꼬리치는 년도, 그리고 저기서 내가 시키는대로 저년 패고 있는 년들도 다 내 친구 아닌데....?"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저것들은....노예들이랑 개새끼지..... 나한테 친구는 너밖에 없는데?"



나는 도저히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밤낮으로 간호해 주고...그렇게나 상냥하게 대해주던 얀순이가....이런 사람이었다니....


내가 한참을 멍하니 있자, 얀순이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말했다.



"얀붕아 왜그래? 혹시 어디 아파?"



얀순이는 나를 한참 살펴보더니, 갑자기 뒤에서 얀진이를 괴롭히던 여자 무리 중 머리를 금색으로 염색한 애를 부르더니 말했다.



"얀순아 왜?"


"야, 엎드려."


"어...어?"


"귓구멍 처막혔냐? 엎드리라고."


"어...어......"



그 여자애는 그렇게 말하더니, 얀순이가 시키는 대로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얀순이는 이번에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엎드린 여자애를 가리키더니 내게 말했다.



"얀붕아 힘들지? 여기에 앉아 ㅎㅎ"


"뭐라고?"


"얀붕이 너 재활훈련이 잘 되긴 했어도 아직 체력은 좀 부족할 거 같아서, 오래 서있으면 힘들잖아...그래서 너 힘들지 말라구 내가 '의자' 만들었어, 나 잘했지!"



얀순이는 엎드려 있는 여자애의 머리를 발로 밟으며 말했다.



"야, 너 얀붕이 앉아있을때 똑바로 엎드려 있어라. 넘어져서 얀붕이 털끝에 생채기라도 나면 죽여버린다 진짜."


"......알았어 얀순아."



나는 너무도 혼란스러운 마음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얀순이가 나한테 보여줬던 모습들은 전부 거짓이었던 건가?


그럼 왜 지금은 내 앞에서 이렇게 폭력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거지? 


도대체...얀순이는 어떤 사람이지?


아무래도 얀순이와 단 둘이 이야기 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그 전에....여기 있는 애들에게도 얀순이에 대해서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얀순아."


"왜 얀붕아? 뭐 필요한 거 있어?"


"나 너한테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는데, 먼저 우리 집에 가있을래?"


"으...응? 얀붕이 집....?"


"응 먼저 가 있어 줘, 난 잠시 할 일이 있어서."


"얀붕이도 참..../// 알았어, 빨리 와야 돼? 기대하고 있을게~"



그렇게 말하며 얀순이는 얼굴을 붉힌 채 가버렸다.


그나저나 뭘 기대한다는 건지....


나는 얀순이가 멀어져가는걸 확인한 후, 엎드려 있던 여자애를 잡아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괜찮아?"


"....응"


"다행이네....초면에 미안하지만, 얀순이가 왜 저러는지 알려줄래? 오늘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대?"


"얀순이가 왜 저러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쟤는 원래 저런 년이었어. 반대로 내가 묻고 싶어, 왜 너한테만 얀순이가 그렇게 친절한 건데?"


"뭐...? 그럼 얀순이가 계속 저렇게 애들을 괴롭혔었단 말이야....?"


"그래, 지 기분 안좋을때마다 아무나 잡아서 오늘 쟤한테 한 것처럼 때리고 괴롭혔다고...."


"그럼....너희들은 도대체 왜 얀순이랑 같이 이런 짓을 하는 거야...?"


"나라고 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얀순이 저년, 저런 싸이코패스 미친년인 주제에 집에 돈은 또 졸라 많아서, 쟤한테 대들었다가는 어떻게 될 지 몰라....중학교때 얀순이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애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 걔는 실종당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금발 머리 여자애의 표정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충격적인 사실에 다시 한번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얀순이가 정말 이렇게 다른 사람은 기분 같은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괴롭히는 사람이었다니....


...그래, 얀순이가 정말 그런 글러먹은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나한테 보여줬던 그 상냥한 모습들은 거짓말이 아니었을 거다.


내가 진심으로 설득한다면, 분명히 얀순이도 변할 수 있을 거야.


얀순이가 아프고. 힘들었던 나를 도와준 것 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어야 할 차례다.





****





"아....얀붕아 왔어?"



집에 들어가자, 얀순이는 몸을 배배 꼬며 날 마중나와 주었다.



"우리 부모님은 왜 집에 안 게시는 거야?"


"응? 아 그건....오늘 얀붕이가 나한테 중요한 할 말 있다고 얘기하니까, 둘이서 편하게 애기하라고 잠깐 밖에 나갔다 오신다고 했어."


"그래...."



뭔가 이상하다. 물론 얀순이가 나한테 잘 대해준게 있기 때문에 부모님도 얀순이를 잘 아시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집의 주인은 우리 가족인데...생판 남한테 집을 맡기고 나간다고....?


어쩌면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부모님도 얀순이가 남들에게 어떤 일을 하고 다녔는지 안다면 실망하실 수도 있을 테니.



"얀순아..."


"으...응?"


"오늘 낮에, 얀진이는 왜 괴롭히고 있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얀진이를 왜 괴롭혔냐고."


"그건...그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너한테 찝쩍대니까....니가 기분 나빠할 것 같아서 내가 대신 혼내준 건데....근데 갑자기 그건 왜..."


"그게 다야?"


"어?"


"얀진이를 괴롭힌 이유가 정말 그것뿐이야? 내가...기분 나빠 할까봐?"


"응..그런데...."


"어떻게....고작 그런 이유로 그렇게 심한 짓을 할 수가 있어!"


"......"



갑자기 얀순이의 얼굴이 아까 그 때처럼 차갑게 변했다.


나는 순간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지만,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얀순아...친구를, 아니, 친구가 아니더라도, 네가 정말 싫ㅇ러하는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심한 짓은 하면 안 되는 거야...!"


"....."


"너랑 내가 친구인 것 처럼, 얀진이도 누군가의 친구고, 누군가의 소중한 딸일 텐데...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그런건 잘못된 일이야 얀순아...."


"........."


"얀순아, 나랑 약속해줘. 다음부터 다시는 그런 식으로 애들을 괴롭히지 않겠다고, 그렇게 해 줄 거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얀순이에게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얀순이는 저번처럼 내 손에 거리를 걸어주지 않았고...그저 냉랭한 표정으로 날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날 바라보던 얀순이는, 싸늘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건데?"


".....어?"


"내가 싫다고 하면, 어쩔거냐고."


"그러면....더이상 우린 친구로 남아있을 수 없겠지...."


".....하, 씨발."


"야....얀순아....?"



얀순이는 험악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이제꺼 들어본 적 없는 무서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얀붕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뭐?"


"내가 그동안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응? 너는...고작 그 버러지 같은 년 하나 때문에....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관계들을 모조리 없던 걸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하는 거야? 어?!"


"그런 뜻이 아니라...난 네가 다른 애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씨발 뜻이 이렇든 저렇든 그년 때문에 나랑 절교하겠다고 한 거 아냐....어? 그년이 그렇게 중요해?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어?"


"얀순아 너 도대체 왜그래....!"


"닥쳐!!!!!"



얀순이는 내게 크게 소리지르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네가....네가 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


"내가 널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네가 혼자서 쓸쓸하게 병실 침대에 앉아있을 때 어울려준 것도 나고....네가 학교 못가서 혹시라도 학업에 지장 생길까봐 내내 신경써준 것도 나고.... 네가 발작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쉴 때 제일 먼저 의사선생님한테 알려준 것도 나야.......그런데.....너는 오늘 처음 본 여자 때문에...그런 날 쳐내겠다고....?" 


"얀순아....."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세상 사람들 다 날 싫어해도....너만큼은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


"나는 널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네 취향에 맞게 외모도 가꾸고....매일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심지어는 네 심장 구해주려고 사람까지 죽였!!...........아."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


"너.....너 지금 뭐라고 했어......"


"......."


"지금 뭐라고 했냐고 묻잖아!!!!!!!!!"



얀순이는 한숨을 한번 푹 내쉬더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네....."



나는 얀순이에게서 황급히 뒤로 떨어졌다.



"너....너어...너는.....어, 어떻게....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얀진 그년 때문에 일 진짜 존나 꼬였네 하.........."


"어떻게....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


"....내가 직접 죽이진 않았어."


"이 미친년아!!!!!!!!!!!"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대로 얀순이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나가.....당장 나가......우리 집에서 나가!!!!!!!!"



얀순이는 고개를 땅으로 향하고 한숨을 푹 쉰 다음에, 이전까지의 태도가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너랑 서로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차근차근 진도를 나가고 싶었는데..... 보아하니까 그건 틀려먹은 것 같네."


"나가....당장 나가....."



그 순간, 얀순이는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더니, 그대로 나를 밀어 넘어뜨린 뒤 내 양 팔을 한 손으로 가볍게 제압했고, 난 완전히 그녀의 밑에 깔려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하는 거야.....당장 놔!"


"얀붕아, 나랑 사귈래?"


"뭐? 싫어! 너같은 살인자는 질색이야!!!"


"흐음....얀붕아,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처지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소리야...."


"얀붕아 잘 한번 생각해봐.....너 맨날 발작일으켜서 검사할 때 마다 몇백만원씩 나오고, 거기다가 너 입원비까지 대느라 안그래도 빠듯하게 사시던 네 부모님이....갑자기 수술비가 어디서 나셨을까?"


"...서, 설마...."


"이제야 좀 상황파악이 돼?"


"밀도 안돼...."


"물론 나도 그렇게 큰 돈을 아무 대가 없이 빌려 주진 않지....그래서 내가 무슨 조건을 걸었는지 알아?"


"......"


"내가 언제 어떤 시점에 너랑 결혼하든, 절대 반대하시지 말라는 조건으로 빌려드렸어."


"그...그런...!"


"그것뿐인 줄 알아? 만약에 내가 25살까지 너랑 결혼 못하면, 빌린 돈 두 배로 갚아야 한다고까지 되있어. 계약서 보여줄까?"


"흑....흐윽......"


"그런데 말이야 얀붕아.....만약에 네가 나랑 결혼만 하면....그 돈, 갚을 필요도 없다?"


"아....."


"그러니까....다시 한번 물어볼게 얀붕아, 나랑 사귈래?"


"....."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제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나는 얀순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핫!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얀순이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자, 광기 가득한 웃음을 내뱉었다.



"드디어....드디어 가졌어......넌 이제 영원히 내거야....다른 사람한텐 절대 안줘....죽을 때 까지, 아니 죽어서도 나만이 널 가질 수 있어, 알았어?"


"......"


"대답해!!!"


"아...알았어....."



얀순이는 내 대답을 듣고 만족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내 입속에 혀를 밀어넣고는, 내 입안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어진 키스가 끝난 후, 얀순이가 나에게 말했다.



"얀붕아....우리 이제 사귀는 사이니가.....너좀 덮쳐도 되지?"


".....어?"


"하아....하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네가 나한테 귀엽게 웃어줄 때 마다, 환자복 사이로 살짝살짝 쇄골이 보일 때 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참았는지 알기나 하냐고....!"


"히...히익...!"


"근데 그동안은 얀붕이가 심장병이 있어서 덮치면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길 까봐 꾸욱 참고 있었는데....우리 얀붕이, 수술 받고 건강해졌지?"


"시....싫어...."


"네 의견은 중요하지 않아 얀붕아♥"



그렇게 말하며 얀순이는 교복 단추를 하나하나 풀더니 손목 아파서 여기까지만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