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에 나오는 일부 이름과 기관은 허구임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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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시엘 / 1200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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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해버린 한 장소.


찢어진 깃발이 휘날리고,

여기저기 땅이 갈라지고 폭탄을 맞은 듯한 흔적과,

따가운 모래바람이 뺨을 스치는.


고요한 전쟁터 한가운데에 두 개의 무언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한 쪽은 세상을 위협하는 거대한 악, 마수의 왕이 쓰러져 있었고....


반대쪽에서는 몸 이곳저곳에서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나가는 내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걸까, 생각할수록 판단력이 흐려졌다.


이내 간신히 붙잡은 정신으로는 그저 조각조각난 기억을 간신히 떠올리는 것 뿐이었다.


그래, 분명 이 망할 괴물과 싸우기 몇 년 전만해도 나는 그저 평범하게 상점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일반 사람이었는데.....


평화롭던 이곳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존재, 마수(魔獣).


주위에 있기만해도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과 인간 상대로 크게 적대시하는 존재였기에 자연스레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멸해야할 괴물로 분류되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그들의 무리로 추정되는 마수들의 왕이 있었다.

이름값을 하는건지 일반 마수들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사악한 기운과 그에 비례되는 강함을 지니고 있었다.


제국을 멸망시킬지도 모를 그런 거대한 악인 마수의 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나라에서는 방방곡곡 인재를 구하고,


황실의 지원으로 마법사와 성녀, 궁수 등의 인원들로 구성된 '마수 토벌대' 라는 원정군을 꾸렸다.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며 토벌대의 리더가 된 사람은 뜬금없이 내가 되었고,

그렇게 세상의 평화를 목적으로 얼떨결에 검을 잡게 된 나는 수많은 훈련과 대련을 하고.
그렇게 성장된 실력과 토벌대의 파티원들의 지원을 토대로 마침내 겨우 마수의 왕을 죽일 수 있었다.


토벌 이후, 토벌대의 사상자는 오직, 나 하나.


누군가 다치고 죽는 걸 보기 싫었던 나는 최대한 토벌대에 피해가 안가도록 싸우게 되었고.
그 대가로 난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반죽음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마침내 평화로운 예전의 시대가 오는구나 생각했다.


그래, 이야기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좋았을련만....


보상금에 눈이 멀었는지, 토벌대의 인원들 중 한 명이 나에게 가슴에 칼을 꽂았고, 보다시피 지금 이 꼴이 되었다.


"어차피 반죽음인 상황이니, 여기서 죽어봤자 아무도 모르잖아? 우리도 받는 상금이 더 늘어날테고, 킥킥!"


토벌대 전원이 다 한통속이었는지 내가 저항조차 하지 못하게 나를 공격했다.


그 놈의 돈, 보상금에 눈이 멀어 이렇게 토사구팽을 당하다니.


정말 허무하고, 또 이런 결말을 맞이 할려고 원정군의 대표로 간 걸까 라는 후회가 크게 들었다.


주마등일지도 모르는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일찍이 엄청난 재능을 가졌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아카데미의 교관.


원정군 출발 전 날, 앞으로의 일을 잘 해내라며 포션 하나를 서비스로 더 주셨던 여관 아주머니.


내 몸은 서서히 차갑게 식어가지만, 역설적이게도 눈에서는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서서히 의식을 잃어갈 때 쯤, 저 멀리서 검은 인영과 함께 터벅터벅 걸어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때까지 마수들과 그것들의 왕을 상대한 것과는 다른....

아니, 오히려 그것을 압도하는 듯한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존재를 보자,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을 정도의 상대' 라고.


남자의 평균 키를 웃도는 체형과 왠만한 여자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몸매.


백옥같이 새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안광의 세로로 찢어진 눈.


그리고..... 이마에 돋아난 커다란 뿔이 그녀가 인간의 존재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여성의 존재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가더니 달콤한 말투로 말했다.


"저런, 불쌍하기도 하여라. 목숨을 바쳐 이 나라와 인간들을 위해서 싸웠는데, 돌아오는 건 배신이라니."


그녀가 천천히 내 심장 부근에 손을 대더니 빛이 나기 시작했고,

동시에 사라져가던 내 의식 또한 간신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크흡....쿨럭! 쿨럭! 당신은....누구십니까... 인간은 절대 아닐테고...."


"호오, 역시 천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실력이라는 건 사실이었나보구나."


그녀는 감히 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 듯한 기를 뿜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해. 난 인간이 아니라 악마란다. 후후..."


"악.....마.....?"


"뭐, 정확히는 대악마지만. 사실 내가 너에게 온 건 너가 내 장난감을 유일하게 대적한 아이라 흥미가 가서 말이야."


장난감....?


나라를 멸망시킬 정도의 괴물이, 그저 그녀가 만들어 낸 장난감에 불과했다고?


그녀를 볼때부터 격차는 이미 느꼈지만,

그 마수의 왕이라는 것이 그녀가 만들어낸 장난감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저에게 원하는 것이 뭐죠....?"


"간단해. '나의 것'이 되는 거야. 인간의 단어로는 계약.... 이라고들 하지."


"....네?"


"사실, 1000년 이상을 살면서 너무나도 외로웠고 심심했단다.

그거 아느냐? 너가 사는 나라 따위.... 내가 손만 휘저어도 파도에 삼켜지는 모래성만큼이나 약하다는 걸...?"

"하지만, 너를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보다 남을 위하는 그 의리심, 모두를 이끄는 리더쉽까지."


이내 그녀가 무릎을 굽혀 앉자 나와 눈높이가 같아졌다.


하지만 같아졌다고는 해도,

그녀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어 오는 듯해 저절로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아아... 이렇게나 순한 양이 되어서는....괜찮아, 괜찮아."


그녀는 살짝 흥분된 목소리와 함께 내 뺨에 살포시 손을 갖다대었다.


겨우 눈동자만 올려 그녀를 흘끗 보아하니, 두 눈이 밝게 불타고 있었다.


잠깐 바라본 것인데도 불구하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나저나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


복수...? 그래....맞아....


배신당한 그 기억을 떠올리니 가슴 한 가운데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는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며 나라를 구하라는 사명을 너에게 떠민 황실...."


분노.


"필요한 곳에 쓰이고는 더 이상 가치가 없다며 무자비하게 배신해버린 너의 원정 토벌대...."


증오.


"옳지, 옳지. 그래 바로 그거야. 너의 그 솟구치는 감정....

내가 전~부 감당해주마. 오직 나만이, 널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녀가 씨익 웃으며 나머지 한 손을 내 심장 부위에 가져다대자,

이윽고 환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픔이 점점 사라졌고, 오른손에는 특이한 문신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이제 넌 나와 계약된 관계다. 넌 그저 나에게 모든 걸 맡기면 되는거야.

몸도, 마음도, 전~부."


"그렇게만 해준다면....내 힘은 물론 나의 수명까지,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나눠주마."


더 이상 잡념은 사라졌다.


"나는 대악마 <이그시엘>. 지금부터 넌, '내 것'이다."


이젠, 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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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기 전에는 정말로 심심한 삶이었다.


나와 동등한 동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에게 대등하게 덤빌만한 적수가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세계가 멸망하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 뿐.


그렇게 몇 세기를 지나보내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한 가지 실험을 하기로 했다.


내 마력을 살짝 담아 만든 조형물인 마수.


만약....그 마수들을 여기에 풀어놓는다면 과연 인간들은 막을 수 있을까?


그저, 순간적인 작은 호기심에 시작한 일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몇 세기에 걸쳐 진화를 했다는 걸까.


내 예상과는 달리 제법 내 장난감들로부터 인간들은 버티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벌대라는 것 또한 만들어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는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자기가 다친 듯한 상처가 있어도 남에게 먼저 다가가 물어봐주고, 인원들을 통솔하는 리더격인 한 남자.


그를 선두로 하여금 토벌대는 끝까지 싸워 마침내 내가 마지막으로 만든 커다란 마수를 쓰러뜨리는 과정까지.


그를 바라보는 감정은 이내 호기심을 뛰어넘는 감정이 되었다.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인간, 나를 보살펴줄 수 있는 인간.

나도....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가 있구나.


그 뒤로 난 오직 그 만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그가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그가 토벌대들에게 배신당하는 걸 본 나는 순간적인 분노가 차올라 모조리 그들을 죽이려 했지만.....


마치 배신 받고 홀로 쓰러진 그가 마치 과거의 혼자 돌아다니던 나를 보는 거 같았다.


이윽고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걸 이용해보자, 라고.


결과는 정말 흡족스러웠다.


허황된 욕심에 사로잡혀 그를 배신했던 어리석고 우매한 토벌대 인간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는 걸 옆에서 볼때마다 내 몸 속 싶은 곳에서부터 희열감과 흥분으로 가득 차올랐다.

인형처럼 내가 조종하는 것이 아닌, 오직 그이의 감정으로만 움직이는.


괜찮아. 더욱 날뛰어도 돼.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자는 나밖에 없으니까.


너의 그 욕망을 온전히 나에게 다 쏟아부을 수 있도록.


시간은, 아직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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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째 사료.

초월적인 존재가 보살펴주는 건 언제나 좋은 소재죠.
단편이 아쉬울 정도로요.

저녁으로 초밥 세트입니다.

오타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