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오늘 같이 장보자. 퇴근하면 전화할게."


"퇴근하자마자 바로 전화해야돼! 꼭이야!"


"그래 그래. 이따 봐 사랑해~"


남자는 전화를 끊는다.

옆에서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던 동기가 한 마디 한다.


"뜨겁구나, 뜨거워. 누군 아내 비위 맞춰주느라 맨날 잡혀 사는데, 내 옆에 계신 동기님은 아직도 신혼생활을 하시는구만."


"에이, 뭘 그렇게 말해. 이게 보통 아니냐?"


"으휴, 지랄이다."


동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캔커피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남자는 그런 동기에게 장난섞인 웃음을 지으며 시계를 바라본다.


4시 30분.

퇴근까진 2시간이 남은 시간이다.


"읏차차차차차-"


남자는 기지개를 힘껏 펼친 후, 업무를 하러 돌아간다.



_ _ _



남자와 여자는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정확히는, 옆집이었다.


당시 여자는 인터넷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던 만화가,

남자는 이제 막 입사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둘의 느낌은 조금 달랐다.

새내기의 열기로 가득 찬 남자는

열정과 설렘으로 훤칠한 얼굴이 빛나고 있었고,

수 년 째 방구석에서 만화를 그리던 여자는

음침하면서도 조금은 매력있게 살집이 붙은,

그러나 절대 활기차 보이진 않는 모습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난건, 남자가 이사온 날이었다.

잠깐 문을 열고 빨래를 개고 있던 여자와, 이제 막 짐 정리를 마친 남자가 마주친 것이다.


"아, 옆집에 이사왔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 네.....어엇!?"


남자의 기운찬 인사에 대답을 하던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속옷들을 개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채, 재빨리 옷들을 가지고 문을 닫았다.


'특이한 사람이네.'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둘의  첫 만남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한 달 후의 두 번째 만남은 조금 더 당황스러웠다.


"네? 제 집에서 잠깐만 지내시겠다고요?"


"아, 아, 그, 그게, 제가 사, 사정이 급해서, 이, 이, 이게 염치 없는 건 아, 알지만...."


여자는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여자의 사정은 이랬다.

그녀가 만화를 연재하던 회사에서 월급 지급이 미뤄졌다,

회사 내부 사정으로 2주 전에 받아야 했던 돈이 아직도 안 들어왔다,

결국 월세가 밀렸고 보증금도 없던 탓에 마냥 짐을 들고 쫓겨났다,

부모님이랑 사이가 좋지 않아 찾아갈 수도 없다,

결국 유일하게 안면식이 있는 남자에게 어렵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원고료가 들어오면 바로 나가고 사례금도 드리겠다-


남자는 한참 눈물 섞인 여자의 부탁을 들은 후,

여자의 사정이 딱해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남자는 처음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집에 머무는 시간은 계속됐다.


여자에게 원고료가 들어왔고, 얼마 전엔 더 좋은 조건으로 연재처를 옮기며 여유도 생겼다.

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짐을 다시 옮기려면 번거롭기 때문에 시간이 걸려서

당장 집을 구하기도 어려워서

이미 이 곳에 자신의 냄새가 베어서....


여자는 별별 핑계로 계속 머물고 싶어했다.


남자는 사실 그런 여자가 싫지 않았다.

마냥 밝은 자신과는 다르게, 어두우면서도 심오한 여자에게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대화를 할 수록 그녀는 재밌고, 상냥하며, 자신과 죽도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과 얼굴은 완전히 남자의 취향이었다.

몰론 남자는 욕구를 통제할 수 있었으나, 가끔 여자의 페로몬 냄새가 그를 자극하는 날엔 겨우 이성을 붙든 채 잠들기도 했다.



여자도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무리한 부탁을 선뜻 들어준데다가,

몸에 친절과 상냥함이 베어 있는 사람이었다.


가끔 자신에게 지어주는 웃음이나, 잘 때 슬쩍 터치해 본 잔근육은 그녀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갑자기 찾아온 운명의 사랑에 앓이를 하는 소녀',

여자는 오래 전 자신이 연재했던 단편을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춘 채 잠에 들곤 했다.




둘의 아슬아슬한 동거는 여자의 첫 실시간 베스트 달성을 축하하기 위해 연 둘 만의 작은 맥주파티에서 변환점을 맞았다.


얼마나 마셨을까?

빈 캔이 널브러진 방,

술에 잔뜩 취한 둘은 서로를 농밀하게 쳐다보더니, 이내 혀를 섞기 시작했다.

그러곤 취기의 이름을 빌려서, 흥분과 즉흥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들은 몸을 섞었다.

이미 욕구로 몸이 지배당한 두 남녀는, 밤새 사랑을 나누었다.



아침이 되고, 나체로 침대에서 일어난 둘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저지른 짓을 깨달았다.


'분명 미움 받겠지? 싫어, 저 사람한테는 미움받고 싶지 않아....'

훌쩍이고 있는 여자한테, 남자가 말을 건다.


"우리, 사귈래?"


여자는 조금 놀란 듯이 남자를 쳐다본다.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말이다.


"뭔가 뒤죽박죽인 감이 없지 않지만, 사실 오래 전부터 좋아했으니까. 너만 괜찮다면 내가 책임을 지고 싶-"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남자를 껴안는다.

그제야 둘은 웃기 시작한다.



그렇게 둘의 사랑이 시작되었고,

진짜 동거가 시작되었다.



* * *



둘의 연애는 순조로웠다.

다툼이 없던 건 아니지만, 서로 배려하고 맞춰가다 보니 사이는 더욱 좋아졌다.


남자는 더 차분해졌고, 여자는 더 밝아졌다.

사람들은 둘이 천생연분이라고 했다.

여자의 부모님도,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딸의 남자친구를 보곤  마음에 들어하셨다.

둘은 서로가 자신의 반려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얼마 안 가 둘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때쯤이 되자, 남자는 꽤 직급이 올라간 상태였고,

여자는 나름 인기 작가로써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꽤나 돈을 모은 상태였고,

그 돈으로 괜찮은 신혼집을 마련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여자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남자도 항상 즐거움과 행복을 느꼈다.


둘의 결혼생활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한 가지 빼고.

여자는 집착이 조금 심했다.


오랜 기간 제대로 의사소통을 못 하고 지내왔던 탓에,

남자에 대한 의존이 극도로 강했다.


그녀는 남자가 없는 삶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기에,

그녀에게 선물처럼 날아온 소중한 사람인 그를 누군가 넘볼까봐 두려워했다.


게다가 남자는 훤칠한 외모로 직장에서도 인기가 좋은 사람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길까봐, 점점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락이 점점 더 많이 요구했고, 간격이 길어지면 불안에 시달렸다. 퇴근하고 자신을 안아주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다른 냄새가 나면 고통스러운 감정이 휘몰아쳤다. 이런 감정을 견디기 힘든 날엔,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남자는 이런 여자를 보며 고통스러워했다.

불편한 것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야근을 하는 자신을 기다리며 울다 지쳐 쓰러진 모습을 볼 때면, 슬픔과 걱정의 감정이 그를 힘들게 했다.


수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국 답은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더 많은 사랑을 주는 것.

그녀에게 확신을 줄 수 있을만큼, 더 많이 예뻐하고 귀여워해주는 것.

분명 오래걸리고 쉽지 않겠지만,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든 아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_ _ _





"자, 모두 퇴근하십쇼~"

부장은 손벽을 치며 퇴근을 재촉한다.

애처가인 부장은, 결혼기념일인 오늘을 위해 잔뜩 준비를 해두고 있었기 때문에 얼른 퇴근하고 싶어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랴.

이럴 땐 재빨리 퇴근해주는게 예의다.


남자는 회사 앞의 공원에서 여자를 기다린다.

퇴근하는 다른 동료들과 짧은 대화와 인사를 나누며, 그녀가 오길 기다리고 있다.


얼마 안 돼 여자가 손을 흔들며 자신을 향해 달려온다.

여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남자한테 안긴다.

이것 봐, 리스트도 미리 만들어왔어-

여자는 오늘 남자와 가질 데이트를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근데, 방금 자기랑 인사하던 여자는 누구야?"


여자는 팔짱을 낀 채, 그리고 조금은 뾰루퉁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묻는다.


"직장 동료야. 홍보 부서에서 일해서 가끔씩 뵈는 정도야."


"흐응...."


그래도 조금은 뾰루퉁한 여자를 남자가 쓰다듬는다.


"자기말고 내가 누굴 사랑하겠어. 내 마음 잘 알면서."


그러자 이내 여자의 얼굴이 밝아진다.





아직도, 여자는 조금씩 집착을 한다.

하지만 전보단 심하지 않다.

심한 질투라기 보단, 자신을 사랑해달란 애정 어린 투정 같아, 남자는 여자가 마냥 귀엽기만 하다.


그가 쏟은 노력만큼,

그는 여자와 자기 자신을 구원한 셈이다.


일전에 한 번, 여자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이번 만화에 자신이 그리는 캐릭터는 얀데레라고,

얀데레는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세서, 상대에게 질투와 집착을 한다고.


남자는 자신의 옆에 기대 걷고 있는 사람 정도의 얀데레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날씨는 춥지만, 노을은 정말 예쁘다.

남자는 이런 일상이 계속되길 기도하며, 그녀의 손을 더 꼭 붙잡았다.














+)얀챈에서 해피엔딩 단편을 보고 싶었는데 찾기 어려워서 직접 써 옴. '얀붕이가 대처를 잘 했을 때'의 느낌임.

참고로 연습이라서 필력 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