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씨! 일어나세요!"

날 부르는 목소리에 감겨있던 눈이 뜨인다. 멍한 머리를 흔들어 깨우며 뻐근한 몸을 일으키니 방금 날 깨웠던 목소리의 주인이 내 앞에 나타났다.

"좋은 아침, 감우."

"좋은 아침이에요, 유성씨."

감우, 리월 칠성의 비서이자 리월의 모든 역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 그리고...

"빨리 오세요! 음식이 식겠어요."

"...그래."

나와 같은 집에서 동거하는 나의 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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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를 마치고 감우와 월해정으로 출근하는 길, 리월의 아침은 언제나 활기차다. 그 중에는 뛰어 노는 한 무리의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


'우후훗'


그런 아이들을 보며 조용히 웃는 감우. 


"뭐가 그렇게 즐거워?"


"활기차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요. 우리 아이도 저렇게 밝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빠른거 아니야? 아직 결혼도 안했는데?"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안그런가요?"


자연스래 내게 팔짱을 끼우는 감우.


나는 그런 감우를 보며 웃음을 흘리고 고개를 돌려 상념에 잠겼다. 


'도대체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된 걸까...'


사실 나는 이 티바트 대륙의 주민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라고 친구들에게 끌려나와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왕창 들이킨 후 술기운에 거리를 떠돌다 웬 정신 나간 트럭에 치이고 정신을 차려보니 리월항 앞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갈 지 전전긍긍하던 내게 구원의 손길을 건네온 사람이 바로 감우였고 다행히 서류작업은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월해정에, 그것도 감우의 직속 비서로 취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녀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그녀가 내게 한 행동들은 평범한 친절이라기에는 어딘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생판 처음보는 나를 도와준 것은 본래 그녀가 선한 성격이기 때문에 큰 의문은 없었지만 나를 그녀의 집에서 재우거나 다른 부서에 자리가 있는데도 굳이 그녀의 직속 비서로 채용하는 등, 명백히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그녀를 보며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걱정하던 나는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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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우의 직속 비서가 된지 1년 후, 야근중이던 나에게 감우가 말을 걸어왔다.


"저... 유성씨... 괜찮다면 잠시 바다를 보러 리월항으로 가지 않을래요?"


야밤에 웬 바다인가 싶었지만 잠시라도 서류의 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리월항으로 발을 옮겼다. 


깊은 밤의 바다는 간혹 들려오는 파도소리 외에는 무척이나 고요했다. '어째서 그녀는 이런 곳으로 나를 데려온 걸까' 라는 의문이 들 때쯤 감우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있으니 옛 생각이 나네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때도 이렇게 조용했었는데...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그러게요.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저 사실... 유성씨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어서 여기로 온거에요..."


"하고싶은 말이요?"


"그... 유성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놀라지 말고 들어주세요."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예?"


순간 시간이 멈춘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금까지 머리속에서 생각했던 것들이 모조리 텅 비어버렸다. 


"그.. 대체 언제부터...?"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부터요."


그녀의 대답을 듣자,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를 자신의 집에서 재운 것, 능력이 있다고 하나 굳이 직속 비서라는 자리를 만들면서까지 나를 채용한 것, 그 외의 이해되지 않았던 모든 행동들... 그 이유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저기... 유성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말없이 생각에 잠긴 내게 다시 한번 말을 건 감우.고개를 돌려 쳐다본 그녀의 얼굴은 마치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장난같지는 않았다.


"..."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하늘색 머리와 그 위에 난 한 쌍의 붉은 뿔, 풍만한 가슴과 골반, 음란해 보이기까지 하는 타이즈 복장, 거기에 상냥한 마음씨까지, 그녀의 모든것이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것 같았다. 


나 역시 그녀에게 욕정이 들끓었던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은인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행동도 있었지만.


감우는 은근히 나를 쳐다보며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길다면 긴 생각 끝에 나는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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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유성씨!"


"...어? 무슨 일이야?"


"제가 묻고 싶어요. 한참 전에 도착했는데도 들어갈 생각을 안하시고 멍하니 서있기만 했잖아요!!"


"아... 벌써 도착했구나..."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월해정의 입구 앞에 서있었다.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으세요? 의원이라도 들르는게..."


"아니 괜찮아. 다른 생각에 깊게 빠져있어서 그랬던 거야."


"치이... 저와 있을때는 제 생각만 해주세요!!"


"미안미안. 반성하고 있으니까 한번만 용서해줘."


"흠... 이번만이에요!"


그렇게 삐진 감우를 달래며 어느날처럼 업무를 보기 시작했지만 전의 생각에서 느낀 의문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감우의 고백을 받아줬던가?'


감우가 내게 고백했던 날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내가 감우의 고백을 받아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그 순간만 뜯겨나간 것 처럼,


사실 이 고민을 처음 한 것은 감우의 고백을 (아마도)받아들이고 연인이 된지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감우와 처음으로 몸을 섞은 이후, 아직 쾌락의 여운에 빠져있던 감우를 끌어안으며 감우의 고백을 떠올리던 중 그 부분만 생각이 나지 않아 감우에게 물어보았다.


"저기, 감우."


"네에... 유성씨.."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보는건데... 전에 네가 고백했을때 내가 답을 했었나?"


"... 그야 당연하죠. 유성씨가 거절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고 있겠어요?"


"그..그렇지? 미안해, 이상한 질문을 해서..."


잠시 기억이 나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지만 물어봤을 때 순간적으로 이상해진 감우의 표정, 그리고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 상황은 내게 또 다른 의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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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생각을 하며 일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였뉘였지는 저녁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야근도 없는 날이니 여기까지 하고 퇴근할까요?"


"그래, 그러자."


"아!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서 저녁 재료를 사야겠어요. 같이 가실래요?"


"피곤한데... 난 먼저 집에 가도 될까?"


"음... 그럼 어쩔 수 없죠, 먼저 가서 쉬고 계세요."


그렇게 그녀는 시장으로 향했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으으으아... 일단 씻는게 좋겠지?"


한바탕 기지개를 피며 근육을 풀어주고 씻을 준비를 하던 나는 우연히 감우의 방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감우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별로 없네.'


감우와 만난 지 얼마 안됐을 때에는 감히 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었고 사귀게 된 이후로는 내 방을 같이 썼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빨리 보고 나오면 되겠지?'


시장과의 거리도 있겠다, 나는 조심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감우의 방은 생각보다 수수했다. 작은 책상과 필기구통, 책장과 옷장, 침대가 전부였다.


'몇번이고 느꼈지만 정말 수수하네, 뭐 이게 감우의 매력이지만.' 


머나먼 과거부터 모락스와 리월 칠성을 보좌해왔다는 능력과는 별개로, 감우는 속세의 물건에 미련을 두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감우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들여놓지 않은 것이겠지.


그렇게 방을 둘러보던 내 눈에 어떤 책이 들어왔다.


"이건... 일기장인가?"


남의 일기를 멋대로 보는 것 만큼 질나쁜 행동도 없지만....


'어쩌면 내 의문에 대한 답이 있을지도...'


분명 감우는 내 기억상실의 이유를 알고 있다. 감우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째서 내게 숨기는 것인지는 알고 싶었다. 


일기를 보기로 결심한 나는 빠르게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일기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날의 업무와 감우 자신의 생각, 그 외에 있었던 다양한 일들이 쓰여있었다.


괜히 본건가 살짝 후회하던 중, 중요해 보이는 내용이 들어왔다.


2월 15일.

 어느 날처럼 업무를 보던 중 류운진군에게 편지와 부적이 왔다. 보아하니 새로운 부적을 만드신 듯 하다. 편지에는 부적의 사용법이 적혀 있었다. 부적에 선인의 힘을 불어넣고 상대에게 보여주면 그 상대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 단, 너무 많이 사용하면 기억에 구멍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쓰여있었다.


기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인데, 기억을 내 마음대로 지운다니... 잔인한 일이다. 류운진군은 어째서 이런 부적을 만든것일까?


'기억을 지운다고?' 


중요한 실마리를 잡은 것 같다. 나는 계속해서 장을 넘겼다.


3월 4일.

 야근에 지쳐 잠시 산책을 나갔다가 어떤 남자를 보았다. 특이하게도 리월에서는 볼 수 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고 바다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 남자를 본 순간 몸이 이상해졌다. 몸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간신히 몸을 진정시키고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그를 내 집에 데려와 빈 방에 재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래, 감우와 내가 처음 만난 날이야.'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날, 내게 고백했을 때 말했던 그대로, 감우는 내게 첫 눈에 반했던 것이다. 


3월 5일.

 잠에서 일어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오늘이 며칠인지도,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내가 말해주자 그는 무척 당황해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니 리월, 아니 티바트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온 것 같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물었지만 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 대신 리월의 정착을 도와주는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고마워하면서도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의 이름은 유성이라고 했다. 


3월 7일.

 시험삼아 유성씨가 자신있다는 서류 작업을 시켜보았다. 결과는 예상보다 뛰어났다. 마침 월해정도 인력이 부족하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가까이서 일했으면 좋겠는데... 


3월 10일.

 해냈다. 몇몇 부서에 압력을 넣어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냈다. 이제 늘 같이 일할 수 있다! 일상이 더 즐거워질 것 같다.


3월 3일.

 유성씨와 만난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는 무척 좋은 사람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도와주려 한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몸이 뜨거워져 미칠 것만 같다. 이제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가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도 싫다. 그에게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한다면... 받아줄까?


3월 5일.


유성씨를 처음 만났던 그 곳에서 고백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마음이 아프다. 원래 세계가 뭐라고... 내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데... 왜....


".... 뭐?"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내가 감우의 고백을 거절했다고?


"다음... 다음장..."


3월 7일.

 그 날 이후 유성씨와의 관계는 너무나도 멀어져 버렸다. 출근할 때 인사하는 것 말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나와의 만남 자체를 피하고 있다. 차라리 고백을 하지 않았더라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다면...


아. 


류운진군의 부적.


3월 8일.

 성공이다. 유성씨에게 내 힘을 불어넣은 부적을 보여주었더니 유성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유성씨의 기억이 빠져나오더니 책처럼 변했다. 고백한 날의 기억을 찾아 지워버리고 유성씨를 깨워 물어봤더니 내 고백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부적만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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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일기에 쓰여있는 것은 많았지만 다 읽을 수가 없었다. 요약하자면 감우는 부적의 힘을 이용해 내 기억을 지우고 고백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했다. 내가 고백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렇다면 내 기억이 불안정한 것도 부적의 부작용인가..."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내 머리는 차분함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 순간,


'투둑'


무언가 떨어진 소리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장바구니를 떨어뜨린 감우가 죽은 눈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감우..."


"...보셨군요."


"이게... 전부 사실이야?"


"네 맞아요, 유성씨가 본 내용 그대로에요."


"...비켜, 나가야겠어."


죽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감우에게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 나는 감우를 밀치고 도망치려했지만.


"유성씨"


"내 말 안들려? 비키라고...."


"여기 보세요...♡"


알 수 없는 문양이 빼곡히 적힌 부적을 보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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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씨! 일어나세요!"




머리에서 생각나는데로 써봤는데 뭔 이상한게 나왔네 제목은 기억상실인데 잘 써먹지도 못한듯, 나도 글 잘쓰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