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번에도 니가 2등, 내가 1등이닿하하하하핳"


"이여어얼, 열심히 했는데?"


뒤에서 1등인 얀붕이와 그 바로 위인 얀순이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전교 꼴등은 도맡아 하면서도, 언제나 밝던 얀붕이와

가끔 전교 꼴등을 빼앗을 때도 있지만, 뒤에서 2등으로 아슬아슬하게 뒤쫓는, 얀순이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야, 바보커플이다, 바보커플."


주변 학생들은 그 둘을 보며 웃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그 둘을 보며

나는 쟤네보단 낫구나 하고.


둘에게는 미래 걱정이란 없었다.

둘이 같이 피시방도 가고, 노래방도 가고, 카페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그저 웃고 떠들기만 하면 좋았다.



"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냐?"


신나게 노래방에서 놀고 집으로 가는 길

얀붕이가 얀순이에게 물었다.


"그러엄, 내가 생각 없이 살아도, 그 날은 많이 생각하지~"



달도 없이 어두컴컴한 밤

놀이터에서


어린 얀순이는 모래를 쥐고, 손바닥에 펼쳐보고, 흘려보내기를 반복하고 있었고


얀붕이는 놀이터로 나가서, 얀순이를 보고 물었다.


"뭐 해?"


"... 그냥..."


"모래장난해? 이 시간에?"


"... 응."


"나랑 같네?"


천진난만하게 웃는 얀붕이를 보며

얀순이는 같이 웃었었고


둘은 곧 몇 시간이나 모래성을 쌓으며 놀았다.


그것이 서로의 첫 만남이었다.




"아핰핰핰, 그 날은 왜 그렇게 모래성 쌓는게 재미있었는지 몰라~"


얀순이는 신나게 웃었다.


"그러게, 진짜 어릴때인데, 그 날은 너무 잘 기억난다니까~"


얀붕이도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 어두웠다.




며칠 뒤


"야, 얀붕아! 나 영화표 구해왔는데~"


얀순이는 평소처럼, 얀붕이와 같이 나가려고 영화표를 구해왔고

그 날따라, 아니, 요즘들어 어두워진 얀붕이는 영화표를 거절했다.


"미안해, 아무래도, 고등학생이면 미래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아..."


"...?"


순간

얀순이의 표정이 굳었다.


"나도 공부 해 보려고. 하하, 웃기지? 저번에 보니까, 우리 반에 얀돌이랑 얀진이가 자기네 공부도 도움 될 겸 한다면서 오답노트 봐준다고 하더라고... 그거... 같이 하려고... 나 같은 멍청이도 껴준대더라..."


얀붕이는 반쯤 자조하며 이야기했다.



그럴 낌새는 보였다.


학교 선생들은 애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있었고

영화관에 자기들 또래는 자신들밖에 없었다.


얀붕이의 형은 사업을 한번 더 말아먹었다고 소문이 돌았고

얀붕이의 누나는 또 이혼을 했다고 했다.


"세상은 왜 이리 복잡한걸까..."


얀붕이는 씨익 웃었지만

웃음에는 힘이 없었다.


얀순이는 그런 얀붕이가 너무 낯설어서

한 마디를 꺼냈다.


"그럼, 나랑, 나랑 공부하면 되잖아. 나도 열심히 할게!"


"하하, 됐어. 너나 나나 수준 비슷하잖아. 우리 부모는 교수고 너희 가족은 부자인데 둘 다 이 꼴인 거 보면... 하하..."


얀순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얀붕이와 얀순이는 떨어져 있었다.

얀붕이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틀어박혔고

얀순이는 도서관을 살짝 기웃거리다가 바로 집으로 향하곤 했다.



이변은 다음 시험 성적표가 나오던 날 일어났다.



교무실에서 얀순이를 불렀다.

얀순이가 커닝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손가락에 금반지를 열 개는 낀 살찐 남자와, 표독스러운 듯한, 온 몸을 명품으로 두른 여자가 교무실에 한번 왔다가 갔고

그 다음엔 얀순이가 사실,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전교 1등은

얀순이의 차지였다.



성적표를 나눠주면서

선생님은 얀순이에게 물었다.


"전교 꼴등을 다투던 네가, 왜 갑자기 1등이 된 거니? 어떻게?"


얀순이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고등학생이면,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몇달 전 대화가 기억난 얀붕이는

얼이 빠진 채로 듣고 있었다.



"너, 너 뭐야. 어떻게 그렇게..."


모두가 하교한 교실에서

얀순이에게 잠깐 남아달라고 한 얀붕이가 물었다.


"왜?"


"공부... 어떻게... 아니..."


"얀붕아. 너랑 성적 맞추는 건 쉬웠어. 넌 매번 8시 50분부터, 10시 20분까지는 졸면서 수업을 제대로 못 들어. 그리고, 10시 20분부터 30분간은 그나마 노트 필기를 하지. 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늘 빼먹어."


"...어?"


"쉬는 시간 10분 동안은, 졸았던 수업 시간의 책을 펼쳐서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러다가 다시 11시부터 11시 50분까지는 노트를 하려고 해. 그리고, 점심 시간 동안은 밥을 먹고 다시 자고. 그리고 다시 15시 20분까지는 다시 졸아."


"..."


"어떤 수업 시간에, 어느 만큼 네가 수업을 듣는지만 알면, 너랑 성적을 맞추는 건 쉬운 일이었어. 그래서, 너랑 딱 1점에서 2점 정도의 차이만 둘 수 있었지. 그래서 난 너랑 같이 다닐 수 있었어. 같이 보충수업도 받을 수 있었고."


"너, 너 뭐야. 너, 어떻게..."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잖아. 너는 이제 성적 좋은 애한테 공부를 도와달라고 하겠다고 했잖아. 보충수업도 빠지려고 하고, 날 버리고 다른 사람이랑 공부하려고 하잖아. 아니, 그러면 안 돼. 나랑 해. 내가 도와줄게."


10년동안 친했던 얀순이인데

그 날 얀붕이는 얀순이가 유독 낯설었다.



"... 너 뭐야."


얀붕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네 친구 얀순이."


얀순이는

평소와 같이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그 미소는 평소보다 차가웠다.



"너는 우리 집에 희망이야. 그런데, 고작 이 따위로 하니?"


어린 얀순이에게

얀순이의 부모가 물었다.


"...죄송해요."


얀순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다. 죄송하다는 말 말고는.


집은 숨막히는 곳이었다.


언니 오빠들은 훨씬 어린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성취를 거뒀고

그래서 부모님은 언제나 얀순이에게 기댔다.


친구도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다르게 보았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었다. 언니 오빠도, 엄마 아빠도 모두 자신에게 위안보다는 기대만을 걸었다.



답답한 마음에

놀이터로 나왔다.


'내가 한 줌에 쥐는 모래의 양은 평균잡아 213알. 내가 한 줌에 쥐는 모래의 너비는 대략 13cm x 8cm니까...'


"뭐 해?"


그 때

얀붕이가 얀순이에게 물었다.


얀붕이는 마을에서 유명인사였다.

부모가 대학 교수인데, 자식 농사를 워낙 개차반으로 지었다고.

형이란 작자는 사업을 하겠다고 집안 기둥뿌리를 뽑았고

누나라는 작자는 번듯한 사윗감을 구해다가 또 다른 남자랑 눈이 맞아 이혼을 했다고.


그런 고민의 일말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얀붕이의 모습에

얀순이는 순간 말을 잃었다.


"... 그냥..."


이라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래장난해? 이 시간에?"


천진난만하게 웃는 얀붕이에게

얀순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응"


이라고 짧게 대답했고


얀붕이는 활짝 웃었다.


"나랑 같네?"


그 미소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얀순이도 활짝 웃었다.




그 뒤부터

세상이 변했다.


얀순이는 생각을 놓아버렸다.

공부를 다 때려치웠고, 부모는 그런 얀순이를 혼냈었지만, 차츰 기대를 잃었다.

본인에게 거는 기대가 없다는 것이 이렇게 자유롭다는것인지 몰랐던 얀순이는

얀붕이와 같이 다니며, 자유를 실컷 만끽했었다.



그래, 그랬었다.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법.

얀순이는 서서히 생각을 멈추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언제나 얀붕이를 관찰하고 나서 행동하게 되었다.



얀붕이는 몇시부터 몇시까지는 존다.

깨어서 쩔쩔맨다.


반찬은 의외로 남기지 않고 먹는다. 집에서 먹는 밥이 부실하니까.

영화는 가리지 않고 다 본다. 책은 읽지 않는다.

노래는 언제나 힙합을 듣고, 부른다.


얀순이는 그렇게

얀붕이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얀붕이와 같은 수준으로 꾸몄다.




그 의태도 끝나버렸다.

얀붕이는 이제 옆이 아니라 위를 바라보려 했다.

그러면 얀순이는, 이제 얀붕이의 옆이 아니라 위를 가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수업 시간마다 얀순이는 어려운 문제를 모조리 풀어냈다.

얀붕이는 아직 다 못 풀었다.


쉬는 시간마다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자기 노트를 건넸다.

얀붕이는 노트를 베끼기에도 벅찼다.


수업이 끝나고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문제집을 건네주었다.

얀붕이는 문제 푸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시험이 끝나면 얀순이는 전교 1등을 하고 있었다.

얀붕이는 중간보다 조금 밑이었다.



"안 할래..."


평범한 반응이었다.

자신의 능력은 정해져 있는데, 주변은 너무 빨리 나아가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부터 해 둘걸 그랬나 싶던 얀붕이에게

얀순이가 물었다.


"그러면, 나도 다시 성적 낮춰서 네 옆으로 갈까?"


"아니, 됐어."


비참했다.

자신은 언제나 전교 꼴등이거나 뒤에서 2등이었고

그 뒷자리를 차지하는 건 언제나 얀순이었다.


그래서 얀붕이는 얀순이를 친구라고 생각했고

얀순이는 보란 듯, 의태를 풀고 얀붕이의 한참 위에 있었다.




그 뒤부터는 열등감의 연속이었다.


얀붕이가 게임을 시작했다.

얀순이는 따라 시작해서, 얀붕이보다 위에 있었다.


얀붕이가 운동을 시작했다.

얀순이는 따라 시작해서, 얀붕이보다 더 높은 성적을 냈다.


얀붕이가 시작하는 모든 것은

모조리 얀순이가 추격하고, 따라잡고, 역전해냈다.



"......"


서서히

얀붕이는 주변 모든 게 자신을 좀먹어가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게 압박스러웠다.

미래도, 친구도, 가족도.

그 중 제일 압박스러웠던 건 얀순이었다.


그런 얀붕이에게 얀순이가 물었다.


"왜 그래?"


얀붕이는

반쯤은 경멸어린 표정으로

반쯤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내 주변에 모든 게 다 날 괴롭히는 거 같아서..."


얀순이는 활짝 웃었다.


"나도 옛날에 그랬었는데... 나랑 같네?"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옛날처럼 서로를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옛날과 달리 망가져버린 웃음을 지었다.


"열등감 때문에 진짜 죽고 싶다."


"따라갈게. 어디든."


그렇게

진담이 진하게 섞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둘은 한번 더 웃었다.



p.s. 요청 받을 때마다 느끼는건데, ㄹㅇ 내가 요청받아서 쓴 글은 대부분 꽝이고 일부분만 괜찮은 느낌임. 자꾸 이런 퀄리티 글 쓸 때마다 요청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 진짜. 내가 필력이 나아지면, 요청받았던 글 중 퀄리티 ㅄ인건 꼭 리멬해줄게.


소재 제공 및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yandere/8328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