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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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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Easten Roman Empire
동로마 제국
이름
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클레이
약 2,000,000 km²
언어
그리스어,라틴어
별명
비잔티움
소속
무소속

1. 개요2. 지도 및 영토3. 역사
3.1. 로마 제국의 분할3.2. 서로마 붕괴 이후
4. 컨트리볼 만화에서5. 관계도6. 갤러리


1. 개요 [편집]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330년(견해에 따라 395년) 부터 1453년까지 존재한 제국이다.

2. 지도 및 영토 [편집]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의 최대강역

3. 역사 [편집]

로마 역사 2206년중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제국. 때문에 내용도 길다.

3.1. 로마 제국의 분할 [편집]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를 만들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정제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정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고,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제를 세웠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기원후 330년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제2의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 그는 화폐(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통화였다.)를 안정시켰고 군사 조직을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풀어서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

395년 이후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황조 세습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되어 이 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다.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동서방 전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다. 아르카디우스의 동방 제국은 발칸반도, 소아시아, 레반트, 이집트, 동지중해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회, 문화가 서로마 제국보다 발달했고 재정 자원도 풍부해 공물을 지불함으로써 국가의 침략자를 회유할 수 있었고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어서 대개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하여 어지간한 공격은 대체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한번도 적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훈족 아틸라의 침입을 피하고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사람들에게 공물(300kg에 달하는 금이었다.)을 바쳤고 훈족이나 타 이민족과 교역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를 계승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것을 거부했으나, 아틸라는 이미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훈족들은 결국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 등은 달마티아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로마의 황제를 자임했다.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마저 사망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최종 붕괴되었다

3.2. 서로마 붕괴 이후 [편집]

유럽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는 476년 또는 율리우스 네포스가 사망하는 480년을 서로마 제국 붕괴의 해로 보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고, 이는 타당한 것이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오도아케르와 동고트의 테오도리크를 형식적이나마 이탈리아의 파트리키우스로 봉한 것을 통해 이탈리아를 자신들이 석권한 것으로 봤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 멸망할때까지 공식 국호를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단순히 적의 영향력하에 들어온 실지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제논는 이탈리아를 회복하고자 모이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의 동고트족과 협상하여동고트족을 이탈리아로 보냈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산 적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이탈리아를 스스로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논 황제는 서방 영토에 최소한의 명목상 수위권만 지켰다.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 황제는 498년이 되어서야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했다. 자신이 여전히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는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라는 사실을 드러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상품 거래에 범용되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완성했으며, 세제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금이 32만 파운드나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개혁은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엄청난 대프로젝트인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수 있게하였다.

4. 컨트리볼 만화에서 [편집]


보통 컨트리볼 만화에서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상징인 위 깃발로 등장한다.
로마의 자식, 그리스의 조상님 격으로 등장한다. 오스만에게 탈탈 털린다. 십자군에게도 한번 털린다. 신성 로마 제국, 바티칸과는 꽤나 불편한 관계.
크게 엮이는 국가가 오스만 빼고는 거의 없어서 등장 빈도가 적다. 그리스의 과거회상에서나 잠깐 나오는 수준… 이탈리아를 한심해하는 로마 제국과는 달리, 그리스가 빚에 허덕이는걸 보고 역시 내 후손이라며 하나도 달라진게 없다는 듯 안심하는 대사를 칠때도 있다.[1]
악 내눈

5. 관계도 [편집]

로마 제국의 족보
로마의 후계자나 자식 정도이다. 전술되어있지만 이슬람, 심지어 가톨릭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실 사이가 좋은 나라가 거의 없었다. 후손 뻘로는 그리스가 있다[2]

6. 갤러리 [편집]

[1] 동로마도 제정 꼬라지가 말이 아니었던 시절이 꽤 많다. 당장 4차 십자군에 털린 이유가 돈 안줘서면 말 다 했지…[2] 여담으로, 유튜브 등지에서 터키인들이 그리스인 놀려먹을때 가장 많이 들먹이는게 ^1453^이다. 1453년 동로마가 멸망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