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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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 |
출생 | 1876년 8월 29일 |
황해도 해주목 백운방 텃골 (現 황해남도 태탄군 지촌리) | |
사망 | 1949년 6월 26일 (향년 72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 | |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
소속 정당 | 한국독립당 |
재임 기간 | 제7대 임시정부 국무령 |
1926년 12월 14일 ~ 1927년 3월 | |
초대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 |
1927년 3월 ~ 1927년 8월 18일 | |
제9대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 |
1940년 3월 13일 ~ 1940년 10월 8일 | |
제10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 |
1940년 10월 9일 ~ 1944년 4월 6일 | |
제11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 |
1944년 4월 7일 ~ 1945년 12월 31일 | |
1. 들어가기 전에 [편집]
2. 개요 [편집]
"오늘은! 우리 전 민족이 세계 무대로 발을 들여놓는 그런 시기를 맞았습니다."백범 김구
3. 일생 [편집]
1876년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법통 운동, 반탁 운동 등을 하다가 1949년에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했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법통 운동, 반탁 운동 등을 하다가 1949년에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했다.
4. 평가 [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구/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5. 비판 [편집]
5.1. 민간인 쓰치다 죠스케 살해 [편집]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상인을 살해했다.
5.2. 사회주의 계열 암살 사주 [편집]
이념이 다른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을 죽이고, 이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한 적도 있다.
북괴의 목사+관료인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던졌었는데 뭐 이 새끼 죽인 것까진 좋았다. 주변 민간인들까지 죽어서 문제지. 거기다 송진우, 장덕우, 여운형 모두 김구에게 암살당했다는 의혹이 있다.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 게, 김구는 분명 상하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간의 싸움으로 벌어진 자유시 참변도 목격했을 거고, 이승만과 이동휘의 대립으로 인해서 임시정부가 산산조각 나는 것도 봐왔기에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는 죽어 마땅한 매국노 집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 죽인 게 잘한 건 절대 아니지만.
북괴의 목사+관료인 강량욱의 집에 폭탄을 던졌었는데 뭐 이 새끼 죽인 것까진 좋았다. 주변 민간인들까지 죽어서 문제지. 거기다 송진우, 장덕우, 여운형 모두 김구에게 암살당했다는 의혹이 있다.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 게, 김구는 분명 상하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간의 싸움으로 벌어진 자유시 참변도 목격했을 거고, 이승만과 이동휘의 대립으로 인해서 임시정부가 산산조각 나는 것도 봐왔기에 김구에게 공산주의자는 죽어 마땅한 매국노 집단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 죽인 게 잘한 건 절대 아니지만.
5.3. 친일 인사 등용 [편집]
이승만과 마찬가지 케이스다. 본인은 독립운동가였고 친일 행위를 한 바가 없지만, 해방 후 친일세력과 가깝게 지내며 이들의 도움을 여러모로 받았다. 특히 한민당으로부터 여러모로 지원을 많이 받았다. 이 지원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6. 관련 문서 [편집]
7. 둘러보기 [편집]
[1] 익원공파 25세손 '회(會)' 항렬.[2] 혼인 전 사망.[3] 천도교 (동학) → 불교 (법명: 원종) → 개신교 (감리회)
과거 제도의 부정부패를 알게된 이후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18세때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면서 동학에 입문해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하던 도중 탈옥하여 충남 마곡사에 은신하면서 불교에 귀의해 법명 원종 (圓宗)을 임명 받아 승려 생활을 하였고 28세 무렵 부친 김순영이 세상을 떠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여 여옥의 모친을 전도하기도 하였다. 김구는 감리회 신자로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4] 피격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의 혈흔을 통해 확인되었다.
과거 제도의 부정부패를 알게된 이후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18세때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면서 동학에 입문해 천도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하던 도중 탈옥하여 충남 마곡사에 은신하면서 불교에 귀의해 법명 원종 (圓宗)을 임명 받아 승려 생활을 하였고 28세 무렵 부친 김순영이 세상을 떠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여 여옥의 모친을 전도하기도 하였다. 김구는 감리회 신자로 생애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4] 피격 당시 입고 있었던 옷의 혈흔을 통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