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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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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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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07월 19일부로 고인이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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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하십시오 흒먼

여운형
呂運亨 | Lyuh Woon-hyung
프로필
출생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리 (묘골)
(現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사망
1947년 7월 19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학력
배재학당 (졸업)
금릉대학교 (영문학)
신체
179cm
소속 정당
재임기간
초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초대 조선인민공화국[1] 부주석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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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여정현, 어머니 경주 이씨
형제자매
남동생 여운홍
여동생 여윤숙, 여씨
배우자
강릉 유씨 (사별)
진상하 (재혼)
자녀
슬하 3남 3녀
장녀 여난구, 차녀 여연, 3녀 여원구
장남 여봉구, 차남 여홍구, 3남 여영구
본관
함양 여씨 (咸陽)[2]
회숙 (會叔)
몽양 (夢陽)
종교
개신교 (장로회)
서훈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 개요2. 일생3. 비판
3.1. 사생활 문제
4. 의혹과 반박
4.1. 친일파인가?4.2. 공산주의자인가?
5. 여담6. 어록7. 관련 문서

1. 개요 [편집]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죽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

여운형, 5번째 테러를 당한 직후
夢陽

여운형 (呂運亨)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그리고 체육인이다. 호는 몽양(夢陽).

독립운동에서 큰 수완을 발휘한 인물이자, 남북 합작을 주도해 좌파친북들과 우파수꼴들의 싸움을 최대한 중재해보고자 한 통일운동가이기도 하다. 정치적 성향은 무당파적에 가깝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중도좌파에 가깝다.[3]

공부에 재능이 있어 3개 국어(영어, 일본어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유머 감각과 패션 센스, 외모 등으로 갖춰진 지뢰설치반 인싸였다. 일제강점기 시기였고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던 시기였음에도 여운형만큼은 꽤나 존중해줄 만큼. 그러나 정치적으로 남북 화합을 추구했던 그의 성향상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 많은 테러 시도를 당했으며, 끝내는 테러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된다.

2. 일생 [편집]

3. 비판 [편집]

3.1. 사생활 문제 [편집]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대상은 지가 뭘 잘못했는지 좆도 모릅니다.

얼굴에 철판이 아니라 비브라늄 판이라도 깐 거 같습니다.



이 문서가 다루는 대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대상의 모습은 천사와 악마처럼 극명하게 달라질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이 문서는 더불어만진당에 대해 다룹니다.

섹스를 알려주겠다.

설거지론에서 말하는 완벽한 지뢰설치반이라 할 수 있다. 마누라 대신 여대생과 야스해 애를 만든 적이 있으며, 성향 자체가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많은 여자들을 따먹고 다녔다 한다.

바람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며, 특히 50대의 나이로 여대생과 야스를 해 말들이 많았다.

이쯤 가면 본처가 가만히 있은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 된다

4. 의혹과 반박 [편집]

4.1. 친일파인가? [편집]


이 문서의 내용 또는 아래의 내용은 말 그대로 헛소리입니다.

지랄병이 도졌나 봅니다, 반쯤은 믿고 거르십시오.



이 문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능지를 보유하고 있는 인물에 대해 다룹니다.

이게 사람새끼냐?

개소리다.

여운형에게 이런 의혹을 제기한 세력은 김성수와 장덕수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한민당계인데, 오히려 김성수와 장덕수를 비롯한 한민당의 주류 세력이 구 친일파에서 비롯된 세력이다.

이들은 여운형이 조선총독부와 협상한 걸 이유로 친일파로 음해하기도 하는데, 이건 총독부에 굴복한 것이 아닌 일제의 패망을 예고하고 일제의 한반도 철수에 대한 것으로 총독부와 협상했다 볼 수 있다.

결론은 개소리

4.2. 공산주의자인가? [편집]


이 문서의 내용 또는 아래의 내용은 말 그대로 헛소리입니다.

지랄병이 도졌나 봅니다, 반쯤은 믿고 거르십시오.
"노동자 농민 일반 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로 되겠다. 노동 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만일 우익이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 이론을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여운형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

리처드 로빈슨, 미군정 관리
이것도 결론부터 말하면 개소리다.

건준위가 좌파친북에 먹힌 건 박헌영이 공산 테라포밍 해서 그렇고, 오히려 본래 성격은 앞서 말했듯 무당파 중립적인 성격이 강했다. 건준위는 조선 총독과 협상을 해 치안을 유지하고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 입챈하기 전까지 조선을 다스리던 세력이었다. 하지만 이들을 씹은 채 그대로 미군정 소련군정 만든 좌파친북이 싫었음 싫었지 절대 긍정적으로 바라보진 않았다.

5. 여담 [편집]

운동광으로, 당시 서구권의 시류였던 스포츠 숭상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조선인들도 스포츠를 통해 심신단련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0대의 키와 탄탄한 근육질의 체격으로 건강식품 CF도 찍었으며, 운동중 특히 야구를 즐겼다.

야구 경기장에서 순사들이 난입해 여러차례 붙들려가 경기가 자주 지연되었다.

유학시절, 거구에 그의 카이젤 수염까지 단번에 멋있게 길러와서 그런지 별명이 "터키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왔단다. 물론 실제로 보았을 때도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이 난다.

그리고 수염도 존나게 독일스러워서 중국 유학 당시에 별명이 콧수염 씨였고 다른 학교에까지 존재감이 알려지자 여운형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편지를 보냈는데 콧수염 씨라고 이름을 적었고 동료들은 다 여운형에게 가는 편지라는 걸 알고 전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옷에 플렉스를 많이 해서 평소에도 고가의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외모가 잘생겨서 그런지, 우가키 가즈시게 조선 총독의 사위도 '내가 여자였으면 여운형과 결혼했다'라는 멘트를 쳤고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도 잘생겼다고 인정했다.

연설 능력도 좋아서 젊었을 적 한일합방 직전에 연설하다가 친일파들마저 눈물을 흘렸다고 하고 잘 때도 잠꼬대로 책상을 치는 시늉을 하며 '여러분!' 하며 졸았다고 한다.

운동광 때문인지 독립운동하면서 생긴 스트레스를 거기에다 풀었는지는 몰라도 운동 만큼 여자와 섹스를 좋아 하셨는 듯하다.

본처에게서 3남 3녀를 둔걸로 모자라서 일본 여자 하고서 여순구를 낳고 여대생 진옥출과의 사이에서도 애를 만들기도 했다.

1886년생치고는 매우 개방적이었고 청년들과도 소통이 잦았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대의 인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렇게 외향적이고 긍정적/낙관적인 성향 탓에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며 엄격 근엄 진지한 당대 정치인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건 김규식 정도.

당대 조선인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았다. '조선을 이끌어 갈 양심적인 지도자'란 한국 최초의 여론조사에서 33%로 1위에 올랐다. 참고로 2위와 3위는 각각 이승만 (21%)과 김구 (18%)

6. 어록 [편집]

"새벽에 어느 집에서 닭이 울면 이웃집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다른 닭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때가 와서 우는 것이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적으로 발작된 것이 조선의 독립운동이다. 결코 민족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건설 국가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을 다스리는 국가일 것이다. 이 민주공화국은 대한민족의 절대적 요구요, 세계 대세의 요구다."
"우리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되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1차 시험에서 모두 낙제다."
"노동자 농민 일반 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로 되겠다. 노동 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만일 우익이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 이론을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
"조국... 조선..."

7. 관련 문서 [편집]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관련 없다.[2] 29세손 '운(運)'자 항렬.[3] 다만, 중립국 시도가 상당히 어려웠을 거란 건 팩트고 이게 현실성이 없단 건 사실이지만 이들을 통합해 최대한 한반도 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한 건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