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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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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陸英修 | Yuk Young-soo
출생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교동리
(現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9)
사망
1974년 8월 15일 (향년 4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대통령묘소
본관
옥천 육씨
부모
아버지 육종관, 어머니 이경령
가족
남편 박정희
아들 박지만
박근혜, 박근령
의붓딸 박재옥[1]
형제자매
언니 육인순, 오빠 육인수
여동생 육예수
학력
옥천공립보통학교 (졸업)
배화고등여학교 (졸업)
종교
불교(법명: 대덕화)[2]
신체
170cm[3], AB형
재임기간
제5대 영부인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
제6대 영부인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제7대 영부인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
제8대 영부인
1972년 12월 27일 ~ 1974년 8월 15일
1. 개요2. 생애
2.1. 박통과의 사랑2.2. 영부인 생활2.3. 사망
3. 총평4. 여담

1. 개요 [편집]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의 처이자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삼남매의 어머니, 또한 제5-8대 영부인이다.

2. 생애 [편집]

충청북도 옥천에서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에 육영수의 집안은 전형적인 대지주였던 육종관이 각종 방법으로 돈을 벌어들여 8천 평이 넘는 땅을 갖고 99칸짜리 대저택에 사는, 하인까지 수십 명이 딸린 대부호였는데, 1920년대에 전화기와 자가용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 육종관은 본처 이경령 외에도 첩을 세 명이나 두고 있었는데, 이러한 축첩으로 속앓이하던 어머니 이경령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던 그녀는 이후 박통의 여성편력에 역시 속을 썩이게 된다.
육영수는 보통학교를 옥천에서 졸업하고, 상경하여 배화고등여학교에 진학하였는데, 이 당시 육종관의 첩이었던 '큰 개성댁'의 집에 거주하며 모진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하기야 본처 소생의 육영수와 그 아버지의 첩과는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고, 심지어는 어머니 이경령이 보내온 물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등 갖은 구박을 하였지만, 그녀는 4년 동안 아무 불만도 꺼내지 않았다. 엄청난 대인배. 그렇게 배화여고를 졸업하고 그녀는 고향에 내려와 1년여 동안 교편을 잡기도 했다.

2.1. 박통과의 사랑 [편집]

1950년 8월, 사촌 송재천의 중매로 박정희와 첫만남을 갖게 되었다. 당시 박정희는 여느 청년들처럼 아버지가 맺어준 김호남과 1936년 결혼하여 딸까지 보았는데, 우리의 나쁜 남자 박통은 마음에도 없는 결혼 생활이 내키지 않았다. 40년대 후반에는 이현란이라는 여성과 동거를 하다가 박통의 남로당 빨갱이짓이 탄로남과 함께 그들의 사랑도 깨져버렸고, 실연당한 박통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렇게 짝 없이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근무하던 외로운 박통을 보던 부하들 중, 육영수와 동향 사람이던 송재천은 단박에 부산에 피난 중이던 그녀를 떠올리고 중매를 봐 준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4]
당시 박정희는 33세, 육영수는 25세로, 나이 차가 꽤 된다.[5]

2.2. 영부인 생활 [편집]

1963년 10월 15일 치뤄진 제5대 대선에서 민주공화당 소속 박정희가 승리하면서, 육영수는 박통의 퍼스트 레이디로서 청와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영부인으로서는 청와대로 쏟아지던 편지와 진정서를 도맡아 처리하거나 야당 인사들과 남편의 관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남편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고위 간부들을 견제하는 등 제8대 대통령으로서의 임기까지 남편 박정희의 곁을 충실히 따르며 그야말로 '내조의 여왕'이자 모범적인 영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정 외적인 부분에서는 아이들, 약자들에게 큰 관심을 보여 고아원과 보육원에서 봉사를 하기도 하고, 육영재단을 설립하여 만화잡지 보물섬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센병 환자들의 복지에 힘쓴 바 있는데, 전국 각지의 한센병 요양소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청와대로 한센인들을 불러 다과회를 갖기도 했다고 한다. 1974년에는 소록도 양로원의 준공식에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육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렇게 영부인이 직접 나서서 한센인들의 복지에 관심을 보였기에 대한민국에서의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크게 개선되었다.

2.3. 사망 [편집]

1974년 8월 15일, 광복 29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가 재일교포 문세광이 박정희를 노리고 쏜 총탄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였다. 향년 48세.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영부인 자리가 공석이 되었으며, 당시 22세의 박근혜가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맡게 된다. 이후에 벌어질 박정희의 충성 경쟁 정치 실패와 더욱 심해진 여성 편력, 나아가서는 10.26 사건의 발단을 육영수 여사의 사망으로 보기도 하는데, 박정희의 든든한 조력자였던 아내 육영수가 사망하자 박정희의 판단력이 급격히 흐려졌다는 것이다. 결국 박졍희 역시 10.26 사건으로 60대의 젊은 나이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사후 박정희 내외의 시신은 나란히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되었다.

3. 총평 [편집]

서슬퍼런 군부 독재 시절 박정희의 통치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기도 하고, 사회복지 사업에 큰 관심을 보여 영부인의 몸으로 직접 뛰었다는 점 등에서 고평가를 받는다. 특히 2016-17년 장녀 ㄹ혜의 탄핵 전후로 해서 최태민과 딸의 관계를 석연찮아했다던 증언이 나오며 재평가를 받기도 했다. 좌파들조차도 박정희는 깔 지언정 육영수까지 욕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는 점에서 그녀의 위상이 돋보인다. 다만 육영수가 생존했더라도 현대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도 있는데, 이미 70년대 중후반으로 해서 박정희 정권의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했기에 육영수의 사망이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는 의견이다.
다만 박통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때문에 도매금으로 까이기도 한다. 가지가 단 세 개인데도 바람 잘 날이 없다.

4. 여담 [편집]

  • 박통과 육영수 여사가 부부싸움을 하면 육박전이라 카더라. [6]
  • 만약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 당시 육영수가 죽지 않았다면 박근혜 대신 그녀가 정계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대권까지 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물급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진보 진영의 이희호만큼의 상징성을 가졌을 것이다.
  • 박정희는 종종 부하 참모들과 아내 육영수를 재떨이 등으로 때렸다고 한다. 노무 무섭다.
  • 당대의 여성치고는 키가 매우 큰 편에 속했다. 60년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6cm였는데, 그보다 4cm나 큰 170cm의 장신이었으니. 남편인 박정희의 신장이 164cm였으니 남편보다도 큰 셈이다.
[1] 박통이 전처 김호남과 낳은 딸이다.[2] 공교롭게도 노짱의 아내 권양숙과 법명이 같다.[3] 당대 여성 치고 굉장한 장신으로, 남편 박통보다도 키가 컸다.[4] 여담으로 이 결혼식에서 둘의 이름에 관한 해프닝이 있었는데, 당시 주례를 서던, '박정희'와 '육영수'라는 이름을 보고 성별을 헷갈린 허억 대구시장이 그만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이라는 말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근데 이 시장도 만만찮다. 어떻게 사람 이름이 허어어억이노?[5] 사진 속 육 여사의 얼굴이 살짝 부어있는데, 전날 앓았던 위경련 때문이라고 한다.[6] 이 농담을 방송에서 꺼냈던 코미디언 전유성은 곧바로 출연정지와 함께 뜨거운 코렁탕을 마실 뻔했다고 한다. 정작 박정희 내외는 이 농담을 듣고 박장대소를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