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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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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왜 두 번 써지지? 어? 왜 두 번 써지지?
이회창
李會昌 | Lee "Mr" Hoi-chang
출생
1935년 6월 2일 (88세)
황해도 서흥군 신막면
(現 황해북도 서흥군 서흥읍)
자택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
학력
광주서석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대 (법학/학사)
국방대학교 (행정학사/8기)
재임기간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88년 7월 27일 ~ 1989년 10월 24일
제15대 감사원장
1993년 2월 25일 ~ 1993년 12월 16일
제26대 국무총리
1993년 12월 17일 ~ 1994년 4월 21일
[ 정보 더 보기 ]
본관
전주 이씨 주부공파 23대손[1]
부모
아버지 이홍규, 어머니 김사순
형제자매
형 이회정
누나 이회정
남동생 이회성, 이회경
배우자
한인옥
자녀
아들 이정연, 이수연
딸 이연희
종교
천주교 (세례명: 올라프)[2]
신체
163cm, 65kg, A형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6, 18
약칭

1. 개요2. 약력3. 생애
3.1. 15대 대선3.2. 16대 대선3.3. 17대 대선3.4. 대선 이후3.5. 근황
4. 여담

1. 개요 [편집]

"대한민국 보수의 품격"
대한민국의 은퇴한 정치인. 대법관, 감사원장, 선관위 위원장을 지낸 바 있으며, 땡삼 시절에 국무총리로 재임했다. 또한 현 국민의힘의 전신인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의 총재를 지냈고 15, 16, 17대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이에 더해 국회의원까지 세 번 지냈으니 그야말로 김종필 전 총리와 같이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사람이다. [3]

2. 약력 [편집]

  •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 대법원 대법관
  • 제8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제15대 감사원장
  • 제26대 국무총리
  • 제15대 국회의원 (전국구 1번 / 신한국당)
  • 제3대 신한국당 대표위원
  • 제4대 신한국당 대표위원
  • 제2대 신한국당 총재
  •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
  • 제15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 제2대 한나라당 총재
  •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송파구 갑 / 한나라당)
  • 제3대 한나라당 총재
  •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1번 / 한나라당)
  • 제16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후보
  • 제17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후보
  • 초대 자유선진당 총재
  • 제18대 국회의원 (충남 홍성군·예산군 / 자유선진당)
  • 제2대 자유선진당 대표최고위원

3. 생애 [편집]

1935년 황해도 서흥군에서 이홍규와 김사순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홍규는 서울고검 검사와 제9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었고, 이후 회창옹은 가히 아버지를 능가하는 엘리트의 삶을 살게 된다. 황해도에서 태어나기는 했으나 부친의 부임지일 뿐이었고, 외가인 전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본인의 정치적 고향은 조상의 선영이 있는 충청도 예산이기에 황해도와 딱히 연관은 없다.
1957년 사시패스를 하고 공군에서 군법무관으로 복무를 끝마친 뒤 판사로서 일하다가, 1981년에는 46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대법관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박통과 땅크의 군사정권 시절에도 본인의 소신을 굽히지 않아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당대의 법조계에 '검사는 홍준표처럼, 변호사는 노짱처럼, 판사는 이회창처럼'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사람들 중에서는 노짱만 고졸이다[4]. 노무 슬프다. 소신에 따른 판결을 내렸기에 땅크 정권에 찍힌 회창옹은 결국 대법관 재임용에 떨어지는 등 시련을 겪었다.
이후에는 원조노짱 정권에서 선관위 위원장을 지내고 땡삼 정권의 감사원장으로 일하다 국무총리로 임용되었는데, 여기서도 자기 소신을 안 꺾다가 땡삼이랑 대판 싸우고 중간에 나가버렸다. 보수의 품격.
그렇게 본격 정치판에 뛰어든 회창옹은 엄청난 시련을 맞닥뜨리는데...

3.1. 15대 대선 [편집]

변호사 일을 하다가 국힘의 조상 신한국당의 총선 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를 이끌고, 회창옹 자신도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한다. 그렇게 신한국당의 당대표까지 맡게 된 회창옹은 대선 경선 레이스에 뛰어들고, 이 때 '대선 뛰려면 당대표 딱지 뗴라'라고 불만을 표하는 다른 후보들에게 회창옹은 "꼬우면 나가라"를 시전했는데, 피닉제가 진짜로 나가버렸다.
게다가 경제위기 때문에 회창옹에게 쿠사리를 잔뜩 먹던 땡삼이가 이인제에게 지지를 보태면서 회창옹이 나락으로 떨어지나 싶다가, 이인제를 찍으면 김대중이 된다는 기막힌 문구로 어느 정도 다시 지지를 되찾나 싶었는데...
땡삼이 최고 업적 IMF 외환위기가 터지고 만다. 회창옹은 '신한국당 못해먹겠다'를 선언, 땡삼이를 쫓아내고 간판을 한나라당으로 바꿔 달아보지만 이미 국민들의 마음은 떠나간 지 오래, 결국 1위의 슨상님에게 39만표 차이로 지고 만다.
그렇게 집안 싸움으로 별거하고 난 뒤. 회창옹과 피닉제의 사이는 이걸로 한참 틀어져버린다.

3.2. 16대 대선 [편집]

슨상님 정권에서 처음으로 야당 신세가 되어 어수선하던 한나라당을 수습하고, 다시 한번 말에 올랐다. 상대는 당시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이자 지금은 MC로 이름을 날리는 노짱. 민주당 경선에서 노짱과 맞붙었던 사람은 15대 대선에서 회창옹을 자빠뜨린 전설의 피닉제였는데, 피닉제의 "노무현은 빨갱이" 공세와 노짱 장인, 그러니까 양숙이네 아버지의 빨갱이짓 이력을 걸고 넘어지자 그 유명한 리즈 MC 노짱의 킬링벌스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를 시전하고 기적적으로 피닉제를 이겨 최종 후보가 된다. 회창옹은 무난하게 경선에서 승리하고, 이번에는 정말 대통령이 되나 싶었는데, 그 유명한 병풍사건이 터진다. 김대업과 설훈[5]이라는 두 빨갱이들이 군면제를 받은 회창옹의 두 아들에 대해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하였는데, 알고 보니 새'빨간' 구라였다. 하여튼 이 사건과 더불어 젊은 층의 노무현 지지로 인해 회창옹은 또 비등비등하게 지고 만다. 노무 슬프다 ㅠㅠ. [6]

3.3. 17대 대선 [편집]

그렇게 정계에서 손을 떼는가 싶다가 돌연 대선 출마 선언을 하였다. 다만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는 가카로 결정이 난 상태였기에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당시 가카의 입지가 압도적이었기에 회창옹은 3위로 밀려나는 구도였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회창옹과는 물론 가카와도 사이가 좋지 않던 ㄹ혜한테 손을 뻗어보았지만, 결국 그 ㄹ혜조차 가카에게로 돌아서면서 회창옹은 3위로 대선 레이스를 마무리하게 된다[7]. 이로서 세 번의 대선 레이스 중 두 번 연속 콩라인을 타고 이번에는 어느 지역도 차지하지 못한 채 콩라인 밖으로 밀려나면서 회창옹의 대권 도전은 끝을 맺게 된다.

3.4. 대선 이후 [편집]

세 번의 대권 도전으로 한바탕 시련을 겪고 빚까지 뒤집어 썼던 회창옹은 2008년 자유선진당을 창당, 18대 총선에서 본인의 연고지 충청도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충청도민들의 지지를 끌어모아 총 18석(지역구 14석, 비례대표 4석)을 차지하였으나, 딱 2석이 모자라 교섭단체를 결성하지 못하고, 2010년 지선에서는 당 자체가 나락을 가면서 회창옹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그를 뒤집고 출마한 2010년 재보선에서 패하면서 당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이후에는 새누리당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에 복당, 자유선진당 자체가 새누리당과 합당하게 된다.

3.5. 근황 [편집]

사실 2010년대 중반쯤 되면 회창옹 본인부터가 80대의 노익장이 되는지라, 정계에서는 완전히 손을 놓고 간간이 원조 정치인으로서 인터뷰나 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2022년에는 간철수와 윤석열의 단일화 결렬에 대해 문재인 정부를 규탄하며 간의 단일화를 호소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를 하거나 윤석열에 대한 지지의 뜻을 내비치기도 하였다[8]

4. 여담 [편집]

진지한 '대쪽 판사' 이미지가 강한 회창옹에게도 밈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흙오이'되시겠다. 이게 언젯적 밈인고 하니, 16대 대선, 그러니까 베테랑 정치인 회창옹이 신예 MC 노짱과 대통령 자리를 놓고 랩배틀을 벌일 때의 일이었다. 당시 회창옹이 선거 유세차 가락시장을 들렀는데, 친서민적 이미지를 만들어 본다는 게 그만 흙 묻은 오이를 닦지도 않고 통째로 먹는 기행을 펼친 것이다. 이는 한국 정치계 원조 2인자였던 김종필 총리조차 비웃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고, 사진도 여럿 있었지만 어느 날 모두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위 '만델라 효과' 비슷한 의미로 '흙오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고.
[1] 시조 41세 회(會) 항렬[2] 자유당 정권 시절 아버지 이홍규가 정권에 밉보여 파직당한 위기에서 독실한 천주교인이던 장면 전 총리가 구해주면서, 가족 전체가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3] 타이틀은 비슷하지만, JP와 회창옹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한다.[4] 홍준표는 고법 행정학과 출신, 회창옹은 설법 법학과 출신.[5] 이대남 비하를 한 그 설훈이 맞다. 원래는 징역 1년 6월에 집유 3년으로 선거권이 박살이 날 처지였는데 괘씸하게도 노짱이 사면을 해 줬다.[6] 참고로 이 때 김대업이 들고 나온 카세트 테이프가 주작이라는 주장을 폈던 사람이 바로 홍준표다. 홍카 그립읍니노 ㅠㅠ[7] 다만 회창옹이 친박 표를 어느 정도 끌어왔던 건 사실이다. 비록 3위로 싱거운 패배를 하였지만, 득표율 15.1%를 찍으며 아슬아슬하게 15%를 넘겨 선거비용을 전액 돌려받게 되어 '이회창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8] 본인부터가 피닉제의 날갯짓으로 인해서 대선에 졌다고 봐도 무방한지라 정말 뼛속에서 우러나온 충고라고 할 수 있겠다. 공교롭게도 그렇게 단일화를 한 이후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15대 회슨대전 때보다도 치열한 0.7%차의 초접전으로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