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https://arca.live/b/arknights/57377983

1-2화 - https://arca.live/b/arknights/57492726

1-3화 - https://arca.live/b/arknights/57711735

1화 외전 - https://arca.live/b/arknights/57896660

2-1화 - https://arca.live/b/arknights/58580951





바로 다음날, 박사의 집무실에는 여느 때와 같은 멤버들이 모여서 박사의 서류 작업을 돕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집중을 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는 백파이프와 박사, 가끔 볼펜을 부러뜨리는 첸, 숫자를 다섯 번째 틀린 그라니, 허둥지둥하다가 서류 하나를 찢어버린 클릭, 그리고 그나마 제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도 가끔 한숨을 쉬는 호시구마까지.

집무실 안의 분위기가 그렇게 점점 더 이상해지기 시작하고, 제발 이 상황을 누가 좀 타개 해줘 라고 클릭이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외치는 동안에도 결국 서류 작업은 하나하나 착실하게 끝을 맺었다.


"""""""하아..."""""""


마지막 서류를 내려놓는 순간 집무실엔 동시에 여섯 명의 한숨이 가득 찼고, 이내 백파이프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그럼, 온실로 가겠사...라고 중얼거린 뒤, 방에서 뛰쳐나갔고 그 뒤를 따라 한 명씩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박사와 클릭을 빼고.


"아, 박사. 오늘도 고생했어. 자 서류는 여기에 있어."


재빨리 서류를 모은 뒤 드론의 힘을 빌려서 가득 쌓아 올려진 서류들을 박사의 책상에 쾅 하고 내려놓으며 클릭이 말을 걸었다.

...물론 박사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에 한숨을 내쉰 클릭은 첸이 했던 말을 상기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백파이프의 과감한 어프로치가 있었다는 것은 말해두지.'

'백파이프가 우리의 생각보다는 행동이 빨랐지만...어쨌든 오차 범위내다. 아니...그보다 오히려 잘 된 거라고 볼 수도 있겠군.'

'하지만, 박사는 어떻게 생각할지 전혀 모르겠으니...그걸 알아내는 게 네 역할이다. 잘 부탁하지.'

'왜 너냐고? 당연히 인터뷰라면 네가 전문이니까 그렇지. 그럼...부디 힘내도록.'

'덤으로, 녹음도 부탁하지.'


그렇다 해도, 이런 상황은 나라도 영 사양인데, 첸도 참 너무하다 너무해...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클릭은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던 박사의 바로 눈 앞에서 손뼉을 짝! 소리가 나도록 쳤고, 박사는 그제서야 허둥지둥 팔을 휘저으며 자신 앞의 서류의 탑을...

...무너뜨렸다.

그 광경을 본 클릭은 마치 소설의 주인공, 영화의 주인공처럼 가능한 태연함을 연기하며 드론들로 서류를 쌓아 올렸고, 다시 쌓아올려진 탑을 보며 박사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 적기인가...그렇게 클릭은 머릿속으로 만들어 놓은 완벽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음, 음. 박사. 오늘따라 정신이 좀 다른 곳으로 가버렸네? 혹시 무슨 일이 있어?"


물론 클릭의 연기는 그저 대본을 읽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지만 다행히 정신줄을 반쯤 놓아버린 박사는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클릭의 말에 박사는 오늘까지 몇 번이나 내쉬었는지 모를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고민이라...없다고 해야하나...있다고 해야하나..."

"...그래? 그럼...이 클릭 누나에게 상담해볼래?"


클릭의 어색한 말투, 거기에 클릭 누나라는 말에 잠시 빵 터져서 신나게 웃기 시작한 박사와 대체 왜 이딴 소리를 한거지...그렇게 자책하는 클릭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웃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으며 박사는 입을 열었다.


"너 생각보다 유머감각이 있구나."

"영상을 찍다보니까 그만...그래서, 그럼 나랑 잠깐 얘기나 할까? 어차피 오늘은 뭘 해도 집중이 안 될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그럼, 혹시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


마음을 굳혔는지 조용히 물어보는 박사, 그리고 그런 박사에게 클릭은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말했다.


"내 방으로 가자. 거기는 조용하기도 하고 혼자서 쓰고 있거든. 덤으로 방음도 오케이! 밤새 작업하느라 시끄럽다고 말이 많거든."

"그래...그럼 잘 부탁해. 클릭."


1단계는 마무리 되었고, 이젠 2단계로 넘어가면 되겠다.

속으로 안도하며 클릭은 앞장서서 집무실 밖으로 나갔고, 박사도 그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네 방이 원래 이 쪽이 아니지 않아?"

"...아, 방을 바꿨거든. 약간의 사고가 있어서. 자, 바로 여기야."


클릭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걷던 박사는 분명 이쪽이 아니였을텐데, 그리 생각하며 질문을 던졌고 그 말에 잠시 멈칫한 클릭은 대수롭지 않게 들리길 바라며 대답한 뒤, 코너를 돌아서 카드키를 꺼냈다.

이내 카드키를 인식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먼저 들어간 클릭은 박사에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 뒤 불을 켰다.

그러자 어두웠던 방이 밝아지더니, 빼곡하게 들어찬 각종 전자 기기들과 어지럽게 널부러진 부품들이 박사의 눈에 들어왔고, 잠시 두리번거리던 박사는 어떻게든 부품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 맞다. 정리를 좀 해야했는데...여기 말고 저기 방 안은 정리해뒀으니까 따라와, 박사."

"...신기한 기기들이 많네."


어린 아이처럼 호기심에 반짝이는 눈으로 이것저것을 들여다보는 박사와 그런 박사를 보며 신이 난 클릭은 기기에 대해서 몇 가지 설명해주려다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고 간신히 멈추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클릭은 이내 안쪽 방의 문을 열어 박사에게 들어가라 손짓하고 입을 열었다.


"마실 건 뭐가 좋아? 아 참고로 그렇게 많은 건 없어. 기껏해야 주스 정도려나."

"그럼...토마토 주스."

"알았어. 먼저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클릭은 기기 사이를 헤쳐나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고, 박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박사가 방 안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본 것은 침대와 접혀서 벽에 세워져 있는 앉은뱅이 탁자 하나였다.

아마도 클릭이 안내한 곳은 자신의 침실이라고 추론한 박사는 탁자를 펴서 앉았고, 이내 클릭은 주스 두 잔을 가져와서 탁자 위에 놓고 박사의 맞은편에 앉았다.

...몰래 녹음기를 킨 채로.


"아, 혹시 여기가 침실이야?"

"응, 그렇지. 조금 살풍경한가? 사실 난 저기서 작업하다가 자는 경우도 워낙 많아서 평소엔 잘 안 쓰거든, 아하하..."

"하는 일이 많구나. 거기에 농사까지..."

"1인 크리에이터는 늘 바쁘다구. 하지만, 박사를 위해서라면 잠깐 시간을 내는 건 일도 아니지. 게다가..."


박사의 말에 아하하, 하고 공허한 웃음을 흘린 클릭은 가져온 주스를 한 입 마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분위기를 보아하니까 이대로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서...모처럼 생긴 동아리인데 이런 분위기는 좀 싫거든."

"...염려를 끼쳤구나, 미안해. 클릭."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도...우리 동아리 회장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어? 어제 나는 몸이 좀 안 좋아서...홍보물도 만드느라...잘 모르겠거든."


이미 대략적인 상황은 들었지만...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클릭은 적어도 표정이라도 태연하게 보이도록 최대한의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의 사정에 바쁜 박사는 클릭의 표정에는 전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만, 어쨌든 잠시 주스 홀짝이는 소리만 들린 뒤, 박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제의 일이였는데..."


그렇게 한 번 입을 연 박사의 말은 청산유수였고, 클릭은 중간중간 응응, 하면서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이어나가던 도중, 모두에게 그 '문제의 대목' 이 나왔다.


"그렇게, 백파이프랑 나랑 키스를 할 뻔 했는데..."

"...키스라고?"

"어, 응...분명 아마 그대로 갔었다면 그랬을거야. 그런데..."

"...그런데?"


이거, 대충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큰일인데...그리 생각하며 클릭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최대한 냉정하게 유지하려고 시도하며 뒷 내용을 물었고, 박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응, 그런데 켈시한테 갑자기 통신이 와서 긴급 회의가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그 순간을 상기하던 박사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 순간 뭐라고 해야하나...난 적어도 좀 약간, 뭔가 분위기가...확 깨진?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 아마 백파이프도 그랬지 않았을까."

"...그건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 그냥 나온거야?"

"아, 백파이프가 먼저 벌떡 일어나더니 그럼 뒷정리를 하겠다고 그렇게 달려가서...그냥 나도 나왔어. 회의에 가야하니까."

"그 회의는 그래서...그렇게 박사를 긴급하게 부를 정도로 큰 안건을 다뤘던 거야?"


순간적으로 켈시의 얼굴이 머리에 스쳐지나간 클릭의 말에는 짜증이 조금 묻어나왔고, 그것을 눈치 챈 박사는 한숨을 내쉬며 주스를 들이키고는 말했다.


"아니, 사실 그리 큰 안건도 아니였어. 그냥 요즘 사내 복지 제도에서 동아리 지원과 관련된 부분이였는데...그런걸 대체 왜 긴급이라고 부른건지...참나."

"...진짜 어이가 없네. 그런거면 그냥 오늘 회의 안건으로 올려도 되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망할 여자 같으니."


그렇게 투덜거리던 박사는 주스 잔을 깔끔하게 비웠고, 클릭의 손짓에 드론이 방 밖으로 나가더니 새로운 주스를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그러면서도 클릭의 머릿속은 알아낸 정보를 정리하느라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ㅡ켈시는 분명 어떻게든 박사의 상태를 나름 구체적으로 알 방법이 있다. 이건 확실하다.

ㅡ확실하진 않지만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ㅡ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간단한 안건을 이용해 백파이프를 방해하진 않았을거다.

ㅡ하지만,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존재하는가? 분명 박사의 근처에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ㅡ그렇다면...


이내 한 가지의 가능성에 도달한 클릭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서 버튼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응? 뭘 누르는거야?"

"에어컨 좀 키려고. 조금 덥지 않아?"


박사의 물음에 태연하게 에어컨을 조작하는 척 하며, 클릭은 몇 가지 버튼을 눌렀고 이내 방 전체의 에어컨이 켜졌다.

...물론 클릭이 설치해둔 다른 기기도 켜졌고, 리모컨을 집어넣으며 클릭은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아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박사.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백파이프를 어떻게 생각해?"

"...안그래도 그게 참 고민이 많이 되거든..."


목이 타는지 다시 클릭이 가져다 준 주스를 한 입에 다 마셔버린 박사, 그리고 다시 손짓 몇 번으로 드론들을 냉장고에 보내서 주스 병들을 여러 개 가져온 클릭.

잠시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클릭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도달하기 직전, 박사가 입을 열어 띄엄띄엄 말했다.


"백파이프 본인에게는 무척 감사하고 있어."

"가장 힘든 작전의 선봉에 언제나 함께하고, 무리한 지시에도 부상을 입어가면서도 나를 위해서 헌신해주고, 내 건강을 위해서도 이렇게 힘을 써주니까."

"그리고 평소에도 보이는 행동도 무척 친근하고 그랬잖아. 그래서 분명 우리는 사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어제의 그 행동은 분명...나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진 것 같아."

"솔직히 지금 나의 생각은...잘 모르겠다는 것, 단지 그것 뿐이야. 나도 나의 생각을 잘 알 수가 없어서 조금 답답해."


느릿느릿하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하는 박사와, 그런 박사를 그저 조용히 응시하는 클릭.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클릭이 입을 열었다.


"원래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는 제법 많은 법이야. 자신의 감정도 그렇고. 그러니까, 박사. 그럼 내가 몇 가지 물어보고 싶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박사를 보며, 클릭은 드론을 불러와서 화면을 톡톡 건드리더니 메모장을 불러왔다.


"지금부터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Yes, or No. 두 가지만 허용. 이외의 대답은 금지야. 그래야 명쾌해지니까."

"오래 고민도 금지야. 그냥 바로바로 대답해주면 그만이야."

"그리고, 수줍어 할 필요는 없어. 그저 진실된 답변만 하면 돼. 걱정 마. 박사의 구체적인 대답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그렇다면, 시작할게. 박사."


빠르게 말을 쏟아낸 클릭은 무언가를 써내려 가더니, O와 X표시의 도형을 그렸다.


"박사는, 어제 백파이프에게 그런 일을 당해서 불쾌했어?"

"...No."

"만약 백파이프가 또 그런 일을 한다면, 거절할거야?"

"...음...No."

"어제의 그 순간, 박사는 설렘 등의 긍정적인 감정을 느꼈어?"

"...Yes."

"만약, 백파이프가 박사와 멀어지길 원한다면 박사도 멀어질거야?"

"...만약 그녀가 진심으로 바란다면...Yes."

"그런 식으로 사족을 붙이는 것이 안 된다는 거야. 박사. 그럼 No. 라고 할게."

"응, 알았어."


클릭의 질문들에 대답하면서 박사는 점점 흩어진 채 방치된 머릿속의 퍼즐들을 하나씩 조립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길었던 질문들의 끝에, 마지막 질문이야. 박사."

"...뭘 물을지 알 것 같아."


퍼즐들이 가리키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사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은 클릭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백파이프를 좋아합니까?"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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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정답을 찾아낸 박사와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은 클릭은 나란히 온실로 걸어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리고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지, 그런 내용의 대화의 끝에


"그렇다면, 너무 어색하게 대하진 말고,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라는 뜻이지? 서로에 대해서 사실 정확하게 모르는 게 많으니까."

"응, 내가 보기엔 그게 맞는 것 같아. 백파이프도 사실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닌데...박사가 너무 둔감해서 그랬던 거 아닐까?"

"그러고보니 둔감하단 얘기는 되게 자주 들었어. 그라벨이라던가, 플래티넘이라던가 블루포이즌이라던가..."


다른 오퍼레이터들의 이름이 박사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화들짝 놀란 클릭은 이내 응? 하는 박사의 의문이 담긴 시선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아! 그래, 아마도...조금 더 작전에서 뛰고 싶다는 뜻이 아니였을까?"

"...그런가? 하기사 그라벨도 팬텀이 합류한 뒤에는 주로 서류일을 했지. 플래티넘이나 블루포이즌도 엑시아나 아르케토가 있으니까...근데 카시미어의 정세도 소란스러웠잖아?"

"나도 그래서 그 쪽에 취재를 갔다왔었어. 그런데 얼마나 소란스러웠던지."

"여튼...그렇네. 내가 그런 건 전혀 생각을 못했구나."


다음에는 작전에 편성해줘야겠다, 그렇게 말하는 박사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클릭은 온실에 거의 도착한 것을 깨닫고 가방을 꺼내 주머니에 넣고 있던 녹음기를 박사의 시선을 피해 소중히 집어넣었다.

한 편, 이번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박사는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클릭. 너도 작전에 나가지 않은지는 좀 되지 않았어? 이번 작전엔 너도 넣어줄까?"

"아니, 괜찮아. 박사. 나는 이제부터 박사를 서포트 해야하니까."

"서포트...그래, 그렇지. 잘 부탁해. 클릭."

"나만 믿어, 박사! 대신 잘 되면...나도 소개팅 해주기다?"

"하하...내가 아는 남자들이 그리 많진 않아서...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줄게."


온실 앞에 도착한 클릭과 박사는 서로에게 신뢰가 담긴 악수를 나누고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물론 이 때의 박사는 전혀 몰랐다.

모든 것이 그녀들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온실 안에 들어간 클릭과 박사는 태연하게 농사를 짓던 동아리 멤버들에게 합류한 뒤,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일상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클릭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물음표가 가득한 시선들을 태연하게 받아 넘긴 클릭은 박사를 백파이프에게 살며시 밀어주며 눈을 찡긋하더니 입모양으로 말했다.


평 소 대 로 행 동 해


...물론 그라니와 다르게 백파이프는 독순술을 할 수 있기에, 얼떨결에 박사를 받은 백파이프는 같이 스트레칭을 시작했고, 클릭도 평소대로 드론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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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클릭의 작은 방은 여느때와 다르게 많은 멤버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방금 목욕을 마치고 목욕 가운을 입은 채 방 바닥에 앉은 클릭.

낡은 체육복을 입은 채 클릭의 침대에 앉은 백파이프.

평소대로 잠옷을 입고 백파이프의 옆에 앉은 그라니.

헐렁한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으로 벽에 기대서 선 첸.

마지막으로 들어온 라이딩 슈트를 입은 호시구마.


"...그런데 호시구마씨는 라이딩 슈트가 있네."

"아, 이것 말입니까. 제 취미가 라이딩이라서요. 방금 하고 온 길입니다."


그라니의 질문에 태연하게 말한 호시구마는 영차, 하고 방바닥에 주저 앉더니 모인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서, 첸 팀장님과 제 방이 더 넓긴 합니다만...어쨌든 여기에 모이자고 한 이유가 있을겁니다."


그렇게 말하던 호시구마의 시선이 방 중앙에 앉아있던 한 명에게 꽂혔다.


"클릭씨. 어쨌든 무언가 좀 알아내셨습니까?"

"응. 굉장히 유익한 시간이였어."


그렇게 말하는 클릭을 보며 눈을 빛내는 백파이프와 첸과 그라니. 그리고 제법인데, 그런 표정을 짓는 호시구마까지.

잠시 방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더 이상은 못 참겠던 백파이프가 먼저 말했다.


"그래서, 어캐 됐사?! 박사는...내를 이상한 가스나로 생각하지는 않드나?!"

"당연히 그럴리가 없잖아. 백파이프."


그라니의 말에도 불안을 참지 못하던 백파이프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서 클릭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내는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 죽어부릴거다! 빨리 대답해도! 클릭 햇아!"

"잠깐! 잠깐! 이대로는..."


뭐라고 열심히 입을 여는 클릭이지만, 나름 진심인 와이번의 힘을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였고, 그렇게 정신없이 흔들리던 클릭을 구한 것은


"잠시, 백파이프씨. 냉정을 되찾으셔야 합니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호시구마였다. 아무리 와이번이라도 오니의 힘으로는 어느정도 억제가 가능했는지, 아니면 백파이프가 이성을 되찾았는지, 호시구마가 손목을 잡자 아차,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며 백파이프는 클릭에게 손을 떼더니 침대위로 다시 돌아갔다.

잠시 숨을 고르던 클릭을 보며, 첸은 늘 가지고 다니던 적소의 검집으로 백파이프의 머리를 본인딴에는 가볍게 콩 하고 때리고, 아야! 하면서 머리를 문지르는 백파이프를 무시한 채 클릭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클릭. 백파이프는 오늘내내 온실에서 엄청나게 불안해 했고, 그리고 너희 둘이서 너무 태연하게 들어온 걸 보니 너무 궁금한 나머지 아무래도 실례를 범한 것 같군."

"아하하. 괜찮아, 첸 팀장님. 그럴 수 있지."


어깨를 잠시 매만지던 클릭은 이내 입을 열어 박사와 나눴던 대화의 결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박사 본인도 백파이프씨를 분명 이성으로 좋아하게 된 것은 맞아. 다만 일단 박사는 백파이프씨를 여태까지 친구로 봐왔던 모양이니까, 일단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그리 판단하고 있어."

"오오...그렇나...! 클릭 햇아...정말 고맙다..."


클릭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집중해서 듣던 백파이프는 그동안 나름 불안과 걱정에 시달렸던 탓에 울먹이며 클릭에게 달려들어 있는 힘껏 껴안았고, 클릭의 얼굴이 숨을 못 쉬어서 새파랗게 될 지경이 될 뻔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첸의 적소에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백파이프였다.

어쨌든 클릭의 말에 누구보다 안도한 첸은 적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잘해주었다. 클릭. 사실...백파이프가 그렇게 갑자기 진도를 빼리라고 나도 전혀 생각은 못했다만...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첸 팀장님. 박사는 상상 이상으로 둔하니까요. 그렇게 차라리 돌직구를 우선 날려서 존재감을 어필하는 것이 잘 먹혀들었던 것이죠. 정말 천연이라고 해야할지, 순진하다고 해야할지...참으로 골치 아팠습니다."


이게 잘못되었다면...그보다 그렇게 백파이프가 폭주기관차가 될 거라고 전혀 생각을 못했던 첸과 호시구마는 그제서야 간신히 불안감을 떨쳐내고 웃으면서 백파이프에게 농담섞인 디스를 했고, 그라니는 백파이프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말했다.


"봐봐, 클릭이라면 잘 해낼거라고 했잖아? 그리고, 어쨌든 박사가 널 절대 싫어할거라고 아무도 생각 안했다고."

"어, 응...모두 정말 고맙사...그라구 오늘의 일등 공신 클릭 햇아에게 제일 고맙사!"

"하하, 이제 나도 좀 쓸만해졌나 싶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지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데이트 계획은 어떻게 할지, 그런 소녀스러운 이야기들이 잠시 나왔지만 이내 분위기를 환기하는 첸의 한 마디에 다시 한 번 방에는 냉랭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클릭이 말한대로...아무래도 로도스의 보안은 그렇게까지 좋은 편이 아닌 것 같기는 하다. 프틸롭시스의 말에 따르면 PRTS와 관리자만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상황에 대해서는 임의적인 판단뿐이다. 관리자는 아마 켈시나 아미야겠지. Leader One 이라는 사람도 분명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메세지도 위험할 수 있겠군요. 첸 팀장님."

"이미 우리가 뱉었던 말들은 어쩔 수 없다만, 앞으로는 단톡방도 조심해야겠어. 가급적이면 서로에게 말은 직접적으로 꺼내는 거다. 일단 별 효과는 없겠지만, 메세지들도 삭제해두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다."

"그거랑 관련해서 모두에게 말할 게 있어."


첸의 말에 다들 단말기를 꺼내서 단톡방의 메세지를 빠르게 삭제하기 시작했고, 클릭 또한 메세지를 빠르게 지우면서 자신의 가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누군가...분명 켈시라고 생각해. 박사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방법이 있는 것 같아. 아까 내가 확인해본 결과로는 박사가 차고 있던 시계가 제일 의심스러워."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라니의 물음에 침대의 리모컨을 달라는 몸짓을 하는 클릭에게 그라니가 재빨리 리모컨을 던져주었고, 능숙하게 리모컨을 받아서 버튼을 조작하는 클릭의 앞에 드론이 날아오더니 화면을 띄우기 시작했다.


"내 방에서 데이터가 수신되거나 송신되면 바로 확인할 수 있거든. 그런데 박사랑 있을때, 데이터 송신량이 늘어난 걸 보니까 아마 그 시계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보여."

"...하기사 박사가 최근에 새로 갖게 된 전자 기기는 그것뿐이니까..."

"다만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송신하는지는 잘 모르겠어, 데이터의 량만 보면 직접적인 대화 같은 것은 아마 도청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심박수나 그런 것들로 아마 종합적인 판단을 하지 않을까?"

"아...그렇다면 혹시 박사가 내랑 같이 있을때...갑자기 긴급 회의가 열렸던 건..."


클릭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그라니와 그 순간의 비밀을 깨달은 백파이프를 뒤로 한 채, 드론을 돌려보낸 클릭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따라서, 앞으로는 좀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내 방은 나름 방비를 해뒀지만 그래도 완전하진 않아. 따라서 회의는 자주할 순 없을 것 같고...그래도 알아낸 정보들을 최대한 서로 나누거나 하면서 임기응변 식으로 대응해야 할 것 같아."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와 클릭씨가 당분간 박사를 서포트합니다. 그리고 그라니씨와 첸 팀장님이 백파이프씨를 서포트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 어떻겠습니까? 박사와 저는 술친구고, 클릭씨를 믿고 있다고 하니까요."


호시구마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며 첸이 적소를 집어들었다.


"그렇다면, 기본 방침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쐐기를 박는다. 중간중간 방해가 분명 들어온다는 것은 확정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인다."

"서로에게 말을 거는 건 크게 상관이 없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가능한 조용히 나눈다. 평소에는 평상시대로 행동하고."

"특히, 켈시와 아미야를 조심하도록. 그 둘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프틸롭시스가 말한 Leader One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건 각자가 조용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고건 프틸롭시스 햇아에게 물어보믄 되지 않긋나?"


그렇게 말하는 백파이프에게 고개를 저으며 첸이 대답했다.


"아니, 이미 그녀는 우리를 약간이나마 인지했고 또 의심도 하고 있다. 따라서 포섭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 접근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다만 임의의 판단이 분명 필요한 시점이 올 것 같습니다."

"그 판단을 우리가 해야하는 거지...어쨌든 이미 절반쯤 왔다. 이제는 천천히 쐐기만 박으면 돼.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종료하지. 또 말할 것이 있나?"

"아, 그래 첸. 그래도 단톡방에서 수시로 농사에 관한 잡담이나 아무튼 이런 저런 이야기는 같은 건 하는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혹시나 의심을 받더라도..."

"아, 그래, 네 말도 맞다. 그라니. 그렇다면 당분간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하도록 하지."


그렇게 회의의 끝을 맺는 말과 함께 적소를 들고 첸이 먼저 방을 나갔고, 이내 그 뒤를 이어 시간 간격을 약간 두고서 한 명씩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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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마지막 메세지를 읽은 첸은 단말기를 침대 옆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눕혔다.


"여러모로 피곤해지겠지만...그래도 이것도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렇게 혼잣말을 하던 첸은 이내 해맑게 웃는 백파이프의 얼굴을 떠올리고 피식, 하고 쓴 웃음을 흘렸다.


"그 녀석은 빅토리아의 일 이후로 여태 힘들었으니까...그 녀석 나름대로의 안식처도 필요하겠지. 자...그럼..."


손을 위로 뻗어 침대 머리 맡에 작게 빛나는 스탠드등을 끄고 눈을 감은 첸은 앞으로의 일들이 모두 계획대로 평탄하게 흘러가길 빌며 잠을 청했다.

...물론 첸이 무척 바빠지는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는 근위국의 용은 평온한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도 와이번 소녀의 꿈을 안고서, 두 개의 달이 서쪽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밤이 깊어져 갔다.




감자 소녀와, 다가온 여름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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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이거 써봐야 얼마나 쓰겠나 했는데 자꾸 용량도 길어지고 되게 편안하게 써져서 놀랐음

다음 화는 나올지 아닐지 아무도 모름

나온다면 다음 화는 감자 소녀와, 쫓아온 가을 이런 제목을 쓰지 않을까

다만 백파 짤이 맘에 드는 게 없어서 표지로 쓸만한 짤도 찾아야 하고

'올려 줘'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



아니 꼭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