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화  3화



※여독타순정물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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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꽤 비를 많이 맞은 듯했다. 

셔츠는 다 젖어 상반신이 비쳐 보일 정도였으니…

엔시오는 나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나는 쿠리어에게 내려달라고 말했다.

그는 말없이 나를 내려놓았다.

 

빗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나버린 것일까, 슬피 흐르는 내 눈물을 가려주기 위함일까…

엔시오는 나를 안으려 했다. 

 

“한참을 찾았어. 맹우여…”

 

“만지지 마! 당신이…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정말, 걱정했네…”

 

“놔, 놓으라구.:

 

그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때 쿠리어가 엔시오의 팔목을 붙잡았다.

 

“쿠리어… 이게 뭐 하는 거지?”

 

“죄송합니다. 엔시오데스님… 당신에게 입은 은혜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쿠리어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당신의 뜻대로 하지 못하십니다.”

 

“…쿠리어?”

 

“박사님,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소원… 잊지 않으셨죠?”

 

“…어?”

 

그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빗속에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엔시오 한 명으로도 벅찬데 이 남자마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던 그때.

 

“쿠리어…! 박사! 하아… 하아… 한참 찾았잖아. 왜 비 맞고 있어 빨리 들어가자.”

 

“에..엔시아…”

 

“…”

 

쿠리어와 엔시오는 서로 말없이 노려보았다.

엔시아는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로 화를 내었다.

 

“둘 다 빨리 가자니까!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쿠리어.”

 

“…예.”

 

 

 



나는 방에 들어가 젖은 옷을 벗고 따뜻한 물로 몸을 녹였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또 허튼짓할까, 엔시아와 엔야가 같이 들어왔다.

 

“…저기, 너무 좁지 않아?”

 

“다 박사가 자초한 일이야.”

 

“바…박사님의 몸…”

 

어째서인지 엔야는 꼬리를 잔뜩 세우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금 무서웠다…

 

좁지도 넓지도 않은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목까지 푹 담그며 쿠리어가 하려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째서 엔시오는 비를 맞으며 나를 찾고 있었을까…

머릿속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저기… 엔야, 너무 가깝지 않아?”

 

“박사님이 도망가실까 봐 붙잡고 있는 거랍니다.”

 

“여기서 어떻게 도망가… 아앗, 은근슬쩍 만지지 마…!”

 

“후훗... 귀여우셔라…”

 

“엔시아, 도와줘…:

 

“싫 어.”

 

그녀는 화가 단단히 난 듯했다.

아마 말없이 사라진 것이 원인이겠지…

서둘러 몸을 닦아내고서 욕실을 빠져나왔다.

 

 

“조금, 춥네…”

 

따뜻한 음료라도 마시면 괜찮을 것 같아 복도에 있는 자판기로 향했다.

복도는 조금 소란스러웠다.

 

“…쿠리어, 네 입으로 설명해 보거라.”

 

“죄송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그녀에게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뭐…?’

 

“처음에는 그저 호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와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 감정은 품어선 안 되는 감정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스스로 죽여왔었습니다.”

 

“…나 때문인가.”

 

“…예, 그녀가 당신에게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그 마음을 죽여왔습니다. 당신의 뜻을 그저 따랐습니다.”

 

그는 이를 세게 깨물고서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그녀와의 관계를 거부했을 때에는 한편으로는 기뻐했습니다. 제가 품은 이 마음을… 그녀에 대한 마음을 더는 억누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하지만, 당신은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맴돌며 그녀를 계속 괴롭게 하셨습니다. 저는… 더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엔시오데스님 당신이 비록 그녀를 향한 마음을 접지 않으셨더라도… 저 또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어떠한 엄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엔시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없이 그를 내려보았다.

쿠리어는 바닥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 꿇은 채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그 말씀은.”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하겠다. 이러한 일로 내 사람을 잃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두 얼굴이 달아올랐다. 대화의 당사자인 나는 정말로 죽고 싶었다. 저들은 나를 수치스럽게 하여 죽게 만드는 것이 목적임이 분명하다. 

 

“…박사님?”

 

“그..그게 들으려고… 들은 거는… 아니…”

 

“보고 싶었어요.”

 

갑작스럽게 그는 나를 껴안았다. 조금 당혹스러웠다. 말문이 턱 막혀 어찌할 줄 몰랐다.

그를 밀어내려 해보았지만, 어찌 내가 그를 힘으로 밀어낼 수 있겠는가…

 

“놔…놔줘.”

 

“죄송해요… 무심코.”

 

“…다 사실이야?”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왜…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에요… 긴장이 풀려서 그만.”

 

나는 주저앉은 그에게 다가갔다. 어디 아픈 것은 아닐까, 혹시 비를 너무 맞아서 감기라도 걸린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는 그런 내 머리를 어루어 만졌다.

 

“박사님, 머리는 다 말리고 나오셨어야죠. 비도 많이 맞으셨는데 감기 걸려요.”

 

“미안… 따뜻한 음료라도 줄까? 금방 뽑아올게.”

 

“괜찮아요. 같이 가죠.”

 

그는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났다. 팔을 부여잡고 그를 부축하려 했다.

갑자기 쿠리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

 

복도 모퉁이에 다른 누가 있었던 느낌이 들었다.

늦은 시간도 아니었기에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이 되지는 않았다.

 

“박사님, 정말로 괜찮으니까… 팔은 안 잡으셔도…”

 

“응? 아…?”

 

나, 속옷을 안 입고 나왔다.

그는 황급히 재킷의 물기를 털고 내게 걸쳐주었다.

 

“조금 축축해도 참아주세요…”

 

“응… 미안해.”

 

그와 음료를 서너 개를 뽑고서 방으로 돌아갔다.

 

 

 

 

 

◇ 노시스의 서고

 

“…그걸로 괜찮은 거냐? 너, 그녀를 꽤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었잖냐.”

 

“그래, 훌륭한 지략가로서, 그녀의 가치는 꽤나 높았지. 그녀가 사내였으면 조금은 형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그 엔시오데스가 여인에게 연정을 품다니. 하, 오래 살고 볼 일이군.”

 

“하아…”

 

엔시오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댔다. 과연 이게 잘한 것일까…

손익을 따져본다면 손해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측근과 그녀가 이어진다면 용이하게 이용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는 자꾸만 아파져 왔다. 괴로웠다. 

먹먹한 가슴이 그를 괴롭혀왔다.

 

박사를 자신의 반려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자신이 보았던 여성과 너무나도 달랐다. 

자신이 풀지 못하는 난관을 정확한 묘수와 해답으로 풀어나가는 그 모습에 전장에서 아름답게 빛이 나는 그 모습에 그는 반하고 말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는 그녀와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자신에 어깨를 짓누르는 막대한 책임감과 여태 쌓아 올린 수많은 이들의 원한과 증오를 그녀에게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부산한 머리를 정돈하고 얼굴에 분칠하며 더욱 아름다워진 용모로 자신에게 다가올 때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이성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그녀를 밀어내고 기피했던 것이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시끄럽군.”

 

 

 

 

 



 

 

◇엔야의 방

 

 

“꼭 여기서 자야 해…? 내 방에 가서 자면 안 될까?”

 

“안 돼.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자고 가.”

 

“그래요. 박사님, 이쪽으로 좀 더 오셔도 되는데…”

 

“언니가 자꾸 껴안으니까 그쪽으로 안가잖아…”

 

“우으… 저 카란의 성녀라구요? 성녀는 쓸쓸하면 죽어버린다구요…?”

 

“아…알았어.”

 

엔야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꼬리로 내 허리를 붙잡고서 꽉 안았다.

가슴에 파묻혀 질식사하는 것이 내 사망 사인이 되겠구나.

 

요 근래 참 많은 일이 생겼다. 

감정 기복 선이 정말 미친 사람처럼 곡선을 탄 것 같다.

이렇게 단기간에 행복해하며 슬퍼도 했으며 죽고 싶기까지 했던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쿠리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엔시오의 모습이 이어 떠올랐다.

나는 정말 어찌해야 할까… 

 

“으음… 박사님, 거긴… 으읏…”

 

괴랄한 엔야의 잠꼬대가 조금은 무서워졌다. 

그녀는 어느새 내 가슴을 부여잡고 끌어당겼다. 도망치려 발버둥쳐보아도 꽉 안아 놓아주질 않았다.

엔시아도 내 몸에 달라붙어 옹알이했다. 

입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나를 깨물었다. 

 

‘다시는 너희 자매랑 안 자….’

 

 



 

 

 

 

“박사님, 좋은 아침이에요!”

 

“으..으응…”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낯뜨거웠다. 어제 그런 폭탄발언을 들어버려 제정신으로 바라보기 쉽지 않았다.

쿠리어는 아무렇지 않게 순진무구한 얼굴로 웃어왔다.

평소보다 더 밝은 분위기에 적응하기 너무 힘들었다.

 

“저기, 쿠리어…”

 

“네, 박사님.”

 

“…아니야.”

 

차마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을 하지 못하겠다.

저렇게 해맑게 웃는 얼굴에 어찌 침을 뱉을 수 있겠는가…

 

그는 평소처럼 집무실에서 내 업무를 거들었다. 

평소와도 같이 엔시아는 빈둥거리기 위해 집무실 소파를 차지했고, 엔야는 자꾸만 찾아와 내 몸을 희롱했다.

모든 것이 평소와 같았다. 단 한 사람의 빈자리만을 제외하고서.

 

 

*노크소리*

 

“네! 들어오세… 뭐야, 플레임브링어. 무슨 일인데?”

 

“뭐야, 그 반응은. 됐고, 텍사스가 부탁한 택배다.”

 

“그걸 네가 왜 가져와?”

 

“…전해줬으니 간다.”

 

나는 의아해하며 택배를 뜯었다.

회색의 긴 코트가 들어있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코트의 벨트는 은색으로 도금되어 꽤 볼 만했다.

 

“왠 코트야? 옷 샀어?”

 

“아니… 누가 보낸 것 같은데, 발송인이 안 적혀있어.”

 

“…! 박사, 잠깐만 나갔다 올게.”

 

“어? 알겠어.”

 

그녀는 코트를 훑어 보더니 이내 어딘가로 황급히 뛰어갔다.

 

날도 꽤 쌀쌀해졌고 겨울옷이 필요하던 참에 잘되었다.

코트는 딱 내 몸에 맞춰진 치수인듯했다.

누가 보냈으면 어떠한가, 그저 감사히 받을 뿐이다.

 

 

 

 

◇노시스의 서고

 

“오빠! 엔시오 오빠! 여기 있지?!”

 

“…엔시오의 동생이냐?”

 

“노시스 오빠, 엔시오 오빠는?”

 

“그 녀석이라면…”

 

“역시, 안에 있는 거지?” 

 

그녀는 노시스를 지나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엔시오는 어딘가 불안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오빠! 제정신이야? 대체 오빠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왜 자꾸 박사를 괴롭히는거냐구!”

 

“…별다른 뜻은 없다.”

 

“그 사람이 오빠만을 바라봤으면 좋겠어? 오빠는 사랑한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으면서 그저 맹목적인 그 사람의 헌신과 사랑이 필요한 거야?!”

 

“나는 그런…”

 

“변명하지 마. 정말로 나, 오빠한테 계속 실망 중이니까. 내 병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잖아. 그렇다면 나 떠날 거야. 그러면 적어도 박사는 오빠를 잊고 편해질 수 있겠지.”

 

“엔시아, 무슨…”

 

“나는 오빠가 박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 아니, 알 수밖에 없었어. 내가 줄곧 봐왔던 오빠의 모습이, 그 두 눈이 너무나 달라졌으니까.”

 

“착각이다. 엔시아.”

 

“아니! 착각일 리가 없어. 그도 그럴게. 어떤 여자를 보아도 담담하던 오빠가...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꾸미고 다가가면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면서 시선을 피했잖아.”

 

“…정말이지, 여동생에게는 못 당해내겠군.”

 

“그래서, 정말로 이대로 끝낼 거야?”

 

“내게는 자격이 없다… 이제 와서 무슨…”

 

그녀는 엔시오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 답답아! 제발, 좀! 줄곧 좋아했잖아, 바라봤잖아! 왜 자꾸만 피하려는 거야. 적어도 내가 알던 오빠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야.”

 

“…”

 

“가. 지금 달려가서 그 사람을 붙잡으라구.”

 

엔시오는 겉옷을 챙겨 서둘러 서고를 뛰쳐나갔다. 

 

“진짜… 우리 가족은 왜 항상 이 모양인 거야.”

 

“내가 할 소리다. 용무가 끝났으면 어서 떠나라.”

 

“…”

 

 

 

◇로도스 복도

 

엔시오데스 실버애쉬. 그는 로도스 함내 복도를 달리고 있다. 그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뛰었던 것이 얼마 만일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저거 실버애쉬 아니야?”

 

“착각했겠지. 그 녀석이 뛰어다닐 놈은 아니다.”

 

“그…렇지?”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필사적으로 달리는 모습에 놀랐다.

복도를 뛰어다니며 그는 박사를 찾았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당장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또 쿠리어에게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그를 괴롭게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달려 그녀의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오라버니? 왜, 오신 거죠?!”

 

“하아… 하아… 엔야, 박사는… 그녀는 어디로 갔지?”

 

“방금전에 갑판으로…”

 

 

그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판으로 향했다.

저 멀리 갑판 위에 두 사람이 보였다.

애타게 찾던 그녀와 쿠리어의 모습이 보였다…

 

 

 

 

 

◇로도스 갑판

 

어제 한바탕 비가 몰아친 덕분일까, 하늘이 새파랗게 칠해졌고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쿠리어와 나는 갑판 난간에 기대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박사님, 그때 말씀하신 소원…”

 

그의 모습 뒤로 엔시오의 모습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렸다. 설마 그가 뛰기라도 한 것일까…

쿠리어는 나를 뒤로 숨긴 채 그의 앞에 마주 섰다.

 

“무슨…일이십니까. 엔시오데스님.”

 

“…그녀와 할 말이 있다.”

 

“엔시오데스님, 저는 적어도 당신이 약속한 바는 지키시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하다, 쿠리어. 잠깐이면 된다…”

 

엔시오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의 눈은 내가 봐왔던 엔시오의 눈이 아니었다. 굉장히 애처롭고 구슬프게 나를 바라보았다…

 

“…박사님, 그때 말한 소원. 지금 사용해도 될까요.”

 

“..어?”

 

“부디… 엔시오데스님께 가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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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결말을 향해 가는구나~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함다!

재밌는 소재는 언제나 환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