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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차.


어제의 댄스 교습으로 인해서 온 몸이 가루가 될 것 같다.

믹서기에 나를 넣고 돌리면, 아마 이런 느낌이 아닐까...그나마 아이린이 끝나고 마사지를 해줘서 어떻게든 스트레칭만 하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스트레칭 하면서 푸는 동안,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야호, 리더! 배달이야!"


문 밖에는 빨간 머리카락의 산크타 소녀, 엑시아가 길쭉한 상자를 들고 있었다.

여기에 싸인해줘, 라는 그녀의 말에 펜을 들고 최대한 떨리지 않게 서명을 하자 음음. 이거면 됐어. 하면서 그녀는 상자를 내 방에 들여다놓고 나갔다.

상자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니, 보낸 사람은 엘리시움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 모임과 관련해서 준비물 얘기를 어제 꺼낸 것 같긴 했는데, 이게 뭘까.

어쨌든 확인은 해봐야지. 그렇게 칼을 꺼내서 상자를 개봉하자, 안에는 은빛 정장 한 세트와 편지가 한 통 놓여있었다.


『오늘 20시. 강당.』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어쨌든 업무를 해야겠지.


그렇게 도착한 집무실에선 미리 도착한 아이린이 서류를 마치 시본을 보는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나의 인사에도 반응하지 않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중얼거리면서 서류를 미친듯이 넘기며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청난 기백을 뿜는 아이린과 한동안 서로 말 없이 서류를 처리하던 도중,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기...혹시 그건 당신의 취향인가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시선은 나의 찻잔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을 보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여보자, 읏. 하면서 그녀는 여전히 찻잔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나에게 절대 눈을 마주치진 않으려는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찻잔 이야기인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어쨌든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응,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다시 우르수스의 눈처럼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빨갛게 물들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어떤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재밌으니 관찰하는 동안, 미간을 모은 채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는지 결론을 끄덕였다.


"...그렇다면 알았어요.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럼, 조금 있다가 제 방에 와주세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내 책상으로 다가와 서류를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문 밖으로 허둥지둥 나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18시. 나도 슬슬 준비를 하러 가야겠지.


...생각보다 몸에 잘 맞는 정장을 입고 아이린의 방으로 향했다.

주변의 지나가던 오퍼레이터들이 뭐라고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역시 옷걸이가 중요하지. 나에게는 영 아닌거 다 안다고.

입으로는 하지 못할 말을 속으로 투덜거리며 아이린의 방에 도착해서 노크하자, 안에서 허둥지둥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네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아이린의 목소리가 아닌데, 혹시 방을 잘못 찾아왔나?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어머, 파렴치한 박사, 좋은 저녁이야. 작은 새는 거의 준비가 다 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줄래?"


그렇게 튀어나온 검은색 드레스 차림의 상어, 아니 로렌티나에게 잠시 당황하자, 그녀는 내 가슴팍을 부드럽게 밀어서 문 밖으로 나를 내보냈다.

어째서 로렌티나가 여기에 있는거지...하고 문 앞에 서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억누르는 동안, 방 안에서의 소리가 멎고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안에서 마찬가지로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스카디와 글래디아가 나왔다.


"...안녕, 파렴치한 박사."

"안녕하십니까. 파렴치한 박사님. 아니,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건 우리에겐 좋은 일이지만요."


셋 다 그야말로 정석적인 드레스 차림으로 여기서 무엇을 하는건지 도저히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동안, 로렌티나가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자! 어서 나오렴! 하고 안에 외쳤다.

그러자 안에서 우으...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제일 먼저 은색 머리띠를 한 회색 머리카락이 나타났고, 그 뒤를 이어 옅게 화장한 얼굴이 나오더니, 


"...아무래도 조금 부끄러워서..."


어깨와 가슴쪽이 깊게 파여서 노출도가 상당히 높은 은빛 드레스 차림의 아이린이 최대한 몸을 움츠리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엘리시움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아니 그렇다면 오후의 질문은 설마? 아니 분명 분명 분명 이정도 노출이라면 파렴치하다고 불릴 만하지...!

잠시 머리가 어지럽던 찰나, 로렌티나가 나를 아이린에게 살며시 떠밀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자, 그럼 박사. 피앙세에게 해줄 말이 있지 않아?"


피앙세는 또 뭐지? 그러고보니 내가 오늘분 오리지늄을 섭취했던가. 아니...이럴땐 이성회복제를 쟁여둔 게...아니, 합성옥이 맛있던가?

사고가 정지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건 내가 사고를 정지한 것이 아닌게 아닌가?

눈을 감고 머리를 짚던 찰나, 무언가가 내 허리에 닿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떠보니 아이린의 손이 내 허리에 닿아있었다.

아마 익숙치 않은 하이힐 때문인지 자세가 무너져서 내 품에 뛰어들듯이 넘어진 모양이다.


"...저기, 당신. 혹시...나 안 어울려요?"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불안에 가득한 눈빛으로 말하는 아이린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어른스러운 코디네, 잘 어울려.


"어른스럽다...잘 어울린다. 응...후후...다행이네요..."


그렇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는 아이린을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붙잡아주었다.

...아까부터 뒤에서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신나게 웃는 로렌티나와 굿 잡, 하면서 따봉을 해주는 스카디.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팔짱을 끼고 우리를 보는 글래디아가 보였다.

그래서 얘네는 왜 여기에 있는걸까...

그것을 물을 틈도 없이 스카디와 글래디아가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자, 박사. 어서 에스코트 해줘야지? 우리 작은 새는 아직 하이힐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야."


그 말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 둘을 문 밖으로 끌어내서는 나란히 세운 로렌티나가 아이린의 양손을 붙잡더니, 나의 왼팔에 팔짱을 끼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와 아이린은 뒤에서 에스코트에 방식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면서 따라오는 로렌티나와 수많은 오퍼레이터들의 시선을 느끼며 함께 강당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넘어질 뻔한 아이린을 열심히 받쳐주느라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모를 강당의 문을 열자 순식간에 수다 소리와 음악 소리로 시끄럽던 강당이 고요해지더니, 시선들이 우리에게 쏠렸다.

시선들을 느낀 아이린이 조금 더 내 팔에 달라붙으며 고개를 숙이자, 

요! 하는 경박한 목소리와 함께 빨간 넥타이와 함께 하얀 연미복이라는 엄청나게 눈에 띄는 의상을 입은 엘리시움이 손을 흔들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전우여, 무려 30분이나 늦었잖아! 늦으면 벌주 세 잔이라고 어디에서 그랬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렇게 말한 엘리시움의 손에는 샴페인 잔이 들려져있었다.

이제야 주변을 좀 볼 여유가 나서 둘러보니, 몇 개의 테이블에 간단한 안주와 와인, 그리고 샴페인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예전 어딘가에서 겪은 사교회 같다는 느낌을 가감없이 솔직히 말하자, 엘리시움이 웃으면서 샴페인 잔을 흔들었다.


"아아. 당연히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이렇게 분위기를 풀어주는 것이 있어야 하거든! 어이 쏜즈!"


넉살 좋은 엘리시움 덕분에 다시 강당의 분위기는 내가 들어오기 이전처럼 웅성거리는 수다 소리와 낮게 깔린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정석적인 사교회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이건 솔직하게 그에게 감사해야겠지. 감사하다는 말을 하자, 아하하! 하고 웃은 엘리시움은 다가온 쏜즈에게서 종이를 건네받더니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렇지, 그렇지. 그럼 기브 앤 테이크라고, 너랑 재판관님이 이걸 조금 있다가 개회사라는 느낌으로 무대에 올라가서 읽어줘!"


붉게 물든 얼굴로 우리에게 순식간에 뭐라 적힌 종이를 떠넘긴 엘리시움은 쏜즈에게 어깨동무를 하고는 넉살도 좋게 여러 테이블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진짜 저 사교성이 때로는 부러울 지경이다. 그렇게 떠나간 엘리시움은 신경끄고 아이린과 나란히 서서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평범해서 오히려 재미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자! 그럼, 우리 이베리아 향우회의 첫 모임을 축하하며 박사가 특별히 왔어!"

"사실 이 모임은 박사가 하자고 아이디어를 낸 건데 어쨌든 내가 쓴 대본...아니 그래 정정할게! 정정! 옆구리 아파! 크흠. 위디가 쓴 대본인데, 아이 참! 여튼 개회사 비슷한거 준비했거든! 자, 전우와 재판관님! 무대 뒤에서 등장하라고!"


하얀 드레스 차림의 위디가 엘리시움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어떻게든 폭주를 막아내고, 마침내 우리의 순서가 왔다.

무대 뒤에서 아직도 긴장했는지 다리를 조금 떠는 아이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휴우 하고 한숨이 옆에서 들려왔다.

이젠 안정된 모양인지 내 팔에 기대서 똑바로 선 그녀와 함께 무대 위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스탠드 마이크 앞에 도착한 채 정적이 감도는 무대 위에서 밑을 내려보니 기분이 좀 묘했지만...

아, 그래. 아이린이 먼저 시작해야하지. 

부드럽게 팔짱을 낀 그녀의 오른손을 쓰다듬자, 깜짝 놀랐는지 삐약...! 하고는 마이크에 다 들리도록 목소리를 낸 그녀가 얼굴이 빨개지더니 흠흠 하면서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수군수군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몇 번 헛기침을 하던 그녀는 마이크 앞에 서서 조금은 떨리면서도 동시에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이베리아 동포 여러분. 저는 전(前) 재판관이자 전달자인 아이린입니다."


그렇게 아이린이 고개를 숙이던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마이크 높이는 엘리시움 기준으로 고정되어있다.

즉 키가 작은 아이린이 고개를 숙이면 마이크가 너무 가깝게 다가온다. 

물론 이 생각을 하는 순간 이미 늦었다.

말릴 틈도 없이 마이크와 이마가 부딪혀서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한 번 삐약! 하고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감싸쥔 아이린과 함께 강당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내 팔에서 손을 뗀 탓에 균형을 잃은 그녀가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서 뻗은 양 팔로 그녀를 받쳐주었다. 아마 조금만 늦었어도 뒷통수를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뻗은 아이린의 양 팔이 내 목에 감긴 탓에, 무대 위에서 어째선지 왈츠의 마지막 자세처럼 서로 안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리던 찰나.


무대 밑에서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께 함성이 들려왔다.


"이야~정열적인 무대였어, 전우!"

"...의도는 정말 완벽하게 달성되었군. 설마, 이것도 네가 계획한 일인가?"


어떻게든 무대에서 내려오자 순식간에 쏜즈와 엘리시움, 그리고 몇 몇 이베리아 출신 오퍼레이터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여러가지 말을 건넸다.

개그 솜씨가 무척 뛰어났다.

내 점수는 10점 만점에 12점이다.

앵콜도 해달라.

부러울 정도로 피앙세랑 사이가 좋아보였다.

피앙세라는 말에 신경이 쓰여서 받아들은 잔의 샴페인을 마시면서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오늘 박사가 피앙세와 함께 참석한다길래 누군가 했지! 근데 설마 저리 작은 아가씨인데다가 재판관일 줄이야! 대단해! 어떻게 꼬신거야?"


재판관도 사람이긴 사람이구나, 괜히 멀리 했나? 저리 귀여운 사람인 줄 몰랐는데 인사라도 좀 나눌까? 

그런 말들이 주변에서 들려오고, 더 추궁할 틈도 없이 술과 안주가 오갔다.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다양한 오퍼레이터들과 아무 말 대잔치를 하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도 여자 오퍼레이터들 사이에서 귀여워라! 이것도 먹을래? 나도 먹일래! 이거 달고 맛있어! 같은 소리와 함께 아이린의 중간중간 삐약삐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애완동물 취급 받는 모양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거리를 두는 것 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한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간이 제법 지나갔다.

이제 슬슬 가볼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저 멀리에서 로렌티나가 아이린을 공주님처럼 안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박사, 좋은 밤이야~. 피앙세가 당신을 찾는데?"

"난 안 취해써! 내려놔!"


이거 놔! 하면서 버둥버둥거리던 아이린은 나를 보자마자 더 거세게 몸부림치더니 마침내 로렌티나의 품에서 탈출했다.

그렇게 불안불안하게 바닥에 선 아이린은 걸을지 말지 고민하듯 발을 몇 번 들다가, 에잇!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나에게 점프했다.

...최대한 애를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받아주긴 어려웠다.

그렇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나와 내 품에서 안겨서 이마를 비비적거리는 아이린의 주변을 오퍼레이터들이 둘러싸더니 찰칵찰칵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말해두지만 난 애완동물이 아니야! 그리구 저 사람들...자꾸 저한테 먹여요! 맛있긴 한데 살찌면 당신이 싫어할까봐 참았어요! 솔직히 두 개 먹긴 했는데..."


사진 찍는 소리에 시끄럽다는 듯 짜증이 난 목소리로 칭얼거리던 아이린은 곧 눈을 감고 내 품에 파고 들었다.


"그럼 둘 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우리가 좀 배려를 해줘야겠지?"


로렌티나가 그렇게 말하자 오퍼레이터들은 아쉬운 듯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이린이 잠들때까지 쓰다듬어주었다.

오늘은 상당히 보람찬 하루였다.



21일차.


어시스턴트의 일과는 9시부터 시작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이린이 10시가 넘었음에도 집무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부터 단말기로 연락했지만 답장도 없는데, 아마도 숙취인가?

조금 걱정이 되서 의료부에 연락을 취했다.


"네, 박사님! 하이비스에요!"


단말기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그녀 특유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순간, 연락을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잘못 걸었다고 말하고 끊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나를 환자로 단정지었는지 한동안 뭐라고 빠르게 말하더니 영양식을 준비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연락을 제멋대로 끊어버렸다.

...이건 좋지 않다. 최대한 빨리 어디론가 숨어야겠다.

그러나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집무실 밖으로 나온 순간, 이쪽을 빠르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왔다.

일단 무작정 반대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나의 뒤에서, 지옥의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앗! 박사님! 어딜 가시는 건가요! 여기 특제 샐러드를 준비했어요!"


그 날 맞이한 재앙도 이것보단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뒤에서 오는 재앙보다 더 무서운 지옥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분명 같이 뛰었지만 나는 점점 체력이 빠지는데, 히비스커스는 아직도 쌩쌩하다.

저렇게 뒤에서 아직도 소리치면서 달려오고 있는 걸 보면 아마 한 시간쯤 더 달려도 멀쩡할 것 같다.


"박사님! 식전 운동도 적당히 하셔야죠!"

"박사님! 못 도망가요! 다 드셔야죠!"

"박사님! 감히! 제 앞에서! 끼니를! 거르시려고! 하시다니!"

"박사님! 쉬시믄 안대용♡!"


누가 전장에서 깃발을 무기로 쓰냐고? 그보다 마지막은 니 대사가 아니잖아.

아무튼 어떻게 해야 히비스커스를 떼놓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코너를 재빠르게 돌자, 화장실이 나타났다.

그 순간 빛보다 빠른 속도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제 아무리 히비스커스라도 남자 화장실까진 못 따라 들어오겠지.』


그렇게 나는 재빨리 화장실에 들어가서 첫 번째 칸의 문을 열고 바로 닫았다.




분명 이론상으로 완벽한 작전이였다.

다만 이론이란 것은 늘 완벽하지 않은 법이다.

늘 변수가 존재하기에 실험을 통하여 이론을 완성시키는 것이 우리 같은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

내가 생각해낸 

『히비스커스는 남자 화장실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론에서도 변수는 물론 존재했다.




첫 번째. 들어 왔을때, 소변기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던 나의 눈.

두 번째. 모든 칸의 문이 열려있었는데 유독 첫 번째 칸만 문이 닫혀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나의 머리.

세 번째. 내 눈 앞에서 하얀 스타킹을 막 올리고 있던, 나를 무척이나 걱정시켰던 아이린.


종합적으로 말하자면 X됐다.

놀란 표정의 아이린의 입을 재빨리 손바닥으로 틀어막은 나는, 쉿. 하고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그렇게 빠르게 작은 소리로 상황을 설명하자, 어째선지 내 손바닥에 촉촉하고도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닿았다.

설마...재빨리 손바닥을 떼자, 내 손바닥을 핥은 혀를 살짝 내민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왼쪽 눈으로 살며시 윙크를 하더니 왼손으로 스타킹을 올리면서 오른손을 뻗어 내 허리 옆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렇게 히비스커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라...박사님의 소리가 이쯤에서 끊긴 것 같은데...그런데 여기는 여자화장실이고..."


왜 간판이 바뀌어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점점 가까이 다가온 발자국 소리에 긴장하던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저기, 누구 계신가요? 혹시 박사님인가요? 그럼 순순히 나오시는게 이로우실거에요."

"네? 누구신가요?"


내 앞의 삐약이, 아이린이 특유의 목소리로 말하자 밖에서는 조금 당황한 음색으로 히비스커스가 대답했다.


"아, 히비스커스에요. 저기 혹시 박사님이 여기로 들어오진 않으셨나요?"

"전 아이린이에요. 아뇨, 잘 모르겠네요. 그보다 이 상황에선 대화를 길게 끌고 싶진 않네요."


능숙하게 받아넘긴 아이린의 말에 밖에서 히비스커스가 아, 맞네요. 실례했습니다. 박사님은 어디 가셨지...라는 말과 함께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죽는 줄 알았다. 발소리가 저 멀리로 사라진 순간, 긴장이 풀려서 바닥에 주저앉자 쿡쿡 웃은 아이린이 그대로 손을 내 머리에 가져가더니, 천천히 쓰다듬었다.


"...당신도 참, 바보네요. 역시 제가 평생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늘 쓰다듬다가 막상 내가 쓰다듬어지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아이린에게 어째서 연락을 받지 않았냐고 말하자,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어제 잃어버린 모양이에요. 그래서 찾아다니던 중이에요."


같이 찾으러 갈래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나저나 제가 들어오기 전까진 분명 여자화장실이라고 간판이 걸려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남자화장실로 바뀌었네요. 그리고...첫 칸이 하필 잠금장치가 고장나서...손 좀 봐야겠네요."


화장실과는 별개로 누가 그랬는진 모르겠지만, 찾아내면 손 좀 봐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히비스커스 표 특제 샐러드의 쓴 맛을 보여줄 것이다. 진짜로.

그렇게 다짐하며 아이린과 함께 어제 모임을 진행했던 강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청소 중인 위디가 보였다.


"박사랑, 아이린이네. 어서 와."


그렇게 손을 흔든 위디는 저수포로 물을 이곳저곳에 뿌리더니 납작한 자동 청소기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청소기들이 움직이는 동안, 가볍게 피한 아이린이 위디에게 다가갔다.


"저기, 혹시 내 단말기 못 봤어?"

"아, 그거 말이지? 저기 단상 위에 올려뒀어."


어제 박사가 널 잘못 안고 간 모양이야. 지갑도 놓고 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뒤를 가리킨 위디의 손 끝에는 지갑과 단말기가 있었다.

어제라는 말에 얼굴을 살짝 붉힌 아이린이 재빨리 그것들을 회수하고 내 손을 잡아 끌면서 강당 밖으로 끌고 나가는 동안에도, 위디의 말은 계속되었다.


"박사는 팔 힘을 좀 더 키워야겠어. 솔직히 공주님처럼 안는 건 기대도 안했는데, 짐짝처럼 짊어지고 가는 건 좀 아니잖아? 그래도 귀여웠으니 상관 없...어머. 내가 괜한 말을 했나?"


그렇게 문 밖으로 나가며 위디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위디는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문은 제대로 닫고 나가고."



익숙한 집무실로 돌아와서 의자에 앉자, 아이린이 마찬가지로 소파에 앉아서 단말기를 켰다.

잠시 뒤, 그녀의 입에서 으엑, 하는 소리가 나왔다.


"...하룻밤 사이에 문자가 이렇게나 많이 왔네요...이름을 모르는 사람들도 제법 있고...어제는...아니, 이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아요. 아시겠죠? 전 아무튼 기억 못해요."


솔직히 좀 궁금하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왼 편에 앉아서 단말기를 내려다보자, 잘 들어갔니. 같은 안부 인사부터, 같이 점심 먹을래? 같이 이런 저런 내용이 적힌 문자들이 여러 개가 와있었다.


"...여태까지 문자는 당신과 로렌티나...아니 언니한테서 온 것이 전부인데."


그렇게 말한 그녀의 얼굴을 옆에서 들여다보자,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긁적인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열심히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답장을 보내던 아이린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보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재판소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겠죠. 이 모든 건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에게 오른손을 뻗자, 자연스럽게 내 품에 파고들어서 이마를 비비기 시작한 그녀를 감싸 안아주었다.

그러자 헤헤, 하고 웃은 그녀는 이내 내 무릎 위로 올라오더니 내 턱에 머리를 가져다 대고 마저 답장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는 게 슬슬 즐거워져서 고민이 될 정도로,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떤 녀석이 간판 바꿔치기 한 거지.


"아 맞다, 당신. 앞으로 언니가 댄스 교습 매일 매일 하러 오라고 했어요. 저랑 같이 가야해요."


...오늘은 어쨌든 보람찬 하루가 될 것 같다.

그렇게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내 무릎에서 내려온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22일차.


"당신...미안해...제발...다시는 안 할게...그러니까..."


울면서 매달리는 그녀를 나는 냉랭하게 뿌리치고 양 옆에 선 가드 오퍼레이터들에게 데리고 나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끌려가면서도 그녀의 입은 쉬지 않았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줘! 제발! 다시는 안 할거라니까!"


끌려가는 그녀에게 빙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자, 






거짓 울음을 멈춘 그녀, 로프는 나에게 사색이 된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히비스커스의 건강식만은 제발 안 돼! 뭐든 할게! 그러니까! 살려줘!"

"자업자득이야. 그리고 겨우 음식인데 왜 그리 호들갑이야?"

"맞다. 겨우 음식인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소싯적 볼리바르에서는..."

"위슬래시 교관과 도베르만 교관은 몰라서 그러는거지! 제발! 숨겨놓은 돈 모두 다 줄테니까!"


집무실에서 나가는 와중에도 소리를 질러대던 로프를 내보내자, 마침내 집무실이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손수건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당신, 수고했어요. 땀 좀 닦을래요?"


아이린이 예전에 커피를 쏟았을때 닦은 내 손수건이였다. 계속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아이린이 내민 손수건으로 땀을 닦자, 그녀는 다시 그것을 낚아채더니 주머니에 소중하게 넣었다.

더러워졌을테니 내가 빨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손사레를 치더니 말했다.


"아, 아뇨. 이건 제가 할 일이에요. 아니, 부디 하게 해주세요. 그나저나 오퍼레이터 히비스커스의 건강식은 대체 어떻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건가요?"


뭔가 석연찮지만, 아무래도 괜찮겠지. 그렇게 그녀에게 히비스커스의 건강식에 대해서 설명하자, 으음...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머리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디카페인 커피에 고기, 치즈, 피클, 양상추를 뺀 햄버거. 그리고...야채 12종 믹스 샐러드...거기에 정체불명의 영양 드링크. 그럼 그 햄버거는 그냥...토마토랑 빵만 남았잖아요?!"


기겁한 표정의 아이린에게 라바의 얘기를 해주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정말 끔찍하네요...그렇게 말하더니 쌓인 서류의 절반을 가져가서 소파에 앉아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늘도 그녀와 함께 서류를 처리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그녀가 한 마디를 던져왔다.


"그나저나, 저희에겐 서로 애칭...같은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그녀를 보니 서류는 다 처리한 모양인지,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어쨌든 갑자기? 뜬금없이? 그런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그녀는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서는 어디서 꺼내왔는지 잡지를 하나 펴더니 어딘가를 가리키고 밑줄을 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더욱 가까워지려면 애칭이 필요하다. 그렇게 적혀있죠? 자, 어서 제게 걸맞는 애칭을 지어주세요."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나를 보는 아이린에게서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진지함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도 그 진지함에 응해줘야겠지.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별명을 입에 담자, 아이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볼을 부풀렸다.


"삐약이라뇨! 제가 병아리에요? 삐약이가 뭐에요!"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채 삐진 아이린을 달래기 위해 최대한 괜찮은 말을 떠올려서 말했다.


"...병아리는 혼자 두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저를 언제나 보고 싶다..."


뭐, 뭐...제법 맘에 드는 말을 하시니까, 특별히 삐약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붉힌 아이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그녀가 내 품 안으로 가볍게 뛰어들었다.

...생각해보니 요새는 나에게 마주보는 방향으로 자꾸 안겨드는데, 이것도 일단 기록은 해둬야겠다.

그렇게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자,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제 애칭을 불러주세요. 당신."


삐약아, 그렇게 말하자, 계속 해주세요! 라고 말하며 더욱 달라붙는 그녀였다.

...결국 그녀가 떨어진 것은 약 100번 정도 말한 뒤였지만, 어쨌든 오늘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어째서일까,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조금 아쉬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분 탓이겠지.

마지막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로렌티나에게 받는 지옥의 댄스 교습까지, 오늘은 어쨌든 보람찬 하루였다.


...이제 8일 남았다.



23일차. 실험 종료까지 7일.


"아, 그래요. 당신. 저랑 가조...아니 어쨌든 사진을 찍겠다고 했죠? 언제쯤 찍을래요? 오퍼레이터 바이비크를 소개 받았거든요. 그랬더니 4일 전에 말해주면 다양하게 준비해주겠다고 하네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의자를 하나 끌고 오더니 내 옆에 앉아서 디자인들의 예시라고 옷이 그려진 종이 몇 장을 건네주었다.

가끔 느끼지만, 우리는 정말 제약회사가 맞긴 한 걸까. 

이래서야 수상하게 봐도 정상이긴 한 것 같다. 

그렇게 내민 종이에서 몇 개를 골라 동그라미를 치자, 저는 이게 더 좋은 것 같아요. 라고 말하며 아이린이 몇 개를 더 골라 동그라미를 치더니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자, 그럼 언제쯤이 좋을까요?"


아이린의 귀가 파닥파닥하고 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이 보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달력을 보고, 5일 뒤가 어떻냐고 묻자 으음...하고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다음날이 무도회니까요, 적절한 타이밍 같긴 하네요. 서로 옷도 좀 입어보고...좋아요. 카메라도 구해야겠고요."


아, 그럼 옷은 제 방에 가져다 달라고 말해놔야겠어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은 문 밖으로 나갔다.

뭔가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 기분이지만, 실험은 계속 되어야 한다.

망설일 시간에 서류를 하나라도 더 처리하는 것, 그것이 내 목표다.

그렇게 내가 생각해도 나름 거창한 생각을 품고, 서류를 하나씩 처리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린도 다시 돌아와서 함께 서류 더미를 헤쳐 나간 결과, 평소보다 더 빨리 끝낼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남는 시간동안은 무엇을 할까, 그렇게 고민하던 순간에 그녀가 나에게 손짓했다.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까, 오늘은 함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떨까요? 최근 많은 일이 있었잖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손짓에 이끌려 소파에 앉자, 영차, 하고 무릎 위에 기어올라와서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저는 사실 제 이마를 별로 좋아하진 않아요. 너무 넓어보여서...틱택토도 할 수 있을 것 같잖아요?"


왼손으로 내 목에 팔을 두른 그녀가 오른손으로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확실히 좀 넓긴 하지만, 이것도 개성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웃으면서 이마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마에 키스해주세요. 여태까지 제게 잘못한 게 있다면 이걸로 용서해줄게요."


나에게 더 마음을 연 그녀를 보고 실험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실험에 대해서 생각하니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큰 잘못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죄책감을 담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에...엣! 하면서 삐약삐약거리기 시작한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몸을 바둥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어이쿠. 떨어질 뻔했다.


"하...하란다고 진짜로 하시다니...!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그...그러니까..."


한 번만 더 해주면 용서해줄게요! 그렇게 말한 그녀의 이마에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마음 속 한 켠이 조금 이상해진 느낌이 든다.

어쨌든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으니 상관없겠지.

여세를 몰아 댄스 교습도 오늘은 무사히 끝냈다.

제법이라고 칭찬하는 로렌티나와 아이린을 뒤로 한 채, 샤워실로 향했다.


...이제 7일 남았다.



24일차. 실험 종료까지 6일.


"저기...당신. 혹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나에게로 가까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그럼 기분 탓이려나요...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양손으로 내 왼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무언가 힘든게 있다면 언제든지 제게 말해주세요."


그러는 그녀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혹시 쓸데없이 걱정하게 만들어버린걸까.


"아뇨, 쓸데없는 건 아니에요. 당신과 저는 서로의 힘든 걸 절반으로 나눠서 드는...그..."


뺨에 살짝 홍조를 띄면서 말하는 그녀는 더 말을 잇지 못하더니, 그저 내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따스해진 느낌이 든다.


"아, 맞다. 저 오늘 점심은 다른 분들과 먹기로 했어요. 당신도 포함해서요. 어차피 다른 분과 약속은 없잖아요? 제가 잘 알아요."


어째선지 그녀에게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오늘은 아쉽게도 다른 오퍼레이터와 점심 약속이 있어. 그렇게 대답하자, 그녀의 눈빛이...무언가 어두워졌다.


"...누구랑요? 혹시 여자분은 아니시죠? 네? 그쵸? 그렇다면...저는 조금..."


뭔가 죽어버린 눈으로 그렇게 말을 하는 그녀에게 무서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빨리 사실을 말해야겠다.


"아...장난이였군요. 그렇죠. 당신이 제가 모르는 다른 약속을 잡을리가 없죠."


왜냐면, 저는 당신의 어시스턴트이자...피앙세니까요!

마지막 말은 숫제 소리치듯 말한 그녀가 내 품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조금 아플 정도로 껴안아주면 좋겠어요."


원하는대로 팔에 힘을 줘서 껴안자, 그녀는 이마를 내 가슴팍에 밀어붙이더니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작은 동물들은 자신의 신체를 비비는 것으로 체취를 남긴다는 말이 있던데, 마킹이라고 하던가.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새 익숙해진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식당으로 가서 이베리아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이젠 완전 마스코트 취급을 받는지 볼을 만지작거린다던가, 머리를 쓰다듬는다던가, 그런 식으로 열심히 귀여움 받는 아이린을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봐도 질리지 않는, 이젠 보지 않으면 아쉬움이 느껴...


...이제 6일 남았다.




4에서 계속 될지도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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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쓰는걸까

글이 나를 쓰게 만드는걸까


피드백은 언제든지 환영이고

다음 화는 나올지 안 나올지 나도 모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