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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터만으로는 뭔가 아쉬운 정도라 발 아래에 작은 난로를 갖다놓았더니 딱 좋은 정도로 집중과 노곤함이 뒤섞이는 느낌이다. 슬슬 주간 근무자들은 다 퇴근했을 시간이지만, 내 일에 밤낮이 언제 있던가.


오후 여덟 시. 저녁을 먹고 적당히 집중력이 왔다갔다 하는 시간이다. 이번 한 주 동안 들어온 비품 신청 목록을 검토하고 있다. 곧 해가 넘어가고, 달이 바뀌는지라 들어온 요청이 굉장히 많다.


정수기 회전률이 너무 떨어져서 사람이 몰리면 필요한 사람들이 다른 층에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각 층에 하나씩만 늘려주세요.

이건 비품에 넣을 건 아닌데. 


개인방송하는 데에 음향 품질이 떨어진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최신형 마이크를 하나 사 주세요.

....너무 개인적인 거 아니냐.


겨울철이라 너무 건조해서 정전기가 자주 튀고 있습니다. 방전 스프레이를 겨울 동안이라도 넣어주세요.

이건 층마다 몇 개 두고 가져다 쓰라고 하면 되겠다.


테니스공이 너무 모자라서 자주 주워모아야 합니다. 한 번에 주워모을 수 있게 테니스공 500개랑 롤러를 체력단련장에 넣어주세요.

잠깐만. 500개는 좀 많지 않나? 500개면 테니스 코트 절반은 채우겠네. 이거 누가 썼지?


테니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면 테니스를 자주 치는 사람일 테니 그쪽에 가 봐야 하려나.

테니스공 정도야 못해줄 건 아니고, 숫자만 좀 만지면 될 테니 금방 끝나겠지.




로도스 아일랜드의 체력단련실을 증설해 만든 널찍한 공간이 있다. 한 번에 많은 용도로 쓰지는 못하지만 선을 긋거나 네트를 걸치는 것만으로 다양한 구기종목을 할 수도 있고, 활발한 아이들이나 혈기왕성한 젊은 오퍼레이터들이 뛰어다니기도 좋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진 않아 그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수용하진 못해서 쓰려는 사람들로 줄서있다고 하던가.

아무리 체력단련이라고 해도 똑같은 동작으로 쇠질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공을 가지고 노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으니 말이지.


"옆쪽 보고, 뒤에서부터 라켓 틀어서!"


기합 섞인 지시와 함께 공을 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차분하게, 수줍게 마음을 전하던 그 목소리가 이렇게 들리니 낯설면서도 기특한 것 같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먼저 들어온다. 

제자리에서 이쪽저쪽으로 공을 쳐서 반대편으로 날리고 있다. 여유로우면서도 신중하게, 거의 같은 자세로, 칠 때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거의 같은 곳으로 날아가고 있다.


"뒤쪽 발 먼저 자리잡고, 라켓은 몸 틀면서 따라가기만!"


반대쪽에 있는 사람은 금발의, 안젤리나와 비슷한 체격의 쿠란타족 여성이다. 빠른 발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안젤리나가 날린 공을 받아치고 있지만, 안젤리나하고는 다르게 이쪽저쪽으로 튀어 안젤리나 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불포와 쿠란타.

적발과 금발.

학생과 기사.

안젤리나랑 블레미샤인.


별 접점같은 건 없을 것 같은 저 둘이 어쩐 일로 테니스를 다 치고 있는 걸까.

모양새를 봐선 안젤리나가 블레미샤인을 가르쳐주는 모양인데.


얼마 동안 그렇게 공을 넘겨주다 옆에 놓인 카트가 다 비고 나서야 안젤리나는 공을 날리는 것을 멈추었다.


"수고했어, 언니. 좀 쉬고 있어. 공 모을 거니까 어디 잠깐 잡고 있어."


블레미샤인이 건너편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는 사이, 라켓을 가방에 넣어 둘러맨 안젤리나가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면서 눈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50개 남짓 되는 테니스공이 멀리 있는 건 구르면서, 가까이 있는 건 천천히 뜨면서....


모인다. 개미떼가 테니스공을 천천히 한데로 모으고 있는 것 같다. 느린 속도지만 정말로 모이고 있다.

안젤리나가 이끄는 아츠의 흐름에 이끌려서 그 옆의 작은 카트 앞으로 모여든다. 하나하나 주워모으면 이리저리 다니면서 2~3분 정도 걸릴 텐데, 아츠도 역시 쓰기 나름이구나.


그렇게 모인 테니스공을 아츠로 띄워올려 바구니에 넣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다.


"어? 바, 박사? 언제부터 와 있었어?"


"얼마 안 됐어. 마침 잘 됐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나, 나한테? 잠깐만."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황급히 머리를 풀고 다시 묶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좀 기다리고 있자니 한층 차분해진 표정으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젤리나와 마주섰다.


"무슨 일이야? 박사 운동도 그닥 안 좋아했던 것 같은데. 여기까지 일부러. 나 보러 온 거야?"


"있는지 몰랐기야 한데, 있으니 반갑지." 


정말 우연에 우연이다. 성탄절날 데이트 비슷하게 외출하고 그 뒤로는 안젤리나가 밤에 사무실에 놀러온 정도라, 이렇다할 일도 없었고.


"뭐, 여기선 네가 가장 잘 알 것 같다. 이거 테니스공이랑 롤러 신청한 거. 롤러는 그렇다치고 테니스공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해?"


"아, 응. 많으면 좋지. 테니스공도 결국 소모품이고, 이렇게 가르쳐 주고 있는 입장에서는 테니스공 하나하나 주워모을 시간이 없으니까. 나야 이제 아츠로 모으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은 결국 직접 주우러 다녀야 되고. 아예 공이 많으면 한 번 주워모으면 오랫동안 할 수 있잖아. 500개를 한 번에 다 쓰겠다는 게 아닌데....어떻게 안 될까? 박사."


살짝 생각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거절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 이끄는 눈길에 심장이 철렁한다.

주체 못 하는 심장과 숨을 어떻게 어떻게 추스르면서 현실적인 대답을 한다.


"아무리 그래도 500개는 너무 많아. 이 공간 절반은 채우겠다. 나중에 더 필요하고, 이야기하면 그때 넣어줄 거니까 지금 저건 숫자 좀 줄여줘."


"아, 그런가. 그럼 대충 300개 정도로 해 줘."


"....이거 신청서 네가 썼구나."


"흐흥."


즐겁다는 듯 웃는다. 저기 멀리 블레미샤인이 있는데 괜히 따라 웃게 된다.


"테니스도 칠 줄 알았구나."


"아, 그냥. 학교에서 좀 쳤던 정도. 이번에 체력단련장에 이렇게 공간이 생겼다고 하니까, 근데 혼자 치긴 뭐해서 블레미샤인 언니 한 번씩 가르쳐주고 있어."


가르쳐주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새삼 조금 전까지 똑부러지게 말하던 목소리가 낯설 정도라서 묘한 기분이다.


"발도 빠르고, 기사 스포츠를 해서 그런지 반응도 되게 좋아. 조금만 다듬어지면 나보다 더 잘 할 것 같아서 가르쳐주는 보람도 있고."


"다행이네."


성탄절 이후로 이렇다하게 따로 놀아줄 시간이라던가 없었는데도 나름대로 즐겁게 보내고 있으니 다행이다.

일이 매번 늦게 끝나니 찾아가기도 좀 그렇고. 아무리 그래도 여자애 방에 외간남자가 그 시간에 찾아가면....좀 그러니까.


외간 맞나? 싶지만 그런 걸로 하자.


대신 안젤리나가 지난번처럼 일 끝나고 찾아와서, 차 마시면서 수다 떠는 정도려나.

성탄절 전하고 그다지 달라진 건 없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박사도 배워 볼래? 몸 움직이는 거 엄청 재밌는데. 몸매 유지도 적당히 되고."


"시간이랑 체력이 따라간다면 좋겠지만 둘 다 아닌 것 같다. 마음만 받을게. 그건 그렇고 최근에 시간 빼서 못 놀아줬었으니 심심했겠네."


"뭐, 박사가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일이 그렇게나 많은데 나한테만 신경써달라고 할 수도 없고."


"대신 휴일에는 꼭 놀아줄게."


"어, 정말? 박사 맨날 늦게까지 일하고, 휴일에는 푹 쉬고 싶을 텐데. 나한테 그렇게 줘도 되는 거야?"


"괜찮겠지."


성탄절 때 안젤리나가 내심 아쉬워했던 것도 있으니 그건 맞춰주고 싶다. 모처럼 이런 사이이니 같이 보낼 시간이 더 생긴다면 더 좋을 거고.


"일단 블레미샤인한테 테니스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마저 해 줘. 사무실에 가자. 차 내줄게."


"그럼 10분 정도만 남았으니까 기다려 줄래?"


"그러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여기 있으면 공에 맞을 거야."


안젤리나가 뭔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으니 시간을 좀 더 들여도 될 것 같다.

몇 분 정도 더 자리 비운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도 않을 거고.


안젤리나가 바구니를 들고 블레미샤인이 있는 쪽으로 넘어갔다. 뭔가 공을 들고 이것저것 설명하는 모양이다.

설명이 끝났는지 블레미샤인이 공을 높게 띄워서는 이쪽으로 치기 시작했다. 


라켓 휘두르는 소리, 공이 라켓에 부딪히는 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공 날아오는 소리, 나름대로 속도가 있는지 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린다.

몇 번 칠 때마다 공이 날아오는 것이 멈추고, 안젤리나가 지도해 주고, 다시 공이 날아오는 것이 반복된다.


생각보다 원하는 자리에 안 가는지 점점 블레미샤인이 조바심을 내고, 공도 그에 맞추어 점점 더 위치를 벗어난다.

몇 번 더 그게 반복되자 안젤리나가 직접 라켓을 들고 시범을 보이려는지 공을 던져올렸다. 블레미샤인보다 더 정제된 자세로 라켓을 휘두르고....


공은 중앙의 네트에 걸치듯 내던져졌다.


"어?"


안젤리나가 당황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아까 설명하는 소리도 안 들렸는데.

침착하게 숨을 고르더니 다시 한 번 공을 던져서 쳤고, 이번에는 일직선으로 날아와 좀 더 멀리 떨어진다.


세 번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다음 공부터는 대각선으로 날아와 중앙을 넘어 네트 앞쪽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는 선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지만, 어쨌든 원하는 자리 안에는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았는지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마찬가지로 블레미샤인도 공을 던지지 않고 라켓을 허공에 휘둘러본 다음 직접 쳐서, 안젤리나와 비슷한 자리에 공을 날렸다.

여기서 봐도 안젤리나가 안도하는 것이 눈에 들어와서, 괜시리 기특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수고 많았어, 안젤리나."


"고마워, 박사. 마지막에 잘 안 되서 나도 놀랐어."


블레미샤인에게는 테니스장 비품 일로 사무실에 갔다가 가겠다면서 먼저 보내놓고, 그대로 라켓과 가방을 챙겨서 사무실로 오는 길이다.


"뭐, 뭘 해도 잘 안 되는 날도 있으니까. 매번 하던 건데. 나도 일하면 매번 켈시한테 트집잡히고."


"늘 생각하는 거지만 박사는 일이 너무 많아. 양도 그렇고 종류도 많고."


안젤리나가 마음이 좀 풀린 듯 가볍게 웃었다. 


"그런 날 밤에는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자면 좀 낫더라고."


"나는 아직 술 못 마시는데."


"뭐 어른이 되고, 이야기겠지만."


"처음 하는 술자리는 박사랑 같이면 좋겠다. 박사가 술 가르쳐 주면 되잖아."


"...."


거기서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애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는 건가.


"술 중에 달달한 것도 있다고 해서 되게 궁금했거든. 소냐랑 나탈리야는 마셔본 적 있대. 나탈리야는 집안 행사로, 소냐는....뭐 어쩌다 보니 친구들이랑."


"우르수스랑 다른 데는 기준이 좀 다른 것 같은데."


거기는 겨울에 춥다 보니 안 얼어죽으려고 보드카를 끼고 산다고 얼핏 들은 것 같다.


"그런가?"


"아마 로사나 지마가 마셔봤다는 술은 좀 더 독한 거겠지. 술은 독하면 써."


"으, 쓴 건 싫은데."


하나하나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역시 그 나이대 여자애인 걸까.

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뭔가 발걸음의 템포도 늦춰진 것 같다. 이야기소리와 함께 복도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좀 더 천천히 울린다.


"아, 아니면 그런 것도 있지 않아? 극동 술 중에 달달하고 약한 게 있다고 들은 것 같아. 칵테일? 이라는 것도 달달한 게 있고."


"뭐 세상은 넓으니 그런 술도 있겠지. 칵테일은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종류가 많다고 했고. 혹시 궁금하다거나 그러면 따로 우르수스 애들하고 마셔볼 생각은 있어?"


"안 돼.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라고 엄마한테 배웠어. 그리고 박사는 어른이니까 박사한테 배워야지."


그 어른이 보통은 부모님이거나 어른이 되고서 마셔보는 걸텐데.

얘는 '어른'의 범주에 나를 어떻게 넣은 건지 모르겠다.


믿는다는 건지, 아니면 별 생각없이 알고 있는 어른이니까 나랑 마셔보겠다고 하는 건지.


그때 안젤리나가 뭔가 떠올랐는지 퍼뜩 놀란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늦게서야 그걸 알고 나도 한 걸음 앞에서 멈춰서 돌아보았다.


"왜 그래, 안젤리나?"


"박사. 먼저 사무실로 가 있으면 안 돼?"


"? 왜?"


뭐 잊어버리고 오기라도 했나? 아니면 지금까지 자기가 한 말이 어떤 말인지 이제서야 깨달은 건가?


"그....잊어버리고 있었어. 나 땀 흘렸는데. 땀냄새....나지 않아?"


아, 그렇겠네. 가르쳐주는 쪽이라서 좀 덜하기야 하겠지만 아무튼 몸을 빡세게 움직였으니.

평소 외출하고 돌아오자마자 사무실에 바로 오는 게 보통이었던지라 나도 인지를 못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아까 테니스하는 데에서도 그렇고, 지금 복도로 쭉 오면서 이것저것 이야기했지.

다급히 안젤리나가 얼굴을 붉힌 채로 운동복 소매의 냄새를 맡아본다.


"퇴근 안 하고 기다릴 테니 신경쓰이면 씻고 와. 어차피 테니스공 이야기도 해야 하니까."


블레미샤인에게도 그렇게 말해 놨으니 안젤리나가 조금 더 늦게 사무실에 오는 정도는 괜찮을 거다.

나는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지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보단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 더 좋고.


"그, 그러면....미안. 금방 씻고 올게."


안젤리나가 급하게 몸을 돌려서 종종걸음으로 복도 멀리 사라진다.

아까 테니스 막바지 때 공을 잘 못 넘겨서 당황하던 것과 비슷한 기색이라서 그건 뭘까, 하고 무심결에 생각하게 된다.


별 문제는 없으려나. 안젤리나는 편하게 모든 걸 대하면서도 가끔 하나하나 너무 깊게 생각하는 성격이 아닐까 싶다.

아까 일도 그렇고, 지금도.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텐데.


어쨌든 사무실에 코코아는 얼마나 남아있으려나.

하나 줄어든 발걸음 소리만, 늦은 밤의 복도에 천천히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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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오류 지적 환영
어느정도 오리지널 설정도 있음. 피드백 환영    


장기출장이 걸려서 얼마전에 테니스를 그만뒀다.

두어달 동안 가게 되어서 집안 정리도 좀 해놓고, 그 와중에 일도 바쁘고.



뭐 근데 이번은 좋게 생각하려고

호텔에서 달리 할 거 없을거니까 좀 더 소설에 전념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래도 객지생활에 객지생활이 또 되어버리니 묘한 느낌이긴 하다






아무튼 이번에도 와줘서 고맙고, 읽어줘서 고맙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점점 늘어지는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하네




근데 많다를 존댓말로 쓴 건 왜 금지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