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오늘도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자신을. 깨어날 수 없을것만 같은 잠에 빠져서도 뚜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정신을 심해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리는 닻과도 같다. 그 닻이 지금은 나를 수면으로 끌어올리려 내 등을 들고있었다.

"...박사!"

닻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수면으로 올라온다. 그것을 거부할 방법은 없고, 따라 올라갈 뿐이다. 이따금씩 느껴지는 붉은 시선이 느껴지지만 잠에 취한 나의 정신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쓸 만큼 매섭지 못하다. 그저 끌려올라가며 나의 정신은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다.

"!"

"일어났네. 박사. 여전히 잠꾸러기야."

무수한 양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머리를 옆으로 치워 새하얀 실타래 뭉치에서 벗어나자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붉은 눈을 맞이한다. 따스한 은발과 대비되는 창백한 새빨간 두 눈과 마주칠 때마다 드는 이 섬뜩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나에게 웃어보이는 저 소녀를 보며 나도 아침부터 웃어주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스카디 씨."

"응. 박사도?"

물론이라고 대답하며 몸을 일으킨다. 그녀가 아침마다 나의 잠을 깨우러 온지도 어느새 3개월 가량이 흘렀다. 어시스턴트로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아침을 항상 같이하는 그녀는 이미 출근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내 방으로 온 모양이다. 얼른 들어가 씻고 옷을 갖춰입는다. 그렇게 나가려는데 스카디가 나를 들고는 자신의 앞에 얼굴이 보이게 내려놓는다.

"박사. 눈에. 안떨어졌어."

가녀린 손이 나에게 뻗어와 눈 근처를 어루만진다. 비단결같은 피부의 감촉을 느끼면서 잠시 눈을 감고 있으니, 곧 감촉이 멀어진다. 눈을 뜨자 눈곱을 휴지로 감싸 쓰레기통에 버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까지 세심했나 생각도 잠시 스카디가 먼저 문 앞에 선다.

"가자."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른다. 사실 처음 눈을 뜨고 이곳에 온지 얼마 안됐을 때, 왜 나의 개인실과 집무실이 따로 떨어져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켈시에게 물어봐도 그저 집무공간과 일상공간을 나누는게 낫다고 설명했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매일 아침 이렇게 잠깐 같이 걷는것이 확실히 좋은 것 같다. 문득 내 옆에서 걷는 그녀를 보았다. 뭘까, 이전과 살짝 다른 것 같다. 잠깐 생각해보자 오늘은 모자를 안썻다.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은 모자를 안쓰셨네요?"

"응. 뭔가 불편해져서..."

의외다. 한평생을 쓰고다니던 모자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다가 가끔 자신도 후드와 투구가 불편해서 집어던지던 때가 있었단걸 깨닫고, 그녀의 발언을 긍정했다. 그럴때마다 오퍼레이터들 중 일부가 유난히 궁금해하던게 귀찮아서 이젠 개인실에서를 제외하곤 항상 쓰고 있지만.

"저도 투구랑 후드가 가끔 불편해서 벗고 그랬었는데 비슷한건가요?"

"아마..."

원체 말을 길게 하지 않은 성격의 그녀이지만, 이정도로 대화해주는것만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이전의 그녀였다면 물음에 그저 끄덕이는걸로 끝이었으리라.

어느새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스카디는 내 앞에서 비켜섰다. 오늘도 출근이구나 생각하며 카드를 찍고 문을 연다. 어제와 다름없는 평범한 사무실에 들어서서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밤새 들어온 파일들을 체크한다. 오늘도 조기퇴근은 글렀군.

"박사. 커피? 차?"

옆에서 스카디가 컵 둘을 씻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사실 어시스턴트라고 해도 본격적 업무는 전부 내가 한다. 그녀가 할 일이라곤 내 말동무와 하루종일 책상에서 일어날 일이 없는 내가 하기 번거로운 잡무, 차 타오기, 보고서 정리와 같은 일들 뿐이다. 평소 그렇게 시끌벅적한걸 좋아하지 않아 조용한 오퍼레이터들을 주로 고르다, 어느새 스카디를 고정으로 두게 되었다. 이제 많이 능숙해졌지만, 나에게 꼭 커피인지 차인지 묻는건 그녀의 습관이다. 지난번에 내가 가끔 커피가 아닌 차를 마신다고 했을때 이미 커피를 타온 그녀의 당황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훤하다.

"아, 오늘도 커피로 하죠. 잠이 아직 덜깨서..."

"그래."

조용히 커피를 타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나도 이내 시선을 컴퓨터 쪽으로 돌렸다. 오늘만 해도 밤새 올라온 보고들이 99+를 찍었다. 분명 어젯밤 저녁 9시에 끝냈을때도 0이었는데 어째서 항상 이럴까. 보고들을 대충 훑어보며 중요도를 파악하던 와중에 특이한 보고서가 눈에 띄었다.

《이베리아 근해 동향 보고/5월 4주차/특이사항 有》

정기적으로 보고를 보내기로 한 그란 파로에서의 보고였다. 지난해 스툴티페라 나비스 호 사건 이후 특이사항은 줄곧 없었다. 다른 보고서는 제쳐놓고 이쪽을 우선하기로 결정했다. 보고서의 내용은 양식에 맞춰 보내졌으나, 특이사항 부분에서 글이 길게 이어져있었다. 우선 문단의 끝에 있는 요약부부터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5월의 말에 들어 이베리아 근해에서의 동향이 특이사항을 보임. 시테러들의 준동이 눈에 띄에 늘었으며, 심해교단의 활동 또한 눈에 띄게 증가한 것으로 보여짐. 특히, 작년 스툴티페라 나비스 호 사건 때 보였던 조직적 활동이 다시금 재개한 것으로 추측됨. 이에 따라 보고 주기를 1주 간격에서 3일 간격으로 줄이는 것을 제안함. 추가사항으로 에기르 출신 이민자들 중 일부가 이샤-믈라를 언급하는 횟수가 증가함. 추가 인력 파견 필요. 에기르 출신 오퍼레이터들에 대한 추가적 조치 필요.'"

...또 다시 이샤-믈라인가. 우선 추가 인력 파견에 대해 승인하고 에기르 출신 오퍼레이터들을 어떻게 봐야하나 생각하자. 글래디아에게 말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생각해보니 당장 자신의 옆에 있는 인물이 이샤-믈라의 최우선 목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커피를 든 채 이곳으로 오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스카디가 서있었다.

"왜 그러지?"

"ㅇ...아닙니다."

괜히 그녀에게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이미 극복했다곤 하지만, 그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으리라. 화면을 잠시 다른 창으로 돌려놓고 그녀가 내려준 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이런 악몽에 시달리는걸 보고싶진 않았다.

이샤-믈라. 시본들의 최상위 개체 리바이어던이자, 시본들의 군주. 그 강대하던 에기르와 이베리아를 몰락시키고 이젠 땅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가진 짐승. 그런 그가 스카디에게 죽임을 당하고 스카디의 정신에 자신을 심어놓은것이 스카디를 잠식하기위해 애쓰던 것이 지난 스툴티페라 나비스 호 사건의 진상 중 하나였다. 그녀는 지금은 이를 극복했지만, 어떨까. 이샤-믈라는 죽지 않았다. 여전히 스카디의 정신 속에서 똬리를 틀고 그녀가 나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그렇게 커피 속을 한참 들여다보니 스카디가 뭔가 이상하냐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박사?"

"아닙니다. 고마워요. 스카디 씨."

"별거 아니다."

살짝 웃어보이며 총총거리며 걸어가 옆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그녀가 가져온 책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요즘 들어 책 읽는데 재미가 들린건지, 책을 가져와 하루 웬종일 읽곤 한다. 묘하게 어휘가 는거 같은게 그거 때문인가? 생각하면서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흐르고, 정신이 퍼뜩 들었을 땐,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 이르렀다.

"어...스카디 씨. 벌써 저녁인데 밥은 드셨ㄴ..."

옆엔 책을 덮어둔 채 곤히 잠든 소녀가 있었다. 간단하게 저녁이라도 먹으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스카디 씨. 스카디 씨."

"....ㅇ?"

꽤 격하게 흔들자, 스카디가 눈을 떠 나를 올려다보았다. 변함없이 창백한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자 또다시 묘한 전율이 몸을 스쳤다. 멍한 표정의 그녀에게 밥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자, 그녀도 바로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팠는지 벌써부터 싱글싱글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잠깐 웃고는 같이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당은 슬슬 저녁 시간이 끝나가 한산했고, 두세 테이블 정도에만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지나가며 가볍게 인사를 주고 받고,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소녀는...메뉴판을 죽 훑으며 전부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먹는다, 전부."

그녀의 눈이 오늘 최대로 밝게 빛나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다를까 주방에서는 그 즉시 불을 지피고 요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만족한 듯 몸을 돌려 앉을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따라 그녀가 앉은 자리로 몸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어지러워져서 가만히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떳다. 머릿속에 주변 소리들이 울리고 제대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다 순간 속삭이는듯한 목소리가 강렬하게 귀에 꽂혔다.

"'이샤-믈라'"

놀라 감았던 눈을 급하게 떳다. 그러자, 내 눈 앞에는 어느새 다가온건지 또다른 창백한 눈동자가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박사님, 괜찮으신가요?"

로렌티나, 코드명 스펙터. 스카디와 동일한 색의 눈을 가진 그녀가 쪼그려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스카디의 때와 같이 순간 섬뜩해진 내가 주춤하자, 그녀는 살며시 웃어보이며 일어섰다.

"아아, 박사님이 말씀도 안하시고 저희를 이리 피하시니, 어비셜 헌터즈는 슬프답니다~"

과장된 연기톤으로 그녀가 우는 시늉까지 내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스카디가 그녀의 옆에 섰다.

"박사는, 우리가, 싫은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그저, 여러분의 그 창백한 붉은 눈과 만나면 순간 섬찟해지곤 해서....여러분의 미모가 너무 빼어나 저같은 범인은 놀라곤 한답니다. 하하."

아직 어지러워 바닥을 보며 장난으로 던져본 말이건만, 앞에 선 두 여성은 대답이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둘 모두 어째선지 양 옆으로 시선을 돌리고 꼼지락대고 있었다.

"ㅇ...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그냥, 오그라드는 말을 참 잘하신다 싶어서 말이에요."

얼굴에 옅은 홍조를 띄운 채 스펙터는 그리 말했다. 아 이거 성희롱인가? 생각하며 다시 사과를 하며 장난이었다고 그냥 어지러워서 고개 숙이고 있다가 눈이 마주쳐서 놀랐다고 말하자 스펙터는 한숨을 내쉬며 그러게 좀 쉬라고 핀잔을 주었다. 멋쩍게 웃어넘기려 했건만, 그 말을 들은 스카디도 동조해서는 그대로 양 팔을 잡혀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단 좀 놔주시면 안될까요?"

"안된다. 박사 그러면 또 일하러 갈거지 않나. 안놓쳐."

"맞아요, 박사님. 요 범고래에게 물어보니 일주일 째 00시 취침, 04시 기상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쥴을 수행하시던데 그러면 몸 상해요."

두 여성에게 질질 끌려가는 남정네의 모습은 이 얼마나 우스운가. 자조하면서도 내심 기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어비셜 헌터즈의 두 여성은 분명 미인이었다. 그것도 굉장한. 그런 두 여성에게 붙잡혀 방에 들어가고 강제로 옷마저 벗겨지며,-심지어 반쯤 뜯어버리듯이 내 옷을 벗겨버렸다!- 나는 침대에 강제로 누워져있었다. 심지어 스카디와 스펙터가 나의 근처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은 그 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웃고 있었다

"자 얼른 주무세요. 우리 박사님."

"그래. 자라, 박사."

그렇게 반강제로 눈을 감고 있자니, 조그마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흥얼거리는듯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얇게 남아있던 의식은 다시 심해로 가라앉았다. 이 노래...어디선가 들었는데...

.
.
.

심해공포증이라는 말을 아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에 대한 공포. 꽤나 최근까지 나는 심해공포증을 크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몇주 동안 계속 심해로 가라앉아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꿈을 꾼 이후로 나는 심해공포증을 앓는 것만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수렁에서 나를 조용히 지켜보는 저 붉은 눈! 그것이 두려워 미칠 것만 같다. 바다는 악의로 가득차있으며, 그 악의는 오롯이 나를 향해 있는것인가?

또다시 누군가 나를 부른다. 내 몸에 묶여있는 닻이 끌어올려진다. 힘없이 나는 끌려 올라간다. 이 차갑고 어두운 심연에서 나는 다시 따듯하고 밝은 수면으로 올라온다.

"박사!"

"읅엙"

내 상체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경박스러운 소리를 내며 나는 잠에서 깼다. 내 몸을 이리 가볍게 흔드는건 역시 은발의 그녀....? 오늘은 뭔가 좀 다르다. 평소의 출근 복장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복이다.

"어라...스카디 씨 옷이 오늘은 왜...."

"오늘. 쉬는날이니까."

"엥 그러면 저를 왜 깨우신건가요?"

"박사. 오늘, 나랑, 데이트. 잊었나?"

아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어제 스카디가 너무 격정적으로 나를 재우려고 한다 싶었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그건 그렇고 데이트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건 좀 부끄러운데. 그냥 같이 놀러가자고한게 그렇게 불릴 정도인가? 다른 어비셜 헌터즈도 같이 가는데?

"....어서 일어나시지요. 박사님. 예정시간보다 벌써 17분이나 늦어졌습니다."

뒤로 젖혀진 고개를 약간 돌리자 똑같이 사복을 입은 글래디아와 스펙터가 있었다. 셋 모두 굉장한 미인이며, 스타일 또한 뛰어났다. 이렇게 생각하니 데이트라는건 오히려 굉장히 축소되어있는 표현인듯 싶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여전히 스카디에게 잡혀있음을 떠올랐다. 잠깐 놓아달라고 얘기한 후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났다.

"맞다. 미안해. 박사. 그, 아까 잡아흔든거."

스카디가 나를 잡아흔든 것에 대해 우물쭈물대다 사과했다. 솔직히 전혀 미안할 일이 아닌데. 괜찮다고 사과는 내가 할 말이라고 웃어보이며 최대한 빠르게 씻으러 들어갔다.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를 보자 여성진 중 둘은 잠깐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글래디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쇼핑부터 하는걸로 생각할까요..."

"음? 나 그정도야?"

같이 한숨을 내쉬는 둘을 두고 스카디가 어리둥절하다는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그러나? 박사는 이미 멋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스카디를 보며 스펙터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어흑. 고마워요 스카디 씨.

"여튼 빠르게 출발해서 서두른다면 저녁 시간 전까진 끝낼 수 있을겁니다. 자, 얼른 가시죠."

어제는 둘한테 끌려가더니 이번엔 세명한테 잡혀서 끌려가는, 아니 들려가는 중이다. 물리적으로 팔 하나씩 잡고 다리를 들려서 가고 있으니 짐짝 취급이 맞을 것이다. 데이트라고 해서 묘하게 기대한건 나뿐이었나? 다들 별 신경도 안쓰는거 같네.
.
.
.

심해트리오 순애물이 써보고싶었어. 현역 군인이라 시간이 많질 않아서 자주는 못올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