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부키 사건이 일어난 날 / 밤
텅 빈 샬레의 집무실, 시계바늘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소리만이 방 안의 고독을 증명하고 있었다. 창밖은 이미 빛 한 점 삼켜버린 짙은 밤이었다.
이부키를 이로하의 전차에 실어 보낸 이후, 선생은 책상 앞에 앉아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애초에 승산이 없는 게임이었다. 황혼의 문을 열어젖히고 인과의 궤적을 억지로 비틀어버린 그 순간부터, 정해진 결말은 단 하나뿐이었다.
선생 : 나는 죽는다.
확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자, 영혼에 새겨진 확신이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단 1%라도 존재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선생은 기꺼이 추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아이들에게 매달렸을지도 모른다. 트리니티의 구호기사단을 부르고, 밀레니엄의 세미나에 조력을 요청하고, 게헨나의 응급의학부원들을 모아 기적을 믿고 희망을 심으며 함께 발버둥 쳤을 것이다. 학생들의 신비와 어른의 지혜를 한데 모은다면,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또 다른 길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그러나 선생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희망이란, 가장 잔혹한 형태로 인간을 무너뜨리는 독(毒)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죽어간다는 잔혹한 진실을 아이들이 알게 된다면, 그 순수하고 다정한 아이들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학업을 팽개치고, 자신의 신비를 불태우며, 금기를 깨뜨려서라도 어떻게든 선생님을 구하려 온 세상을 뒤엎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결국 실패할 것이다.
필멸자의 몸으로 신의 영역에 손을 댄 대가를, 키보토스의 그 어떤 신비로도 상쇄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 처절한 실패의 감각이 아이들의 세계를 안쪽에서부터 산산조각 내어 부숴버릴 것이다. "내가 구하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자책감은 아이들의 맑은 영혼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가 되어 그들의 미래를 영원히 갉아먹을 터였다.
학생들의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은 황혼의 문 너머의 괴물이 아니다. 어설픈 희망이 불러온 ‘실패의 기억’이다.
선생 : …그러니, 너희는 몰라야 해.
조금 전 화장실 문을 부수고 들어와 자신을 목격했던 이부키의 표정이 떠올랐다.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채, 공포와 절망으로 새하얗게 질려 단단히 굳어버렸던 그 조그만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
아이들이 '선생님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울부짖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어른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비극의 무게를 나눠 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마주할 필요가 없는 잔혹한 현실을 차단하고, 그들의 등 뒤에서 묵묵히 폭풍우를 맞아주는 벽이 되는 것. 그것이 선생이 생각하는 어른의 마지막 자격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더럽혀지고 찢기든 상관없었다. 아이들의 찬란한 아침을 지켜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이 밤의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스러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장 위협적이고도 영리한 이름이 있었다.밀레니엄의 전지(全知)이자 초천재 병약 미소녀,
아케보시 히마리.
엉뚱하고 장난기 가득한 성격 뒤로, 그 누구보다 올곧은 정의와 초인적인 통찰력을 숨겨둔 아이. 악을 혐오하고 절대로 불의에 무너지지 않는 아이였다. 과거 리오의 잘못된 선택으로 모두가 상처받았을 때, 세상 모두가 피해자인 아리스를 위로하고 집중했지만 오직 히마리만은 달랐다. 그녀는 아리스의 뒤편에 숨겨진 또 다른 피해자, 차가운 명령에 종속되어 소모품처럼 쓰이던 토키의 상처마저 가장 먼저 들여다보고 위로하며 구원해 낸 아이였다. 세상의 외면을 받는 가장 어두운 구석의 아픔까지 찾아내어 손을 내미는, 키보토스의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그 다정한 천재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선생이 아무리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고 진실을 은폐하려 해도, 히마리의 초월적인 해킹 능력과 번뜩이는 지성은 결국 이 종말의 실마리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선생 : 히마리라면, 분명히 알아채겠지.
그것이 두려웠다. 히마리가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신비와 밀레니엄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선생을 구하려 들 터였다. 밀레니엄뿐만이 아니었다. 히마리를 시작으로 트리니티, 게헨나, 아비도스까지… 도미노가 무너지듯 모든 학생들이 이 잔혹한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비도스, 트리니티가, 게헨나가, 밀레니엄의 학생들이… 자신이 목숨보다 아끼는 그 모든 아이들이, 피비린내 나는 지옥도 한가운데서 무너져가는 자신을 보며 똑같이 절망에 찬 표정을 짓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기 위해 소중한 삶을 내던지며 발버둥 치다, 결국 눈앞에서 선생의 파멸을 목도하고 다 같이 상처받는 미래. 그것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선생이라는 존재는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정원사여야 했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잔혹한 절망과 무력감을 낙인처럼 새겨버리는 비극의 시발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덜덜 떨리는 손끝이 책상 위에 놓인 푸른색 태블릿, 싯딤의 상자를 켰다. 은은한 오로라 빛이 집무실의 어둠을 밝히며 아로나와 프라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기에, 그의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실시간으로 실감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었다.
선생은 붉게 젖은 숨을 몰아쉬며 메마른 목소리로 명령했다.
선생 : 내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정보로 전부 덮어줘. 샬레의 메인 서버, 생체 데이터 로그, 그리고 외부로 송출되는 내 모든 행적까지전부… 추악한 범죄자의 기록으로 위조해 줘.
그 잔인한 요구에 아로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메인 OS의 AI인 그녀는 선생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학생들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던 다정한 이가, 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스스로를 쓰레기로 떨어뜨리려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로나 : 왜 그런 짓을 하시는 거죠? 왜요…! 혼자서 그렇게 아프게 죽어가시면서, 왜 굳지 위악자가 되려고 하시는 거예요…! 모두에게 미움받으며 끝나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아로나의 외침은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화면 너머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한 아로나와 달리, 그 옆에 서 있던 프라나는 그저 침묵을 지켰다.
프라나는 이미 한 번 세계의 파멸을 겪어본 아이였다. 자신이 살던 차원의 선생이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결말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이미 뼈에 사무치도록 겪어본 프라나였기에, 지금 눈앞의 선생이 지독한 죄책감과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가장 완벽한 방패’를 치려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비극의 무거움을 알기에, 프라나는 말릴 수도, 그렇다고 찬성할 수도 없는 서글픈 침묵 속에서 선생을 응시할 뿐이었다.
선생은 울먹이는 아로나를 향해, 힘겹게 손을 뻗어 아로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선생 : 유메를 잃은 호시노의 표정을 봤어. 내가 죽은 후에 아이들이 전부 그런 표정이 되어서는 안 돼. 부탁이야.
선생은 짓이겨진 호흡 사이로 애원하듯 말을 이어갔다. 피가 섞인 목소리는 낮고 처절했다.
선생 : 나를 구하려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나를 미워하고, 경멸하고, 증오하게 만들어줘.
그것이 선생이 선택한 가장 완벽한 방어벽이었다. 그는 싯딤의 상자 깊은 곳에 스스로 ‘거짓’을 심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학생들을 순수한 눈이 아닌, 왜곡되고 추악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음해성 고백록. 밀레니엄의 소중한 생명인 아리스를 지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샬레의 목적과 권력을 위해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는 서늘한 보고서.
한 자 한 자 적혀 내려가는 문장들은 선생이 살아온 고결한 삶을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오물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것만이 아이들의 발을 묶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차단 장치였다. 분노와 배신감은 상처를 남길지언정, 구원하지 못했다는 절망감처럼 영혼을 영원히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
하지만 천재의 눈을 속이는 것은 선생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히마리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반응했다. 초천재 병약 미소녀의 연산 능력은 샬레의 데이터가 오염되기 시작한 그 극히 미세한 순간의 위화감을 단번에 포착했고, 그녀는 통신 너머가 아닌, 자신의 휠체어를 직접 밀며 샬레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 샬레 / 다음날
샬레의 무거운 문이 열렸을 때, 선생은 마치 모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백색이었던 와이셔츠와 회색의 정장은 칠흑같은 어둠의 색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부키 사건을 계기로 선생이 언제든 피가 흘러도 검은색에 묻는다면 잘 보이지 않으니 선생은 이부키의 고통으로 뼈저리게 배웠다.
흐트러진 정장을 다잡아 입고, 입가에 묻은 피를 완벽하게 닦아낸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히마리 : 선생님, 그 파일… 도대체 뭔가요?"
히마리의 목소리는 평소의 장난기나 자만심이 완전히 거세되어 있었다. 샬레의 메인 서버에서 가로챈, 선생이 직접 작성한 추악한 고백록과 아리스를 이용했다는 위조 보고서. 히마리는 그것이 선생의 진심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무결하게 등록된 데이터의 형태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선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동 휠체어 위에 가만히 놓여 있는 히마리의 다리를 잠시 바라보았다.
단순히 흘려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선생은 일부러, 아주 의도적이고 노골적으로 그녀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시선을 길게 붙잡아 두었다.
언제나 학생들을 향해 무조건적인 존중과 다정한 배려만을 건네던 선생이었다. 신체적 불편함을 가진 학생의 아픔을 그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감싸 안던 그 부드러운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사람의 가장 취약한 결핍을 난폭하게 들춰내려는 듯한, 서늘하고 왜곡된 관찰자의 시선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히마리는 그 시선의 의미를 실시간으로 읽어냈다
순간, 히마리의 하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난생처음 마주하는 선생의 모멸적인 시선에 영혼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알던 다정하고 올곧은 어른이, 정말로 데이터 속의 괴물처럼 자신을 '결함이 있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거대한 의문과 공포가 그녀의 지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학생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면서도, 선생은 마음을 굳게 닫아걸었다. 이것이 아이들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 확신하며, 그는 심장을 후벼파는 듯한 낮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선생 : 너는 나한테 관심을 갖지 마.
선생은 조소 섞인 목소리로 잔인한 거짓을 덧붙였다.
선생 : 동정이나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했지만 말이야.
그 말은 완벽한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심장을 난도질하며, 오직 거짓만을 진실처럼 차갑게 내뱉었다.
선생 : 질투라도 하는 건가? 나 같은 인간이 널 보지 않을까 봐.
그의 말은 칼날보다 날카롭고 정확하게 히마리의 가장 깊은 상처를 찔러 들어갔다. 그가 건넸던 모든 구원과 다정함이 한순간에 추악한 기만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그 잔인한 폭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선생의 등 뒤에 있던 싯딤의 상자가 깜빡였다. 선생의 처절한 의도를 완전히 이해한 프라나와 아로나의 비극적인 개입이었다. 집무실의 메인 모니터 위로 수십 장의 가짜 합성 사진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리오, 에이미, 세미나, 게임개발부, 베리타스, 엔지니어부, 트레이닝부, 야구부, C&C에 이르기까지. 밀레니엄의 모든 학생들을 불법적으로 촬영한 듯 정교하게 조작된 몰래카메라 합성 사진들이었다. 오직 히마리만 제외한 밀레니엄의 모든 학생들의 합성사진이였다.
히마리는 피사체조차 될 수 없을 만큼 결함품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처럼 보이게 해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려는 선생의 잔인하고도 가슴 아픈 위악이었다.
선생은 화면을 힐끗 돌아보더니, 소름 끼칠 정도로 무덤덤한 감탄사를 뱉었다.
선생 : 호오… 생각보다 잘 찍혔네. 중요 부위는 다 가려졌지만 말이야…?
방 안의 모든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히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어떤 기적도, 필멸자의 지성도 이 상황을 부정할 수 없도록 사방이 가짜 증거들로 채워져 가고 있었다. 히마리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단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절망과 배신감, 그리고 거대한 혐오감이 그녀의 영혼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밀레니엄의 초천재 병약 미소녀는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을 내렸다.
히마리 : (이 인간은… 구할 가치도, 우리와 미래를 공유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다.)
선생이 자신의 온 존재를 바쳐 쌓아 올린 완벽한 절교의 성벽이었다. 아이들에게 구원받지 못한 절망 대신, 차라리 혐오라는 방패를 쥐여주는 어른의 비참한 구원극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