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오의 안전가옥(Safehouse)
리오 : 과거에 내가 에리두를 짓기 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키보토스 곳곳에 숨겨둔 안전가옥(Safehouse) 중 하나야. 전술 위성과의 독자적인 통신 회선도 살아있고, 생체 인식 시스템도 내 권한으로만 묶여 있으니 베리타스의 아이들이라 해도 절대 이곳을 해킹해 낼 수 없어.
리오는 평소의 합리적인 밀레니엄 학생회장의 모습을 내려놓은 채, 조심스러운 손길로 히마리에게 다가갔다. 전동 휠체어의 전원을 끄고, 오물로 얼룩진 그녀의 마른 어깨와 무릎 밑으로 팔을 밀어 넣었다.
신체적으로 한없이 연약한 히마리의 몸은 리오의 품에 너무나도 가볍게 안겨 왔다. 리오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요새 내부의 안쪽에 마련된 간이 침대로 이동했다. 백색의 깨끗한 시트 위에 히마리를 부드럽게 앉혀놓은 리오는, 다시 문가로 걸어가 더러워진 전동 휠체어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혹여나 히마리가 자신의 이동 수단을 빼앗겼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동선이었다.
리오는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히마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차가운 모니터 빛 아래에서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히마리의 메마른 두 손을 두 손으로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리오 : 아이들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 줘, 히마리. 아르고스의 메인 코어 제어권은 이 안의 서브 모니터로도 연동해 두었으니까. 네가 이곳에서 안전하게 숨을 고르는 동안, 바깥의 폭풍은 내가 전부 막아볼게.
그녀를 향해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오프라인의 폭력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히마리는 그 모든 증오를 홀로 묵묵히 짊어졌다.
그 순수한 아이들이 더는 그 음험한 선생을 찾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 악마 같은 어른의 더러운 손길에 다시는 닿지 않도록, 그녀 역시 기꺼이 스스로 악역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었다.
그녀는 온 세상의 오명을 한 몸에 받아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타인에게 쉽게 이해받지 못할 고결하고 숭고한 존재이자,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외로운 절벽 위의 꽃이었으니까.
히마리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니, 그래야만 이 숨 막히는 고독 속에서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쏟아지는 증오의 화살을 '위대한 자가 치러야 할 당연한 통과 의례'로 치환해 버린 히마리는, 그렇게 뒤틀린 정신 승리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갔다. 그렇게라도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으면, 자신이 그토록 수호하려 했던 밀레니엄의 아이들이 던지는 날카로운 언어의 칼날에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다만,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는 단 하나의 죄책감이 있다면 그것은 '리오'였다.
자신이 친 사고를 수습하겠다며 학생회장의 권력마저 교묘하게 흔들고, 결국엔 아무런 대가도 없이 추악한 괴물의 동반자를 자처해 버린 자신의 오랜 숙적. 과거 리오가 독단에 빠졌을 때 그 누구보다 매섭게 비난했던 주제에, 결국 자신이 가장 먼저 리오가 내밀어 준 비논리적인 온기에 기대어 숨어버렸다는 사실이 히마리의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다.
히마리는 조용히 컴퓨터 부품을 정비하고 있는 리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마 들리지 않을 만큼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히마리 : …미안해, 리오. 결국 너까지 내 이기적인 독단에 말려들게 해버렸네. 언제나 전지(全知)를 자랑하던 내가… 고작 이런 순간에조차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한심한 미소녀였다니,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그 쓸쓸한 자조를 들은 것인지, 리오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꾸했다.
리오 : 연산 오류야, 히마리. 넌 한심하지 않아. 그리고 난 말했잖아. 네가 괴물이 된다면 나 역시 기꺼이 그 동반자가 되겠다고. 네가 짊어진 짐의 절반은 내 몫이야.
히마리 : …정말이지, 융통성 없는 학생회장님이라니까.
히마리는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감추려는 듯 짐짓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리오는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공구를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히마리를 바라보았다. 늘 감정이 읽히지 않던 차가운 검은 눈동자에는 오직 히마리만을 향한 잔잔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리오 : 학생회장으로선 누구보다 융통성있고 합리적이야.
히마리 : ….
리오 : 하지만 친구로서는… 네 말대로 융통성 없고 비합리적일지도 모르겠네
리오는 조용히 다가와 히마리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평소의 리오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위로였다.
리오 : 계산 수치대로라면 널 당장 말려야 하는 게 맞지만, 난 지금 내 연산 회로가 아니라 내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르기로 했으니까. 그러니까 자책하지 마, 히마리.
리오의 그 다정한 확답에 히마리는 결국 꽉 다물고 있던 입술을 파르르 떨며, 리오가 덮어준 담요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자존심 강한 초천재가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리오는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선생이라는 잔혹한 악마와 밀레니엄의 학생들이 다시 만나, 그 추잡한 시선과 손길에 아이들이 상처 입고 더럽혀지느니… 차라리 영문을 모른 채 자신을 독재자라 부르며 미워하는 편이 아이들에게 훨씬 안전하고 덜 상처받는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곁에는 그 외로운 절벽을 함께 지탱해 줄 가장 든든한 친구가 있었다.
아이들의 원망이 가득 담긴 서브 모니터의 텍스트들이 어두운 안전가옥의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히마리는 온몸을 파고드는 지독한 고독감 속에서도, 리오의 온기를 느끼며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추악한 독재자의 왕관을 쓴 히마리와 그녀의 비합리적인 방패가 된 리오.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채 필사적으로 쳐둔 선생의 위악의 성벽.
밀레니엄을 지키기 위한 천재들의 슬픈 독단이, 선생이 구축해 놓은 거대한 절망의 시나리오와 소름 끼치도록 완벽하게 맞물려 가며 키보토스의 운명을 거대한 폭풍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렇게 선생은 게헨나와 밀레니엄, 키보토스를 대표하는 3대 학원중 두 거대 학원 모두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 폐허
빛 한 점 들지 않는 칠흑 같은 폐허. 방 안의 지독한 어둠을 밀어내는 것은 오직 싯딤의 상자가 뿜어내는 창백한 모니터 빛뿐이었다. 그 정적만이 감도는 침묵의 공간 한가운데, 선생은 초점 없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시체와도 같은 고요함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선생의 영혼 깊숙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던 ‘황혼의 저주’가 잔혹하게 고개를 들었다. 파멸의 심연 속에서, 뒤틀린 인과율의 거대한 틈새가 칼날처럼 날아들어 선생의 망막을 사정없이 찢고 들어왔다.
선생 : 아아악…!
선생은 순간적으로 뇌수가 폭발할 것만 같은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바닥으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기괴하게 얼룩지는 것과 동시에, 뒤틀린 인과의 틈새를 타고 잔혹한 미래의 파편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자신이 죽고 난 뒤, 유일한 방벽을 잃어버린 채 종말의 불길에 휩싸이는 키보토스. 가혹한 운명 앞에 고통받는 두 학생을 시작으로 마침내 열려버린 종언의 서막.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는 파멸의 도약 속에서, 그 어떤 학생도 키보토스가 허락했던 찬란한 청춘을 누리지 못한 채, 실패하고 절망하며 스러져 가는 종말의 미래가 송곳처럼 선생의 뇌리를 잔인하게 헤집었다.
아로나 :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선생님!
프라나 : 싯딤의 상자의 연산 한계를 초과하는 파동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선생님?!
선생: 하아… 윽, 아로나… 프라나….
선생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뜨거운 핏덩이를 억지로 삼키며 신음했다.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가슴을 짓누르는 감각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급격하게 곤두박질치는 바이탈 사인을 확인한 아로나가 결국 패닉에 빠져 소리쳤다.
아로나 : 선생님?! 아, 아직 말씀하시면 안 돼요…! 바이탈이 전혀 안정되지 않았…!
선생 : 미안해, 놀라게 해서…. 하지만 정말로 괜찮단다. 머리가 조금… 지독하게 아팠을 뿐이야.
선생은 각혈로 붉게 물든 입술 끝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눈앞의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지독한 격통을 속으로 집어삼키며 희미하지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무모할 정도의 초연함에 프라나가 충격과 의구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모니터 너머의 선생을 바라보았다.
프라나 : … 정말이신가요?
선생 : …물론이지. 근데 뭐 특별한 일 같은건 없었어?
선생은 지직거리는 싯딤의 상자를 향해 떨리는 손을 뻗으며 짐짓 쾌활하게 물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어조였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날카로운 시선은 두 학생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아로나 : 그게…
아로나는 선생의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을 초조하게 맞잡았고,
프라나 : …
프라나는 무겁게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방 안을 채우던 기계음마저 일순간 숨을 죽인 듯, 모니터 너머로부터 지독하고 무거운 정적이 흘러나와 폐허를 짓눌렀다. 싯딤의 상자 표면에 얹은 손끝을 통해 두 존재의 극도에 달한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생의 낮게 가라앉은, 거부할 수 없는 어른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파고들었다.
선생 : … 무슨 일이 벌어진 거니? 거짓말은 하지 말아줘.
아로나 : 밀레니엄의… '아케보시 히마리' 학생이…
프라나 : …그리고, '츠카츠키 리오' 학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로나의 뒤를 이은 프라나의 목소리에는 참담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선생은 찢어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도 두 학생의 이름이 나오자 본능적으로 상체를 굳혔다.
선생 : 그 둘이 왜…?
선생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프라나가 힘겹게 고개를 숙이며 메인 모니터의 화면을 전환했다. 밀레니엄 내부의 익명 커뮤니티 데이터와 학생들의 고발 메일이 모니터 화면 위로 툭, 툭 떨어져 내렸다.
창백한 광원 아래로 떠오른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던 선생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초천재 병약 미소녀라더니 결국 독재자일 뿐이였다.]
[실망이야, 히마리 부장. 그렇게 유치하게 샬레를 독점하고 싶었어?]
[내려와, 독재자 년아!]
손가락 끝부터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서늘한 조소와 원망의 문장들. 화면을 가득 채운 폭언들 사이로, 현장의 처참함이 고스란히 담긴 첨부 사진들이 차례로 스크롤 되었다.
그것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휠체어 위로 사정없이 쏟아지는 차가운 오물과 찌그러진 알루미늄 캔. 성난 아이들의 거친 고함과 야유 분노 사이에서, 완벽하게 고립되어 부서져 가던 히마리의 참혹한 근황이 박혀 있었다.
선생 : …아.
선생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진 듯한 신음이 툭 흘러나왔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거대한 충격에 숨이 턱 막혀 전신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화면 속의 처참한 광경 위로, 과거의 기억이 유령처럼 겹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로나와 프라나에게 애원하다시피 부탁해 스스로 심어두었던 추악한 거짓들이었다. 아이들이 죽음의 저주에 휩싸인 자신을 구하려다 다치지 않게 하려고, 차라리 자신을 경멸하고 증오하게 만들겠다며 정교하게 가공했던 그 역겨운 합성 사진들. 그것이 밀레니엄 학생들을 멀리 떼어놓을 가장 완벽한 방어벽이 되어줄 거라 확신했었다.
자신이 던진 모멸적인 시선이 히마리의 영혼을 처참하게 난도질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날, 휠체어에 놓인 그녀의 가녀린 다리를 의도적으로 차갑게 응시하며 ‘동정이나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마라’고 뱉었던 그 잔인한 거짓말이 그녀에게 평생의 흉터가 될 것도 각오했었다. 차라리 자신을 홀로 지옥에 가둘지언정, 아이들만큼은 안전하고 평온한 일상에 머물 것이라 믿었기에 감내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밀레니엄이 자랑하는 ‘초천재 병약 미소녀’의 지성과 그 영혼의 무게를 너무나도 간과하고 있었다. 히마리는 상처 입은 채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선생이 던진 추악한 가짜 고백록과 오염된 데이터들을 밀레니엄의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그 진실의 탈을 쓴 악의에 상처받아 아이들이 믿어온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선생의 모든 오물을 자신이 가로채 혼자 뒤집어쓰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밀레니엄 전체의 증오와 비난을 홀로 받아내는 '위악자' 되기를 자처한 것이었다.
자신이 악마가 되어서라도, 선생이 남긴 그 뒤틀린 욕망을 손길로부터 밀레니엄의 학생 전부를 지키기기 위해.
비참한 진실을 마주한 선생의 음성이 가늘게 떨렸다.
선생 : 대체 왜, 히마리가 이런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거지?
선생의 절박한 다그침에 모니터 화면 너머로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이윽고 프라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프라나 : … 아르고스(Argos)
선생 : … 아르고스(Argos)?
낯선 단어에 선생이 되묻자, 프라나는 감정을 죽인 인공지능 특유의 서늘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프라나 : …밀레니엄의 전산망을 완전히 장악한, 광역 정보 통제 프로토콜입니다.
선생 : 통제… 라고?
프라나 : 네. 츠카츠키 리오 학생이 구축한 키보토스 전역의 물리 인프라와, 아케보시 히마리 학생이 설계한 고차원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결합한 형태입니다.
두 천재의 기술이 결합하여 탄생한 거대한 시스템. 그 무시무시한 실체에 선생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번에는 아로나가 모니터 화면을 두드리며 비통하게 덧붙였다.
아로나 : 평소에는 백그라운드에서 완벽한 침묵을 유지하지만, 데이터의 헤더에 '선생님' 혹은 '샬레'와 관련된 패킷이 감지되는 순간… 시스템은 가차 없이 그 정보를 소멸시키고 있어요.
선생 : 그걸… 히마리랑 리오가 만들 리가 없어.
선생은 마른침을 삼키며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밀치락질이었다.
선생 : 그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데… 어떻게 그런 짓을…
아로나 : 선생님의 그 추악한 가짜 사진들을 본 아케보시 히마리 학생이, 선생님과 밀레니엄 학생들이 만나 상처받는 상황 자체를 통제하기 위해… 아르고스의 망막 안에서는 단 한 바이트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프라나 : 아무것도 모르는 밀레니엄 학생들은 선생님과의 만남을 강제적으로 끊어놓았다는 사실 때문에, 아케보시 히마리 학생을 밀레니엄 공공의 적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프라나의 쐐기를 박는 듯한 보고가 폐허의 정적을 깨부수었다. 선생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 :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거칠게 쓸어내린 마른 얼굴 위로 지독한 후회와 자책감이 피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아이들을 지키겠다는 오만함에 눈이 멀어, 그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품었던 마음의 깊이를 제멋대로 재단해 버린 대가였다. 낭만을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소녀의 신념을 시궁창에 처박아 괴물로 만든 것은, 리오의 합리성도 히마리의 독기도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건넨 잔인한 거짓말이 결국 히마리를, 끝내 괴물 ‘아르고스’를 산태(産胎)하게 만든 것이었다.
선생 : 미안해… 미안해, 히마리….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선생은 몇 번이고 겉도는 사죄를 뱉어냈다. 심장이 날카로운 유리 파편으로 헤집어지는 것 같았다. 뺨에 묻은 오물보다 더 차가운 아이들의 적의 속에서, 홀로 떨며 바퀴를 굴렸을 연약한 소녀의 실루엣이 눈앞에 아른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선생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았지만, 책상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그녀가 자신만을 지옥에 가두기 위해 아르고스의 눈동자를 개안시켰다면, 그리고 자신을 향한 증오로 무장해 독재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자신이 그 요새를 부수고 나갈 차례였다. 더 이상 그 연약한 어깨에 밀레니엄의 증오와 자신의 죄악을 짊어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폐허의 공기가 기괴하게 비틀리며, 황혼의 문이 다시 한번 무겁게 진동했다. 거대한 진동과 함께 선생의 망막 너머로 또 다른 인과율의 틈새가 잔혹하게 열려 젖혀졌다.
선생 : … 아아악!!!
선생은 다시 한번 머리를 깨부수는 듯한 격통에 비명을 지르며 책상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번에 밀려든 환영은 방금 전의 절망과는 전혀 다른, 극도로 이질적인 궤적의 미래였다.
그것은 자신의 사후, 히마리와 리오가 밀레니엄 모든 학생들의 원성과 증오를 한 몸에 받으며 아르고스를 파괴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파괴되는 찰나,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하려는 그 찰나, 두 학생은 '누군가를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아르고스의 제어권을 쥐었다. 그 순간 아르고스는 폭발적인 연산력으로 키보토스 전체를 맹렬하게 스캔하기 시작했다.
파멸의 전조이자 추악한 독재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그 절대적 통제의 눈동자는, 사실 종말 속에서 두 학생을 끝까지 찾아내어 지켜내기 위한 ‘기적의 방패’였던 것이다.
아르고스 최후의 개안(開眼). 그것은 두 학생이 세상에서 사망하는 최악의 미래를 저지하는 시작점이었다. 뒤틀려 있던 미래의 궤적이 통두리째 뒤바뀌며, 마침내 두 학생의 구원을 시작으로 키보토스 전체가 구원받는 찬란한 기적의 미래가 창백한 종말의 틈새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선생의 바이탈이 다시 급격하게 곤두박질 치자 아로나와 프라나가 다시 한 번 외쳤다.
아로나 : 선생님 괜찮으세요?
싯딤의 상자 너머에서 아로나가 울먹이며 외쳤다.
프라나 : …선생님!
프라나 역시 금치 못하는 불안감을 담아 떨리는 목소리로 선생의 이름을 불렀다. 저주의 격통 속에서 기적의 편린을 목격한 선생의 눈동자에는, 전과는 다른 기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절망의 심연 속에서 마주한 한 줄기 구원의 열쇠가 그의 눈 안에서 차갑게 요동쳤다.
선생 : …나는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간신히 대답을 뱉어낸 뒤, 선생은 깊은 고뇌에 빠졌다.
고립되어가는 히마리를 구하기 위해 지금 당장 자신이 움직인다면, 키보토스 최고의 오파츠인 싯딤의 상자와 아로나, 프라나의 연산력으로 아르고스 시스템을 포맷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모든 죄를 자신의 위악으로 돌리고 "내가 히마리를 이용했을 뿐"이라며 세상을 속인다면, 히마리는 상처받지 않고 곧바로 밀레니엄의 고결한 '지고의 꽃'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 순간 아르고스는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고, 그것은 곧 '미래의 두 학생'의 파멸을 신호탄으로 키보토스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종말의 혼돈에 빠져드는 미래를 의미했다. '히마리 한 사람의 명예'와 '키보토스 전체의 존망'. 저울은 잔인하리만큼 비대칭이었다.
선생 : 내 손으로 아이를 지옥에서 꺼낼 수 있는 힘(싯딤의 상자)이 눈앞에 있는데도, 세상을 위해 그 아이를 지옥에 방치해야만 한다니. 이것이 어른의 책임인가, 아니면 그저 비겁한 변명인가.
결국 선생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키보토스 전체를 구원하는 무거운 선택을 내렸다.
선생 : 아르고스는 히마리와 리오가 함께 빚어낸 우정의 산물이자 단 한번 키보토스를 구원할 빛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세미나의 학생회장으로 복귀한 리오가 뒤에서 히마리를 굳건히 지탱해 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과거의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통제하려던 오만한 리오였다면 결코 믿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리오는 뼈아픈 실책을 통해 '선'을 아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히마리는 그 리오에게 올바른 선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유일한 친구였다. 두 사람의 유대라면 이 기괴한 괴물을 통제할 수 있을 터였다.
실제로 아르고스는 키보토스 전역을 옥죄는 가공할 방위망을 구축하고 있었지만, 기묘하게도 오직 밀레니엄의 학생들, 그것도 선생이나 샬레에 관련된 정보만을 철저히 통제할 뿐 그 외의 영역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히마리가 남겨둔 마지막 인간성이자, 선생을 향한 슬픈 증오의 증거였다.
선생은 결국 아르고스를 파괴하는 대신,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결심했다.
다만, 이 선택의 끝에 홀로 남겨질 아이들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뒤, 아르고스라는 멍에를 짊어진 채 독재자라 손가락질받을 히마리와 리오의 명예를 지켜야 했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지어야 할 마지막 책임이었다.
선생 : 아로나, 프라나. 지금부터 내 지시를 기록해 줘.
선생은 가빠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자신의 사후에 발동될 두 사람의 명예 회복 및 보호 계획을 싯딤의 상자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의 미래 속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어른의 기도가 전자기판 위로 조용히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