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황혼선생


#. 밀레니엄 / 그날 밤




그날 밤, 밀레니엄으로 돌아온 히마리는 마침내 결단했다.


휠체어에 기댄 그녀의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거칠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초천재 병약 미소녀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게, 그녀의 독점적인 해킹 권한은 밀레니엄 전 학원의 초고속 네트워크 방어벽을 단숨에 관통했다. 세미나의 승인도, 그 어떤 절차도 거치지 않은 초법적인 강제 명령이 전산망 전체를 타고 서늘하게 하달되었다.



[밀레니엄 긴급 공지: 현 시간부로 샬레와의 모든 정보 교류를 무기한 제한합니다. 선생과의 직접 접촉은 예외 없이 실시간으로 기록하며, 필요시 즉각적으로 차단 조치합니다.]



화면에 점멸하는 경고등을 바라보며 히마리는 마른침을 삼켰다. 선생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샬레의 초법적인 권력을 홀로 막아서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국 히마리는 해킹 툴을 닫고, 평생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 같았던 리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 한 번의 신호음이 울린 후, 차가운 기계음 섞인 리오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리오 : …히마리? 네가 먼저 연락을 다 하다니, 꽤 신기한 일이네. 그나저나 내 모니터에 떠 있는 이 밀레니엄 긴급 공지는 뭐야? 초천재 병약 미소녀의 장난치고는 선을 조금 넘은 것 같은데… 혹시 감당하기 힘든 트러블이라도 생겨서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걸까?


히마리 : 리오, 당신의 그 영혼 없는 농담을 받아줄 만큼 한가한 기분이 아니야. 농담인지 아닌지는 지금 당신 화면에 실시간으로 동기화되고 있는 내 분석 데이터를 보면 잘 알 텐데.



휠체어에 깊숙이 몸을 기댄 히마리가 수화기 너머의 학생회장을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히마리 : 지금 당장 네가 가진 에리두 시스템의 백도어 우회 접속 권한과 마스터 키, 그리고 격납고에 있는 그 기괴한 깡통 로봇들을 포함한 모든 제어권을 제게 넘기도록해.


리오 : 깡통 로봇이 아니라 ‘아방가르드 군’이랑 AMAS들이야, 히마리. 내 미학적 정수가 담긴 정예 유닛들을 그렇게 모욕하는 건 유감스럽네. 게다가 내 방어 체계는 밀레니엄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한 최종 보루야. 명확한 근거 없이는 단 한 조각의 데이터도 넘겨줄 수 없어. 심지어… 도가 지나친 장난꾸러기에게는 더더욱.


히마리 : 그 한심한 네이밍 센스에 태클을 걸 시간조차 아까우니 본론으로 바로 들어갈게.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니야, 리오. 샬레를… 정확히는 선생을 전방위로 격리해야 해. 그 사람이 가진 '어른의 힘'과 연쇄적인 영향력은, 이미 밀레니엄의 통제 범위를 한참 초과했어. 이대로 방치하면 다음 붕괴는 우리 차례야.



수화기 너머로 잠시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평소 아리스와 토키의 일로 선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며 자신을 그토록 매섭게 다그치던 히마리였기에, 리오로서도 도무지 연산해낼 수 없는 독단이었다. 세미나 회장실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리오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리오 : 선생님을 격리하겠다고? 이해할 수 없네, 히마리. 그분은 아리스를 구원했고, 내 잘못된 선택 속에서도 너와 함께 토키를 끝까지 버리지 않은 사람이야.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어른'이라고 내게 주장했던 건 다름 아닌 너였을 텐데. 도대체 왜 이제 와서 그런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거지?



리오는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의구심이 동시에 묻어났다.



리오 : 이것이 밀레니엄의 최고 책임자인 나조차 납득해야 하는 조치라면,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명확한 계산과 근거를 제시해 줘. 이유를 듣고 싶네.


히마리 : …대답할 수 없어.


리오 : 이유도 없이 밀레니엄 전체를 움직이겠다는 거야? 그건… 예전의 내가 저지른 과오와 다를 바 없어. 설명해, 히마리. 도대체 샬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히마리 : 말할 수 없다고 했잖아…!



순간 수화기 너머로 히마리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평소의 도도하고 여유 넘치던 '초천재 병약 미소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추악한 합성 사진. 자신을 피사체 조차 될 수 없을 정도로 결함품이란걸 증명하는 의도로 제외한 것, 선생의 모멸적인 시선,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상황을 만든 원흉. 그 더러운 기억을 다시 입에 담는 것조차 자신의 영혼이 오염되는 기분이었기에 히마리는 끝내 진실을 밝히지 못했다. 수화기를 쥔 히마리의 하얀 손가락에 핏줄이 돋아날 만큼 힘이 들어갔다.



리오 : …히마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와 미세한 울먹임에, 리오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 천재적이고 오만하던 히마리가 이토록 망가진 목소리를 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현상이었다.



히마리 : 그냥…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 그 인간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리오 : …


히마리 : 부탁이야, 리오. 친구로서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제발 도와줘.



그것은 이성이 아닌, 완벽하게 무너져 내린 인간이 건네는 처절한 애원이었다.



리오 : …알겠어. 히마리, 네가 이 정도로 감정적으로 흔들릴 정도라면 보통 일은 아니겠지. …그것만 도와주면 되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한 차례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리오는 이미 책상 위에 올려둔 펜을 밀어놓고, 히마리를 돕기 위해 단말기 키보드 위로 손을 올린 참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히마리의 단 한 마디가, 리오의 손가락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었다.



히마리 : 빅 시스터 알고리즘 (Big Sister algorithm)


리오 : … 지금 뭐라고?



순간 리오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완전히 가셨다. 설마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인지 연산 회로가 강하게 요동쳤다.




빅 시스터 알고리즘 (Big Sister algorithm)


리오가 과거에 구축했던 밀레니엄 최악의 절대 감시 시스템이었다. 학원 전체의 CCTV, 모든 학생의 통신망과 개인 단말기 백도어까지 한눈에 들여다보고 실시간으로 추적하는 괴물이었다.


오직 밀레니엄의 안위만을 위해 개인의 사생활을 철저히 짓밟았던 이 시스템 때문에, 히마리가 이끄는 ‘베리타스’를 비롯한 수많은 학생이 리오를 ‘빅 시스터(Big Sister)’라 부르며 멸시하고 대립했던 이유였다.


누구보다 개인의 자유와 낭만을 가장 고결하게 여기며 리오의 통제를 혐오했던 히마리였다. 그리고 스스로의 과오를 뉘우치고 이제는 타인을 억압하는 통제 시스템을 두 번 다시 만질 의사가 사라진 리오 본인이었다.


그런 두 사람 사이의 대화에서, 가장 나와서는 안 될 금기어가 히마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것이다.



리오 : …히마리, 네가 지금 무슨 요구를 하고 있는지 인지는 하고 있는 거야? 그 시스템을 다시 가동하겠다는 건…


히마리 : 알고 있어. 내가 리오 너를 향해 ‘독재자’니 ‘빅 시스터’니 하며 온갖 독설을 퍼붓게 만들었던 그 정점의 쓰레기 시스템이라는 거,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아.



히마리는 수화기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시궁창에 처박는 자괴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미 샬레에서 본 그 남자의 실체는 히마리의 영혼을 통째로 집어삼킨 뒤였다.



히마리 : 하지만 지금은 그 방법밖엔 없어. 그 인간과 밀레니엄과의 접촉을 원천 차단해야 해. 리오… 부탁이니까 날 방해하지 마. 나라고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니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와 절박한 서글픔에 리오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비논리적인 감정이 섞인 애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공포의 무게만큼은 연산 장치를 거치지 않고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리오는 침묵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리오 :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빅 시스터 알고리즘은 밀레니엄 엑스포 사건 이후 내 손으로 직접 완전히 파괴했어. 데이터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포맷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복구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


히마리 : 복구하자는 게 아니야, 리오. 새로 만들자는 거지.


리오 : 새로 만든다고? 그 방대한 감시 아키텍처를 단기간에 설계하는 건 아무리 우리라도….


히마리 : 너의 하드웨어 및 설계 능력과, 나의 소프트웨어 및 프로그래밍 기술이 합쳐진다면 불가능하지 않아.



히마리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멎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한이 끼칠 정도로 차갑고 명징한 광기였다.




히마리 : 네가 시스템의 거대한 뼈대와 서버, 밀레니엄 전역의 CCTV 연동망을 다시 짜 줘. 내가 그 위에 절대 뚫리지 않는 완벽한 방화벽과 추적용 인공지능을 얹을 테니까. 그렇게만 된다면 과거의 빅 시스터 알고리즘을 뛰어넘어, 밀레니엄이 아니라 키보토스 전체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신의 시스템도 만들어낼 수 있어



키보토스 전체를 감시하는 신의 시스템.



그 오만하고도 위험천만한 발언이 다름 아닌 히마리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리오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과거 자신조차 감히 상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선을 아늑하게 넘어서는 '절대적인 통제'의 영역이었다.



리오 : 히마리…!



리오는 자신도 모르게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니터 빛에 비친 리오의 눈동자가 깊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돌아온 것은 리오의 경악을 받아치는 매서운 독설이 아니었다.



히마리 : …으, 흑….


리오 :  …히마리?



작게 억눌린 흽과 함께, 둑이 터진 듯 서글픈 울음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평생 눈물 한 방울 보여주지 않을 것 같았던,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기까지 했던 초천재 병약 미소녀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만약 이 사실을 게임개발부를 비롯한 밀레니엄의 학생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수한 아이들이 선생의 추악한 이면과 자신을 향했던 오염된 시선들을 알아버린다면,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이 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비극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 했다.


그렇기에 히마리는 자신을 그토록 아껴주던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오랜 동기인 리오에게조차 그 더러운 진실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채 홀로 가슴을 쥐어뜯었다.



히마리 : 부탁이야… 리오…. 나 정말로 무서워…. 더는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 좀 살려줘, 리오… 제발….



수화기를 쥔 채 휠체어 위에서 조그맣게 웅크려 엉엉 우는 히마리의 처절한 흐느낌에, 세미나 회장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리오는 눈을 감았다. 연산 장치와 논리 회로는 구체적인 이유조차 밝히지 않는 이 위험한 제안을 당장 거절하라고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것은, 자신이 에리두 사건으로 잠적하고 숨어 방황하고 있을 때도 자신을 책망하기보다는 세상 밖으로 꺼내 주었던 유일한 친구, 히마리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중한 친구가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절망에 전력으로 무너져 내린 친구의 비명이었다.



리오 : …참 잔인하네, 히마리.



리오는 마침내 떨리던 눈을 뜨고, 조용히 책상 앞으로 걸어가 마우스를 잡았다. 그녀의 차가운 빨간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남아있지 않았다.



리오 : 내 손으로 직접 파괴했던 쓰레기 더미를, 네 손으로 직접 다시 부활시키라고 말하다니. 끝내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건 섭섭하지만… 너를 이토록 망가뜨린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졌어.



리오는 수화기를 어깨와 뺨 사이에 고정한 채, 굳은 표정으로 텅 빈 메인 단말기 모니터를 응시했다. 과거의 빅 시스터 알고리즘은 밀레니엄 엑스포 당시 데이터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포맷해 버렸기에, 복구할 수 있는 백업 파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리오 : 좋아. 받아들일게. 네가 원하는 대로 밀레니엄의 모든 연산 서버와 지하 격납고의 오토마타 생산 라인 권한을 개방하겠어. 내가 세계의 뼈대를 구축할 테니, 너는 그 심장을 완성해 줘.



하지만 기록이 사라졌다고 해서 리오의 머릿속에 각인된 천재적인 아키텍처 설계 능력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리오는 완전히 비어 있는 백지상태의 캔버스 위로 메인 프레임을 올렸다. 그녀의 열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두드리기 시작하자, 화면 위로 차가운 푸른빛의 홀로그램 선들이 정교하게 교차하며 새로운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과거 밀레니엄 한 학원만을 가두었던 원형 감옥의 한계를 부수고, 키보토스 전체를 전방위로 포획하기 위한 전무후무한 광역 감시망의 뼈대였다.


밀레니엄의 모든 연산 서버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가동되었고, 모니터 화면 위로 정밀한 하드웨어 그리드가 대륙 전역의 지도 위로 거침없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리오는 수화기를 귀에 대고, 여전히 흐느끼는 오랜 친구를 향해 담담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어조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리오 : 하지만 기억해 둬, 히마리. 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두 번 다시 평화롭고 낭만적인 밀레니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우리는 키보토스 전체를 적으로 돌린 괴물이 되는 거야.


히마리 : …아니야, 리오. 괴물은… 나 혼자면 돼.



수화기 너머로 히마리가 눈물을 훔치며, 간신히 쥐어짜 낸 목소리로 리오를 만류했다. 자신의 망가진 신념과 죄책감의 무게를 오랜 친구에게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히마리의 마지막 이성이자 배려였다.



히마리 : 이 모든 비극은 내가 제안했고, 시스템의 코드를 짜는 것도 나야. 그러니까 넌… 밀레니엄의 학생회장으로서 그냥 모른 척해 줘. 더럽고 추악한 오명은 나 혼자 전부 짊어질 테니까….


리오 :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히마리.



리오의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히마리의 말을 부드럽게 가로막았다. 모니터의 푸른 설계도 빛이 리오의 검은 눈동자에 어려 잔잔하게 일렁였다. 리오는 키보드 위에 올렸던 손을 잠시 떼고, 수화기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리오 : 내가 독단에 빠져 에리두를 짓고 밀레니엄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도, 모두가 나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할 때도… 언제나 내 궤도를 수정해 주고 끝까지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었던 건 다름 아닌 너였어.




그것은 연산 수치나 데이터로는 절대 계산할 수 없는, 리오가 가슴 깊이 간직해 온 유일한 온기였다. 리오의 입가에 찰나의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리오 : 네가 나를 세상 밖으로 꺼내 주었으니, 이번엔 내가 네 곁에 있을게. 네가 괴물이 된다면 나 역시 기꺼이 그 괴물의 동반자가 되겠어.



그것은 밀레니엄의 차가운 세미나 회장으로서가 아닌, 오랜 세월을 함께 헤쳐 온 단 하나의 동기에게 건네는 리오의 가장 다정하고 굳건한 맹세였다.



리오 : 그러니까 혼자서 울지 마, 히마리. 세계의 뼈대는 내가 완벽하게 지탱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