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
가을밤의 공기는 제법 쌀쌀했다. 희미한 달빛과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뒤섞여 아스팔트 위로 길게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수진의 집 앞, 민준은 차 시동을 끈 채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이제… 들어가 봐. 늦었다."
민준이 먼저 정적을 깼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은 곧 이별의 인사였기에 수진의 심장이 쿵, 하고 작게 내려앉았다. 안 돼.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늘이 아니면, 이 완벽한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는 용기를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 응. 운전 조심해서 가고."
입에서는 바보 같은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수진은 속으로 제 이마를 쳤다. 하루 종일, 아니 민준과 함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고 강변을 산책하는 내내, 수백 번도 더 연습했던 말이 혀끝에서만 맴돌았다. 그저 세 글자면 되는데, 그 말이 왜 이리도 무거운 바위 같을까.
민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수진은 거의 본능적으로 외쳤다.
"저기, 민준아!"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울려 퍼져, 고요한 밤공기를 갈랐다. 민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놀란 눈으로 수진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자, 애써 끌어모았던 용기가 풍선처럼 픽- 하고 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괜히 제 가방끈만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왜? 뭐 두고 갔어?"
걱정스러운 그의 물음에 수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두고 간 건 없어. 오히려, 너를 붙잡아 두고 싶어. 마음속의 외침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공허하게 흩어졌다.
"그게… 아니… 저기…"
말이 자꾸만 헛돌았다. 그의 맑은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수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닳아빠진 운동화 코뿐이었다. 이 신발처럼, 자신의 마음도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았다. '그냥 잊어버려' 하고 돌아서려는 민준의 기색이 느껴지자,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입을 열었다. 아주 작은, 모기만 한 목소리였다.
"……라면, 먹고 갈래?"
정적이 흘렀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은 듯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도,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수진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너무 직접적이었나? 그가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하지? 아니, 그냥 배가 고픈 애로 보면 어쩌지? 온갖 후회와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차라리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달칵.'
민준이 열려던 차 문을 다시 닫는 소리가 들렸다. 수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의 입가에 머물던 희미한 미소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짙어지고 있었다. 그 눈빛은 라면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수진의 마음을 정확히 보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놀람이나 당황이 아닌, 따뜻하고 깊은 이해의 눈빛이었다.
민준은 차에서 내려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부끄러움에 붉어진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래. 라면 좋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수진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네가 끓여주는 거면, 더 좋고."
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작은 온기에 얼어붙었던 수진의 심장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민준은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이끌어 깍지를 꼈다. 수줍게 마주 잡은 손의 온기가, 쌀쌀했던 가을밤의 모든 한기를 몰아내는 듯했다. 라면의 김보다도 더 뜨거운 무언가가 두 사람 사이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
두번째
***
"아, 진짜!"
하나의 외마디 비명이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 모니터 화면에는 붉은색의 ‘K.O.’ 글자가 큼지막하게 떠올라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의 캐릭터는 비참하게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맞은편 소파에 앉은 지민의 캐릭터는 승리의 포즈를 취하며 의기양양하게 춤을 췄다.
"크으, 봤냐? 이게 재능의 벽이라는 거다."
지민은 컨트롤러를 내려놓으며 얄밉게 웃었다. 하나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늘 입고 다니는 헐렁한 회색 후드티가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구겨져 있었다. 평소라면 "한 판만 더!"를 외쳤겠지만, 이번 판에는 너무나도 끔찍하고, 현실감 없는 벌칙이 걸려 있었다.
"……방금 건 무효야. 렉 걸렸어."
"핑계 오지고요. 아까 네가 이길 땐 내 탓 아니라며."
지민의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하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사건의 발단은 10분 전, 마지막 한 판을 남겨두고 벌칙을 정하던 때였다. 승부욕에 불탄 하나가 "진 사람이 뭐든 소원 들어주기!"를 외쳤고, 장난기가 발동한 지민이 낄낄거리며 "콜. 그럼 진 사람, 위에 입은 옷 벗기."라고 받아친 것이 화근이었다. 그저 게임의 재미를 더하기 위한, 실현될 리 없는 농담 같은 약속이었다. 적어도 질 거라고는 0.1%도 상상하지 못했던 하나에게는 그랬다.
"자, 약속은 약속이지, 이하나 선수."
지민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하나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을 깨닫자 하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하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남자애' 같다고 여겼다. 짧은 숏컷 머리에, 치마보다는 트레이닝복. 헐렁한 박스티나 후드티는 그런 그녀에게 일종의 갑옷이었다. 남들보다 조금 발육이 좋은 편인 가슴을 가려주고, 성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지민과도 격의 없이 어깨를 부딪치며 게임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보호막.
그런데 지금, 가장 친한 남자 사람 친구 앞에서 그 갑옷을, 그것도 유일한 갑옷을 벗어야 했다.
"…진짜 해야 돼?"
"어허, 겜돌이의 긍지를 걸고 한 약속을 어기려고?"
지민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녀의 승부욕을 교묘하게 긁었다. 하나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체념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약속은 약속이다. 여기서 빼는 건 더 비참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을 닫고 잠갔다. '딸깍'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에 지민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하나는 놓치지 않았다. 저 녀석도 마냥 태연한 건 아니구나.
하나는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얼굴이라도 가리면 조금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후드티의 아랫단을 잡았다. 축축하고 낡은 면의 감촉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눈 감아."
"그건 반칙이지."
지민의 목소리도 살짝 잠겨 있었다. 그는 애써 태연한 척 시선을 게임 화면에 고정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이 그의 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심호흡 한번과 함께, 망설임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 빠르게 후드티를 위로 들어 올렸다. 헐렁한 옷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자, 서늘한 방 안의 공기가 맨살 위로 스며드는 감각이 소름처럼 돋았다.
마침내 옷이 머리 위로 완전히 벗겨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는 듯했다.
헐렁한 옷 속에 감춰져 있던, 가느다란 어깨끈의 검은색 속옷이 드러났다. 평소의 '친구 이하나'가 아닌, 너무나도 선명한 '여자 이하나'의 모습이었다. 하나는 본능적으로 팔짱을 껴 몸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았다. 얼굴은 불덩이 같았고 심장은 발소리처럼 크게 울려 지민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지민은 입을 살짝 벌린 채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장난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놀람, 당황, 그리고 그가 스스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낯선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컨트롤러를 소파 위로 툭, 떨어뜨렸다. 그 작은 소리에 하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부끄러움은 수백 배로 증폭되었다. 이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던 하나가 막 다시 옷을 입으려던 찰나, 지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고 진지했다.
"…야. 됐다. 입어."
그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허공을 헤매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귓불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했다.
"…미안. 장난이 심했다."
하나의 오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녀는 서둘러 후드티를 다시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익숙한 천이 몸을 감싸고 다시 '갑옷' 안으로 몸을 숨기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음 판은 죽었어, 너."
하나가 툴툴거리며 자리에 앉아 컨트롤러를 집어 들었다. 지민은 아무 대답 없이, 마른 입술만 축였다. 게임의 승패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두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던 벽, 혹은 친구라는 이름의 편안한 경계선이 오늘, 이 짧은 순간에 흔적도 없이 허물어져 버렸다는 것을 둘 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