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의 기록

거칠부가 젊었던 시절 스님이 된 적 있음

스님이 되어 편력하다 고구려에 혜량이라는 유명한 스님이 계시다는 말을 듣고

거기로 넘어가 불경 강의를 들음

그런데 어느 날 밤 혜량이 거칠부를 부름

혜량 : 사미 어디서 왔소? - 사미는 원래 비구계 받기 전의 예비 승려를 가리키는 말(여자는 사미니)이나 통상은 그냥 젊은 승려를 가리키기도 함

거칠부 : 신라입니다

혜량 : 내 관상을 보니 너는 크게 될 인물이라 .... 속히 여기를 떠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싶다 ... 아 그리고 내가 위험에 처하면 나 좀 도와주고

거칠부 : 네 스승님


그 후 신라로 간 거칠부는 환속하여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전의 스승에게서 편지가 온다


혜량 : 나라 망할 것 같다 나 좀 도와다오

거칠부 : 어서 오십시오 ! 환영합니다


거칠부는 혜량의 망명을 받아들이고 왕인 진흥왕에게 소개하고 혜량의 건의를 받아들여 팔관회를 열게 하니 이게 한국사 최초의 팔관회 기록임 ...


이로 미루어보면 몇 가지 짐작 가능한 것이 있음


1. 불경 강의 같은 고급 강의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언어가 크게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2. 그래도 그 특유성 정도는 남아 있을 수 있다 - 혜량과 그 제자들이 짐작했듯이 ...

아마 거칠부도 강의하면서 대답도 했을 것이고 일상 소통도 했을 것인데 신라 출신이라는 것이 티가 났고

혜량은 이게 단순히 신라인 월경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왕족이나 고위 귀족의 자식일테니 필경 외교 문제로 퍼질 수도 있으니 미리 돌려보내버린 듯 함 -참고로 서민 자식이 자유럽게 국내를 여행하려면 저 시기로부터 최소 1400년은 지나야 가능 ,,,


그리고 저 기록은

6세기 고구려의 내분을 알려주는 유일한 국내 자료임

6세기 고구려는 엄청난 내분에 시달리는데 그게 죄다 일본서기에만 기록이 있고 - 중국 사서에는 에둘러 기록됨

우리 기록에는 저 거칠부 편에서 혜량의 대사가 유일한 기록으로 남아 있음

그래서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이 일본서기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

참고로 고구려는 소수림왕을 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역사는 뭔가 스토리텔링이 될만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그 이후는 딱딱한 조공 기록이나 몇 가지 정치 기록 뿐이라 ....

고구려가 펴낸 자체 역사서가 소수림왕 이후에 대해서는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됨

혹은 우리에게 전하지 못하였거나 ....

소수림왕 이전까지는 신집이 전하면서 그 신집 속에 포함된 자료들이 삼국사기나 삼국사기의 저본이 된 구삼국사 편찬에 중요 자료가 된 듯 하나

불행히도 소수림왕 이후의 역사는 책으로 펴내지 못한 듯 함

그러면서 잊혀진 듯 하고

특히 영양왕 이후 고구려 최후반기 역사는 중국 사서 복붙이라 - 약간의 주술적 기록 빼면

김부식도 한탄할 정도였으니 ... - 실제 김부식은 중국 사서 없었으면 우리는 을지문덕도 몰랐다 할 정도로 자료 부족에 시달렸던 사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