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내 사견과 무관함


[기고]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에 대한 오해와 진실-1
  •  최미성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회원
  •  승인 2019.07.1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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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민족시인, 저항 시인으로 후세의 사랑을 널리 받는 일제강점기 대표적 시인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인 2017년에 이어, 3.1운동 100주년인 올해에도 윤동주는 시낭송회, 문학예술제, 콘서트, 뮤지컬, 영화 등 여러 가지 형식의 행사로 재조명받고, 기념되고 있다. 

윤동주는 북간도(北間島)에서 태어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윤동주의 생가는 중국 지린성 용정시 명동촌(吉林省龍井市明東村)에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지칭하는 간도(間島), 즉 북간도는 두만강 이북의 용정시를 포함한 지금의 연변조선족주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일대다. 간도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는 중국과의 영토문제를 논하면서 간도를 한민족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윤동주의 조부가 이주하고 윤동주가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다녔던 북간도는 적어도 그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중국의 땅이었음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윤동주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윤동주 생가는 2012년 연변조선족주치주의 추진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아 수리됐다. 그런데 수리과정에서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힌 표지석이 새롭게 세워졌고, 그 뒤로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는 호칭에 불편해하거나 반감을 드러내는 시선들이 한국사회에 상당수 생겨났다. 

그러다가 2016년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가 중국 대표 포털사이트 바이두(百度)의 백과사전에 윤동주의 국적이 중국으로, 민족은 조선족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고 언론화하면서 ‘중국 조선족’이라는 윤동주에 대한 호칭의 문제점이 다시 불거지게 됐다. 처음에는 윤동주 생가를 방문했던 한국인들과 윤동주 관련 연구나 사업을 하던 한국인들로부터 소폭으로 전해지다 보니 파장이 크지 않았지만, 언론에 대한 반크의 폭로는 인터넷을 타고 일파만파 번져 급기야는 ‘중국에서 고구려 땅을 빼앗더니 이제는 윤동주까지 빼앗으려 한다’며 중국 혐오 태도를 보이는 국민도 적지 않았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에 부쳐 출간된 『윤동주 시 함께 걷기』를 보면, 윤동주의 출생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중국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으로 독자의 흥미와 주의력을 끌어내는 부분이 인상 깊다. 북간도에서 출생한 윤동주의 귀속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중국과 윤동주의 관계가 공론화됐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아쉬운 것은 윤동주를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정당한 측면을 설명해주는 글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로지 부당한 측면만을 꼬집는 글들이 앞다투어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하면 안 되는 이유 등을 누누이 강조하는 목소리를 높일 뿐이라는 점이다.

윤동주가 중국 사람이라니? 대한민국에서 윤동주는 교재나 시험문제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무릇 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받은 국민이라면 윤동주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윤동주는 대한민국의 명망 높은 시인이다. 

현대시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진행됐던 여론조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1위가 윤동주였다. 그런데 이렇듯 국민의 많은 사랑을 받아온 윤동주 시인을 중국 사람이라고 하다니,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충분히 순간적으로 당혹스럽고 어처구니없고 분노할만한 일이라 생각된다. 

중앙일보와 전남일보의 인터넷 기사 내용을 각각 인용해보자면, “지난 2012년 중국 지린성에서 윤동주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국적을 마치 중국인 것처럼 소개한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표현으로 볼 때, 윤동주 시인을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으로 본 것과 다름없다. 일본 검찰이 공개한 윤동주에 대한 재판 기록들을 봐도 윤동주 시인의 본적은 함경북도로 한국인임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윤동주의 가족이 일본의 폭압을 피해 북간도로 피난을 갔지만, 국적이 바뀐 적은 없다.” “조선족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한민족 계열의 소수민족이다. 1910~30년대 만주에 거주한 사람들과는 애당초 다르다. 1909년 청·일 간도협약에 ‘도문강 이북의 간도지역 내 한국민 거주를 승인한다’고 돼 있다. 간도 거주 한국민은 청의 보호(통제)를 받지만, 그 나라 백성은 아니었다.”와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사들은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는 호칭을 못 마땅해하는 인식의 배후에 깔려 있는 생각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의 배후에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공동으로 망각되고 있다. 그 망각이 불러일으킨 오해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불만과 분노가 더 크게 끓어 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과 중국 조선족 역사에 대한 인식이다<계속>


‘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진실

‘조선족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중국 국적을 부여받은 한민족 계열의 소수민족이고, 1910~30년대 만주에 거주한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전자의 경우는 국적을 취득했고 후자의 경우는 국적과 상관없이 거주로 보기 때문에 둘이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근대 간도에 거주했던 한인들의 국적 문제는 한중일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뒤엉켜진 아주 복잡한 문제다. 해방 전 한국과 중국은 모두 명확한 국적법이 없었거나 국적법이 만들어진 다음에도 지금처럼 국적의 경계를 명확히 하여 출입국통제를 철저하게 실행하지 못했다. 또 국적법은 국제적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나라마다 자국의 여러 상황에 비추어 제정하고 관리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고 모순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한국은 국민이 다른 나라 국적을 가져도 자기 나라 국적이 자동 말소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상황이었고, 중국은 만주국 성립 이전에 국적법을 만들고 간민들의 중국입적을 강요하지만, 이후 만주국에 대한 일본과의 협약과 모순되는 점이 발생하자 중국과 일본 쌍방 모두 각자의 수요와 이익을 위해 간도 이주 한인의 국적 문제에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간도에 이주한 한인의 국적문제는 간도에 대한 통치권과 직결됐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태도와 국적법 규정이 달라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였다. 때문에 간도에 이주한 한인들은 간도와 고국을 비교적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국적법에 대한 관리가 엄격해짐과 더불어 중국으로 이주한 한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되고 중국 공민으로서의 합법적인 지위를 얻게 됐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족’의 역사를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혼돈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으로부터 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새롭게 생겨난 것은 ‘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이지, 조선족이라는 민족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을 명기해야 한다.

‘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동일시한다는 것은 바꾸어보면 한국이라는 명칭의 역사와 한국인의 역사를 동일시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한국(대한민국)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다음부터 한국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를 들면 세종대왕은 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전에 존재한 역사 인물이니깐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기 전이라고 해서 윤동주를 조선족이라 해서는 아니 된다는 논리대로라면, 본적이 함경북도인 윤동주를 한국인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조선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아니한가. 지금의 한국인 또는 한인이라는 명칭도 조선족이라는 명칭처럼 조선인에서 갈래지어 나왔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윤동주는 대한민국 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 조선족 시인이며, 한국인과 중국 조선족 사이에는 바로 윤동주라는 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 주목해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에서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이라는 호칭으로의 확장 문제다. 중국에서는 윤동주에게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지, ‘중국 사람’이나 ‘중국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지는 않았다. 윤동주 생가의 표지석에도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로 돼 있고, 바이두 백과사전에도 국적을 중국으로 표기하고 민족을 조선족으로 표기하여 따지고 보면 역시 중국 조선족으로 분류되어 있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이라 주장한다며 당황스러워하는 경우라면 ‘중국 조선족’이라는 호칭을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이라는 호칭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적합한 것인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중국 사람’ 또는 ‘중국인’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조선족의 민족성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지금까지 민족성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온 조선족 사회의 노력을 한순간에 헛되이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중국 조선족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세기 60년대부터다. 18세기 중엽 이후 조선 북부의 가난한 농민들이 엄격한 국경 봉쇄를 뚫고 두만강을 건너서 농사를 짓기도 했고, 19세기 초엽 이후 그 수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 1861년, 1863년, 1866년에 대수재가 조선 북부지역을 휩쓸었고, 1869년과 1870년에는 대한재가 연속 덮치면서 조선 북부의 많은 농민이 생활고를 헤치고자 분분히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 땅’으로의 이주를 본격화시킨 다른 한 가지 이유는 ‘간도 땅’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령 해제였다.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지금의 베이징에 도읍을 정한 청나라는 장백산(長白山)을 저들 조상의 발상지 ‘용흥지지(龍興之地)’로 간주하여 강희제 집권 기간(1669-1681)에 흥경(興京) 이동, 이통주 이남, 두만강 이북의 광활한 지역을 봉금 지대로 선포하여 중국인과 한인의 이주를 엄금하는 조치를 내렸다. 

1712년에 청조에서 장백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운 후 봉금정책은 더 강화됐고, 따라서 봉금지대는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중엽부터 산둥, 허베이 등지의 관내 한족들이 봉금정책에도 마다하고 요둥, 지린 지역을 거쳐 지금의 연변지역에 밀려들기 시작했고, 조선 북부의 빈고농민들도 조선의 엄격한 국경 봉쇄를 무릅쓰고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짓기에 나섰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1848년부터 해마다 변방 순찰병을 파견하여 월경한 한인들을 쫓아내려고 했지만, 월경하는 한인의 수는 늘어만 갔다. 조선에서도 처음에는 월강죄를 적용하여 월강하는 조선인을 법으로 다스리며 막아 나섰지만,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은 북관 6진을 순시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월강하는 죄인을 다 죽일 수 없다(越江罪人不可盡殺)”라고 한 것처럼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없어 목숨을 내걸고 월강하는 사람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조 조정에서도 월강죄를 해제하고 두만강 이북에 대한 이주를 승인하게 됐다.<계속>


‘중국 조선족’이라는 수식어의 의미

제2차 아편전쟁 후 청나라는 러시아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간도지역에 정변군(靖邊軍)을 주둔시키고, 1881년에 봉금을 폐지하고 한족 이민을 받아들여 ‘이민실변(移民實邊)’ 정책을 실시하고자 황무지 답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에야 관부는 간도 땅이 조선 이주민들에 의해 많이 개간되고 있음을 알게 됐고 잇따라 훈춘에는 ‘간광총국(墾礦總局)’이 설치되기도 했다. 

처음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이주민을 몽땅 쫓아내려고 했다. 조선 정부에서도 ‘2년 내에 데려가겠다’고 하면서 조선인의 월강을 막아섰으나 소용없었다.

그리하여 지린장군 명안(銘安)과 오대징(吳大徵)은 조선 이주민을 전부 귀환시키지 않으면 치발역복 시켜 청나라 국적에 편입시키자고 조선에 간 통상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통해 이조 통치자들과 교섭한 한편, 조선 이주민들을 쫓는다면 이들이 개간한 땅이 황무지로 된다면서 이주를 허락하자고 청나라 조정에 상서했다.

1885년에 청정부에서는 봉금령을 완전히 해제하여 조선 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 이주민들의 거주권과 생존권을 승인하고 간민(墾民)들에게 입적권(入籍權)과 토지사용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윤동주 집안의 중국 이주과정을 보자면, 1886년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이 가족을 거느리고 조선 땅에서 두만강 너머로의 이주 물결을 타고 오늘의 중국 용정시개산툰진자동촌에 처음 자리를 잡았다가 1900년에 용정 명동촌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윤동주는 1917년에 용정 명동촌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용정에서 다녔다. 윤동주는 짧은 28년 생애 중 20년을 용정에서 보냈고 유해도 그의 고향인 용정에 묻혔다. 그러나 윤동주의 중국 국적 취득 여부는 아직까지 증거자료가 불충분하다.

1910년에 최초의 국적법인 ‘대청국적조례’와 ‘대청국적조례실시세칙’을 반포하고 1912년에는 ‘중화민국국적법’과 ‘국적법실시세칙’을 제정하는 등 중국 정부는 조선 이주민이 일본의 세력 범위에 진일보 들어가는 것을 막고 일본세력의 팽창을 억제하기 위하여 중국 국적에 가입하지 않는 조선 이주민에 대해 압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조선 이주민 입적 고조가 한때 일어났는 바, 같은 해에 ‘간민회’가 조직되어 조선 이주민의 입적 운동을 발동하고 조선 이주민 학생을 중국 관립학교에 입학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주민 간민회의 주요책임자인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이었다.

간민회의 토의를 거쳐 이동춘과 김립이 함께 만세대의 조선 이주민을 대표하여 1914년에 베이징에 가서 민국국무원에 ‘만호청원귀화입적서’를 제출했다. 간민회의친중배일(親中排日)의 적시적인 조치였는데 이는 중화민국 국무원의 비준을 받았고 명동촌의김약연, 윤하현, 문병구, 남종구, 김하규 등 5대 가족을 포함한 명동 일대의 조선 이주민들이 국적을 취득했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김약연이 중국국적을 신청했다는 것으로 윤동주도 중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윤동주의 국적을 증명할 만한 증거자료들은 직접증거가 아니라 정황증거들뿐이다. 

‘조선족 시인’이 아니고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고 하는 것은 윤동주를 중국에 ‘강제로’ 귀속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조선족’의 원래 명칭이 ‘중국 조선족’이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 애당초 ‘조선족’과 ‘조선 민족’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굳이 ‘중국’이라는 수식어를 넣어서 중국의 소수민족을 일컫는 이름으로 특정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는 문구에서 ‘중국’과 ‘조선족’이 각각 ‘시인’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은 ‘조선족’을 수식하고, ‘중국 조선족’이 하나의 명칭으로 다시 ‘시인’의 수식어가 된다는 말이다. 

지난 5월20일부터 22일까지 한국문학번역원이 마련한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이라는 행사와 관련 기사가 참으로 바람직했다. 탈중심의 중심, 모두가 중심이라는 시각으로 한인 문학을 열린 시각으로 바라보고 소통하는 장을 만들고자 한 기획 의도가 좋았고, 조선족은 독자적인 문단을 조성하고 문학지도 발간해왔다면서 윤동주 시인도 조선족 작가라고 써준 경향신문 문화면의 탈중심적이고 우호적인 기사 내용에 큰 박수를 보낸다. 

아리랑을 중국 조선족이 부를 때는 조선족 민요가 되고 한국인이 부를 때는 한국 민요가 된다. 한복을 중국 조선족이 입으면 조선족 전통복장이고 한국인이 입으면 한국 전통의복이다. 김치를 중국 조선족이 담그면 조선족 전통음식이 되고 한국인이 담그면 한국 전통음식이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의 윤동주문학은 조선족 문학이고 한국에서 윤동주 문학은 한국문학이다. 뺏고 빼앗길 것이 없이 이 모두가 공동의 민족문화유산이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조선족 시인’으로 정의 내리는 것은 지금까지의 ‘민족시인’이란 평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에게도 윤동주를 ‘조선 족시인’으로 고쳐부를 것을 요구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윤동주는 여전히 한국 대표 시인이다.

중국에서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평가하는데 대해서 한국인도 무작정 반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조선족 이주역사, 윤동주 집안의 이주사와 윤동주의 출생지, 조선족 사회에서의 윤동주 연구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이해하고 윤동주를 걸출한 ‘조선족 시인’으로 정의 내리는 조선족 사회의 현실적 과제를 들여다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것이다. 

‘중국 조선족 시인’이라는 수식어 하나로 인하여 조선족 사회는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첫째, 조선족 문학사 기술에 있어 든든한 기둥뿌리가 생기고 한결 당당한 문학사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윤동주를 통하여 자기 민족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고 아울러 젊은 세대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민족적 사명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윤동주를 통해 조선족의 이주사를 보여줌으로써 조선족 사회와 한국  사회의 민족적 유대감을 끈끈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조선족 시인’도 좋고, ‘민족시인’이나 ‘한국대표 시인’도 좋다. 부르는 방법은 달라도 결국은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시인이고 찬란한 민족문화유산이 아닌가. 비생산적이고 파괴적인 경계를 만들지 말고 ‘한국의 대표 시인’이면서 동시에 걸출한 ‘중국 조선족 시인’이란 두 날개를 달아주어 마음껏 세계를 비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윤동주를 향한 진정한 사랑일 것이다.<끝>


필자소개
1982년 중국 길림성 용정시 출생
중국 연변대 조선언어문학 학사·석사
한국 고려대 국문과 현대문학 박사
최미성 재한조선족문학창작위원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