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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은 머리 스타일을 바꾼 16쨜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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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유약하고 솔직하지 못한 존재이기에 

종종 거짓의 가면을 쓰고 선의를 숨긴다.

하지만 때로는 거짓이 불어넣은 용기가

선의의 빛을 비추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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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이군. 네가 먼저 이렇게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다니. 게다가 그 옷차림... 누가 애 아니랄까봐 화려하기는."


"왜요? 싫으신가요 스승님?"


"싫다고 한 적 없다."


저녁을 먹자는 핑계로 이수연이 힐데를 불러낸 거였지. 뭐든 사주겠다는 말과 함께.


넘쳐나는 인파 속에 힐데와 이수연은 제삼자가 보기에 친구 사이의 소녀들처럼 보였어.


"젊음을 잠시 되찾은 기념이에요. 제가 쏠게요. 이런 기회 흔치 않다구요 스승님?"


크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힐데는 넌지시 한쪽 눈을 떴어.


"....불족발이 좋겠군."


"역시 솔직하지 못하시다니까~ 그럼 가요."


힐데의 손을 홱 휘어잡고 이수연은 이 근방에 제일 유명하다는 불족발집 "클리포트 마왕족발"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어. 뒤에서 힐데가 놓으라며 히스테리를 부렸지만 알게뭐야.


불족발집 내부에 들어가자 따뜻한 열기가 힐데와 이수연을 반겨주었어. 어찌나 인기가 많은지 안에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지. 족발을 먹으며 왁자지껄 웃는 사람들부터, 말도 하지 않고 족발 먹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까지 각양각색이었어.


들어가자마자 글을 잘 쓸 것처럼 생긴 훈훈한 외모의 종업원이 이수연과 힐데를 맞아주었어. 몇 명이냐며 묻는 종업원에게 이수연은 검지와 중지를 치켜들어 2명임을 알려줬어.


"네. 마침 자리가 났으니까 들어가셔도 되요. 다음 손님!!!"


"감사합니다! 가요 스승님!"


주방에서는 펌을 하고 안경을 낀 후덕한 인상의 요리사가 칼을 들고 능숙한 솜씨로 족발을 썰고 있었어. 한쪽에 이어폰을 낀 채로 화려하게 양념을 하는 요리사도 있었지. 


소스와 함께 버무려지는 족발을 저 너머로 보니 힐데도 이수연도 갑자기 속이 쓰려서 견딜 수가 없었어. 위장만 허락했다면 각자 몇 인분이고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여기 불족발 대자 2개요!!""


힐데고 이수연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들어 주문을 넣었어.


잠시 후, 윤기가 좔좔 흐르고 매운 냄새가 솔솔 올라오는 불족발 두 접시가 그 수려한 자태를 두 사람 앞에 드러냈지.


주린 위장이 음식을 보더니 마구 용솟음쳤어. 주문했을 때처럼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비닐장갑을 낀 손이 날아들었어.


힐데와 이수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족발 두 접시를 깨끗하게 비워버렸어.


띵동~


"네~"


""여기 한 접시 더요!!"" 


"알겠습니다~ 상연아! 6번 테이블 한 접시 더!"



.....



거한 식사를 마치고 힐데와 이수연은 밤의 거리를 거닐었어. 밤이 되니 날씨가 쌀쌀해져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어.


"센스가 많이 늘었군. 이수연."


"그럼요. 누구 제자인데요."


"그리고 건방짐도 많이 늘었군."


스커트 자락을 살짝 팔랑거리며 이수연이 힐데 앞에서 아양을 떨었어. 


"패션 센스도 훨씬 늘었는데. 아까 별 말 안해주셨죠? 저 어때요?"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냐. 대체."


얘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번화가를 지나 인적이 조금 드문 공원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지. 하늘은 어둑어둑해져 이내 공원 안의 가로등과 저 멀리 건물들에서 나오는 빛 외에는 어둠이 세상을 둘러쌌어.


"오묘하시죠? 예전에는 강아지처럼 들러붙던 아이가 이렇게 스승님과 차분하게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히 그렇긴 하군. 16살의 얼굴로 30대의 너처럼 얘기를 하고 있으니. 적응이 안된다."


"이제 더는 매달릴 사람도 없고, 매달릴 입장이 아니게 되었으니까요. 나이를 먹다보면 그렇게 되더라고요."


자신의 앞에서 나이를 갖고 주름잡다니, 우스워서 힐데는 콧방귀를 꼈어.


이수연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어. 힐데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지. 이 아이가 지금 뭔가를 말하려 하겠구나 싶은 확신이 들었어.


힐데는 이수연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궁금해서 선수를 치기로 해.


"슬슬 말하지 그러냐. 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인지. 설마, 그냥 못 놀아본걸 놀아보겠다는 이유가 다는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죠."


이수연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손사래를 쳤어. 그리고 웃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진지한 어조가 뒤따랐지.


"...16살의 이수연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원래는 안할 생각이었는데. 친구들 말을 듣고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이건... 이건 꼭 말해야만 하겠구나. 하고."


이수연은 크게 심호흡을 했어. 말을 하려고 하는 와중에도 마음 속에서 잡음이 계속 울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입을 열었어.


"....이전에 제가 나유빈을 따라가려 했다고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시나요?"


"...그래."


"그녀석이 그랬어요. 오지 말라고. 저까지 스승님을 떠나면 스승님은 혼자가 된다고. 스승님이 무너지지 않게 내가 붙들어달라고. 스승님 곁에 필요한건 저라고.


웃기는 말이죠? 정작 가장 필요할 때 절 버린 사람을 뭐가 좋다고 용서하고 같이 있어달라는 건지. 배려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니까요. 그 멀대 자식은. 그 때의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던 건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줬더라면..."


아무래도 감정을 건드리는 기억이어서 그럴까, 말하는 이수연의 손이 살짝 떨렸어. 


아냐. 앞으로 이야기할 부분은 더 두려운 이야기야. 여기서 흔들리면 안돼. 이수연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어 흘러넘칠뻔한 감정의 동요를 멈췄어.


"관리실패로부터 20년이에요. 저는 스승님을 따라 세상을 지키려고 죽어라 싸웠는데,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대가를 바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말이죠. 


최소한 성취감이라도 남았으면 했지만... 좋은건 무엇 하나 남지 않고, 상처만이 남더라고요. 관리실패 후 남은 거라고는 애꾸가 된 눈,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 잃어버린 시간, 그리고 내가 세상을 지키려다 이리 되었다는걸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잔인한 진실."


잔인했던 당시의 기억들을 하나 하나 떠올릴 때마다 이수연의 마음에 가시가 하나씩 박혀가는 듯 했어. 이수연은 손을 들어 가슴팍에 대고 옷을 꽉 움켜쥐었어.


"36살의 저는 그 상처를 가진 채로 지금까지 아득바득 살아왔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끔... 아니, 확실히 후회되요. 학교도 제대로 가보지 못했고, 누군가를 만나며 설레였던 적도 없었고, 여행도 가보지 못했고, 평범하게 누릴 수 있었던 삶들을 전부 버려야 했어요. 


그래도 그때는 좋았어요. 왜냐면 그땐 몰랐으니까. 그냥 내가 엄청나게 강하다는게 정말 신기하고, 내가 세상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해서 신경조차 쓰지 않았으니까요. 바보같이, 병신같이."


"......"


"그렇게 평범함을 모두 버린 제게는 스승님과 함께하는 시간만이 남들이 누린 평범한 삶의 대안이었어요. 제게 스승님이 어떤 존재였냐고요? 스승님은 제 스승님일 뿐만 아니라, 선배였고, 친구였고, 언니였고, 부모님같은 존재였어요.


그런데 스승님은 그 날, 세상이 두 쪽이 나던 날, 절 버리셨죠. 그 어느 때보다도 곁에 있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 때에 스승님은 거기 없었어요. 제 선배이자 친구이자 가족 같았던 사람이, 제가 무너져버렸을 때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어요. 하하. 


그 때의 기분이 어떻냐고요? 그냥... 다 놔버리고 싶어지더라고요. 관리국 최강의 카운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애꾸눈이라는 무공훈장 하나 말곤 남은게 없었는데, 심지어... 스승님마저 날 떠났는데, 내가 보낸 모든 순간들이 다 의미가 없었던 거 같고, 그러더라고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지 이수연?"


이수연은 고개를 숙였어.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리는걸 숨기려고. 그럼에도 힐데의 반응은 냉담했어.


"사과라도 하라는 건가? 아니면 뭘 원하는 거지? '그 시절'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이제와서-"


"네. 맞아요. 사과."


이수연이 고개를 확 치켜들어 힐데를 바라봤어. 고개를 들자 고여있던 눈물이 한 줄기, 잃어버린 쪽의 눈에서 흘러내렸어.


"싫으시면 하지 마세요. 저에게는 안해도 괜찮으니까."


무슨 말이냐며 되물으려는 힐데에게 이수연은 되물을 새도 없이 몰아붙혔어.


"하지만 16살의 이수연에겐 사과하셔야 해요."


이수연은 힐데가 자신에게 사과하기를 바랬어. 힐데는 자신의 탈주를 비롯해서 자기의 행적이나 말에 대해 솔직하게 밝힌 적이 없었거든. 


솔직하지 못한건 이수연도 마찬가지였기에, 그 때 해결하지 못한 힐데에 대한 감정이 앙금으로 남아버린거야.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이수연은 16살의 모습을 빌려 그 앙금을 해결할 생각이었어.


"왜냐고요? 그 시절의 이수연은 스승님께 버려지는 바람에, 세상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빨려 들어갈 뻔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사과하시라고요. 이걸 말씀드리려고 옛날 모습으로 돌아갔어요. 옛날에는 그렇게 사이 좋았던 스승님이 왜 날 버렸는지, 왜 다시 돌아왔는지,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지, 어른의 모습으로는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어서... 그래서 구차하지만 어린 시절의 모습을 빌려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듣고 싶어서라고? 고작 그런 의미 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네. 의미 없어요. 36살의 이수연에게는요. 사과 하나 갖고 애처럼 징징거릴 나이는 지났으니까."


이수연은 흐느끼며 숨을 내쉬었어. 어조가 점점 거칠어지고, 호흡이 불규칙해졌어.


"36살의 이수연에게 사과하기가 껄끄럽다면 하지 마세요. 하지만, 16살의 이수연은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스승님께서 내다 버리셨던, 그 가련하기 짝이 없는 아이는.... 그래서 모든 것을 잃고 허우적대면서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불쌍한 아이에게는!! 사과하셔야 한다고요!! ....사과하시란 말이에요. 사과해주셨으면, 한다고요..."


얼마나 억눌려있던 감정이 터져나온 건지, 이수연은 핏발 선 눈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숨을 헐떡였어. 호흡 하나하나가 슬픔이었고, 눈물이었으며, 흐느낌이었어.


그래. 못 즐긴 젊음을 즐기겠다는 것은 1차적인 이유에 불과했어. 이수연은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16살의 몸으로 돌아온 거였지. 단지 마음이 너무나 곪아 있어서, 그것을 수면 위로 꺼내고 싶지 않아했던 것 뿐이었어. 기껏 꺼낸 마음을 무시받음으로써 또 상처받기 싫었으니까.


언제나 하고 싶었던 말이었음에도 세월의 간극이라는 벽과 남을 배려하는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이수연은 힐데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할 수 없었지.


그러다 어느 날, 힐데와 찍힌 자신의 사진을 보고 그럴 마음이 들었던거야.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돌아가서 '펜릴 전대'로서 힐데와 동등한 선에 설 수 있다면, 그러면 보다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스승님도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스승님... 한번만, 이번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솔직해지시면 안되나요? 저 있잖아요. 진짜 죽을만큼 힘들었어요. 아직도 가끔 눈을 잃고 죽어가는 꿈을 꿔요. 냉엄한 세상의 시선은 또 어떻고요? 나는 죽을 위기까지 겪으면서 세상을 지켰는데, 남은 사람들에게 저는 학교도 나온 적 없고 어디선가 그냥 솟아난 무경력자일 뿐이에요. 


그걸 20년이나 겪어왔고 견뎌왔어요. 그렇게 힘들어했는데도, 스승님 다시 만났을 때 내색 한번 안했어요. 스승님께도 사정이 있겠지, 그런 거겠지 하면서, 믿었어요. 그런데 이젠 못 믿겠어요. 못하겠어요... 못한다고요..."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힐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 때와 똑같았어.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아무 말 없이 떠나버렸던 그 때, 십여년 만에 돌아와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던 그 때.


그리고 과거의 모습까지 빌려가면서 진심을 보여달라고 갈구하는 지금도, 힐데는 말이 없었어. 그저 가만히 이수연을 바라볼 뿐이었어. 


"왜 아무 말도 안해주시는 건데요...? 제가 그렇게나 못미더운가요? 말 못할 사정이 있다면 최소한 끄나풀이라도 잡을 수 있게, 간단한 확신이라도 주실 수 있었잖아요... 그때도 그랬을거고, 지금도 그렇잖아요....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보라고요!!!"


"...."


이수연이 악에 북받쳐 다그쳐도 힐데는 말이 없었지. 


그러고보니 힐데는 항상 그랬었어. 스승님이 너무 좋아서, 그런 스승님이 한번이라도 눈길을 줬으면 하고 이수연은 몇 번이고 믿고, 참고, 표현해왔지만 힐데의 눈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거든.


그때도, 지금도. 아무리 속을 드러내도 힐데의 마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아. 


결국 이수연은 좌절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렸어. 눈물이 흐르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어.


"....하... 하하...."


정말로 헛수고였구나. 내 믿음, 내 헌신, 내 애정, 내 시간, 나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럼에도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좋았는데.


스승님에게 있어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그런 거구나.


......


아니.


"......"


사실은, 그렇지 않았어.


사실은 힐데 또한 마찬가지였어. 


이수연의 말대로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 셀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수도 없는 세계를 거쳐오면서, 자신과 함께 싸워가며 스러져간 모든 것들에게 사과해야 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지. 사막의 신기루를 보고 진짜로 여길 수 없듯이, 사람은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신기루에 휘둘렸다간 길을 잃고 죽어버리고 말아.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힐데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기루와도 같은 것. 거기에 휘말리며 일희일비했다가 의지를 잃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해 죽어간 수호자들을 그녀는 수없이 봐왔어.


그건 저주야. 세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이들은 몇번이고 그 기회를 새롭게 부여받지만, 그 대가로 끊어지지 않는 인연의 쇠고랑을 차게 돼. 인연의 의미나 가치는 사라지지만 그 앙금은 영원히 자신에게 남는 저주.


그게 '최후의 발키리'로서의 숙명. 인류를 삼키려는 악을 척결할때까지 영원의 싸움을 이어나가겠다는 맹세.


하지만 아무리 강한 카운터라도 근본은 인간이야. 존재의 틀을 바꾸지 않는 한 나약한 인간의 마음은 그것이 가진 수용량 이상의 시련을 견뎌내지 못해.


그래서 힐데는 선택한거야. 아무것도 듣지 않겠노라고, 아무것도 보지 않겠노라고.


무감정한 태도과 거침없는 행동은 힐데가 그 저주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나름의 선택이었어. 스러져간 동료들을 가슴에 묻는 것도, '그녀'를 계속해서 잃어야 하는 것도, 어차피 잃을 인연이기에 정을 주지 않으려는 것도, 애정을 갈구하듯 달려들던 이수연에게 차갑게 대하고 종국에는 매몰차게 버린 것도.


전부 힐데가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선택이었어.


그런 힐데의 선택을 이수연은 알 턱이 없었지. 다만 감으로는 알았어. 힐데가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힐데를 아직도 존경하고 따랐기에, 버림받은 후에 힐데를 다시 만났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거야. 


자신에게 큰 상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힐데가 언젠가 스승과 제자로 남았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와주리라 믿었으니까. 


그래도 이수연은 힐데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외쳤어.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겠다는 스승에게 나를 봐달라고, 내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20년 전에도, 지금 이 자리에서도.


눈물 흘리며 소리없이 우는 이수연을 힐데는 가만히 바라봤어.


힐데의 마음 속에서 숙명이 메아리쳤어.


외면해야 한다고. 어차피 사라질 신기루라고.


너에겐 더 큰 사명이 있다. 인연 하나에 일희일비할 새가 없다.


이미 몇번이고 무시해왔지 않는가? 한번만 참자. 언제나 그래왔잖아.


그래. 언제나처럼 힐데는 무시했어야 했고, 무시하려고 했어.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어.


아니.


이수연의 진심어린 호소에 뭔가 힘이 실려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사명이 메아리치는 힐데의 마음 속 사막 한 가운데에, 물방울이 떨어졌어. 마치 이수연이 흘렸던 눈물처럼 말야. 


그러자 멈춰있던 힐데의 마음 속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어. 


정지되어 있던 사막에 바람이 일었고, 물방울은 끝도 없이 떨어지며 곧 사막 전체를 적셨어. 세상 너머를 바라보던 힐데의 눈동자는 이수연의 모습을 담았어.


오래토록 굳어있던 힐데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거야.


'아니야.'


처음으로 힐데는 자신의 숙명을 향해 거부의 의사를 내비췄어.




마침내, 미동도 않던 힐데가 천천히 움직였어.


힐데의 떨리는 손이 이수연의 어깨에 차분히 닿았어.


"한 순간도...."


".....!!!!"


"한 순간도, 네게 미안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이수연의 몸이 한 차례 떨렸어.


힐데는 마음 속으로 바랬어. 혹, 지금 이 순간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일지라도 나의 선택이 상처받은 제자에게 의미가 있기를. 지금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를.


"단 한 순간도. 펜릴 소대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 너를 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스.....승님....?"


"....미안하다. 수연아."


이수연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멍하게 힐데를 바라봤어.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말이 힐데의 입에서 흘러나왔어.


"꽃다운 시간들을 침식체와 싸우며 보내게 해서 안타까웠고, 내 개인적인 이유로 네 어리광을 다 받아주지 못해 미안했고, 널 버려야 했던 것이 미안했다. 그럼에도 날 여전히 스승으로 바라보고 예우하는 네게 미안하고, 먼저 이유를 말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힐데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눈과 귀를 막고 살아왔어. 자신이 지고 있는 운명이란 그만큼 무거운 거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도, 수없이 생겨났어.


이수연의 한쪽 눈을 잃게 만든 것도, 카운터로 살아온 인생을 무가치하게 만든 것도,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까지 곪게 만든 것도, 스스로 상처입지 않으려는 선택이 만들어낸 아이러니였지.


가장 아꼈던 애제자의 깊은 상처와 눈물을 보자, 힐데는 더 이상 방패를 들고 있을 수 없었어.


이 방패를 내려놓는다면 나는 다시 상처입게 될거야. 그래도 좋아? 


무너지지 않으려고 스스로 잘라내려 했잖아. 그래도 다시 다치길 원해? 슬퍼하길 원해?


힐데의 마음 속에서 숙명이 다시 메아리쳤어.


하지만 힐데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


그렇다고.


기꺼이 내려놓겠노라고.


힐데는 무릎 꿇고 있는 이수연을 끌어안았어.


"여전히 나는 너에게 많은 얘기를 해줄 수 없어. 알아서 도움 될 것도 아니고, 알아봤자 의미도 끝도 없는 넋두리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해."


".....스승ㄴ..."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를 분명히 기억한다. 때로는 동료로, 때로는 동생으로, 때로는 딸 같이 내 곁에 있었던 너의 모든 순간은 환하게 빛났어. 의미가 없지 않았다고. 


예전에 널 다시 찾아왔을 때, 다 자란 널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열 여섯이 아니라 서른 여섯이라도 여전히 환하구나. 내가 곁에 없었는데도 환하게 있어줬구나.


하지만 그 환한 빛 이면에 상처가 곪아가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고,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 준 것이 너의 최대한의 배려였음을, 지금에서야 알았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거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잊었을지라도, 관심이 없을지라도, 이수연 하나만큼은 여전히 힐데 자신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한번 크게 찢어졌던 마음을 갖고 아파하면서도, 힐데를 여전히 소중히 품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힐데 역시 이수연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지. 이수연 뿐만 아니라 지금껏 싸워오며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기억들을. 그저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을 뿐.


이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말하고 돌아섰어. 힐데는 정면으로 이수연을 감싸 안았어.


"당장은 네게 밝힐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믿어다오. 표현은 못했을지라도, 널 바라보고 있던 마음만큼은 항상 진심이었다고. 단지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미안하다 수연아. 미안해..."


가만히 힐데에게 안겨있던 이수연은 힐데의 품으로부터 천천히 고개를 들었어.


".....말로만 그러면, 제가, 받아들이겠어요?" 


"...."


"20년이에요. 20년동안 절 외면하셨어요. 미안하다 몇 마디만으로 20년의 간극이 그렇게 쉽게 사라질거라고 생각하시냐고요..... 네?"


힐데는 아무 말 없이 이수연을 바라볼 뿐이었어.


"믿을 것 같냐구요!! 스승님 같으면!! 20년동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는데... 그런데... 왜, 대체 왜... 내 마음은 이게 진심이라고..."


금방이라도 이수연의 얼굴은 울음이 터져나올 것처럼 부르르 떨렸어. 목울대가 울렁였고, 눈에는 이미 맺혀있던 눈물을 밀어내고 새로운 눈물이 다시 쏟아져내렸어.


"내가... 내가.... 얼마나....스승, 님... 스승님....으윽, 으으으...!!"


그리고 더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어. 


"아아, 아, 아아아... 아아, 아아아아아-!!!"


매번 혼자 숨죽여 울어야 했던 이수연이지만 이번엔 달랐어. 이번에는 이수연을 받아줄 사람이 그녀의 앞에 있잖아. 


이수연은 이렇게 크게 울어본 적이 없을 만큼 큰 목소리로 감정을 폭발시켰어. 서툴지만 따스한 힐데의 손이 이수연의 등을 토닥일 때마다 이수연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어.


너무나 서러워서, 너무나 슬퍼서, 너무나 기뻐서, 너무나도 다행스러워서. 이수연은 목놓아 울고 또 울었어.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이 힐데의 옷을 적셨어.


힐데는 그런 이수연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어.


"내가 잘못 생각했다. 더는 외면하지 않으마. 내 사과가 네게 위안이 된다면 얼마든지 하겠다. 미안하구나."


상처입고 싶지 않다는 나의 바램은 그로 인해 남을 상처입히는 것조차 불사하려 했었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힐데는 아이처럼 엉엉 우는 이수연을 부여안고 가만히 있었어.


20년의 간극이 쌓아올린 두 사람의 벽은 생각보다도 쉽게 와르르 무너져내렸어. 더 이상 힐데와 이수연 사이에 남아있는 벽은 없었어.


그것은 거짓으로부터 비롯된 용기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어.



......



"...죄송해요 스승님. 훌쩍, 헤헤. 너무 많이 울어서 그런가, 다리 힘이 완전히 풀려버려서..."


"신경 쓰지 마라. 너 하나 업고 다닐 힘은 있으니까."


얼마나 울었는지 이수연은 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나봐. 아예 힐데에게 업힌 채로 밤거리를 걷고 있었어.


16살의 이수연만 해도 힐데와 키 차이가 꽤나 날 만큼 힐데는 작았지. 그런 힐데가 이수연을 업고 다닌다고 생각하니 뭔가 심히 부조화스러웠지만 뭐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


"헤헤. 그래도 스승님께 업히게 될 줄이야."


"녀석. 좋으냐?"


헤실헤실 웃는 이수연을 향해 힐데는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건넸어. 평소의 힐데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말투였어.


"그럼요. 얼마나 좋은데요."


"얼마 없을 기회니까 즐겨둬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업히는건 고사하고 네가 날 업어줘야 할테니 말야."


"그때 가면 그러죠 뭐. 스승님 어차피 땅꼬마니까 업어주는 것 정도야 간단해요."


힐데는 이수연의 다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살짝 흔들면서 장난을 쳤어. 확 떨어질 뻔한 이수연이 급박한 비명소리를 냈어.


"와악스승님스승님!!"


"땅꼬마 얘기 한번 더 하면 내리고 가버리는 수가 있다."


"이씽... 어차피 스승님도 저보고 아줌마라고 놀리잖아요. 쌤쌤이에요. 흥."


"쯧, 한마디를 지질 않는군. 하아... 그래. 한번쯤은 져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자 이수연은 신나하면서 쾌재를 불렀어. 팔에는 힘이 남아 있었는지 아예 힐데의 머리를 쓰다듬는가 하면 볼살을 당기기까지 했어.


"아싸~!! 땅꼬마 스승님 너무 귀여워요~~ 머리카락도 귀엽고 볼살도 귀엽고 그리고, 아무튼 귀여워요~!"


"에휴.... 36살이나 먹어놓고 주책부리는 꼴이 참 보기 좋군."


"16살로 정정해주시죠 스승님~ 그리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그걸 제일 잘 아시는 분은 스승님일 텐데요."


이 능구렁이 같으니. 진짜로 내려놓고 가버려야 하나 싶어서 힐데는 한숨을 내쉬었어.


이수연과 한바탕 마음을 부딪히고 난 후, 힐데의 마음 한 켠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이 자라나 있었어. 


다른 동료들이 눈 앞의 인연을 지키려다가 스러져 간 이유가 있었다는 것. 수호자로 남길 자처하며 무감정하게 사는 것보다 지금의 인연을 소중히 하려고 했던 거야. 


이수연과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비로소 힐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어. 한숨을 쉬었지만 힐데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지.


"....고맙다. 수연아."


"네?"


"내가 뒤를 돌아볼 수 있게 계속 불러줘서. 그게 고맙구나."


이수연이 그런 상처를 갖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생각하고 있어준 점에 대해서, 힐데는 진심어린 감사 인사를 전했어. 


"아니에요. 저도 스승님께 고마워요. 여전히 절 마음 속에 품고 있어주셔서. 제 마음에 답해주셔서." 


그건 이수연도 마찬가지였지. 언제나처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그래서 어쩌라고' 식으로 대응하면 어떡하지 하고 오만가지 걱정을 다 했는데 다행히 힐데가 이수연의 마음을 받아줬으니까.


힐데와 이수연이 손을 마주잡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다 서로를 마음에 품고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어.


"저 같은건 안중에도 없으신건가 했었는데, 역시 스승님은 제 영웅이시라니까요."


"영웅.... 이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지. 내가 영웅이라니. 모든 인연들을 잘라내고 무시하고 홀로 싸워나갔던 내가 그런 소릴 들을 자격이 있긴 한가 싶었지만, 지금의 힐데는 더 이상 그런건 개의치 않았어.


"후훗. 나쁘지 않군."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다짐했으니까.


"아. 스승님 웃었다! 방금 웃은거죠? 그쵸?"


"사람 웃는거 처음 보냐?"


"스승님 웃는건 별로 못봤거든요. 대박사건! 기왕 웃으신거 저희 사진 한번 더 찍을까요? 그때처럼?"


핸드폰을 꺼내려 드는 이수연의 움직임에 힐데는 질겁하며 사진 촬영을 막으려 들었어.


"그, 그건 사양하지. 아무리 그래도..."


"이이잉~ 스승님 너무해! 너무해!"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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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족발집 직원은 스튜디오비사이드와 하나도 연관이 없는 가상의 인물입니다. 글 잘쓰게 생겼고 이름이 상연이고 음악을 달고 사는 직원이 있지만 아무튼 스튜디오비사이드와는 일절 관련이 없습니다.


6챕터에서 이수연이 미나링 학교 보내면서 하는 말이 너무 가슴에 남더라. 자기는 평범한 생활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까 가서 잘 있다가 오라고. 그게 마치 엄마가 딸을 대하는 느낌이라 너무 짠했음. 그 부분에서 이수연도 사실 큰 상처를 갖고 있을거란 생각이 들더라. 


사춘기 시절부터 침식체 머가리 따고 다니면서 죽음의 외줄타기를 반복해왔는데, 그걸 힐데에게 의지해가면서 버텨왔는데, 막상 눈 하나 잃어서 장애인 되고 관리국은 망하고 세상 곱창나고, 모든게 남아나질 않았던 순간에 가장 의지했던 힐데는 빤스런했잖아. 그나마 동료였던 나유빈 찾는데 이새기는 스승님께 너가 없으면 안된다고 버텨달라네? 보통 사람이면 여기서 진작에 무너졌어도 이상할게 없음.


요즘 힐데 여론들이 좋게 흘러가던데 이 글을 힐데빠들도 즐겁게 봐주면 고맙겠습니다. 사실 저도 힐데 좋아해요. 사복 입혀놓으면 ㄹㅇ 개커엽게 생겼잖아? 그치????


다음 화는 나올지 말지 잘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수여어어어언 스트라이크으으으으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