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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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https://arca.live/b/counterside/27892472

3편: https://arca.live/b/counterside/27896748


3종쯤 되는 침식체라면 이미 인류 단위의 재난이라 불린다.

까딱하면 도시하나가 통째로 증발해버릴 수 도 있는 거대한 죽음을 목도한 이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사,살려줘!"

"죽고싶지 않아, 엄마, 살려줘!"

"흐아아악!"


누군가의 입에서 3종이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패닉에 빠진 용병들 사이에서, 그녀는 검병을 틀어쥐며 상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겨우 3종따위, 관리국 시절에는 혼자서 처리하는 이도 드물지 않았다. 애초에 에스타크의 포격 한방이면 그대로 이터니움 덩어리가 되어서 바닥을 나뒹굴었지.


허나 지금은 어떠한가?

아이 손목 비틀듯 목을 딸 수 있는 관리국의 전대원들은 생사를 알 수 없는채 해산했고, 관리국의 자랑이던 대 침식병기들은 전부 고철 덩어리가 됐다.

그 때의 그녀는 혼자가 아니였지만, 지금의 그녀는 반쯤 망가진 검 한자루로 혼자서 죽음에 맞서야 했다.


"설마 싸울거야?"


언젠가 들었던 여성의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차원함선 내에서 괜한 참견을 하던 그녀였다.

흙투성이에 피투성이지만 어찌됐던 살아는 있는 모습이였다.


"그래야지."

"미친년! 3종이라고! 혼자서 도시 하나를 박살내는 괴물!"

"그럼 도망치던가. 쓸 수 있는 차량이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미친년아! 죽는다고!"

"그래, 죽겠지."


바라는 바다. 바라는 바인가?


모르겠다, 모르겠어. 어차피 생각이란걸 그다지 해오지 않은 삶이다.

앞을 막는다면 베고 넘어갈뿐. 3종 침식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뒤의 여자가 뭐라뭐라 소리치지만 무시한다. 전투에 있어서 불평불만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해.

이 싸움을 넘기려면 눈 앞의 상대에게 집중하는게 더 효율적이다.


(킥킥킥)

(너따위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 머저리. 너 따위가?)


"닥쳐라."


눈이 아프다.

오른쪽 시야에 희뿌연 무엇인가가 보여. 그들은 저주의 말을 내뱉으며 그녀의 손을, 발을 잡는다.


그래, 이 눈을 파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아파야 할 것이 없다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테니까, 그러면 좀 더 잘 싸울 수 있겠지.

손 끝을 오른 쪽 눈으로 가져간-


"그만두세요, 시야만 좁아질 뿐이에요. 자학은 좋지 않아요."


그녀에겐 끔찍한 목소리였으나, 그녀에게만 들리는 그것들은 아니였다.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준, 위선으로 포장된 상냥한 목소리의 남자.


아비규환의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멀끔한 모습의 나유빈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니면 그것도 침식 증후군의 영향일까요?"

"닥쳐, 당신처럼 잘나신 양반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꺼져."

"하하...미움받는 모양이네요. 당신은 신경쓰지 않은 모양이지만 저도 계속 당신과 같은 함선에 타고 있었습니다."


나유빈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관리국의 물건은 회수해두는 쪽이 마음이 편해서요."

"...내가 죽을거라 생각하는군."

"네, 당신도 그걸 바라잖아요?"


저 남자의 말이 맞다.

그녀는 죽고싶었다. 너무 죽고싶어서 사지를 찾아다니며 검을 휘둘러댔다. 어차피 스스로 죽을 수 없다면 다른 수단으로-


"디자이어가 다가오네요. 아무래도 인간들을 전부 끝장낼 생각인가본데..."

"시끄럽군, 싸우지 않을거라면 닥치고 있어."

"...네, 그러죠. 저는 싸우지 않을거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 기분나쁘다.

변함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다. 펜릴은 전부 저런 녀석뿐이였을까. 에이스라던 그 여자는 아니였던것 같은데.


디자이어가 포효한다.

인간과 함께 저급의 차원종들을 함께 짖밟아버리는 무자비한 폭군의 발길을 따라 붉은 지옥이 넓어져간다.


디자이어, 헤드헌터, 바이터, 니들러, 레이스.

수종류의 침식체들이 수십 수백마리는 몰려있다. 지형과 차량을 엄폐물삼은 인간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겠지.

지금 3종급의 침식체를 상대할 수 있는건 그녀 밖에 없었다.


눈이 아프다. 정말 뽑아내고 싶지만, 그 남자의 말대로 시야가 좁아질뿐이란걸 깨달았으니 버텨낸다.

희뿌연 무엇인가는 아직도 온 몸에 달라붙어 저주의 말을 내뱉고 있다.


죽어,죽어,죽어. 쓰레기같은 배신자년 죽어버려.


"그 말대로 해줄테니 닥치고 있어, 죽어버릴테니까."


자, 죽으러 가자. 이제 편해지러-


"어째서 가지 않으시죠?"

"...뭐?"

"아까부터 지켜봤습니다. 당신, 달려드는 것들은 베어내고 있지만 전진하지 않아요. 계속 그 자리에 못박혀 있네요. 어째서죠?"

"닥쳐, 네가 뭘 안다고. 말밖에 못하는 너따위의 목소리는 듣고싶지 않아."

"네, 그러시겠죠...그제 진정으로 당신이 원하는 바라면 따라드리겠습니다."


기분나쁜 남자. 언제나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는 짜증나는 인간. 저런 남자와 엮일 사람들이 불쌍-




디자이어가 포효했다.

강함을 과시하기 위한 위협을 내뱉는 순간.

맹수가 가장 방심하고 있을 그 순간이 최적의 기회임을 알고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넣는다. 땅을 딛고있는 다리에 힘을-







힘을-









"겨우 3종인데 말이죠."


나유빈이 재차 말을 걸어온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편안한 목소리로, 별 일 아니라는듯 가벼운 태도로.


"스승님이나 수연이라면 맨손으로도 날려버릴 피라미죠. 사실 관리국의 전대원들은 둘만 모여도 쉽게 잡을겁니다. 우리는 그런 싸움을 했으니까요."


카운터까지도 필요없다. 관리국의 강화병사들또한 그에 비견되는 강함을 가지고 있던 것이 관리국이니까.


"겨우 그런 3종인데."


나유빈은 그녀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싸우려하지 않네요."


그는 그런 남자였다.

선(善)인일지는 모르겠지만, 호(好)인이지는 못한다.

언제나 사람의 가장 숨기고 싶은, 피하고 싶은 부분을 찔러온다.


상냥했던 소년은, 더 이상 상냥하지만은 않았다.


"전부 변했죠. 주변의 시선도, 세간의 상식도, 옆을 지키는 동료들도...저도, 당신도."


그럼에도 그는 변함없이 선인이였지만, 그 뿐이였다. 그저 그 뿐이였고, 예전의 그는 없었다.




"당신, 사실은 죽고싶지 않은거죠?"



그녀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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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거 구상할때 나윾빈도 아직 미숙하고 선을 긋지 못하는 어리숙한 초년생으로 쓸까했음.

관리국을 나와 자기만의 정의를 쫓지만 그 방법도 수단도 없어서 방황하는거임. 그러다가 같이 갈곳잃고 방황하는 구관검을 만나서 유긱을 만들었다-이런식으로 쓸까했다가, 역시 나유빈은 흑막형이 어울리더라. 얘가 미숙한 모습이 상상이 안됐어. 그렇게 쓰려고 해도 결국 이렇게 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