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또 훈련 가는 거야?”

 

차가운 공기가 뺨을 차갑게 식히는 이른 새벽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준비를 하던 한솔은 졸음기 섞인 여동생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평소 이 시간이라면 자고 있어야 할 그의 여동생하림이 졸린지 눈을 반쯤 뜬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여동생을 향해 한솔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열심히 해야지.”

 

이제 기사단에도 합격했잖아그런데 왜······?”

 

하하그래도 더 노력해야지.”

 

하아입 밖으로 빠져나온 숨이 흰 김이 되어 시야를 어지럽힌다제 안경에 숨을 불어넣고 옷자락으로 쓱쓱 닦은 한솔은 이내 안경을 도로 썼다차가운 겨울 눈이 내리는 세상이 선명해진다.

 

난 아직 견습 기사일 뿐이니까.”

 

차갑게 와닿는 겨울의 공기만큼이나 그의 앞에 놓인 현실은 차갑다습관적으로 손때 묻은 목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제 오빠의 모습에하림은 이렇다 할 말을 덧붙이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다녀와너무 무리하지 말고.”

 

다녀올게.”

 

가볍게 눈인사를 마치고 한솔은 집 밖으로 나갔다이른 아침부터 회색빛 하늘에는 조금씩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고그와 마찬가지로 일찍 일어난 사람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닌다그들 사이를 스쳐지나가며 한솔은 오늘도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오늘도 힘내자.”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

 

 

한솔그대는 몸이 약하다.”

 

알고 있습니다.”

 

견습 기사 시험에서 합격하고 조디악 나이츠의 고결하고 숭고한 단장에스테로사 드 슈발리에에게 처음으로 교습을 받기 시작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들은 말은 차가운 현실이었다.

 

물론일반인 기준으로 한다면 제법 괜찮은 편이지하지만한솔알고 있지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니라 침식체다그대의 신체 능력은······그래아직 그들과 맞서기에는 조금 모자라다.”

 

물론 에리어스 선배와 같이 그보다 신체 능력이 더 떨어지는 정식 단원도 있었다그러나그녀의 역할은 직접적인 전투가 아니라 후방 지원.

 

반면 한솔은 직접 검을 들고 적과 정면에서 맞서야 할 근접 공격수특히나 무기를 사용하는 그에게 신체 능력의 부족함은 치명적이다에스테로사는 가장 먼저 그의 그러한 부족함을 지적한 것이다.

 

허나에스테로사는 마냥 후배를 몰아붙이기만 하는 냉혹한 스승은 아니었다그녀는 다소 어조를 부드럽게 고쳐한솔의 손에 검을 쥐여주었다.

 

그대는 아직 진검을 잡기에는 이르지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처음에는 그대의 신체 능력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전투법을 위주로 가르치고신체 능력이 충분히 향상된 뒤에는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할 테니.”

 

그녀는 못난 후배를 쫓아내는 대신 기사단의 품에 안는 것을 택했다한솔에게 검을 들게 하고에스테로사 또한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그녀의 무구는 흑과 백이 정갈한 조화를 이루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대검이었다.

 

봐라.”

 

에스테로사가 말한 순간그녀의 검끝에서 광휘가 솟구쳐 올렸다한솔은 경이에 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그녀가 발한 것은 광검(光劍). 처녀자리의 기사로써그녀가 지닌 힘.

 

아름다워요······.”

 

그렇게 찬탄하는 눈으로 바라볼 필요 없다그대 또한 스스로의 빛을 다루게 될 테니.”

 

가볍게 말하고에스테로사는 검을 휘둘렀다그녀의 대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그 날의 끝에 머물러 있던 광검이 마치 초승달과 같은 궤적을 그리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훈련장의 벽에 한낱 인간이 검을 휘둘러 남겼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검흔이 새겨졌다그 압도적인 힘에 한솔은 그저 입만 딱 벌렸다.

 

이렇게 말이지.”

 

제가······저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 무시무시한 힘에 위축된 한솔은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개 숙인 그의 고개 위로 단장의 시선이 떨어졌다한솔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에스테로사의 청금석처럼 곧은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를 직시하고 있다.

 

물론이지.”

 

정말인가요저는······아직 스스로의 카운터 능력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반푼이일 뿐인데.”

 

기껏 카운터로 각성하고도 한솔은 자신의 힘의 실체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흔히 다수의 카운터가 각성하는 검기와 비슷한 힘이라고 추정하고 있을 뿐이지만그는 그 힘의 수발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른 쟁쟁한 경쟁자들 대신 조디악 나이츠의 일원으로 그를 선택했는가어째서 황도 12궁 중 하나인 양자리의 좌를 그에게 허락했는가한솔은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고기사단의 선택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한솔그대의 별자리는 양자리였지?”

 

.”

 

그대는 양자리의 의미를 아나?”

 

에스테로사의 푸르른 눈동자에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여한솔은 저도 모르게 점점 더 의기소침해졌다그 또한스스로가 양자리의 기사로 임명받은 뒤 해당 별자리에 대해 찾아본 적 있는 것이다.

 

······. 알고 있습니다양자리는 황도 12궁의 별자리에서도 가장 작고별의 수도 가장 적은······.”

 

아니.”

 

그 단언하는 어조에 한솔은 눈을 둥글게 떴다언제나 근엄한 기사단장이어야 하는 에스테로사는 제 후배를 향해 다정한 미소 한 번을 지어줄 수는 없었지만그 대신 그녀의 선대에게 들었던 그녀의 후대에게 격려하는 것은 가능했다.

 

양자리는 황도 12궁의 첫 번째 별자리다. 한솔. 그대는 그대의 별자리에 자랑스러워하고, 또한 그대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져라. 누가 뭐래도 그대는 조디악 나이츠(Zodiac Knights), 만인을 위해 밤하늘을 밝힐 별자리의 기사가 아닌가?”

 

한솔은 에스테로사가 보여 주는 먹먹한 신뢰와 확신에 감동하여 입을 벙긋거렸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한솔의 눈은 점처럼 어둡지 않았고 대신 별처럼 단단하고 반짝이는 결의가 그의 눈동자에 새겨져 있었다.

 

!”

 

조디악 나이츠에 들어온 뒤스스로의 부족함에 한탄하고 자신의 자격에 대해 번민하면서도 한솔은 단 하루도 훈련을 거르지 않았다.

 

하루에 죽도 일만 번을 휘둘렀다살이 찢어지고상처가 곯아 터지고그 위로 다시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그의 마음 또한 그러했다.

 

이제 고뇌의 시간은 끝이다상처 입고 흐느끼는 마음에는 이제 단단한 굳은살이 박혔다그것은 별처럼 빛나는 기사의 결의그러나 한솔은 아직 스스로가 양자리의 기사라고 자처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한솔이 입을 열어 담은 것은 기사의 맹세가 아닌스스로가 세운 맹세였다.

 

조디악 나이츠의 견습 단원양한솔선배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

 

 

어째서입니까!”

 

저도 모르게 탁자를 쾅 내려친 한솔은 이내 단장의 눈치를 보며 움찔했다그러나그런 격한 반응을 드러낼 정도로 지금 그는 흥분한 상태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한솔은 어른이 되었고스스로의 능력 또한 일취월장했다허나 그 동안 그는 여전히 견습 단원의 꼬리표를 벗지 못했다그 동안에는에스테로사에게도 생각이 있어 그런 것이라 여기고 수련에 매진했었다.

 

허나 지금그는 처음으로 조디악 나이츠의 단장에게 반발하고 있었다.

 

한솔 경단장님께 그 무슨 태도입니까!”

 

에스테로사의 옆에 선 부단장피오네 로웰이 그를 꾸중했다허나 한솔은 잠시 움츠러들었을 뿐 여전히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에스테로사가 침묵을 깼다그녀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이는 한솔 때문이 아니었다그만큼 최근에 그녀가 힘을 쓸 일이 많았다는 의미였다

 

한솔아니한솔 경내 그대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네하지만 알고 있지 않나그대는 아직 견습 단원일세.”

 

저도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그대의 실력을 의심하려는 것은 아니야그러나그대가 떠나면 이 쉘터의 사람들을 누가 지킬 것인가?”

 

통렬한 지적에 한솔은 입을 다물었다클리포트 게임의 개막 이후 세계 전체의 침식률이 극도로 올라갔다이미 세상의 대부분은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고피난민들이 모여든 쉘터 역시 침식체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에스테로사를 포함한 조디악 나이츠의 일원은 바쁘게 움직이며 침식체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한솔 자신을 제외하면한솔의 요청은 자신 또한 다른 조디악 나이츠와 마찬가지로 출전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 곳에 저만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다른 카운터들도······.”

 

그대가 여동생을 지키지 않는다면누가 지킬 것인가?”

 

결국 한솔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시간의 흐름 속에서 하림은 능숙하고 강력한 카운터로 성장했지만그녀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후방 지원에 치중된 것이었다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도그녀 스스로가 나가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피곤하군이만 쉬고 싶네.”

 

“······알겠습니다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에스테로사는 눈을 감으며 이 몇 번이나 반복된 논쟁에 끝을 고했다그렇잖아도 막 거친 싸움을 하고 온 단장을 더는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결국 한솔은 이를 악물며 물러섰다.

 

피오네와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한솔은 고개를 돌려 단장실 밖으로 떠나갔다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침묵 속에서 피오네는 입을 열었다.

 

한솔 경은 이미 훌륭한 기사입니다왜 그를 출전시키지 않는 겁니까?”

 

그에게는······지킬 것이 있으니까.”

 

침식 재난 속에서 인류의 문명 대부분이 무()로 돌아갔다그 중에는 사람도 있었다조디악 나이츠의 가족들명예로운 기사의 원로들 또한 늙은 몸으로 침식체에 맞서다 하나둘씩 쓰러지고아예 연락이 끊긴 이들도 많았다.

 

운이 좋게 다른 쉘터로 피난한 이들도 있겠지만그 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조디악 나이츠에게는 더 이상 지킬 가족이 없었다그들은 오직 사명감이라는 가슴 속에 품은 별을 따라 멸망에 맞서는 최후의 기사들이었다.

 

그러나한솔에게는 아직 지킬 것이 있었다만일그가 출전한 사이 그의 여동생이 화를 입는다면에스테로사는 이미 한 번 그 슬픔을 경험한 자로써이것이 이성적인 판단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의 단원을 그 슬픔 속에 밀어넣을 수는 없었다.

 

바랄 뿐이네그는 지킬 수 있기를.”

 

무고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검이 되어 적과 맞서겠다.

 

그러한 맹세는 이미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남은 것마저 잃어버리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

 

 

단장실에서 빠져 나온 한솔은 쉘터로 이전된 조디악 나이츠 본부를 정처 없이 거닐었다오랜 습관에 따라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연무장에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끙끙거리는 신음과다른 누군가를 만류하는 소녀의 목소리.

 

한솔이 연무장으로 내려서자 연무장에 먼저 왔던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하얀 머리아이로 보기에는 너무 자란 소녀와 검은 머리소녀로 보기에는 너무 자란 처녀.

 

그들은 한솔의 선배이자 조디악 나이츠의 정식 기사인 물병자리의 기사에리어스 에스퀘테와 천칭자리의 기사리브 앨런이었다.

 

이제 그만해요!”

 

침식체와의 전투로 말수가 극도로 줄어들었던 에리어스가 드물게도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흘러가는 물과 같이 온유한 성정을 지닌 그녀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건 드문 일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같은 조디악 나이츠의 일원이라면 더더욱평소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다니던 리브는 오늘따라 흐트러진 차림새였다흩어진 머리카락 속에서 그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입니까?”

 

한솔 경!”

 

그를 본 에리어스의 표정이 밝아졌다그녀는 드물게 분통을 터트리며마치 고자질하는 아이처럼 리브를 손가락질했다.

 

리브 경 좀 말려 보세요제 말은 지지리도 안 듣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자한솔은 에리어스의 몸에 가렸던 상황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리브는 쓰러지듯 주저앉은 상태였는데그녀의 손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치유의 힘을 지닌 에리어스가 곁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그건 퍽 이상한 일이었다게다가 그녀의 무기인 천칭의 봉 또한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으니한눈에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사태인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치료부터······.”

 

치료하면 또 이런다고요저 바보진짜!”

 

에리어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욕을 하며 화를 냈지만한솔은 어렵지 않게 그녀의 눈동자에 깃든 걱정과 염려를 읽을 수 있었다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그 말에 대답한 것은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봉이무거워.”

 

전투가 끝나고도 언제나어쩌면 일부러 활기찬 기색을 유지하던 리브의 목소리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음성은 탁하고 음울했다한솔이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가가자리브는 고개를 들어 스스로의 표정을 내보였다.

 

천칭자리의 가호로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던 그 눈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그 시선의 끝은 어떠한 방향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메었다.

 

뭐라고요?”

 

알아미워하면 안 되는 거 아는데악의를 품으면 안 되는 걸 아는데······.”

 

리브의 손이 덜덜 떨렸다이내 그녀는 찢어진 두 손을 들어 스스로의 얼굴을 덮었다손틈 사이로 피에 희석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럴 수가 없어.”

 

리브의 무장인 천칭의 봉은 주인의 악의에 반응하여 무거워진다이제껏 리브는 그 무거운 봉을 깃털처럼 가볍게 휘두르며 전장을 난무했다.

 

그러나 지금그녀는 손이 찢어지도록 노력했음에도 자신의 봉을 들 수 없었다아니그녀 자신의 악의를 들어올릴 수 없었다스스로가 품은 악한 마음에 짓눌린 선한 본성은 조금씩 나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잠깐 방어선이 뚫렸는데전투가 끝나고 돌아오니까 쉘터의 생존자들 한 사람이 그러더라우리가 무능해서 침식체한테 자기 가족이 죽었다고······. 그 때나는 팔 한쪽이 잘려서 덜렁거리고 있었는데.”

 

리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나온다이내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던 천진하고 밝은 소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차라리팔이 아니라 목이 잘리는 게 좋았을 거래이렇게 무능해서는나도아팠는데나도 다 다치고내 가족도 다 죽었는데.”

 

그녀의 입에서 음울한 속삭임들이 흘러나왔다그러나 한솔과 에리어스둘 중 누구도 감히 그녀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같은 사고를 겪었다고 해도 슬픔의 무게는 각자 다르다그들은 감히 리브의 슬픔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그녀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도 없었다그러기에는 그들 또한 지쳤으니까.

 

그럼에도한솔은 이를 악물고 제 동료의 왜소한 등에 다가갔다그리고하루에 검을 만 번씩 휘두르느라 굳은살이 박힌 자신의 단단한 손을 리브의 어깨 위에 올렸다등 부분에 따뜻한 온기가 닿자 그녀는 움찔 떨었다.

 

리브 선배.”

 

무턱대고 입을 열었지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한솔 스스로도 막막했다결국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이내 마음에 우러나오는 그대로 입을 움직였다.

 

우리는 기사입니다.”

 

“······.”

 

약자를 수호하고악을 벌하고이 어두운 세상에 별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줄······, 다른 이들은 우리를 광대라 비웃어도 우리 스스로에게는 언제나 떳떳한 별자리의 기사입니다리브 선배아니.”

 

리브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그 장면에 어쩐지 기시감을 느끼면서도한솔은 말을 이었다.

 

리브 경경은 무엇 때문에 기사로 살기로 서약했습니까?”

 

그래야······하니까.”

 

잠시 침묵하던 리브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발언이었다그러나 그 말을 비웃거나 조롱하는 대신 한솔은 그것에 공감하듯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한솔은 조심스레 리브의 손을 봉으로 끌었다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손으로 무기를 잡게 한 채한솔은 그 위로 손을 겹치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는 기사도를 따릅니다그러나그 이유는 부귀와 명예 때문이 아닙니다얄랑한 책임감이나 조잡한 도덕적 우위 때문도 아닙니다.”

 

이내한솔은 조심스레 손을 뗐다리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봉을 쥐고 다시 한 번 봉을 들어올렸다앙상한 팔이 그 무게에 가늘게 떨었고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지며 다시 한 번 피를 흘렸지만.

 

우리는 기사니까.”

 

그 무게에 짓눌리면서도리브는 서서히 스스로의 악의를 들어올렸다.

 

우리가 지켜야 하니까.”

 

그녀가 일어섰을 때그 자리에 있는 것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악의에 짓눌린세상의 풍파와 모진 시련에 마음에 꺾인 한 명의 처녀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고결하고도 위대한그 누구도 긍지를 부정할 수 없는 천칭자리의 기사였다.

 

 

***

 

 

그러나한낱 의지로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었다.

 

클리포트 게임은 점차 심화되었다침식체들의 수는 늘어났고힘은 강해졌으며그 중에는 마왕이라 불리는 대적할 수 없는 재앙도 있었다.

 

그리고 한솔은 여전히 견습 단원이었다.

 

다녀오겠다.”

 

이제는 그 규모가 절반 이하로 줄어버린 쉘터의 입구에서조디악 나이츠는 최후의 출정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왕과 그 휘하의 군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쉘터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다이제껏 온갖 수단으로 시간을 끌었지만그들의 그러한 노력도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짓밟는 마왕의 말발굽을 멈출 수 있는 수단은 이제 하나뿐이었다그들 스스로가 전장에 나가마왕의 앞을 가로막는 것.

 

그러나 그 끝이 무의미한 죽음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한낱 인간이 맞서기에 마왕의 힘은 너무나 강대하였고이는 몇 년간 이어진 침식체과의 전투를 통해 경험을 쌓고 스스로의 능력을 눈부시게 개화한 조디악 나이츠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솔 경.”

 

그러나한솔은 이번에도 그 최후의 결전에 끼지 못했다그는 이를 악물고동요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동료들을 송별할 따름이었다.

 

한솔은 어느 때보다도 격하게 반발했지만 에스테로사의 의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결국 쉘터 최후의 생존자들을 지킬 이들이 필요하다는 말에 한솔은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기사단의 위계질서는 절대적이었으니.

 

단장님.”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는 한솔을 향해 에스테로사는 가까이 다가섰다사르륵무언가를 벗는 소리가 나고 이내 단장의 망토가 한솔의 어깨 위로 걸처졌다.

 

“······제게 이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한 발 물러선 에스테로사는실로 오랜만에 기사단장이라는 직책에서 벗어나 그 나이에 걸맞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부터는 그대가 조디악 나이츠의 단장이다.”

 

그게 무슨!”

 

한솔은 놀랐지만다른 동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무덤덤한 기색이었다놀라며 경악하는 한솔을 향해 에스테로사는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우리는 마왕을 저지하기 위해 간다그러나사실 그 작전의 성공 확률은 극히 낮지그렇다고 조디악 나이츠의 명맥을 끊어지게 둘 수는 없으니앞으로의 기사단은 한솔 경에게 맡기겠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말했지 않은가그대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고.”

 

분명 가벼워야 할 망토가 무겁게 어깨를 짓누른다한솔은 입을 달싹였지만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가볍게 미소지은 에스테로사와 동료들이 몸을 돌린다비록 명목은 견습 단원이어도 한솔은 그들과 서로 동등한 동료였고그들 각자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엄격한 기사단장을 연기했지만 언제나 사명감과 부담감으로 악몽에 시달리던 에스테로사언제나 단장을 위하여 무엇이든 꿰뚫는 창이 되었지만 전투가 끝나고 나면 PTSD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횡설수설하던 피오네본래부터 몸이 병약했고그럼에도 동료들을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의 수명까지 쥐어짜며 파도를 일으키던 에리어스스스로의 악의에 짓눌려 무기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던 리브.

 

그리고 한솔 자신.

 

“······오빠?”

 

동료들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한솔의 등 뒤로 하림이 다가와 섰다아니그녀뿐만이 아니었다그녀와 함께하는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이제는 수십 명밖에 남지 않은 쉘터의 생존자들이 보였다그들은 하나같이 침식파로 인한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고희망을 잃은 눈동자는 퀭했다그럼에도 그들은 살아 있었고그가 지켜야 할 자였다.

 

하림아.”

 

?”

 

그러나한솔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재앙과 고난 속에서 눈부시게 성장한 동생을 본다마냥 귀엽게 생겼던 하림의 동물 친구들은 이제 저마다 검과 총으로 무장한 채쉴틈없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그 위로 하림의 지원이 더해진다면 그들의 화력과 방어력은 가히 요새와 맞먹으리라.

 

근무력증에서 완전히 벗어난 한소림은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신체 강화에 투자할 수 있었다이제 그녀는 4종 침식체와의 힘겨루기에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카운터이며동시에 델타 세븐의 유산인 온갖 첨단병기를 다루는 뛰어난 솔저(Soldier)이기도 했다.

 

그리고마왕마저도 대적하길 꺼리는 소녀 또한 그들 곁에 있었다어떠한 불운마저도 행운으로 뒤바뀌고어떠한 위기에서도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 또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천부적인 행운의 소유자조호진 또한 그 곁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 전투로 쌓인 식견으로 한솔은 확신했다이들이라면 남은 생존자들을 지킬 수 있었다조디악 나이츠는 마왕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떠났고그 휘하의 침식체들은 기껏해야 수십 명의 인간에게는 이렇다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테니.

 

설령위기에 처한다고 해도 이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그러니여기에 한솔의 조력은 불필요하리라제 오빠의 심정을 짐작한 듯 하림은 슬프게 웃었다.

 

조심히 다녀와.”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너무나 많은 피가 흘렀다너무나 많은 상처가 새겨졌다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무리하지 말고.”

 

다녀올게.”

 

한솔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그는 조용히 자신의 죽도를 바라보다가이내 손때 묻은 죽도를 그대로 부러뜨렸다.

 

이제껏 저 검을 몇 번이나 휘둘렀을까하루에 일만 번씩그게 한 달이 되고백 일이 되고일 년이 되고다시 수십 년이 되었다.

 

그에게 더 이상 검은 필요하지 않았다그가 검이었고검이 곧 그였다한솔이 가볍게 손을 휘젓는 순간 허공에서 푸른빛의 검이 그의 손에 잡혔다한 자루가 아니었다

 

한솔의 의지에 따라 그가 이제껏 검을 휘두른 횟수만큼헤아릴 수 없는 수의 푸른 검이 그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이는 에스테로사의 광검과는 비슷해 보이면서도 다른 힘이었다세월이라는 불꽃을 통해 정련된 그의 잠재력그의 영혼에서 빛나는 별.

 

조디악 나이츠.”

 

더 이상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서도조디악 나이츠의 마지막 단장은 고한다.

 

갓 걸쳤을 단장의 망토가 익숙하다한솔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으려고 했다기나긴 싸움 동안 그의 안경은 파괴된 지 오래였지만더 이상 유리알에 기대지 않아도 맨눈으로 보는 세상 역시 충분히 선명했다.

 

그는 여전히 기사였다. 아니, 여태껏 기사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기사는 제 동료를 저버리지 않는 법이었다. 이미 마왕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그의 동료, 별자리의 기사들을 떠올리며 양한솔은 스스로의 맹세를 되뇌었다.

 

양자리의 기사 양한솔, 출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