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하라편 통합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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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치는 멸망 그 자체는 되지 못하네. 로자리아. 덧붙여 말하자면, 

비록 위급상황은 맞으나 대처할 여지는 남아있지."


"무슨 뜻이냐."


"그것은 모든 세계에서, 어떤 상황에서든, 끝의 끝까지 가서야 나타났네.

그러니 아직 사태를 해결할 여유가 충분히 남아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높낮이가 일정한 관리자의 목소리는 상황이 심각히 돌아가는 지금도, 더없이 사무적이었다.

로자리아는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렀다. 이 남자와 그녀 사이에 놓인 정보의 불균형은 언제나 짜증나는 일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라는 표현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봉인의 양쪽 축이 모두 깨어진 다음에도 한참은 더 지나서야 그것은 출현하네. 

한 쪽이 망가진들 다른 마왕들처럼 신체가 풀려나지 않아.”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깃든 신체쪽의 주도권이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으나,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마왕들과는 퍽 친하지가 않아서."


"결국 추측이란 말인데. 이번이 예외가 된다면?"


“글쎄. 재도전 기회도 없으니 딱히 방법이 없겠군. 같이 바닷속이나 탐험하세나."


"남의 일처럼 말하는구나. 관리자여?"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라네.  자네가 있으니. 이미 걱정이 산더미인데 벌어지지 않을 일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하. 우습게도 날 믿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럴 수밖에. 이제 우리 둘 다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아, 비로소 한 배에 탄 동지가 되었군?”

 

말문이 막혔다. 재치있는 답변이 즉각 떠오르지 않았다. 

입을 우물거리다 그만두었다. 그냥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이런 남자였던가? 


하긴, 모를 일이었다.

이 일에 엮인 누구보다도 길고 긴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그들 두 사람은 딱히 친밀했던 적이 없으니.


어쩌면 서로에게 마지막 시도인 이번에도 그럴지도 모르고.

그녀의 짐작대로라면, 둘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를테니까.


로자리아 쪽에서 입을 다시 열 때까지 관리자는 침묵하며 기다렸다.

그녀는 적당히 무난한 단어를 골랐다.


"큼. 그, 맡겨두거라."


"그래. 항상 믿고 맡기고 있다네. 우수 사원."


하, 말이나 못하면.


웃음기를 숨기지 않는 남자의 목소리에 괜히 짜증이 났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윤기나는 남색 머리칼이 손가락을 타고 흐트러졌다.


"내가 더 알아야 할 내용이 있다면 빨리 말하지 그래. 슬슬 움직이고 싶으니."


몇 가지 정보가 더 전달되었다. 지원이 급파될 것이지만 시간에 맞출지 확실하지 않았다.

유미나의 클리포트 인자 해방에 대한 재량을 포함해, 현장에서의 판단은 그녀의 몫으로 넘어왔다. 


"논의한대로 진행하면 되겠군. 더 궁금한 사항은 없나?"


"없지는 않지. 그런데 묻는대로 답해줄 생각은 있느냐?" 


"질문의 종류에 따라서? 펜릴 소대장."


"흥. 좋다. 관리자여."


"음, 듣고 있다네."


"그대가 본 오로치는 어떤 모습이었나?"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예상치 못한 질문인데. 작전 수행과 관계도 없지 않나."


"관계가 왜 없을까. 아-알아디시피, 궁금증 해결이 내 의욕을 끌어올려줄텐데. 다른 녀석들이야 한 두 번 본 사이지만.

 이 놈은 생소하거든."


잠깐의 정적이 찾아왔다. 로자리아는 이 능글맞은 남자를 상대로 거둔 작은 승리에 만족하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 끝을 꼬았다.

이것도 그가 틀어쥐고 있는 '공개 불가능'인 정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헛기침을 한 번 한 관리자가 나직이 말했다. 


“구전 그대로의 모습이지. 여덟 머리의 뱀."


"단지 그것 뿐인가?"


"목격한 케이스는 1회. 클리포트 게임 단계가 거의 3페이즈가 다 되어서야 깨어났네.

강림만으로 해일을 일으켜 동아시아 대부분을 수몰시켰고." 


"참 힘이 되는 얘기로군. 그 다음에는? 덩치가 큼지막하니 역시 식탐도 뛰어난가. 그, 먹보년처럼."


"거기까지는 알 수 없네. 자결했으니까.”


이어진 관리자의 대답에 로자리아는 그만 수화기를 놓칠뻔했다.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발언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럴리가. 다시 말해주지. 오로치는 강림한 그 자리에서 잠시 머무르다가 자결했네."


말도 안 되는 소리. 

온갖 욕망이 똘똘 뭉친 덩어리인 그것들이 자신을 파괴한다니. 애초에 가능하기는 한가?

하지만 관리자는 말을 하지 않을 망정, 거짓말을 하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사실이라는 것인데. 


이후로도 몇 마디 말이 오갔으나 전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이 마왕에 대해서는 관리자조차 명확히 알지 못하는 정보이니 그보다 더욱 무지한 그녀로서는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통화는 곧 끝났다. 


씨잉. 괜히 물어봤나.


짧게 불만을 내뱉은 로자리아가 시선을 돌렸다.

해그늘이 뉘엿뉘엿 지는 저택의 기와에 닿았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것 천지였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자결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마왕과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어째서?



 * *



투명한 물에 몸을 뉘인다.

찰랑. 잔잔한 파동이 퍼져나간다.


사방이 고요하다. 눈이 소복하게 내리는 새벽처럼.

의식이 떠다닌다. 잔잔한 호수결에 올라탄 나뭇잎처럼.


이건 아마도 꿈.


꽤 오래전부터 그녀는 꿈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꿈은 언제나 죄의식과 의무감이 짜낸 물감을 혼탁하게 섞어 난잡하게 칠한, 망쳐버린 그림이었다. 

가끔은 상상 속에나 있던 끔찍한 일들만 밤새 반복상영되는 악몽으로 가득찬 영화관이었다.


그렇기에 너무나 편안했다.


언제 이렇게 조용한 무채색의 꿈을 꾸었더라. 모르겠다. 까마득히 예전의 일이었다.


누구나 편안히 잠에 든다면 일어나고 싶지 않듯, 치후유도 그랬다.

정말 오랜만에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려던 일, 해야만 했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중요할까. 이렇게나 평화로운데.


이대로 쭉 쉴 수 있다면 좋겠어.


"그만 일어나거라."


뻑, 정수리를 얻어맞았다. 고요함을 깬 폭력이 그녀를 난폭하게 끌어올렸다. 


번쩍 눈이 뜨였다. 순간적으로 늘어난 광량에 눈이 부셨다.

손을 올려 가렸다. 어, 눈?


있다. 있었다. 짓이겨진 눈도, 잘려나간 팔도 제자리에 붙어있었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마주한 광경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온통 녹슨 세상이었다.


풀 한포기 없는 땅은 군데군데 쩌억 갈라진 모습을 드러내 황량했다.

황혼과 여명의 색이 뒤섞인 하늘은 불그스름했다.


시야가 닿는 곳은 어디든, 지평선 끝까지 노을로 물들었다.

이를테면, 낡은 필름으로 찍어 색조가 바랜 사진 같았다.


현실의 다채로웠던 색과 엇나간 채로 정지된 세상은, 

덜 깨어난 머리로도 자신이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음을 단박에 깨닫게 했다.


이 기묘한 장소에, 그만큼이나 기묘한 모습으로. 그녀는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얬다. 

폭포수같이 쏟아진 머리카락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굳이 다듬을 필요도 없는 아름다운 눈썹, 


가녀린 몸을 감싼 고풍스런 하카마,

옷깃 사이로 언뜻 비치는 피부의 색도 햇빛 한 점 받은 적 없는 백옥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것 중 색이 입혀진 곳은 금색으로 빛나는 눈과 선홍빛 입술뿐이었다.

 

이토록 새하얀 그녀는 마치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순백의 공주님이었다. 

어떤 미사여구도 그녀에게는 부족할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아름다운 모습을 단번에 추락시키는 것에 구속되어 있었다.


그녀의 족쇄는 집채만한 검이었다.

언제 땅에 못박힌 것인지, 이 세상과 같은 녹슨 색으로 물든 검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었다.

숭숭 뚫린 구멍에 연결된 사슬들이 그녀를 묶어두는 진짜 구속구들이었다. 


본래 여섯 가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그것들은, 지금은 반절이 끊어져 바닥을 굴렀다.

남은 것 중 가장 굵은 것은 손에 잡힐만큼 가는 목에 묶여 있었다.

부러질 것처럼 얇은 손과 발 한쪽도 사슬로 구속되어 있었다.


그녀는 공주가 아니었다. 붙잡힌 마녀, 혹은 더한 무언가였다.


눈이 마주쳤다. 


황금색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어딘가, 겁먹은 것처럼 보였다.

손을 교차해 어깨에 올렸다. 무의식적인 동작이었다.


여자가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살랑거리는 몸짓에 키보다 넓게 뻗은 그림자가 슬금슬금, 줄기를 뻗으며 꿈틀거렸다.


마치, 뱀의 머리처럼.


자연스레 치후유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소름이 쫙 돋았다. 짜릿한 감정이 솟구치며 잠에서 덜 깨어난 정신에 황급히 경종을 울렸다. 공포감이었다.


"흐음."


그녀는 잠시 치후유를 관찰하고는 또다시, 가볍게 웃었다.


"나나하라의 계집임은 분명하다만, 오랜 핏줄중에 제일 형편없도다."


"다, 당신은, 설마 오ㄹ, 아얏!"


뻑.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시 치후유의 정수리에 손날을 세운 내려치기가 꽂혔다.

그닥 힘이 실리지 않은 움직임이었으나 머리 전체가 울렸다. 몇 발짝 뒷걸음치다가 꽈당, 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어찌 한낱 계집이 존귀한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불경하다. 그러나 네 생각이 맞도다."


그녀가 과장된 몸짓으로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당연히 여기가 어딘지도 알겠구나.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감옥에 어서 오거라.”


짤랑, 사슬 하나가 따라오자 불만인듯 볼을 부풀렸다.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사슬을 몇 번 잡아당기던 그녀는 포기하고 자세를 바꾸었다.


치후유는 그 일련의 동작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직도 이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공포의 한켠으로 의문이 불쑥 솟아올랐다.


“내가 왜..? 나는, 분명히."


죽었을텐데. 뒷말을 마저 내뱉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미끄덩, 하고 손에 잡혔던 내장의 느낌을 떠올리니 구역질이 올라왔다.

스스로의 죽음을 언급하는 일은 본능적인 역겨움을 유발했다.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주저앉은 치후유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래. 가엾게도, 네 생각이 옳다. 너는 죽었다."


짤랑, 짤랑.


“허나 기뻐해도 좋다. 계집아. 위대한 존재가 너를 안쓰러히 여겼으니.”


"...예?"


짤랑, 금속의 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녀가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몸이 뱀 앞의 개구리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볼에 손가락이 닿았다.


분명 피부끼리 맞닿고 있음에도, 새하얀 손가락은 싸늘했다.

올려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볼을 타고 따라 내려온 손가락이 턱을 쓰다듬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느긋하고 나른했다.


"너무 겁먹지 말거라? 잡아먹으려고 부른 것은 아니니."


주먹을 꽉 쥐며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공포를 억누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한층 휘어졌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다시 말해주마. 너는 죽었다. 그러나 아직 죽지 않았다.

으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는 게 좋을까. 지금도 너는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

거의 결승점에 도달하기 직전이지. 그러나 들어오기 전에 한없이 시간을 느리게 만들었다."


짤랑. 사슬의 소리. 서늘한 손가락이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는 눈길이 소름끼쳤다.

닭살이 돋았으나 차마 팔을 올려 쳐낼 수가 없었다.


"너희 식으로, 그, 무엇이라고 부르더라. 그래. '한 줄 요약' 하자면, 가사 상태라고 할 수 있겠구나?"


손가락이 멀어진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치후유가 참았던 숨을 훅 내쉬었다.


"...어째서?"


"너에게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 싶구나. 굳이 인간종을 납득시킬 이유가 필요하겠느냐?


장난기와 여유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선두를 달려나간 공포의 뒤로, 조금씩 깨어나는 감정 중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반항심이었다. 

그리고 반항심은 금세 뜨겁게 끓어올라 치후유에게 용기를 주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더니 봉인의 심부로 끌려와 있었다. 

영문도 모르는 상태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고 했겠다. 그럼 대들어도 문제 없는 거고.


"장난은 그만두십시오. 절 여기 데려온 이유가 있겠죠."


"허? 너희 인간종은 농담을 즐긴다고 여겼건만. 아니었느냐."


한 번 지르고 나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긴장이 더 풀렸다.


"그럴 정신 없습니다. 잘 하지도 못합니다."


"풍류가 없구나. 게다가 건방지고. 그러나 용서하마. 얼마만의 말동무 상대인지 모르겠으니.

이 정도의 무례함은 관용으로 넘어가 주어야겠지. 좋다. 말해주마."


치후유에게서 손을 뗀 그녀가 시선을 멀리 돌렸다.

치후유의 시선도 여자의 눈길을 따라 하늘에 닿았다.


"밖의 상황이 흥미롭더구나."


심장이 펄떡였다.


언니.


그랬다. 육탄돌격으로 구속에서는 겨우 해방했으나 봉인과 치나츠 모두, 완전히 안전해 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 언니는 적의 손아귀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뒤따라 올 동료들을 믿고 벌인 일이었으나 그들이 제 때를 맞출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다.

들불처럼 퍼졌던 용기는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그 자리를 조급함이 채웠다.


"어,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아직. 그러나 너와 싸우던 그것이 어떻게 다룰 지 모를 일이니.

이대로는 우리 둘 모두에게 썩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구나."


쿵쿵거리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치후유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분명히 '우리 둘 모두에게'라고 말했다. 다시 몸에 힘이 돌아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당신도 지금 상황이 불쾌하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호. 그렇다만."

 

"그럼 막을 생각이겠군요."


"약골은 맞지만 멍청이는 또 아니로구나."


"뭐든 할테니, 방법을 말씀하십시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벌벌 떨던 계집답지 않구나. 말해주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냐?" 


"잡소리나 늘어놓을거라면 그냥 내보내 주십시오. 제가 다시 막겠습니다."


 "이미 한 번 지지 않았느냐? 몸뚱이도 망가졌고."


여자는 여전히, 반쯤 미소가 걸린 나른한 얼굴이었다.

화가 솟구쳤다. 벌떡 일어섰다. 더는 예의를 갖춰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시간이 없었다.


"출구를 말해!"


"악쓰지 마라. 네가 있는 곳이 어딘지 그새 잊었나 보구나. 나가는 출구같은게 있겠느냐?"

 

"그럼 꺼져! 아니. 내가 가겠어. 당신의 말장난에 어울려 주는것보다야 낫지."


그대로, 익숙하지 않은 욕설들을 쏟아부었다. 홱 뒤돌아 보이는 대로 걸었다.

출구가 있기는 할까 싶었지만 빙빙 말을 돌리는 저것과 대화를 더 나누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정표도, 어떤 구조물도 없는 황야를 걸었다. 


한참을 멀어졌을 때, 등 뒤와 앞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거라."


눈치채기도 전에 여자의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입도 험한데다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계집이로다. 너를 어떻게 교정해주어야 할까."


"헛소리나 늘어놓을거면 내버려 둬. 나갈 곳을 찾을테니."


"알겠다. 알겠어. 성미가 이렇게 급해서야. 출구는 없으니 관두거라. 저곳에는 초대 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묶어두었다."


"...불청객?"


직전에 걷던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별다를 것 없는, 이 녹슨 세상의 일부였다.


뭐라도 다른게 있는 걸까. 


한참 눈과 귀를 기울이자 지평선 멀리서 희미하게 울려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울부짖듯 쉭쉭거리는 소리.

다시 소름이 쫙 돋았다. 앞서 느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혐오감이었다.

 

그녀 역시 한껏 얼굴을 찌푸렸다.

 

“듣기 싫구나. 아니 그러하냐? 감히 누구 앞에서 뱀의 흉내를 내는 것인지. 제 새끼가 온 것이라도 느끼는 것일까.“


"저기 뭐가 있지?"


"아직 네가 이해할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것. 계집아. 너를 여기 데려온 가장 큰 이유는 저 불청객 때문이니라.

저것이 어느날 갑자기 기어들어오기에 묶어놓았더니, 잡종들이 자꾸 제 주인을 찾으며 비루하게 기어오는구나."


여자의 고운 얼굴이 처음으로 다른 표정을 만들었다. 명백한 불쾌감이었다.


"근본없는 것들이 안뜰에 개집을 짓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흙 묻은 발을 들여놓고 있다. 집을 내놓으라며 말이다."


그녀가 주먹을 휘둘렀다. 짤랑,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밖에 도사린 것들을 포함해, 건방진 도둑들에게 징벌이 필요함이 분명하지."


“그게 나를 불러온 이유라고?”


"우리의 이해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더냐? 너는 네 혈육을 구하고 싶겠지."


"출구가 없다면 나갈 수 없을텐데. 어떡하겠다는 얘기야."


“본래는 그렇다. 하지만 밖에 적당한 그릇이 있지 않느냐.”


"...그릇?"


여자는 손가락을 뻗어 치후유를 가리켰다.


"힘을 외부로 전달할 그릇말이다."


언니가 위기에 처한 것과는 별개로, 합당한 의문이 떠올랐다.

치후유가 맞닥뜨린 이것은 일본의 땅을 뒤엎었던 악신이자 괴수였다.


"다르게 말하면, 봉인을 깨고 나갈 쐐기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럴 생각은 없느니라. 머리를 좀 쓰는게 어떠하냐. 나가고 싶다면 놈을 굳이 정리할 이유가 없지."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내가 어떻게 믿지? 당신같은 악신이라면 거짓말을.."


딱. 또다시 정수리에 손날치기. 이번엔 주저앉지 않았으나 뒷걸음질은 칠 수밖에 없었다.


"말을 좀 가려서 해야 하지 않겠니. 계집아. 누구 앞인지 잊었느냐. 악신은 무슨. 자비로움에도 끝은 있다." 


그녀는 손짓 한번으로 화려한 의자 하나를 만들어내 폭, 파묻히듯 앉았다. 팔을 되돌려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믿고 말고할것이 뭣 있느냐. 어차피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는데.  

그저 신의 자비로움에 감읍하면 되는 것이거늘. 으응?"


"아니. 거부하겠어. 당신을 신뢰할 수 없어."


"거부? 슬슬 입이 아플 지경이다. 네게는 거부권이 없다. 신이 하기로 정했다면, 그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날 데려올 이유도 없었을텐데."


"자기평가가 과하구나. 허락이라도 구할 줄 알았느냐? 잠시나마 그릇이 될 너를 말동무나 삼을 겸 데려왔을 뿐이다만.

이렇게 싹수가 노란 계집일 줄이야."


몸에 열이 올랐다. 감정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뜨겁게 날뛰는 분노와 차가운 이성이 한 입을 모아 소리쳤다. 저건 거짓말이야.

치후유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여자의 황금색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건방지게 눈을 뜨는구나. 어디까지 참을성을 시험하려는 것이냐? 꿰뚫어보려고해도 소용없다."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을 믿을 수 없어." 


"의심까지도 많구나. 허나 인간종으로서 품을만한 의심이지. 합당하다. 뭐,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네 몸이 그릇으로 쓰일 것이며, 봉인은 유효하게 남을 것이다. 이 감옥에 나름 정이 들었거든."


치후유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는 다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움직임에 맞추어 사슬도 짤랑, 짤랑거리며 흔들렸다.


"벌써 수천년을 여기 갇혀 있었느니라. 분노에 몸을 맡겼던 것도 다 까마득히 예전의 일.

이미 이 별은 과거의 아름다움을 잃고 추악해졌으니 봉인에서 풀려난다 한들 못 볼 꼴만 가득하다.

저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는, 여기 앉아서 너희들의 꼼지락거림을 관람하는게 더 낫지.이게 꽤나 재밌다는 것을 알고있느냐?"


 "거짓말. 인간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나?"


치후유의 질문에 눈을 휘둥그레 뜬 그녀가 깔깔 웃었다.

손으로 목을 구속하는 사슬을 집어당겼다. 짤랑.


"너는 이것을 미워할 수 있느냐? 너희와 이것은 다를바 없노라. 증오는 너희에게 향하지 않는다."


여자의 금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감정들이 송골송골 맺혔다.


연민, 그리움, 기쁨, 슬픔, 두려움, 공포, 분노, 애달픔.

그런, 단순한 단어로 정의하기 힘들만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감정들이 쉼없이 교차하며 멤돌았다.


얼굴도 자연히 표정을 바꾸었다.

숨막히게 아름다웠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향할 곳이 더는 없다. 여(余)는 이미, 용서했다."


그녀는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려 표정을 지웠다.


치후유는, 잠깐이지만 이 존재를 가엾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치후유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자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야기는 이만 하자꾸나. 간만의 말상대였다만,

너는 조금씩이지만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대로 몸이 죽어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아니더냐.”


그녀의 말이 옳았다. 서로의 사정도, 내막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돌파구가 없다면 믿는 수밖에. 불행히도 언니가 위험에 처했다면 선택권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언니가 죽는 순간 이 괴물은 풀려난다.


만약의 만약이라도 이 뱀이 진실만을 말했다면, 아직도 해피엔딩의 가능성은 남아있었다.


"...방법을 설명해."


"순응했느냐? 그래. 발악하는것보다 낫구나. 

우선 밖의 저것이 더는 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치워야겠지. 내 힘의 일부를 네게 내어주마."


"그것만으로 정리할 수 있단말이야?"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군. 나나하라의 계집이라면 당연히 여(余)의 위업을 들어보았을텐데.

아주 일부면 충분하다. 전달 과정에서 네가 버티지 못해도, 육체는 청소를 수행할 것이니라."


"버틴다는건 무슨 의미지."


"조막만한 네가 일부라 하더라도 신의 힘을 편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 정신이 필경 산산조각날 것이다."


아.


역시, 쉽게 해결될 리가 없었다.


타올랐던 감정들이 하나 둘, 사그라든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피하지 않겠다고, 도망치지 않겠다고.


스스로의 거짓말로 쌓았던 탑을 무너뜨려준 사람과 약속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야."


사그러든 잿더미에서 감정을 끄집어내 걸친다.


목숨까지 전부 내어준 줄 알았는데 아직도 걸 것이 남아있었다.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다면 매달릴 것이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였다.


"만용이 지나치다. 계집아."


"됐어, 시작하지. 이걸 계약으로 받아들이겠어. 내 몸을 내줄테니. 당신의 힘을 줘. 그걸로 언니를 구하겠어."


"허, 당돌하구나. 인간종들의 계약은 동등한 당사자끼리 맺는 것이 아니었느냐?"


치후유는 이 장소에 온 이후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려 조소를 머금었다.


"육체가 없으면 나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센 척은 관 둬. 그릇이니 뭐니, 몸을 빌려달라는 말이잖아?

좋아. 빌려주겠어. 그럼 당신과 나는 임차인과 임대인이겠지. '인간종'끼리는 이런 걸 계약이라고 불러."

당신 같은 늙고 교활한 뱀은 모르겠지만."


"아하하하하!"


익숙하지 않은 치후유의 도발을 들은 여자가 웃었다.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가렸음에도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 세상이 흔들릴 정도로 웃었다.


문자 그대로, 땅과 하늘을 뒤흔드는 웃음에 반항하는 것처럼 멀리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작은 세상이 흔들리는 소음 속에서 치후유는 묵묵히 팔짱을 낀 채 서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한 이야기는, 구질구질해도 후편이 남아있었다.


아직, 언니에게 가는 길이 남아있었다.


폭소를 멈춘 여자가 치후유에게 사슬에 묶이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나 재미있는 농담을 할 수 있었구나. 만족스러운 말동무였다. 계집. 좋다. 흥미롭군. 계약이라 치자."


뻗은 손을 맞잡았다. 피부는 차가웠다. 이젠 이 뱀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자신을 언니에게 데려가 줄테니까.


"시작해. 당신 말마따나 시간이 없으니까."


여자가 대답 대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득히 먼 고대, 산야를 유린하여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수없이 많은 강줄기를 만든 태고의 괴물은 마침내 그 까마득한 신위를 드러냈다.


치후유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기운에 압도당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이것은 규격이 다른 괴물이었다.

침식체에게 매기는 급수 따위로는 평가할 수 없는, 진짜배기 괴물.


늘어놓은 말들이 어디까지가 거짓말일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이 힘이라면 반드시 치나츠를 구할 수 있다.


손가락이 느릿이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음?"


"당신. 잡아먹지 않겠다고 했잖아."


별로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금세 톡. 이마에 닿았다.


"거짓말이었노라. 네 말마따나, 여(余)는 악신이 아니냐?"


"그럼 그렇지. 네 힘은 잘 쓰겠어. 뱀."


야마타노 오로치가 웃었다. 소맷자락으로 가리지 않아 뱀의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드러났다.  


힘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들어온다.


이윽고 이해할 수 없는 지식과 기억이 파편처럼 나뉘어 함께 휙휙 밀려들어온다.


치후유는 순식간에 쏟아지는 격류에 쓸려 아득한 심해로 끌려내려갔다.





왜, 마지막에 농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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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유기를 한달이나 해버려서 너모 늦었지만 들고왔읍니다...


호옥시 기다린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제송합니다...마음에 들었을지 몰?루겠네


사실 스스로도 만족스럽진 않은데 더 늦으면 안되겠으니까 일단 갖고왔음 교정은 좀 자고 뒷편 마저 올리고 하던지 해야겠어


원래 써뒀던 부분을 갈아엎으면서 분량상 두 파트로 나누게 됐는데 뒷부분도 주말 안에 다듬어서 올릴 수 있을 것 같아


한 편이 더 늘어나게 되었지만 아모턴 현생에서 다음 프로젝트 들어가기 전에 끝내는게 목표인데숭..

 

개추댓글 언제나 너모너모 고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