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론 그저 떠돌아다녔다. 시계와 단검을 쥐고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분노를 가슴에 품은 채.
시계는, ‘오르카’는 끊임없이 내게 침식체에 대한 증오를 속삭인다.
그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전쟁터를, 버려진 도시를, 사막을, 숲을 누볐다.
싸우고, 다치고, 죽이고, 죽이고 죽였다.
모든 행동은 오직 침식체를 죽이기 위해서만 이루어졌다.
식사는 몸에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것.
휴식은 전투를 대비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한 것.
숨을 쉬는 것도, 걷는 것도, 눈을 깜박이는 것도 모두다.
침식체를 죽이지 않은 채 긴 시간이 지나면 참을 수 없는 금단증상이 치밀었다.
허기나 갈증과 같다.
이 경우 음식이나 물이 내겐 살육일뿐이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침식체의 피를 뒤집어쓸 때마다 예전 기억이 흐려졌다.
강적을 만나 오르카의 힘을 빌릴 때마다, 큰 상처를 입어 부상을 재생할 때마다 내 의식 속에 오르카의 인격이 스며들어왔다.
전투 중 입은 부상으로 신음하는 밤이면 오르카는 지난 워치의 소유자들의 기억을 보여줬다.
누대에 거쳐 쌓여온 원망은 바다와 같아서 그 속에 난, 바다에 따라버린 한잔 물에 지나지 않았다.
열 밤이 지나고 친구의 얼굴을 잊었다.
백 밤이 지나고 부모님의 얼굴을 잊었다.
또 수백의 밤이 지나고,
난 누구지?
난
나는
너는
나는, 오르카다.
그렇게 이름도, 기억도 잊은 채 오직 피를 쫓아다니다가, 아저씨를 만났다.
맛있다는 걸 가르쳐 준 사람.
살아갈 이유를 준 사람.
내게 삶을 준 사람.
서로에게 진실 되지 못한 관계였다는 건 알고 있다.
아저씨는 나에게, 나는 아저씨에게 서로의 딸과 아빠를 겹쳐보고 있던 것뿐이다.
하지만 거짓된 관계였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는가.
가짜였더라도, 서로에게 받은 구원은 진실이었기에.
오르카가 부추기는 대로 내 안전은 미뤄두고 침식체의 피와 살을 좇기만 하던 예전의 날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구원해 준 아저씨.
숙주가 된 이후로 단 한 사람도 내게, 내가 살길 바란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오직 아저씨뿐이었다.
그래서 살아가기로 했다.
아무리 추해도, 발악하고 발버둥 치면서, 버티고 버텨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기로.
세상일, 모르는 거니까.
크어어억. 커어억. 커어어억.
침대에 누운 채 한쪽 귀를 막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 써본다.
커어어어억. 크어억.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 침대로 다가갔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훤히 보이는 배를 벅벅 긁으며 코를 골고 있는 찰리가 보였다.
오른손으로 가볍게 코를 쥐자 곧 숨이 막혀 얼굴이 붉힌다.
잠시 뒤에 놓아주자 색색거리며 숨을 쉰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하려 하지만 찰리는 눕자마자 다시 시끄럽게 코를 골아댄다.
아무래도 오늘 더 자긴 그른 것 같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와 기숙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새벽이라 밤공기가 조금 쌀쌀했지만 카운터가 된 이후로 이 정도 추위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난간에 다가가 손을 짚고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도시 끝에 정화작전이 끝나지 않은 침식지대가 보였다.
침식 오염지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침식파가 아직 어두운 도시의 불빛과 뒤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불러본다.
“...오르카.”
반응이 없어도 안다. 듣고 있을 것이다.
“나, 무슨 꿈 꿨어?”
대답이 없어도 안다. 말해주기 싫은 것이다.
꿈이란 건 참 제멋대로다.
부끄러워서, 고통스러워서 평소에는 무의식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둔 기억을 마음대로 꺼내와 눈앞에 늘어놓는 주제에, 막상 다시 떠올리려 하면 금고를 걸어 잠그고 열어주는 법이 없다.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군.’
“뭐가?”
‘꿈 같은 걸 떠올리려고 머리를 굴리느니, 침식체를 어떻게 썰어 죽일지 고민하는 게 더 생산적이지 않나? 이런 곳에서 한가하게 낭비할 시간 따위 없다.’
“여기서 지내는 건 오르카 너도 좋다고 했잖아.”
‘자기들과 함께하면 침식체를 더 많이 죽일 수 있을 거라는 그 아줌마의 말을 듣고 동의 한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지?’
”바람 쐬고 있는데.“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다. 이렇게 느긋하게 보낼 시간은 없다. 어서 하나라도 더 많은 침식체를 죽이고 힘을 흡수해야...’
”뭐가 그렇게 급한데?“
‘... 네가 알 필요는 없다.’
항상 이렇다.
오르카는 자기가 아는 것을 내게 먼저 말해주는 일은 있어도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일엔 대답을 해주는 법이 없다.
내가 알 필요 없는 일이라며 입을 다물 뿐.
변덕스러운 아이처럼.
”그런데 오르카, 회사 사람들과 지내는 게 그렇게 싫다면 왜 내 몸을 빼앗지 않아?“
‘......’
”부사장이란 아줌마가 그랬어. 오르카 너랑 만난 사람들은 모두 외롭게 떠돌다 죽었대. 침식체를 죽이며 떠돌다. 끝내는 오르카 너한테 몸도 빼앗기고 죽을 때까지 싸우기만 했다고. 그런데 오르카 너는 왜 날 내버려 두는 거야?“
여전히 대답이 없다.
”사실 오르카 너도, 이곳 사람들이랑 지내는 게 마음에 든 거지?“
‘......’
”난 여기서 지내는 게 좋아. 메이드 언니가 구워주는 쿠키는 정말 맛있어. 사장 딸이라는 애와 노는 것도 재밌고. 아줌마는 잔소리가 심하지만 그래도 뒤에선 날 잘 챙겨줘. 걱정도 해주고.“
‘......’
”찰리랑 제시카도 이 회사가 마음에 든대. 월급은 좀 적어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이렇게 편하게 일할 곳은 얼마 없다고. 그래서 난 여기가 좋아.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리고 오르카 너도, 고마워.“
‘뭐?’
”너랑 만나지 않았다면 난 어땠을지 가끔 생각해 봐. 부모님을 잃고 혼자 헤매다가, 그냥 그렇게 떠돌다가 죽어버렸겠지. 그때 난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무것도 떠올리기 싫었으니까. 살아갈 이유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물론 싸우는 건 아직 무섭고, 다치는 건 아프지만, 그래도 오르카 너와 함께라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어. 아저씨를 만나고,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 있었어. 그래서 난 네가 참 고마워.“
‘난 내 목적을 위해 널 이용할 뿐이다. 넌 내 이빨이자 발톱이지. 도구란 말이다. 너에게 감사를 들을 이유 따윈 없어.’
”그래도, 네가 있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사실이잖아. 네가 내게 싸움 힘을 주었어.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수 있었어. 아저씨가 남긴 말 대로 말이야.“
이면세계에서 도망쳐 나온 뒤 힘을 기르기 위해 숙주를 찾아다니며, 받은 거라곤 항상 증오와 두려움과 악에 받친 저주뿐이었다.
네가 내 삶을 망가뜨렸다. 더는 싸우고 싶지 않다. 죽어서도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명령대로 침식체의 피와 살을 좇던 그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죽어가며 내게 원망을 퍼부었다.
그들의 매도를 들으며 마음 약해진 적 따윈 없었다.
처음부터 각오한 일, 무고한 피해자가 나온다 한들 멈출 생각 따윈 없었다.
시체를 산처럼 쌓아간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내 일이 끝나면...’
”응? 뭐라고 했어, 오르카?“
‘...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말해봤자 아무 의미 없는 약속일 뿐이니.
얕게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늦겨울 새벽공기에 입김이 서렸다 사라진다.
콘크리트로 지은 마천루에 가려진 동쪽 하늘 끝에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도시 끝 침식지대도 여명의 은혜를 입어 짙은 보랏빛 연기가 흩어져간다.
미처 다 개이지 않은 어둠 속에서 보랏빛으로 물든 침식지대는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옷에 매달아 둔 붉은 워치가 햇빛을 받아 요요하게 빛난다.
바라보는 사람을 삼켜버릴 듯이 불길했던 붉은색.
지금은 어쩐지 그 광원 깊은 곳에 따스한 온기가 새어 나오는 것만 같다.
왼손으로 워치를 꼭 쥐어본다.
잔잔한 떨림이 느껴진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기간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겠지.
삶이 닿는 곳까지 힘껏 발버둥 치기로 약속했으니까.
맛있는 걸 먹는 행복도, 또래와 노는 즐거움도, 사람과 어울리는 따듯함도 잊고 날뛰던 나날.
오르카가 있어 살아남았고, 아저씨가 있어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의 은인, 나의 동료, 나의 친구 오르카.
고마워. 함께 해줘서.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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