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는 사장실에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적막이었다. 12시 이전에 불 꺼지는 일 없던 회사는 설립 이후 최초로 어두운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칼퇴근해도 좋다는 말에 직원들은 하나같이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냈다. 하기야 누구라도 1년 가까이 야근에 시달리다 보면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관리자는 사소한 실수를 핑계로 했던 말을 취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사장과는 다르게.
클리포트 게임이 눈앞으로 다가온 지금, 관리자는 좀 더 세밀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백 번의 세계를 거쳐 온 관리자의 경험만이 전력도 자원도 압도적인 적 앞에서 우위를 점하는 유일한 카드였으니까.
물론 관리자 혼자서 모든 계획을 수립할 수는 없다. 한 사람이 제아무리 잘나 봐야 뻗을 수 있는 손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오늘 이 자리는 그를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관리자가 안배한 파트너를 위해.
“...슬슬 시간이 되었나.”
관리자의 시선이 창문 너머로 향했다. 노을이 뉘엿뉘엿 지며 세상이 붉게 물드는 중이었다. 퇴근하는 자동차도 드물어질 무렵이다. 관리자는 곧 만나게 될 손님을 생각하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세상이 폭발했다.
-콰앙!
사장실에 비치되어 있던 캐비닛이 터지듯 열리며 분노를 쏟아냈다. 그곳에서 거친 모래바람이 흘러들어오며 사장실 내부를 광폭하게 휩쓸었다.
“이게 무슨... 쿨럭!”
당황한 관리자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조금 늦었다. 모래가 들어간 눈에서 울컥 눈물이 솟았다.
관리자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마왕 측에서 보낸 기습이라면, 어떻게든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마침 나유빈이 오고 있을 터이니 조금만 시간을 끌면...
그때 캐비닛 안쪽이 반짝였다. 동시에 무언가가 저편에서 튕겨져 나오며 땅을 굴렀다.
그리고 관리자가 보기에, 그것은 낯선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야야... 이게 무슨 일이람.”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방금까지 격렬한 전투라도 치른 듯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그녀는 방금 전 땅을 구르며 기어코 넝마가 되어버린 옷을 툭툭 털었다.
그러다 멍하니 서있는 관리자를 발견하곤 다행이라는 듯 웃으며 다가왔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어딘가요?”
“...여기가 어디냐고?”
“네. 믿기 어렵겠지만 전 방금 전까지 사막 한가운데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만졌던 아티팩트가 문제였던 거 같은데.”
그녀가 말을 잇는 동안 관리자가 빠르게 그 행색을 살폈다. 황토색으로 물들었지만 원래는 흰색이었을 셔츠. 사막의 단면을 잘라온 듯한 코트와 갈색 머리, 그리고 흐릿해 보이는 청색 눈.
관리자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쏙 빼닮은 모습이었다. 성별을 제외한다면.
“...설마-”
“관리자님, 실례하겠습니다.”
관리자가 뭐라고 입을 염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불 꺼진 복도에서 나타난 건 관리자가 기다리던 손님이었다.
“어휴, 웬 먼지가 이렇게 많습니까? ...음?”
손을 휘휘 내저으며 걸어오던 나유빈이 사장실 안의 상황을 확인하곤 눈을 크게 떴다. 난장판이 된 방 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관리자가 상황을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나유빈이 묘하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 눈빛에 담긴 건 명백한 경악과 불신, 혐오의 감정이었다.
“...관리자님.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왜 그러나?”
질문 자체는 평범했지만 문제는 저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관리자가 주변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아무도 없는 회사에서 관리자와 단 둘이 있는 상처투성이의 여자. 주변엔 부서진 흔적들이 가득한 데다 덤으로 나유빈과 닮은 꼴이기까지. 그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지 상상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리자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소리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자네가 뭘 생각하든, 그건 오해일세!”
“그 벌겋게 충혈된 눈이나 숨기고 말씀하십시오!”
“충혈된 눈이라니, 그게 무슨...”
반사적으로 눈에 손을 가져가자 꺼끌꺼끌한 모래가 만져졌다. 그제서야 관리자는 방금 전 모래바람이 몰아쳤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나유빈이 점점 더 일그러지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글쎄, 오해라니까! 이건 아까 전에...”
“오해요? 지금 상황에 무슨 오해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내 말을 좀 들어보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관리자의 말을 중간에 끊은 나유빈이 두 손을 모았다. 일견 공손해 보이는 자세였다.
“죄송합니다, 관리자님.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뭐?”
“당분간은 저를 찾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잠깐, 잠깐 기다리...!”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나유빈은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 검붉은 에너지의 흔적만 남기고서. 그리고 관리자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내 말 좀 들어 주게...”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그 끔찍할 정도의 침묵 속에서, 방금 전까지 소외되어 있던 이 사건의 원흉 되는 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 * * *
“-그렇게 된 거라네.”
관리자의 설명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자면 여기는 평행세계고, 이 세계의 저... 그러니까 ‘나유빈’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정확하네.”
평행세계의 나유빈이 팔짱을 꼈다. 볼륨감 있는 가슴이 부각되는 자세에 관리자가 시선을 피했다.
“평행세계라니, 그런 게 정말 있을 줄은 몰랐는데요.”
“크흠, 그런 것치고는 잘 믿고 있지 않나?”
“안 믿을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제가 살던 세계엔 그라운드원이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저’를 직접 만나기까지 했으니.”
나유빈(여)의 시선이 향한 곳엔 나유빈(남)이 흥미롭다는 듯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저도 제법 놀랐습니다. 관리자님의 은밀한 취향인 줄 알았더니...”
“...아니라고 했잖나.”
관리자가 눈두덩을 매만졌다. 어젯밤 있었던 오해를 풀기 위해서 했던 노력들을 회상하면서.
그때 나유빈이 떠난 직후 구 관리국에서 사용하던 보안 회선으로 통신을 연결했지만 일방적으로 거부당하고, 글레이프니르에 전송한 메시지는 보내는 즉시 파기당하고.
결국 오늘 아침 회사에 출근한 이지수 양을 협박해 겨우 육익 내부 통신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 큰 처녀가 울먹이는 걸 보는 건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오해를 풀지 못했으리라.
“...아무튼, 자네가 만진 아티팩트가 문제라면 아마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걸세.”
“듣던 중 다행이네요. 저도 나름 급한 일이 많이 있거든요.”
“그러면 남은 시간 동안은 뭘 하실 겁니까?”
“글쎄요, 바깥 구경이라도 해 볼까요?”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는 듯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 대신 회사 밖으로는 나가지 말게. 여기 있는 나유빈은 지명수배자 신분이거든.”
“이런이런, 이 세계의 저는 몹쓸 악역인가 보네요.”
“그럴 리가요. 전 언제나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답니다.”
관리자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신분증 하나, 그리고 사원증 하나. 그녀를 위해 새로 제작한 모양이다. 쓰인 이름을 읽은 나유빈이 싱긋 웃었다.
“나유린이라, 이건 제 이름인가요?”
“나유빈이 두 명이면 헷갈리지 않나. 하루만 참게나.”
“좋아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이름이라, 새로 태어난 기분이네요.”
=================================
“그럼 유린 양, 자네는 이만 가봐도 좋네. 유빈 군 자네는 나랑 이야기 좀 하지.”
관리자가 서랍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원래 어젯밤 논의하기로 했던 계획서였다.
“부사장은 일이 있어 조금 늦을 걸세. 그 전까지는 자네랑 나랑 둘이서 봐야겠군,”
그리 말하며 관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난처하게 웃는 나유빈 옆에 아직 나가지 않은 나유린이 보였다. 그녀는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자네 둘 뭐하나?”
“관리자님, 그게 말이죠...”
“여기 있는 나유빈 군이 제 손목을 잡고 놓아주질 않네요. 이게 인기인의 숙명인 걸까요?”
나유빈의 얼굴에서 낭패감이 짙어졌다. 그걸 본 관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자네 뭐 하나?”
“관리자님, 아무래도 이런 계획은 머리가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유린 양은 엑자일러일세. 하루가 지나면 돌아갈 운명이지. 우리 계획에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걸 알잖나.”
“그... 렇다고 해도 저희가 놓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어차피 부사장이 올 걸세. 이수연이 그럴 실수를 할 사람으로 보이나?”
말문이 막힌 나유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유린은 그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흥미진진한 기색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다 못한 관리자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나유빈이 본심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관리자님과 단둘이 있기 불편합니다.”
“오해라고 하지 않았나! 몇 번이나 말하게 할 셈인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로서의 두려움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자네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건가?”
관리자의 얼굴이 분노로 푸르죽죽해졌다. 그걸 본 나유빈도 차라리 막 나가자고 생각한 듯싶었다.
“이런이런... 이 나이 먹고 뒤를 조심해야 하는 제 입장도 좀 생각해 주시죠.”
“이런 씹-”
-와장창!
“하하하... 재미있는 분들이시네요.”
관리자와 나유빈이 바닥을 뒹굴며 드잡이질 하는 사이, 비로소 자유로워진 나유린이 등 뒤의 상황은 무시한 채 바깥으로 나섰다.
“후후, 여기 계신 관리자님의 회사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에 부풀어 복도를 걷던 나유린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띠었다. 이수연. 오랜 전우의 이름이었다.
부사장실 앞에 도착한 나유린이 슬쩍 좌우를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걸 확인한 그녀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향했다.
“너무 삭막한데, 내가 아는 이수연이 맞나?”
그녀가 알고 있는 이수연의 방은 이렇게 삭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나이 대 여자들보다도 화려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흔이 넘었음에도 관리국 시절에서 외모가 전혀 변하지 않은 그녀였다. 젊은 외모만큼 어리게 살고 싶은 것도 당연한 생각이리라.
볼을 긁적이던 나유린이 책 하나를 뽑아들었다. ‘주름진 피부, 지금이라도 살릴 수 있다.’
“...정말로 동명이인인가?”
지금이라도 나가야 하나.
고민하던 나유린이 책상에 있는 컴퓨터의 전원을 눌러 켰다. 마지막으로 확인만 해 볼 요량이었다.
모니터에 전원이 켜지고, 나유린이 마우스를 움직이려는 순간.
“...아, 비밀번호.”
자신이 알던 이수연은 보안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생물이었는데. 수십 번에 걸친 자신의 부탁이 이 세계에선 빛을 본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기쁜 건 아니었지만.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수연 스트라이크.”
-다시 입력해 주십시오.
“lsystrike."
-다시 입력해 주십시오.
“LSYSTRIKE.”
-확인되었습니다. 좋은 하루 십시오.
“와, 이게 맞다고?”
나유린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아는 이수연이 맞는 모양이다.
잠금이 풀리며 모니터에서 푸른빛이 쏟아져 나왔다. 나유린이 기대 어린 얼굴로 시선을 집중했다.
남의 비밀을 캐는 건 언제나 즐겁단 말이지.
짧은 로딩이 끝나고 갖가지 파일들이 떠올랐다. 대부분이 업무용 폴더였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니 꽤나 흥미를 끄는 파일이 많았다. ‘사사건건 기어오르는 부하직원을 갈구는 방법.’, ‘남의 남자에게 손대는 불여우들 쳐내기.’, ‘나이 든 여자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72가지 기술.’
“나이 든 여자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72가지 기술...?”
나유린이 인상을 쓰며 파일 제목을 읽어내렸다. 이수연이 왜 이런 걸 본단 말인가. 귀찮다고 화장조차 하지 않는 녀석인데.
그러고 보면 방 안에서 풍기는 향기도 이상했다. 평소 쓰는 향수보다 조금 진한 향수. 마치, 나이 든 여성들이 뿌리는 것과 비슷한...
무서운 상상에 사로잡힌 나유빈이 몸을 떨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러나 고집을 내려놓으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저 벽에 걸려 있는 중년 여성의 타페스트리라던가.
마치 그녀가 알고 있는 이수연이 정상적으로 나이를 먹었다면 저렇지 않았을까 싶은, 사진 하나가...
-똑똑.
“부사장님, 언제 돌아오신...”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부사장실 내로 들어왔다. 흠칫 놀란 나유린이 서둘러 띄워져있던 창들을 정리했다.
“...누구시죠? 여긴 부사장실인데요?”
“안녕하세요. 수연이 친구, 나유린입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김하나였다. 얼굴을 확인한 나유린이 생긋 웃으며 관리자에게 받은 사원증을 꺼내 건넸다. 저쪽은 나유린을 모르지만, 나유린 입장에선 이미 구면이었다.
“사장님께 허락은 받고 들어왔는데, 실례가 된 모양이네요. 죄송합니다.”
“사장님한테 허락을 받으셨다고요?”
“네.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
의심스럽다는 듯 쳐다보던 김하나가 이내 납득한 듯 사원증을 돌려주었다.
“가짜는 아닌 거 같네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하지만, 그거랑 부사장님 업무용 컴퓨터를 만진 건 별개입니다. 사장님도 그거까지는 허락하시지 않으셨을 거예요.”
“...으흠, 그건 그렇네요.”
좋게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하여간 깐깐한 여자였다.
어쩔 수 없이 나유린이 사용 기록창을 띄웠다. 부사장 입장에선 죽어도 공개하고 싶지 않을 파일이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관리부장이 공개하라는데.
기록을 천천히 살펴보던 김하나가 돌처럼 굳었다. 그리곤 고장 난 시계처럼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걸 보며 나유린이 밝게 웃었다.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깁니다?”
=================================
-덜컹.
낡은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배출구에서 멈췄어야 할 커피는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이씨, 내 커피...”
투덜거리며 나유린이 팔을 걷었다. 그리곤 자판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벽과 바닥이 맞닿는 곳에 그녀가 뽑은 커피가 보였다. 발을 뻗어 그걸 끌어낸 나유린이 다시 자판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기껏 꺼낸 캔커피는 먼지가 이미 수북하게 묻은 상태였다. 기둥 부분만 그렇다면 털어내겠지만 입술이 닿을 부분까지도. 청소를 언제 했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 위생이었다.
잠시 커피를 내려놓은 뒤 주머니를 뒤적였다. 너덜너덜한 주머니 안에서 나온 건 종이 쪼가리와 고무줄 2개, 먼지 한 움큼이 전부였다.
“......”
나유린이 조용히 커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대충 소매로 닦은 뒤 뚜껑을 따고 입으로 가져갔다.
분명 아이스커피라고 되어 있었건만, 혀에 닿는 감촉은 미지근했다.
“아니, 무슨 휴게실이 이래?!”
분노에 찬 나유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하나가 휴게실이라고 데려다준 곳은 고작 의자 몇 개와 자판기 하나가 전부인 공간이었다.
나유린은 설마 그 여자가 복수랍시고 안 쓰는 창고에 데려다 준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 시작했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상식적으로 음료 하나 빼먹기 힘든 곳이 휴게실 일리 없으니. 이미 확신에 찬 나유린이 관리부에 쳐들어가는 것과 관리자에게 이 일을 고발하는 것 중 뭐가 더 효과가 좋을지를 고민하던 중.
“못 보던 얼굴이군. 신입사원이라도 되나?”
상념을 깨트리는 목소리였다. 나유빈이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흰 머리카락, 유달리 작은 키, 등에 맨 쌍검마저 눈에 익은 모습으로.
힐데가 얼굴을 찌푸리며 서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익숙한 면상인데. 넌 뭐지? 나유빈과 무슨 관계냐?”
힐데는 이곳에서도 ‘나유빈’과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나 좋은 이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라면 저렇게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
그러고 보니 지명수배자라고 했었지. 겨우 그 사실을 떠올린 나유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단순한 오해 때문에 옛 스승과 싸우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네 정체는 뭐냐?”
힐데가 등 뒤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잠시 고민하던 나유린이 활짝 웃었다. 최대한 경계를 사지 않는 표정으로.
“안녕하세요, 스승님. 이 세계에선 처음 뵙네요.”
“...뭐?”
칼자루를 막 쥔 손이 굳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힐데가 나유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김빠진단 느낌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 그렇군. 너도 엑자일러인가.”
“별로 놀라진 않으시네요. 스승님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신가 보죠?”
“익숙한 건 아니다. 하지만 겪어보긴 했지.”
의자에 털썩 걸터앉은 힐데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유린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런 모습은 어느 세계든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서, 넌 뭣하다가 넘어온 거냐?”
“사막에서 아티팩트 하나를 발견했거든요. 아마 그거 문제였던 거 같네요.”
“내가 아는 나유빈은 그렇게 아무 거나 덜컥 만지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전투 중이었거든요. 발치에 걸려 넘어진 것도 발동요건에 포함될 줄은 몰랐죠.”
나유린이 커피를 홀짝였다. 미지근한 커피, 역시 최악이다.
그러고 보니 떠오른 생각이 있어 나유린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근데 휴게실이 여기가 맞나요?”
“휴게실?”
“네. 김하나 양이 휴게실이라고 소개해주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휴게실이라기 보단 창고에 가까워 보이는데요?”
“......”
한참 담배 연기를 빨아마시던 힐데가 길게 뱉어냈다. 그리고 곁에서 힐데를 오래 봐온 나유린의 경험상, 저건 할 말이 궁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유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승님?”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힐데의 얼굴은 찔리는 게 많은 자의 얼굴이었다. 뭔가 더 말할까 고민하던 나유린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섣불리 더 캐물었다가 쌍검으로 쳐맞긴 싫었으니까.
“그럼 난 가마. 네 녀석도 늦지 않게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다.”
담배를 비벼 끈 힐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요, 스승님.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냐?”
“그, 수연이 있잖습니까. 저랑 나이가 비슷하니 그 녀석도 40대일 텐데... 역시, 많이 변했겠죠?”
“뭘 묻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그 날 이후로 20년이 지났다. 변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차갑게 내뱉은 힐데가 문을 열었다. 딸랑이는 종소리가 울리더니, 곧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뭐, 너나 다른 녀석들은 별로 변한 게 없는 거 같기도 하군. 이수연 그 녀석이 유독 늙은 건가.”
살짝 늦은 대답은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걸 들은 나유린은 옅게 웃으며 마찬가지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생 많이 했나 보죠. 스승님께서 잘 챙겨 주세요.”
이번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적막한 공간에선 조용히 커피 홀짝이는 소리만 맴돌았다.
“그렇군, 힐데 소대장을 만났다라... 별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야.”
“저 같은 엑자일러에겐 별 관심이 없어 보이시던데요?”
돌고 돌아 다시 발걸음이 향한 곳은 사장실이었다. 휴게실에서 기다리다 지친 나유린이 돌아왔을 때는 대충 소란이 정리된 상태였다. 관리자는 승리의 증거로 머리에 커다란 혹을 하나 달고 있었다.
“스승님이 관심을 쏟는 건 클리포트 게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곧 돌아갈 엑자일러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것도 당연하죠.”
머리가 산발이 된 나유빈이 서류를 넘겼다. 산더미 같던 서류뭉치는 어느새 거의 분류가 끝난 상태였다.
“그나저나 평행세계라고 해 봤자 별로 재미는 없네요.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가 보죠?”
“글쎄, 뭐 기대한 거라도 있었나?”
“당연하죠. 이 세계의 제가 남자였으니, 또 다른 차이점이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기대했던 거만큼 다를 건 없네요... 하나 건진 게 있다면 수연이 정도일까.”
그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서류를 살피던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수연이? 뭔가 다른 점이 있었나 보죠?”
“구체적으로 얘기해 보게. 뭐가 다른가?”
“으흠, 제가 살던 세계의 수연이는... 일단 젊어요. 여기랑은 다르게.”
“젊다니, 얼마나 젊길래?”
“20년 전하고 비교해도 전혀 변하지 않은 정도로?”
이쪽을 바라보는 얼굴들이 멍해졌다. 나유린은 작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 세계의 이수연은 복제인간이라도 되나?”
“아하하, 그럴 리가요.”
“비결 같은 걸 물어본 적은 없습니까?”
“자기도 잘 모르겠다던데요. 서류 작업을 하면 늙는 체질이 있는 건 아닐까요?”
농담이었지만 이들에겐 꽤나 신빙성 있게 들린 모양이었다. 나유빈이 착잡한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놓은 걸 보면.
“...관리자님. 앞으로 이런 작업은 수연이 시키십쇼.”
“매정한 말을 하는군. 펜릴 전대가 동료를 그리 쉽게 팔아먹어도 되는 건가?”
“가끔은 잘라내선 안 될 것도 잘라내야 할 때가 오는 법이죠. 수연이도 이해해 줄 겁니다.”
“부사장이 들었으면 자네 목을 조르려 들었을 걸세.”
말과는 다르게 관리자도 꽤 심란해 보였다. 한참 동안 서류를 들여다보던 관리자도 결국 진저리를 치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못 해먹겠군. 그냥 자네 말이 맞는 걸로 하지.”
“...동료라고 있는 게 이 모양이라니. 수연이가 봤으면 땅을 치겠군요.”
“기왕이면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를 뒀다고 해주게.
...그런데 그쪽 부사장은 사무직이 아닌 건가?“
관리자가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나유린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관리국 시절의 수연이를 생각하면 될 거 같네요. 그 성격에 사무직이 가당키나 하겠어요? 당연히 현장직이죠.”
“아직도 전투직으로 뛴다고?”
“제가 보기엔 천직입니다. 영상이라도 보시겠어요?”
두 사람이 기대 어린 눈빛으로 다가왔다. 코트 안쪽에서 휴대폰을 꺼낸 나유린이 영상을 재생했다. 한 뼘 길이의 액정에 비치는 풍경은 눈이 소복하게 쌓인 설산이었다.
관리국 기갑차량에서 촬영된 영상은 전장의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다. 질주하는 차량에 치인 그림자 하나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이십여 미터 바깥의 앙상한 나무를 부러뜨리며 추락한 그림자 위를 바싹 마른 줄기가 쓰러지며 덮쳤다.
전장 바깥을 가리던 나무가 사라지며 시야가 확 넓어졌다. 그 너머로 보이는 함선은 그들에게도 익숙했다. 코핀 오브 타키리온, 마왕을 봉인하는 쐐기.
사방에서 포화가 치솟고, 운 없이 포탄에 직격당한 포대는 사방 수십 미터를 집어삼키며 뜨겁게 산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은 박살 난 동료의 잔해를 뱃속으로 삼키며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섬광과 포성이 번쩍이는 전장에서도 흑색의 대검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허공에 선이 그어질 때마다 그림자 서넛이 터져나갔다. 사람 키만큼 거대한 냉병기는 이 순간 포탄에 가까웠다. 대검이 한 번 휘둘러진 자리에 검게 남은 잔상은 수십 미터 바깥에서도 보일 만큼 거대했다.
멀리서 조준된 포탄을 주먹으로 튕겨내며, 사방의 그림자들을 베어낸 이수연이 힘껏 점프했다. 설산의 가장 높은 나무를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뛰어오른 이수연이 대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붉은 섬광이 검날을 횃불 삼아 거세게 타올랐다.
“필살-”
전장 한가운데 붉은 유성이 떨어졌다.
“-이수연 스트라이크!!!”
한순간 포효와 폭음이 전장을 뒤덮었다. 그림자들의 괴성도, 전차의 육중한 엔진 소리도, 불이 붙어 타오르는 나무의 비명도, 포탄이 쏘아지는 소리도, 주변 모든 소음들이 묻혀 사라지며-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폭발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영상은 그걸로 끝이었다.
“......”
영상이 끝나고 나유린이 어떻냐는 듯 둘을 쳐다봤다. 그리곤 얼굴이 시뻘개진 관리자를 발견했다. 관리자는 입술을 꽉 깨문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거... 절대 수연이에겐 보여주지 마세요.”
“왜죠?”
“본인은 그게 흑역사라고 생각하거든요. 이젠 그 시절처럼 요란하게 뛰어다니지도 않을뿐더러, 저런 필살기 대사 같은 건 입에도 담지 않습니다.”
나유빈이 쓰게 웃으며 설명했다. 옆에서 결국 웃음이 터진 관리자가 배를 잡고 웃는 사이, 나유린이 누구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것치곤 비밀번호로 잘만 써먹고 있던데.
“아, 하하하... 오래간만에 크게 웃었군. 그쪽 세계에선 그 대사를 자주 써먹나 보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술 중 하나죠. 본인이 하도 써먹은 탓에, 관리국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카운터 1위에 뽑힌 적도 있고요.”
이 말을 들은 나유빈도 결국 웃어버렸다. 이수연 스트라이크가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세상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살짝 이수연에게 미안해지는 나유린이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남의 흑역사가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피가 전부 빠져나간 듯 창백해진 관리자가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봤다.
그곳에 이수연이 있었다. 마치 시체처럼 새파란 안색의 그녀가, 마주 고개를 돌려 관리자를 쳐다봤다. 그리곤 기괴하게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쓱 훑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건 나유린이었다.
“당신이 그 엑자일러군요. 맞습니까?”
가까이서 본 그녀의 친구는 여러 가지 의미로 예상 이상이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시선이 무기질적으로 번들거렸다. 나유린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이수연이 말없이 방 밖으로 나갔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는 작아지나 싶더니 다시 가까워졌다.
다시 돌아온 이수연은 온몸에 테크 레벨 5등급의 장비들을 덕지덕지 걸친 상태였다. 세 사람이 숨도 쉬지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사이, 그녀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공중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녀의 전용 전술예장이 지퍼 사이로 보였다.
"돌아갈 때 같이 가시죠. 그 애송이를 죽여버려야겠습니다."
“......”
분노한 부사장을 말릴 수 있는 건 최소한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압박 속에서, 나유린은 검게 변해버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나유린이 밖을 쳐다봤다. 태양이 서쪽 하늘을 향해 떨어지는 중이었다.
옆에서 물걸레질을 하던 관리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타박했다.
“유린 양, 지금 그런 거 볼 시간이 어디 있나. 빨리빨리 밀게.”
“에이, 진짜. 남의 회사에서 이게 뭐 하는 거람.”
나유린이 투덜거리며 팔을 움직였다. 물을 잔뜩 머금은 걸레가 미끄러지듯 바닥을 훑었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자네 때문 아닌가. 자네가 그 영상을 틀지만 않았어도...”
“저는 여기 수연이가 ‘그거’ 싫어할 줄은 몰랐거든요? 그러는 관리자님이 제일 크게 웃었으면서.”
“...크흠, 기억이 잘 안 나는군.”
관리자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유린은 그런 관리자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자, 자. 떠들지 말고 일합시다 일.”
앞에서 먼저 걸레질을 밀고 나가던 나유빈이 분발하자는 듯 두 손을 마주쳤다. 어림잡아 격납고 3분의 1 가량은 홀로 청소한 상태였다. 뺀질뺀질한 관리자와는 다르게 그래도 할 일은 열심히 하는구나, 라고 생각한 나유린이 다시 봤다는 듯 말했다.
“웬일로 이렇게 열심히 하신 거예요?”
“웬일이라니, 저 원래 할 땐 하는 남잡니다. 그리고 청소를 빨리 끝내야 유린 양 작별 인사라도 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나유린이 살짝 감동했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나유빈은 싱긋 웃어주었다.
“그럼 전 제 할 일 다 했으니 쉬겠습니다. 남은 구역은 알아서들 해 주십쇼.”
“와, 진짜 쓰레기다.”
기어코 감탄해버린 나유빈이 중얼거렸다. 나유빈은 신경 쓰지 않고 고탄성 장갑 위에 올라가 누웠다. 고무처럼 탄성 있는 장갑판이 출렁거리며 그의 몸이 물 위에 뜬 배처럼 흔들거렸다.
청소가 다 끝난 건 기다리다 지친 나유빈이 함포장약을 베고 잠들었을 무렵이었다.
나유린이 허리를 꺾자 뚜둑 하고 관절 꺾이는 소리가 울렸다, 옆에서 그걸 따라하던 관리자는 으드득 소리와 함께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자다 깬 나유빈이 그를 부축했다.
격납고 문을 잠그고 돌아가는 길에 자판기 하나가 보였다. 나유빈이 선심 쓰는 척 관리자의 지갑을 꺼내 음료수를 돌렸다. 다행히 이번에 뽑은 커피는 미지근하지 않고 시원했다.
회사로 돌아오니 사무실은 사람 없이 한산했다. 복도 사이사이에 널브러진 보고서들은 이틀 연속으로 칼퇴근이라는 기현상을 맞이한 광란의 흔적이었다. 말 그대로 개판 오 분 전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나유린이 농담 삼아 얘기했다.
“근로기준법은 잘 지키고 계시죠?”
관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장실에 도착한 세 사람은 각자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수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유린은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랜 친구와의 첫 만남은 트라우마가 되기에 충분한 기억이었다.
“...노을이군.”
시체처럼 모로 누워 숨만 쉬던 관리자가 고개를 까닥였다. 나유빈과 나유린의 시선도 따라 창밖을 향했다. 서쪽 하늘 아래로 태양이 반쯤 잠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그렇네요, 노을.”
한참 노을을 바라보던 나유린이 겨우 입술을 뗐다. 마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노을.”
그리고 한 번 더 반복했다. 이 상황을 뇌리에 남기려는 듯이, 조금이라도 더 눈동자에 남기려는 것처럼.
“아쉬우신가요?”
“...조금은요. 빨리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때가 되니 조금 아쉽긴 하네요.”
그렇게 말하는 나유린이 몸이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나유빈과 나유린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건 관리자뿐이었다.
“이제 돌아가려는 걸세.”
“가만히 있으면 되나요?”
“그래. 이젠 정말 작별이군.”
나유린이 사방을 둘러봤다. 처음 자신이 떨어진 사장실, 노을이 붉게 물들던 유리창, 캐비닛, 소파. 그리고 관리자, 나유빈.
마지막으로 그 모든 풍경을 망막에 새긴 나유린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뭐, 제법 즐거웠어요.”
“그 세계에도 ‘내’가 있겠지. 나를 잘 부탁하네.”
“관리자님도 부디 원하는 걸 이루시길 빌죠.”
관리자와 인사를 마친 나유린이 나유빈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을 마주친 나유빈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살짝 웃었다.
“다음에 올 땐 수연이 하고 같이 오십쇼.”
나유린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둥글게 휘어졌다. 그리고 뭔가 말하려는 순간-
광원이 사라졌다. 한순간의 꿈처럼, 빛이 사라진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멍하니 그 자리를 바라보던 나유빈이 작게 중얼거렸다.
“갔네요.”
“그래, 갔군.”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나도 그렇다네. 다신 못 할 경험일지도 모르지.”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한참을 그저 멍하니 있었다. 조금 뒤 관리자가 정신을 차린 듯 침묵을 깨며 말했다.
“정신 차리세. 이제 나유린 양도 갔으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관리자가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들을 꺼냈다. 원래 일정이었던 클리포트 게임을 대비한 계획을 짜기 위해서. 나유빈은 휴대폰을 열어 이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평소였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았을 이수연은 오늘따라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나유빈이 관리자를 쳐다 본 그때, 마찬가지로 불안해 보이는 관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부사장이랑 연락이 안 되나?”
“...왜 그러십니까?”
“좌표전송장치가... 없어졌네.”
사라진 이수연. 그리고 동시에 없어진 좌표전송장치. 나유빈은 어떤 예감이 현실화되는 것을 느꼈다.
얼어붙은 침묵이 방 안을 감쌌다.
이수연은 황야에 있었다.
그녀가 전투복을 조이는 벨트를 고쳐 둘렀다. 고장 날지 모른다는 염려와도 다르게 가져온 장비들은 대부분 멀쩡했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전부 가리는 투구를 눌러 쓴 그녀가 기절한 나유린을 들쳐 맸다. 방심한 사람의 목덜미를 쳐 기절시키는 건 적잖이 해 본 일이었다. 적어도 일이 다 끝나기 전엔 깨어나지 못하리라.
준비를 끝낸 이수연이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 기절한 대적자를 적당한 곳에 내려 두고, 아직 철이 들지 않은 누군가를 강제로 계도하기 위해서.
부사장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 번에 올리는 게 낫대서 한 번에 올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