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는 티타노마키아 당시 가이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크로노스에 의해 저승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에 유폐된 티탄 삼형제를 구출해주었다. 이들은 이후 제우스에게 벼락을, 포세이돈에게 삼지창을, 하데스에게 투구를 만들어주었는데 이 벼락을 아스트라페, 또는 케라우노스라고 부른다.****



피비린내. 비명. 총성.

 

으아아아! 젠장! 젠자앙!”

 

탄약 가져와! 빨리!”

 

자율전투함 키클롭스(Cyclops) 다운! 남은 함선은 3대입니다!”

 

사방에 뒤섞여 쓰러져 있는 사람과 괴물의 시체.

 

너무 많아 강을 이뤄 흐르는 피 웅덩이 속에서 반은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 .”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반의 어깨를 흔들던 사내가 신음을 흘리는 걸 듣고는 외쳤다.

 

!”

 

귀에선 계속 삐 하는 소리가 울렸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자 군복을 입은 사내가 자신에게 소리치는 게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사방은 뿌옇고 이명(耳鳴)으로 인해 사내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반쯤 벌어진 입에서 침을 흘리며 웅얼대는 걸 본 사내는 장갑을 낀 손으로 반의 뺨을 후려쳤다.

 

!

 

얼얼한 통증에 점점 정신이 돌아온다.

 

반이 서서히 선명해지는 시야에 사내의 얼굴을 담았다.

 

! 반 살라자르(van salazar) 일등병! 정신 차려!”

 

, !”

 

사내가 반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내 말 들리나? 다친 곳은? 일어설 수 있겠나?”

 

반은 서둘러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여기저기가 쑤시고 한쪽 귀가 잘 안 들리긴 하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 듯했다.

 

! 괜찮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사내가 반의 멱살을 움켜쥐다시피 하며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그럼 당장 가서 싸워, 이 멍청아! 뭘 퍼질러져 있어!”

 

반이 반사적으로 옆에 떨어져 있던 총을 집어 들고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망가진 승용차와 건물 잔해를 쌓아서 만든 바리케이드 뒤로 수백에 달하는 군인이 모여 화망(火網)을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패이고 부서진 도로

 

조금 전 자신처럼 바닥에 쓰러져 도움을 호소하는 전우들.

 

계속해서 불을 내뿜는 전차와 장갑차.

 

상공에서 지원 포격을 하는 차원 함선과 전투기.

 

그리고 자신들을 갈가리 찢기 위해 밀려드는 침식체의 파도.

 

떠올랐다.

 

여긴 챔버(chamber) 3 대피소 방어선.

 

인류 최후의 보루.

 

인세(人世)의 지옥이다.

 

 

 

맨 처음 이터니움이 현실 세계에 나타난 이후 간헐적으로 열리던 균열은 불규칙적으로 침식체를 토해냈다.

 

개인의 총화기로 대응할 수 있는 1.

 

다수의 중화기나 미사일, 함선을 동원해야 저지가 가능한 2.

 

그리고 인류의 기존 무기체계로는 도저히 상대 불가능한 3종까지.

 

이터니움을 가공하여 침식체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어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 자체로 하나의 고 에너지원이나 다름없는 이터니움의 가공 공정은 조그마한 실수가 곧 큰 사고로 이어졌다.

 

갖은 실패를 거듭해가며 겨우 거둔 성과는 동력 효율도 낮은 차원 함선용 엔진과 저심도 침식파 방호 기능이 전부인 이터니움 실드 둘 뿐.

 

인류는 줄곧 패배를 거듭했다.

 

간혹 침식파에 노출된 사람 중 카운터 워치라는 출처 불명의 물건을 손에 넣어 CRF 능력자로 각성하는 사례도 있었으나,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출력이 낮은 능력자는 2종을 격파하는 게 한계였고, 고등급 능력자의 경우 자신의 출력을 온전히 담아낼 장비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카운터 수십이 모여도 3종 침식체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3종을 앞세운 침식체의 침략 앞에 많은 강대국이 무너졌다.

 

대 균열 발생 이전부터 체계적인 카운터 양성 계획을 수립해 군대를 육성한 미국만이 간신히 국가의 기틀을 유지했지만, 그들 역시 영토 대부분을 잃은 상황

 

대전쟁 개전 이후 2.

 

인류는 멸망의 기로(岐路) 위에 서 있었다.

 

 

 

미사일 보급은 아직이냐?!”

 

다연장 로켓포 1번부터 4번 차량까지 장전 완료! 5번부턴 포대 작동 불량입니다!”

 

쏟아부어! 포대 망가진 건 바리케이드에 박아둬!”

 

본부! 여기는 A-2 방어선! 화력 지원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침식체의 울부짖음과 인간의 비명이 자아내는 전장의 소음 사이로 지휘관들이 연이어 외쳤다.

 

무기체계에서 뒤처지고 숫자에서도 밀린다.

 

무인기를 운용하려 해도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침식체의 끊이지 않는 공세 속에 인류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시체를 쌓아가며 방어전을 펼칠 뿐.

 

군인 사이로 간혹 통일되지 않은 복장의 사람들도 보였다.

 

용병들이었다.

 

국가 체제가 무너진 이상 개인의 힘으로 생존하기란 어렵다.

 

어떻게든 뭉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군은 전력(戰力)이 필요하고, 용병은 등 비빌 터전이 필요하다.

 

공통의 이해관계 아래, 두 집단은 손을 잡았다.

 

생존이라는 당면한 문제 앞에 편견과 선입견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살아남고자 했기에.

 

살아남아야 했기에.

 

 

 

기다란 바리케이드로 이루어진 방어선에서 소총과 기관포대가 불을 뿜는다.

 

침식체가 방어선에 달라붙으려 하면 후방의 포병이 지원 포격을 하고 무인기와 차원 함선이 상공에서 폭격을 가했다.

 

습격에 맞서 인류는 부족한 전력으로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공세가 거센 곳은 일시적으로 후퇴시키고 주변의 부대와 협공해 예봉(銳鋒)을 꺾는다.

 

적이 뭉친 곳은 화력을 집중해 일시에 쓸어버리고 보병을 진격시켜 전략상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란 피해를 줄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압도적인 힘 앞에 전략과 전술은 휴짓조각처럼 구겨질 뿐이었다.

 

지휘관제소의 스피커가 불길한 경보를 토해냈다.

 

곧 모니터에 커다란 방점이 여럿 찍혔다.

 

전방에 대형 침식파 관측. 계측 결과는, 3종입니다! 3종 침식체 군집이 방어선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3종 침식체. 인류의 악몽.

 

그동안 무수히 많은 부대를 집어삼킨 악마가 턱을 한껏 벌린 채 전진했다.

 

중대장님, 후퇴해야 합니다! 우리 전력으론 3종 침식체를 막을 수 없습니다!”

 

한 소대장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

 

맞는 말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병사들은 모두 다른 전장에서 패배해 흘러들어온 패잔병들.

 

그동안 저 3종이란 이름의 괴물이 자신들의 부대를 어떻게 박살 냈는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병력으론 결코 승산이 없다는 사실 또한.

 

전방 방어선이 침식체의 발길 아래 간단히도 짓밟혔다.

 

전차와 전투기의 폭격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영화의 cg를 보는 듯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아니, 전선을 사수한다.”

 

중대장님!”

 

중대장이 굳은 얼굴로 자신의 소총을 쥐었다.

 

이곳이 최후 방어선이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우리 뒤엔 민간인이 있다. 어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여길 지켜야 한다.”

 

하지만 저걸 어떻게 막는단 말입니까?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고 도망칠 거냐! 군인이 되기로 한 이상 언제고 죽을 각오를 했어야지! 그동안 뭘 위해 국민이 그 비싼 세금을 들여서 널 먹이고 재워줬다고 생각하나.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잖아!”

 

중대장이 일갈한 뒤 앞으로 달려나갔다.

 

전선을 사수한다! 목숨을 던져서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그분이 오실 거다. 조금만 버티면 반드시!”

 

!

 

침식체의 발길이 부대를 덮쳤다.

 

곧 다시 발을 들어 올렸을 때 그곳엔 인간이었던 고기 반죽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병사들이 수수깡처럼 쓰러져간다.

 

결의도, 각오도 무자비한 폭력 앞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악!”

 

어머니.”

 

3종 침식체를 앞에 둔 이들이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제발 우릴 구해달라고.

 

인류를 버리지 말라고.

 

그리고, 뇌신(雷神)이 기도에 답했다.

 

 

 

콰릉!

 

전장 한가운데 커다란 벼락이 떨어졌다.

 

번개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3종 침식체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침식체의 등 위에 올라탄 한 사내가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려 강하게 내리쳤다.

 

다시 한번 푸른 번개가 전장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번갯불이 사라진 곳엔 까맣게 탄화된 3종의 시체만이 남아있을 뿐.

 

사내, 제이크 워커가 침식체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병사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 오셨다. 대령님이 오셨다!”

 

우린 살았어!”

 

와아! 워커 대령님이 오셨다!”

 

제이크가 환호를 뒤로 한 채 침식체와 파괴된 진지를 훑어보며 뇌까렸다.

 

많기도 하군.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귀에 꽂은 통신기로부터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대령님. 그렇게 혼자 뛰어들면 위험합니다!”

 

제이크가 태연히 대꾸했다.

 

이게 가장 피해가 적다. 잊지 말도록, 소령. 우리의 전력은 한정되어있다. 가장 강한 전투원인 내가 앞장서는 것이 옳아.”

 

곧 커다란 차원 함선이 상공을 가로지르며 아군을 향해 다가왔다.

 

델타세븐의 기함, 뉴 오하이오였다.

 

소령, 엔진 동력은?”

 

카린이 함선의 관제 모니터를 확인했다.

 

좋지 않습니다. 연전(連戰)으로 인해 엔진 출력은 20% 미만. 부포도 과열되어 절반 이상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함선을 후방에 착륙시키고 펄스 장벽으로 아군을 보호한다. 관제 시스템에 필요한 출력을 제외한 나머질 모두 쏟아붓는다면 가능해. 자네도 하선해서 참전하도록. 전력이 부족하다.”

 

, 대령님!”

 

제이크가 주먹을 그러쥐며 침식체를 향해 다가갔다.

 

이 구역이 마지막이다. 최대한 빨리 끝낸다.”

 

푸른 전광(電光)이 제이크의 등으로부터 뻗어 나왔다.

 

 

 

마왕도, 현자도 없는 세계.

 

관리국도 대적자도 존재하지 않는 차원.

 

이곳은 인세의 지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