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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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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 꼭 틀어주세요.)

 ○ (내용에 어울린다고 생각함.)

 ● (일단 나는 좋아서 올렸는데 켜지 않아도 좋을 거 같음.)

 ○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음…. 찾기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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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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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에 어울린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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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로 어울리지는 않는 것 같음…. 찾기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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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다음날 새벽.


 코핀 컴퍼니의 사장실에 앉아 검은 직사각형 네모 로봇을 손보고 있던 관리자. 문을 똑똑 두들기는 소릴 듣고 말하였다. "베로니카인가? 들어오게."


 "실례하겠습니다."


 상쾌한 얼음 큐브가 동동 떠있는 아이스 커피를 쟁반에 담아와서 고풍스러운 몸짓으로 책상에 올려두는 베로니카. 관리자는 왼손으로 집어서 마시곤 말하였다. "역시, 자네가 타는 커피는 그 나름의 맛이 있어."


 "주인님에게 과분한 칭찬을 받을 수 있어 무엇보다도 기쁠 뿐이랍니다."

 "……."


 둘은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베로니카는 관리자의 작업을 방해하지 않고 다소곳하게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지켜보았고, 관리자는 장비의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는 파워를 가동시켰다.


 기긱, 움직이며 다시 작동하는 머신갑.


 "Checking Hardware. Software Modules OK. Biocortex Analysed. Checksum Clear…"


 "Inference Engines OK. Final Checks. PURGE ALL BUFFERS."


 관리자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흐음… 됬군." 그리고 곧 동시에, 검은 로봇의 표면에 하얀 불빛이 번쩍이며 집게 팔을 칭칭 거리었다. "I LIVE AGAIN!"


 베로니카가 중얼거렸다. "주인님, 이것은…?"


 "코핀 컴퍼니의 인공지능 가이드이자 자문가로 둘 생각이야. 내가 없을 당시 신생관리국을 창설했던 마더 컴퓨터에 연결했지. 남아 있는 머신갑의 기체들도 전부 하이브 마인드 구조로 접속시킬 생각이네."


 "그렇다면 주인님께서 사념으로 조종하는 기계는 아닌지요?"


 관리자는 머리를 저었다. "그런 형태로서 조종하는 것은 일단 올림피안 하나일세." 그리고 커피를 다 마시곤 말했다. "베로니카 양, 미안한데 하나만 더 타와줄 순 없겠나?"


 "괜찮습니다. 단지…." 궁금한듯 말을 흐리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관리자.


 "편히 말하게나."


 "…주피터의 양자확정을 사용하면 제가 타는 커피 정도는 물질 그대로 복사할 수 있지는 않으신지요? 이제 주인님께는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됬습니다."


 관리자가 힐긋 올림피안을 보곤 말하였다. "나는 시종이 필요한 것이 아니야. 단지 자네가 필요한 거지." 아직도 얼티메이트 제네레이터 파츠가 작동하며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는 검은 워머신. 베로니카가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관리자의 생각은 달랐다. "단순히 커피만 마시고 싶다면 나 혼자서도 했을 테지. 하지만 메이드로서 자네는 상대의 기분을 염려하고 때마다 살짝 다르게 내오고 있어."


 "아…."

 "눈치채지 못한다고 생각했나? 잘 맞추더군. 뭔가 깊게 생각할 때는 설탕을 적게 타오고, 뭔가 나른할 때엔 커피 보다는 코코아 같은 느낌으로 타고,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때엔 비타민도 함께 탔었더군."


 자신이 염려하던 사실을 이해했던 것인가, 베로니카는 눈을 감고선 미소를 지었다. 관리자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떤가? 그것은 자네와 나만의 대화라고 할 수 있을 테지. 그래… 이런 것도 운치가 있어서 나쁘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천천히 해도 되네."


 약 한 시간 뒤에, 레지나가 문을 똑똑 두들기곤 들어왔다. 옆에서 둥둥 떠있는 에델은 힐끔힐끔 주위를 보다가 평상시엔 없던 검은 직사각형 로봇을 보고는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저건 대체….'


 그리고 레지나를 보면서 불쑥 갑자기 머리를 들어올리며 집게를 챙챙 거리는 머신갑.


 "…응?"

 "웨에에에엘 커어어어엄! 코핀 컴퍼니에 오신 것을 환영하네! 에, 또… 뭐, 뭣이라? 여왕님?"


 "……?"

 "이런 누추하고 좁디 좁은 삼류 태스크포스에 여왕님께서 행차하시다니 정말 영광이군! 하지만 이 코핀의 책임자로서 귀빈 대접을 소홀히 하는 건! 절대! 용납하지…"


 관리자가 조용히 말했다. "마더 컴퓨터, 아니… 머신 갑. 레지나는 이름이다." 그러자 머신 갑이 뒤돌아 보며 말했다. "WHAT?! isn't she like, Queen(Regina) Maccready?"


 "…아무튼 가만히 있게나. 그녀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관리자가 원한다면! 사일런트 모드 발동! 오오오오옷!"


 …그리고 머신 갑은 마지막까지 다이나믹한 소릴 계속 내다가, 집게 팔로 입에 지퍼를 잠그듯 지익 효과음을 내곤 팔짱을 끼며 조용히 침묵했다.


 "…뭔가 정신 사나운 것이 늘어났군요."


 한숨을 쉬며 말하는 레지나와, 관리자의 뒤에 서서 쓴웃음을 짓는 베로니카. 관리자는 일어나 레지나를 보며 소파에 앉았다. 베로니카가 또각또각 다가와서 물어보았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목을 축일 음료가 필요하십니까?"


 레지나는 힐끔 에델을 보고 물었다. "그렇군요…. 에델, 마시고 싶은 거 있어?"


 감각을 공유하는 그녀들, 레지나는 가슴에 안고 있던 네크로노미콘을 상에 두며 포근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에델은 버릇대로 모노클을 닦는 척하며 말했다. "크림 요거트에 섞은 푸르츠 칵테일이 좋겠네요."


 에델은 영혼의 파장을 바꿔 베로니카에게도 들리게 말했고, 그걸 들은 그녀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베로니카 씨."

 "그럼, 부탁해요."


 둘의 말을 들으면서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베로니카.


 관리자가 말했다. "어제 전화로도 얘기했었지만…. 이탈리아에 카운터 대학을 설립한다고 했지. 자네에겐 마법학 교수직을 주고 싶네."


 "혹시, 코핀에서 나가 그곳으로 가란 얘긴가요?"


 "…어떤 무거운 부담도 없이 스스로의 일에 몰두하기 좋은 자리를 안배해 줬네만, 자네가 원하면 그래도 되겠지. 그것은 지위에 불과해."


 레지나는 명확하게 듣고 싶다는 듯이, 확인차 물었다. "코핀에 계속 있어도 된다는 말씀으로 들어도 괜찮겠나요?"


 "음…."


 레지나의 말을 듣고 관리자가 접은 검지를 턱에 대고서는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아. 내킨다면, 이제까지처럼 여러가지 도와주게." 그러자 레지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왜 그러시죠?"


 관리자는 모두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말했다. "아키는 잠적했고, 한솔은 떠났었지. 애초부터 우리 회사의 소속은 아닌 프리드웬 및 나나하라 같은 인원들도 고향으로 돌아갔고. 평화의 시대에, 자네는 학업과 연구를 선택할 줄 알았어. 또한 그게 자네에게 어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어울리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요. 다만…" 레지나는 이어서 말했다. "저에게는 이것만큼 최선의 선택도 없겠지요."


 옆에서 떠있던 에델이 물었다. "그렇지만 대체 무슨 바람일까 궁금해지네요. 어째서 카운터 대학과 마법학교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건가요, 관리자?"


 "미지의 힘은 권력에 의해 통제가 되는 편이 좋다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으음… 틀린 말도 아니네요."


 신성 로자리아 제국하고 교류하게 되면, 필연 저쪽에서 마법을 배워오는 자도 많아질 것이다. 또한 그걸 악용하려 하는 자도… 그렇다면 중세 시대처럼 마법을 배척하고 금지하는 것보다, 사회가 그것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돌발적인 상황에 스스로 대처하게 만드는 법이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델이 물었다. "마법 심문관들도 둘 생각인가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기다려지네요… 당신이 만들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요."


 묘한 호감이 느껴지는 대사다.


 아마 레지나와 비슷하게, 특출난 지성을 가지는 관리자는 에델에게 있어 애증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관리자는 평범한 톤으로 대답했다. "내가 만드는 게 아니야. 인간의 힘으로 도달하는 세상이지." 레지나가 말했다. "그래요, 우리 모두가 만드는 세상…. 그렇죠?"


 "그래. 그렇겠지."


 잠시 그렇게 조용히 있으면, 베로니카가 문을 두들기고는 사장실에 들어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느새 힐데가 출근하여 그녀 또한 사장실에 와선 옆에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고, 그러다가 지아까지 와서 마법학교 및 관리국령 그로니아 같은 문제들에 대해 의논하게 됬다.


 "그러고 보니 깰 때가 됬는데…." 관리자의 말에 지아가 물었다. "가은 고모님을 말씀하는 거죠?"


 "그렇다네. 그리고 오늘 모두와 함께 나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지. 대적자에겐 보여줘야만 할 게 있으니까…." 관리자는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베로니카 양, 레지나 양, 힐데, 지아 회장. 아침은 밖에서 먹는 게 좋지 않겠나?"


 베로니카와 레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가 물었다. "음? 아침 여기서 먹고 나가도 상관없지 않나?"


 "이런 날에 카레를 아침으로 먹는 것도 그렇잖아."


 "여태 무슨 초월자처럼 굴더니 편식은…."


 "아니, 그런 거 아냐. 나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너무 질려하더라."


 생각해 보면 이 녀석, 내가 오기 전까진 이 회사를 세워놓고 여태까지 여기서 일했었지. 밥도 먹었을 테고… 근데도 저 카레만 나오는 괴상한 메뉴가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인가.


 지아가 옆에서 말했다. "저기, 힐데 소대장님. 그로니아에도 알파트릭스 엔터테인먼트 빌딩이 있어요."


 "음? 여기 있는 거랑 똑같은 그거?"


 식당하고 영화관과 백화점이 합쳐진 종합건물. 여기서 가까우니까 힐데도 휴일에 자주 이용해왔다.


 "네!"

 "호오…. 내전으로 완전히 박살난 그 그로니아에 말이야…. 좋은 투자인진 모르지만, 어쨌건 기대는 되는군."


 지아는 말없이 웃었다. 이제 돈은 단지 세상의 발전을 앞당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걸 그녀도 알기에. 어쨌건,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세실리아도 가은의 옆에 있겠지. 내가 가서 데려오겠네. 다들, 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게."


 "어제 봤던 로물루스급 전함 맞지?"

 "그래."


 그리고 십 분 뒤에야, 관리자는 코핀 비행장에 세실리아하고 함께 가은을 데리고 왔다. 레지나의 옆에서 추운지 어깨를 떨면서 들어가는 세실리아, 베로니카가 타주겠다는 커피를 한사코 거절하곤 자기가 탄 커피를 마시면서 주위를 보는 힐데, 집게 손을 칭칭 거리면서 신나게 떠드는 머신갑과 그걸 신기하게 보는 가은, 또한 아까부터 마법에 관해서 여러가지 말하고 있는 지아와 에델과 레지나.


 '오늘의 계획은… 그래. 아침에는 대적자가 어린 시절에 있던 고향까지 가서 여러가지 보고 난 뒤, 점심에는 각자 가고 싶어하는 곳에 가면 좋을 테지. 저녁은 미술관에 가면 좋겠어… 음?'


 관리자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도 오를 때에, 갑자기 익숙한 인기척을 느꼈다.


 앞을 보면, 선실에 붕 떠있는 의자. 그리고 거기 앉은 소녀가….


 "뭐냐, 로자리아?"


 뭔가 살짝 짜증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먹고 있던 감자칩을 툭 던지면서 말했다. "뭐긴 뭐야." 그리고 목소리를 깔았다. "너에게는 실망했다, 관리자."


 "……?"


 "너 말야…."


 거기 있었던 모두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 로자리아를 보았다. 짧게 한숨을 쉬곤, 로자리아가 말했다. "하아, 진히로인에 대한 취급이 정말 야박하구나. 난 널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도와줬더니, 넌 여자들이랑 놀러가는데 날 부르지도 않아?"


 "무슨 소릴… 지금 그로니아가 얼마나 재건되었나 그걸 확인하러 가는 거다."


 "……."


 관리자는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질 못했다. 그렇기에, 그게 진심인 걸 알고는 로자리아는 의자에서 툭 내려오며 말했다. "정말, 둔감남 같으니. 아무래도 좋아. 그럼 나도 따라간다. 괜찮겠지?"


 "그래. 네가 좋아할만한 과자도 잔뜩 있으니 기대해도 좋아."


 "정말?! 이… 아니라. 야, 넌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거야?"


 "……?"


 알다가도 모를 로자리아. 관리자는 목을 뚜둑이며 풀곤 승선했다. 선체의 문이 닫히곤, 함선은 한국으로부터 잔잔히 그로니아에 구름을 가르면서 출항했다.


 관리국령 그로니아.


 그로니아의 역사는 루릭 왕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부족과 부족이 서로 싸우던 혼돈의 시대에서 그들은 이 영원한 싸움을 멈출 법도를 구했고, 세 형제를 불러와 각기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다.


 강인공지능의 무한에 달하는 행정력과, 극한의 숫자에 달할 정도의 양산형 로봇들을 통해 치안유지와 작업활동을 하는 관리국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건 지역군벌 밖에 없었으며, 투표 후에 그로니아는 관리국에 합병되었다. 과거 아그립파가 공명정대한 정책으로서 유대인에게 찬사를 받았듯 - 지금 관리국도 일단 세금을 감면해, 복지와 상업에 집중하는 운영을 마더 컴퓨터에게 맡기며 높은 지지를 받았다.


 이미 완성된 제국은 단지 그 시스템만 확장하면 된다.


 그것이 관리자가 레아를 되돌렸을 때부터 일어난 일이다: 현재 그로니아는 다른 유럽의 국가와 별 차이가 없게 보였다.


 아침, 원래는 알파트릭스 빌딩에 가서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로자리아가 그로니아의 식문화를 보고 싶다면서 보챘고, 모두에게 괜찮단 허락을 받으면서 거리에 보이는 가장 큰 식당을 골라 먹고 나왔다.


 "후아… 카비아도 맛있구나."


 의자에서 내려 총총 걷는 로자리아. 상쾌한 찬 바람이 부는 푸르른 하늘에, 앞서 걷는 그녀를 모두가 따라가는 그림이다.


 레지나가 가까이 가서 물었다. "로자리아, 캐비어는 거기도 있지 않나요?"


 "음? 내 땅엔 비슷한 게 없는데. 어떤 이유인지 양식이 어려워서."

 "있을 건 다 있다 생각했는데… 약간 다른가 보군요."


 그러다 갑자기 궁금해진 레지나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여기에 온다는 건 어떻게 알았던 건가요?"


 "음? 심심해서 에델한테 말을 거니 오늘 그런 약속 잡았다고 들어서 말이야. 네가 자고 있을 때 말한 거다."

 "그랬군요."


 뒤에선 관리자의 옆에서 나란히 걷던 힐데가 말했다. "그거 맛있더라. 이름이 뭐였지? 버섯과 고기에 하얀 크림을 섞어서 주던 거." 마치 미식가 같은 표정을 지으며 걷는 그녀.


 "스트로가노프였나?"

 "흠… 외우기 힘든 이름 아닌가."

 "네 입맛에 꼭 맞게 보이더군. 크림의 맛 자체도 그렇고, 너무 느끼하지 않게 비벼둔 것도 그렇고."


 힐데가 물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던 음식은 뭐였나?" 왠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 관리자는 잠시 생각하다 대충 말했다. "굳이 꼽자면 네가 말한 거."


 "정말?"

 "아마도…."


 "그럼, 다음에 같이 먹으러 오면 안 될까?"


 살짝 붉어진 얼굴. 그걸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힐긋 돌렸다. 하지만 관리자는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 그냥 평범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언제든지."


 "…그럼, 다음주 주말에."

 "시간 비워두지."

 "정말이다…? 같이 안 가면 화낼 거야."


 관리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뭐가 기쁜지, 힐데는 꼭 붙어서 팔짱을 꼈다.


 "야, 풀어. 걷기 불편해."

 "싫어."


 "……." 잠시 힐데를 쳐다보던 관리자는 한숨을 쉬곤 중얼거렸다. "나참…." 하지만 팔을 살짝 벌리고 보폭을 조절하며 그녀에게 맞춰 주는 모습을 보고선, 힐데는 자신도 모르게 소녀처럼 기쁜 웃음을 지었다.


 멀찍이 걷던 지아는, 세실리아의 입에 무언가 묻은 걸 보곤 손수건을 꺼내서 닦아줬다. 방금 전까지 자기 입가에 음식이 묻었단 걸 모르고 그렇게 신나게 걸은 게 왠지 부끄런 것인지, 세실리아는 자기도 물티슈를 꺼내서 계속 부비적 거리며 닦았다.


 "하아… 나도 참, 너무 급하게 먹어 몰랐구나."

 "그렇게 맛있었나요?"


 "응! 그 만두 같이 생겼던 것도 꽤나 괜찮았어. 지아 너는 어땠니?"

 "아… 펠미니요? 저야, 만드신 분들이 열심히 만드셨으니 먹을만 했다고 생각했어요."


 딱히 맛없단 것을 돌려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순수히 말 그대로의 뜻일까?


 그것 때문에 세실리아는 고민하다가 물었다. "저기… 지아야. 너 요리도 잘하지 않니?"


 "음… 스스로 잘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할 순 있어요."

 "그럼 나도 나중에 저런 거 만들어 주면 안 되겠니? 아니면 저런 요리를 할 수 있는 요리사라도 고용한다면…."


 …세실리아는 어지간히 맘에 들은 모양이다.


 "그런 일로 누군가를 왔다 갔다 부르면 안 되요. 특히 고모님은 몇 번 먹다가 바로 질리는 식성이시잖아요?"


 "웅… 안 되는 것이냐?"


 하지만 지아는 엄마처럼 웃으며 말했다. "대신, 집에 가면 제가 간식으로 만들어드릴게요."


 "역시 우리 지아!" 세실리아가 안기듯 지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마치 강아지처럼 솔직하게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면서,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에?"

 "아…."


 지아는 손을 떼면서 말했다. "저기, 모자가 떨어질 것 같길래…."


 "응… 고맙구나. 지아는 너무 상냥해."


 후후, 그렇게 웃으며. 지아는 앞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들의 앞에 관리국 주도로 신설된 교육 지구구역. 전후 의지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살피는 고아원과 학교와 도서관, 배식소나 아파트먼트 컴플렉스 및 상가가 나란히 서있다. 그로니아에선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광경이다.


 관리자는 머릴 손으로 털고선 말했다. "그럼, 점심까진 가은 양에게 이곳에 대해 말해주고 싶네. 하지만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어. 지루할테고…. 다들 원하는 걸 보다가 점심 때 여기로 모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세실리아도 지아도 레지나도 힐데도 로자리아도 떠났다. 머신 갑과 관리자와 가은. 옆에 있는 베로니카에게 관리자가 말하였다.


 "자네도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아. 굳이 내 옆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네."

 "메이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언제나 주인의 곁입니다."


 베로니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관리자는 가은에게 물어봤다. "낯설은가?"


 "…잘은 모르겠어요."

 "어쩌면 모르는 게 더 나을지 모르지."


 무언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 건 왜일까.


 옆에서 활공하는 머신갑이 말했다. "흐으으으음… 그러고 보니 말이야, 무언가 보고할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말야…."


 "지금 이곳에 관련된 일인가?"


 "맞아, 그렇다네… 아아! 맞아! 그랬었지! 그게, 사실은 말인가. 아무리 발전된 고도의 기술로 이루어진 최첨단의 오버 테크놀로지 엔타이티인 이 몸이라 해도 필멸자들의 문화와 양식은 이해하지를 못해."


 "……?"


 "요는 참고할 자료가 적었단 걸세. 하지만 오늘 있었던 대화 로그와 직접 음식이란 것을 봤더니 왠지 알 거 같더군, 그게 말야. 그… 나한테 이곳의 건설과 운영에 관한 것을 전부 위임하지 않았던가?"


 "너, 설마…."


 관리자는 묘하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렇게 보지 말게나! 아니, 내가 굳이 단백질 덩어리인 너희들 인간이 뭘 먹고 사는지 전혀 관심도 없었고! 굳이 별도의 참고자료도 주지도 않고… 그냥 코핀에서 보고 배웠지."


 아….


 관리자가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그럼, 이 사람들 여태 카레만 먹였다는 건가."


 "뭐, 메뉴는 다양하긴 했었네. 카레 밥, 카레 빵, 카레 야채 볶음, 카레 치킨…."


 "우리가 무슨 인도 관리국도 아니고 이럴 필요는 없었잖나."


 인도 관리국이란 말에 베로니카가 피식 웃었다. 아직도 뭔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 가은은 단지 멍하니 서서 계속 말하는 둘을 보았다.


 "그, 그렇다면 별도의 지시를 했었던가, 아니면 식단에 관련된 인원을 따로 배정해 주지 그랬나!"


 "……." 관리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그것도 내 책임은 맞지. 어쨌든… 내일부터 메뉴를 좀 바꾸게."


 "당장 그렇게 하지! 근데 말야… 너무 실망할 것도 없다네. 저들에겐 그냥 뭐든 감지덕지니까."


 "……."


 그거, 그렇게 말하면 좋은 건가?


 아무튼, 그들은 고아원부터 갔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치원 같은 느낌의 곳이었다. 돌봐줄 사람이 따로 필요한 유아들을 위해서 관리국에서 보육사들을 배속한 것이다. 기계도 이런 역할을 할 순 있지만, 어린 아이들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는 어머니와 같은 젊은 여성들이 필요하단 말을 지아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내렸던 결정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일까, 아이들이 공을 차고 던지면서 노는 모습을 보며 걸어갔던 관리자는 그곳에서 지아를 볼 수 있었다.


 "관리자님?"


 쭉 훑어보니 거의 한국계 여성들. 정식적으로 현지인들을 고용하기 이전에 부족한 자리를 보충하기 위해서 보내진 알파트릭스 복지재단의 인력이겠지.


 "역시 자네는 바로 여기로 왔군."

 "일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니까요."


 둘은 흙이 깔린 운동장과 뛰어 노는 아이들을 봤다.


 흩날리는 머리칼을 다듬으며 지아가 말했다. "가은 고모님에게 여길 보여주고 싶으셨죠?"


 "…그렇다네."


 그러자 가은은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보았다. "나한테…?"


 "……."


 지아는 아무런 말도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다. 그러다 그녀가 말했다. "이곳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모두 행복해 보여."

 "그래서 우리가 고모님한테 보여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지아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모르겠어."

 "사랑이랍니다."

 "어째서?"


 "그야, 사랑이 없다면 지금쯤 아무도 남지 않았겠지요.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고,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서, 가족을 만들고, 아이를 만들고…. 너무나도 자연스런 것일지도 모르네요."


 "……." 관리자는 딱히 긍정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을 막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니 이곳의 지아는… 그래. 실험체가 아닌 평범하게 태어났던 천재였지.'


 천연적인 면모가 아니라 모성적인 태도가 더 강한 건 아마도 부모에게 기대와 사랑을 받았기에 그런 것일지도.


 가은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그럴까요."


 지아는 살짝 앉으며, 가은과 눈높이를 맞추며 머릴 쓰다듬었다. "언젠가 알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무엇인지 아세요?"


 "침식체?"


 "후후, 이제 그런 건 전혀 무섭지 않답니다. 왜냐면 관리자님과 저희가 모두를 지켜줄 테니까요. 그것은…." 지아는 뭔가 슬픈 눈으로 가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에게 어떤 사랑도 베풀지 않는 세상이랍니다."


 "어째서?"

 "결국은 미치게 되니까요."


 "……."


 관리자는 엿볼 수 있었다. 지아의 눈동자 안에선 여러 사람들이 지나갔다. 세라펠도 그 중 하나였다.


 "가은 고모님."

 "응?"


 "저는 고모님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힘든 일이 있다면 모두에게 의지해 주세요."


 가은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어나서 혼자 걸어가며 보육사 중 하나에게 말하고는 사라지는 지아. 잠시 운동장을 보던 가은은 베로니카에게 물었다.


 "베로니카 씨?"

 "네?"


 "…사랑이란, 남녀간의 애정이 아닌가요?"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런 의미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공감하는 것도 말합니다."


 "어렵군요."


 "언젠가 아실지 몰라요. 하지만 지금은, 지아 회장님이 가은 님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한단 걸로 이해해 주세요."


 "……."


 가은이 중얼거렸다. "내가, 좋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일까. 스스로도 모르겠어."


 옆에 있던 머신갑이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음! 아마 그렇다고 생각하네!"


 "…응?"


 "나도 반했었네! 멋져! 관리국의 수뇌부에 들어와서 온갖 로봇들을 총탄으로 박살내고 나도 거의 망가질 뻔했던 경험이… 읍! 읍!" 주절주절 그녀의 악행을 떠들면서 폭주할 것 같았던 위험에 관리자는 황급히 손으로 막아냈다.


 "저기…?"


 "아, 아무것도 아닐세. 무시하고 다음 장소로 가지. 그러니까… 그래, 학교. 학교까지 가는 거다. 당장."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관리자! 진실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고, 우리는 정의니 항상 진실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지금은 때가 아니야. 좀 조용히 하게나."


 서로 몸싸움을 하는 관리자와 머신갑을 보던 가은은, 쓴웃음을 지으며 안내하는 베로니카를 뒤따라 학교에 갔다.


 살짝 멀리 떨어진 곳에.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 정도 아이들이 모인 곳에 무언가 폭죽처럼 보이는 에너지가 펑 터지는 걸 보았는데, 가까이 가면 그곳엔 세실리아가 지아에게서 배웠던 모든 마법을 사용하면서 아이들에게 자랑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카운터 능력이 아니라, 좀 더 다른 것이란다! 봐라… 빛을 쏘거나, 물건을 들거나. 멋지지 않니?"


 …솔직히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에게는 마법이건 카운터 워치이건 전부 신기하게 보이긴 했다.


 "헤, 헤에… 누나 대단하긴 한데…."

 "그렇다면 침식체들 많이 죽였다는 거죠?"

 "굉장해! 잠깐… 그렇다면 카운터 능력은 뭔데요?"


 마법사와 카운터의 차이라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의 갯수에 차이가 있단 것일까. 신체강화 외엔 특수기술 하나 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이 카운터고, 여러가지 주문들을 습득하면 좀 더 다양하고 많은 기술들을 사용하는 것이 마법사와 주술사다.


 세실리아는 도야가오를 짓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지금부터 보여줄께… 잘 봐!" 그리고는, 휙 사라졌다.


 "뭐, 뭐야?!"

 "사라졌어!"

 "귀, 귀신 아냐?!"


 놀라하는 아이들이 저편에 있는 채로 그녀는 곧 자신들의 앞에 나타났다. 킥킥 웃으면서 세실리아는 관리자의 앞에 나타나곤 말했다. "아이들은 정말 귀엽구나, 관리자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자네도 아이 같은데 말야.'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냥 그런 힘이 생겼다고 저렇게 과시하는 것이 뭔가 장난감을 받은 아이 같단 인상이다.


 "어? 가은아, 왜 그렇게 쳐다봐?"

 "방금 네 능력… 내 것과 꼭 닮았어."


 가은의 금반지는 본인을 이 차원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이었고, 세실리아의 카운터 워치는 도피적으로 이 차원에서 도망치는 능력이다. 둘을 비교하면 근원적인 성질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매우 비슷하긴 했다.


 하지만 세실리아는 묘한 대답을 했다. "…응. 우리가 매우 닮아서, 똑같은 타입의 카운터 워치를 받은 걸지도."


 "…같은 타입?"


 "너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네가 죽을 뻔할 때에, 나는 이걸로 너를 구했단다."


 "……."


 세실리아가 뭔가 염원하는 눈빛을 비추었다. "솔직히 고백하고 싶구나. 여태까지 난 자기가 딱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남을 질투하곤 했었단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 두번째 기회는 있었고,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단 걸 깨달았단다."


 "세실리아…?"


 "너도 그렇게 해주렴. 힘을 가진 사람이, 더욱 남들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멋지다고 생각한단다."


 그렇게 말하곤, 세실리아는 휙 사라지면서 다시 아이들의 앞에 나타나며 여러가지 마법들을 보여줬다.


 "……."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 가은의 뒤로 관리자와 베로니카가 말하였다.


 "많이 변하였군, 세실리아."

 "후후, 처음 세실리아 님을 볼 때와는 달리 숙녀다운 기품이 느껴지는 것도 우연은 아니겠지요."

 "그래. 우리와 만난 필연이 그녀를 지금의 자신으로서 있게 했어."


 그들이 다음에 갔던 곳은 공공도서관이다. 이 시간에 딱히 사람은 없었기에, 레지나 혼자 복도를 거닐면서 여러가지 책장을 살펴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녀의 옆에 둥둥 떠있는 에델하고 여러가지 책을 짚어가며 토론하고 있는 그녀. 전혀 심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관리자를 멀리서 보자마자 반가운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했다.


 "관리자님."


 살짝 떨어진 저쪽의 책상엔 많은 두꺼운 책들을 몇 권 쌓았다. 관심이 생긴 관리자는 뭘 골랐었던 건지 보았다.


 "이건… 전부 역사로군. 중세 전기에 세운 그로니아라는 국가의 연대기."

 "맞아요. 성전의 시대에 이들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리고 몽골의 대두에 이들은 어떤 대응을 했는지, 이후 산업혁명과 또 정보혁명의 때에 무엇을 했나, 또 어떤 지도자가 있나 궁금해서요."


 관리자는 대충 훑어보다 본심을 말했다. "…이런 걸 보면, 자네와 난 진짜로 취향이 잘 맞는 거 같아."


 "……."


 관리자는 레지나의 표정을 보질 못했다. 책을 훑어보며 집중하는 그의 모습에, 레지나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정말 사실이예요."


 자신도 책을 집어서 읽어 보던 가은이 질문했다. "…이런 게 정말 중요한 거야?"


 "네?"


 "여기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딱히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특별한 업적을 성취하지도 못했어. 그냥 플레이스 홀더에 지나지 않았다고 느껴." 가은은 책을 덮으며 레지나와 눈을 마주쳤다.


 가은이 말했다. "거기다가 대부분은 악인이야. 굳이 이런 바보들의 행적을 알 필요가 있나? 세 원숭이 같은 거야. 악은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말 것. 이런 걸 배울 필요가 있을까?" 날카로운 비판적인 관점이 드러나는 말이다.


 "당신에겐 필요가 없습니다."

 "……?"


 가은이 물었다. "그 말은 왜 한 거야?"


 "그들이 잘못됬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것이랍니다." 레지나가 이어서 말했다. "인간에게 있어 필요한 지식은 결국 과학하고 역사예요. 세계를 이해하고 어떻게 바꿀 것인지, 그리고 이제까지 인류가 어떤 길을 걸었던 것인지. 만일 진정한 인간이 진정한 지식을 이해하는 존재라면, 스스로의 지혜로서 인류 전체나 인간 개인이 가야만 할 길을 스스로 알 수 있겠죠."


 에델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선 레지나를 조용히 내려봤다.


 가은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역사에 필요하지 않았단 얘기도…."


 "네, 저도 동의합니다."


 레지나가 말했다. "무로부터 문명을 다시 세워야 한다면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은 전부 핵심적인 기여를 했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던 거랍니다. 그들의 이름과 성취를 기억하는 것으로 인간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아무리 떨어져도 다시금 올라오면 되니까요. 그리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 건지도 스스로 알 수 있는 거죠. 자신이 이 세계에 있어 인간의 몸으로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지."


 가은이 물었다. "…음? 하지만 그러면 내 논지에 대한 반박이 되질 않는데? 결국, 왜 이걸 읽던 거야?"


 레지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저는 이미 필요한 것은 전부 아니까요. 나머지는 단지 이런 사람들을 논평하고 싶었을 뿐이예요."


 "아…." 가은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응. 그랬구나."


 잠시 둘의 대화를 듣던 관리자는 베로니카에게 말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독서를 좋아하는가?"


 "싫어하진 않습니다. 단지 최근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어서…."


 "여기서 하나 골라도 좋겠지."


 그렇게 말하곤 이십 분 정도 둘러보던 관리자는 시계를 보곤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레지나와 에델이 대화했다.


 "…에델, 지금의 가은을 어떻게 생각해?"


 "그러네요… 이전의 타락한 대적자였던 시절의 광기는 전혀 보이질 않아요. 본질적인 지적수준만은 남아 있어 차분하고 논리적인 성격으로 보이네요."


 "우리가 좀 더 조심스럽게 지켜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파트먼트 컴플렉스엔 조용히 캔커피를 마시며 주위를 산책하는 힐데가 보였다.


 "음? 관리자 아니야?"


 담배를 피지 않는 힐데는 지금 봐도 참 적응이 안 되었다. 어쨌건 저게 낫기는 하지만….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었나?"

 "딱히 뭘 하던 건 아냐. 그냥 볼 것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할 필요도 없어서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지."


 힐데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완전히 평화가 와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도 신선하게 느껴진다. 이곳에 있는 모두도 같은 느낌이겠지."


 "……."


 "그러고 보니 너 말야, 그때 호라이즌이 말한 걸 염두에 두고 이런 걸 지은 건가?"

 "뭐? 아, 그거…."


 언젠가는 신이 도와주지 못하는 대시 같은 아이나 버려졌던 고아들을 위해, 크고 따뜻한 집을 준비해 주고, 병에 걸리면 바로 치료해 주고… 그런 발언을 그녀가 했다.


 "다른 누가 말하건, 말하지 않았건, 늦던 빠르던 인류 자체가 이렇게 됬겠지. 반대로 말해서, 그녀의 계산에 나 자신이 팩터로 들어가 있을 것 같나?"


 "…당연한 거 아니냐? 이 세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너 아니냐. 앞으로도 그럴 테고."


 "아니. 이곳의 인류는 내가 없어도 괜찮을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거고."


 관리자의 말에 고갤 기울이던 힐데는 도끼눈을 뜨면서 말했다. "너 말야… 그렇게 말하는 거 보면, 어느날 갑자기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


 "뭐? 아냐. 내가 권력을 전부 내려놓아도 괜찮아야만 한단 의미다."


 힐데는 노려보며 말했다. "진짜지? 너, 이번에도 여기 질렸다고 혼자서 말없이 도망친다면 진짜 지옥 끝까지 어떤 이면세계라도 쫓아갈 거니까."


 "그럴리가 없잖은가."

 "……."


 힐데는 한숨을 후 쉬고는 말했다. "찾으러 가기 귀찮다. 그러니까 내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마."


 "……."


 관리자는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하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어쨌건 이해하질 못하여 그냥 고개를 털었다.


 힐데는 가은을 보고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가은 너는 괜찮나?"


 "…뭐가?"


 타락한 대적자는 니힐리즘의 화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또한 독심으로 읽어 사람들의 내면적인 악을 읽어내곤 인류에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었기에 대적자의 신분을 뒤틀어 가면서 그렇게 변했다는 것도 나름 짐작했던 힐데였다. 그렇듯이 그녀는 여러모로 감이 좋은 여자였다.


 '일단 구하긴 했다만, 언제 그렇게 다시 폭주할지 모르니까.'


 힐데가 보는 가운데, 머신갑이 붕붕 팔을 휘저으며 말했다. "소대장, 그녀는 예전처럼 생각을 읽지 못하네."


 "확실한가…?"

 "내가 옆에서 계속 뇌파 측정을 하고 있는데, 예전이랑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다른 에고를 가졌어. 으음… 마치! 정신붕괴를 당한 사람이 마음의 조각을 맞춰 리셋되어진 느낌이라네!"

 "…뭔진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군."


 힐데가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꺼내 가은에게 주면서 말했다. "마셔라. 야, 관리자. 가은이랑 잠깐 저기 가서 말하고 싶은데, 괜찮겠지?"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은과 힐데는 멀리 가지 않고서 살짝 떨어진 벤치에 같이 앉았다. 옆에 서있던 베로니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공용 주거지… 전부 한국식으로 건설됬군요."


 "알파트릭스 그룹이 지었으니까 그런 것이겠지."


 생각해 보면 지아와 처음 만났던 직후, 그녀의 힘을 적잖이 많이 빌렸다.


 창문을 열고서 밖을 바라보는 몇몇 아이들과 눈이 마주친 베로니카는 손을 살짝 흔들었다.


 "심리적인 안정감은 일단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찾는 것에 있지요."


 "그래. 저 아이들도, 그리고 과부들도 드디어 걱정하며 선잠을 자지 않아도 돼."


 떨어져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가은.


 힐데가 그녀를 조용히 보다가 물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변하질 않겠지."


 "……?"


 "개개의 인간은 서로 다른 본성을 가졌다. 여전히 도둑질하는 녀석들이나 살인하는 녀석들을 볼 수 있겠지. 군중이란 혼돈과도 같아. 마치 자연처럼…."


 "자연의 본질이 악하다고 말하려는 거야?"


 힐데가 말했다. "후우… 모르겠다. 오래 살면 여러가지 인간들을 보고, 뭐가 뭔지 모르겠거든. 하지만 나도 네가 생각한… 아니, 예전에 생각한 것에 공감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어."


 "……?"


 지금의 가은은 완전히 다른 인격을 가졌고, 예전의 기억을 잃었기에 잘 이해하질 못하는 것이다. 힐데는 고개를 젓고선 말했다. "그리고 그 군중을 이끄는 건 언제나 국가였지. 스스로 법을 정하고 어긋나는 것은 전부다 쳐냈던 거다. …관리자 녀석도 그렇게 말하고 말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다." 힐데가 물었다. "저것을 보고 악하다 느끼나?"


 아파트 말하는 것인가?


 가은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곤, 힐데가 다시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호라이즌 녀석도 말하더군. 선이라는 것은 특정 역할이나 필요마다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서로 모이면서 같이 사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나는 지켜주고 싶은 거다. 침식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질 못하는 사람들을. 발키리의 의무라고 이전부터 생각했지."


 "……."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이 모두 선이란 건 아니다. 저기에 있는 모두가 완벽히 깨끗한 선은 아니야. 하지만… 설령 저들의 마음을 다시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해도,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래, 이제부턴 너도 노력해야 하듯. 왜냐면 살 가치가 있는 게 누군지 정하는 건 너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힐데는 그렇게 말하곤, 하얀색 부드러운 옆머릴 넘기면서 일어났다. "미안, 잔소리가 너무 지나쳤군. 어쨌건 난 가겠다." 그리고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갔다.


 "……."


 혼자 남은 가은은 묘하게 의미를 알 것 같기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한 그녀의 말을 곰곰히 생각하며 자기도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갔었던 곳이란, 배식소의 옆에 있는 지원소다. 그로니아에 산재해 있던 군벌이 와해되었던 직후, 실직 상태에 있던 남자들을 위해 엔리스트먼트 센터를 배치한 것이다.

 이들이 맡는 업무는 단순했다. 침식체를 사냥하고 이면세계에 퍼진 자원들을 확보하는 일을 맡았는데, 당연히 용병들이 주류였고 때로는 관리국이 아닌 타국 기업에서 일거리를 맡기기도 했다.


 감자칩을 먹으면서 돌아다니던 로자리아가 관리자와 눈이 마주쳤다.


 "관리자, 곧 있으면 점심인데 말이야…."


 주위에는 군용 장비들을 걸친 남자들이 와글와글 북적이며 시끄럽다.


 "여기서 볼 줄 몰랐다. 진짜 의외의 장소에 있었군."

 "원래는 배고파서 배식소에 가봤다. 상시 서비스를 하는 건 괜찮지만 카레만 주더라… 도대체 네 입맛은 이해하질 못하겠어."

 "……."


 사실 그건 내 입맛이… 관두자.


 로자리아가 말했다. "혹시나 카레맛 감자칩이 있다면 용서해 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니까 말야."


 "마트에서 사먹으면 될 거 아냐."

 "안 팔아."


 지루한 듯이 봉지를 휙 던지곤, 손가락에서 빔을 쏘아 태워버리는 로자리아.


 "그런 것보다 이것이 너의 정책이냐? 정말 하찮구나. 얼마나 위협적인 미지의 적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이면세계의 저편에 저런 원시적인 총만 쥐이곤 노예처럼 부리다니…."


 "대부분의 제1종 침식체는 저걸로도 일방적인 사냥이 가능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느냐? 너의 올림피안이라면 이제 원하는 건 뭐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어째서 아직도 일을 시키는 거지? 이러다가 죽는다면? 아비나 형제나 아들을 잃은 가족들은 어떻게 느낄까?"


 비록 주제는 살짝 심각한 것이지만, 로자리아의 표정은 장난을 치듯이 웃는 느낌이 강했다.


 "죽음이란 것이 뭔지 모르는가? 게다가 인류는 애초에 천국을 쫓아 방황하는 것들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서 제국을 세우는 존재들을 칭하는 것이다. 관리국은 나라는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도 영원히 인간의 질서를 뻗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겠지."


 주위의 용병들이 힐긋 쳐다봤긴 했지만, 말하는 대상이 꼬마인 로자리아라서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곧 자기들의 일에 집중했다. 로자리아는 재밌다는 듯이 쳐다봤다. "호오… 언젠가 관리자의 지위를 포기할 거라고?"


 "그래."


 자신이 뭐든지 챙겨줄 필요는 없지 않는가. 같은 시민으로서 그 이상의 의무는 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너랑 나는… 닮은 듯 해도, 너무나도 달라." 그렇게 말하며 빙글 돌고는 가은을 보는 로자리아. "그래, 가은. 네가 이들을 도운 사실을 기억하느냐?"


 "…내가?"


 "정말로 다 잊었냐? 네가 만들지 않았냐. 반침식체 탄환, 반신성체 탄환. 그딴 것들. 네가 개발하고 지금 베타트릭스가 헐값에 찍어 내는 덕분에 이 구질구질한 용병들도 침식체들과 맞서 싸울 여력이 있는 거다."


 "그런 것이 중요한가…?"


 로자리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로 말하는 재미가 없구나. 차라리 타락한 대적자 시절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어. 어떤 국가던지 그 시스템은 결국 무력으로 유지되고, 확장 또한 무력으로 집행되는 거다. 그리고 번영도 그렇지: 너희라고 계속 지구에서 영원히 앉아 있을 수도 없지 않느냐?"


 "……."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던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그로니아에, 다시금 사람들은 맨주먹으로 일어나서, 그 손으로 다시 문명을 건설하는 거다. 한 번 진리의 이상을 찾은 이들은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국가를 세우고… 계몽의 정신을 사방에 퍼트리는 거겠지. 후우… 왜 마왕인 내가 이런 얘기를 너 대적자에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어."


 사실.


 로자리아의 왕국 또한, 이런 형태로 발전한 것이긴 했다.


 관리자가 말했다. "여왕다운 관록은 있었군."


 "뭐래, 진짜. 평상시에 이런 얘기는 안 해. 지루하고 짜증난단 말야. 하지만 지금의 대적자는 정말 기준미달이로구나. 관리자, 얘 좀 가르쳐야 하지 않냐?"


 이상하게도, 그렇게 대놓고 낮잡아 보는 태도에 가은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로자리아가 말했다. "그래. 너, 시녀. 쟤 좀 옆에서 돌보고 가르치면 되지 않겠느냐?" 베로니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저… 말씀입니까?"


 "그래. 적어도 옆에서 떠드는 그 이상한 로봇 보다는 나을 테지."


 머신 갑은 눈을 번쩍이며 말하였다. "뭣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자그마치 IQ 수치 65535를 자랑하는 코핀 컴퍼니의 책임자이자 신인류들을 인도하는 멋진 신세계의 가이드인 머신-갑-로보 MKII…"


 "그래! 그래서 싫다는 거야! 좀 차분하게 굴어!"


 관리자는 생각했다. '아니… 너도 충분히 산만해.'


 하지만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은지, 잠시 생각하던 관리자가 물어봤다. "베로니카 양, 로자리아가 말한 대로 하면 어떻겠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잠시 생각해 보게나. 별로 대단한 건 아니고, 싫다면 상관은 없네."


 베로니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지루한지 로자리아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곤 말했다. "다들 기다리고 있겠다. 빨리 가자."


 걸어서 약속 장소에 가면, 레지나와 힐데가 이미 있고, 잠시 뒤에 지아하고 세실리아가 같이 걸어왔다.


 허공에 왕좌를 만들어서 앉고 있던 로자리아가 내려오면서 외쳤다. "늦어! 진짜, 뭘 하다가 이제 온 거냐!"


 "어머, 로자리아… 많이 기다렸나요?"

 "응? 근데 시간에 거의 맞춰서 오질 않았느냐?"


 3분 늦긴 했다.


 "약속 시간의 전에 나와야 예의 아니더냐. 에잇…." 투덜대던 로자리아는 모두가 모인 걸 보곤 알파트릭스 빌딩으로 향하였다.


 15층의 고층 빌딩. 백화점과 영화관과 뷔페 식당에다 없는 게 없는 문화센터.


 과연, 로자리아가 매우 기대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들어가자마자 갖가지 향료의 냄새에, 널찍이 펼쳐진 공간엔 화려한 색채와 우아한 장식의 여러가지 음식들이 예쁘게 모아져 있었다.


 "흐음… 이런 정도라면 나쁘지 않구나. 이 내가 만족할 만한 모양새다."


 그렇게 말하며 들어오는 로자리아. 종업원들은 그녀를 보고 별난 아이라 생각하면서 부드럽게 웃었지만, 사실 그녀의 진짜 정체를 생각한다면 그만한 칭찬도 없었다.


 곧 쟁반과 집게를 들며 열심히 고르며 집는 그녀.


 레지나도 에델하고 함께 뭔가 말하면서 이것 저것 고르고 있다. 뭔가 생소하게 바라보는 가은에게, 관리자가 따라 붙어 설명했다. "먹고 싶은 걸 원하는 만큼 집어도 되네."


 "…잘 이해가 되질 않네요. 먼저 주문하고 음식을 받는 게 이런 가게의 법칙이지 않나요?"


 "놀이공원의 자유이용권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게."


 "어떻게 이윤이 남는 걸까요? 만일 누군가가 모든 음식을 다 먹으면…."


 "그런 사람은 별로 없네."


 …뭐랄까.


 지금의 가은은 매우 특이했다. 기본적인 지능 수준은 높지만 아예 일반적인 관습이나 사고관은 모르기에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궁금하게 생각되어, 가은은 무슨 음식이 취향일까 계속 따라붙어 관찰했다. 이것은 무슨 요리냐, 저것은 무슨 요리냐, 그때마다 야채조림이다, 면에다가 소스를 부은 것이다, 새우하고 닭고기에 튀김 옷을 입힌 거다, 그런 것을 설명해줘야 했었지마는….


 결국 가은은 자기가 이해하질 못하는 특이한 것만 잔뜩 골랐다. 아마 시험하고 싶은 것이겠지.


 대충 구운 사슴 고기하고 야채들을 집어왔던 관리자는 주위를 보다가 지아와 세실리아를 찾고 자리에 같이 앉았다. 지아의 옆에 앉는 관리자와, 세실리아의 옆에 앉는 가은.


 "평일 점심이라 그런 건지 한산하군."


 지아가 옆에서 말했다. "후후, 조용하고 차분해서 좋은 느낌이네요."


 "그러고 보니 그때 우리가 같이 들렸던 레스토랑과 느낌이 매우 비슷해."

 "아, 그런 스타일이 좋아서 비슷하게 꾸며 달라고 요청했거든요."


 갈색의 마루에, 진한 고급스러운 붉은 커튼에, 클래식 느낌의 현악기 멜로디가 연주되는 곳이다. 낮에는 따사로운 햇빛이 실내를 비추지만 밤에는 재즈 풍의 피아노를 연주한다 했던가.


 "자네도 참 고상해."

 "낮에는 이런 곳에서 음악 감상을 하며 독서를 하고… 밤에는 좋아하는 분이랑 같이 술잔을 음미하고…. 평화의 시대가 온다면 그런 안락한 날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이제는 자네의 것이야.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고, 그리고 이미 갖게 되었지. 그럴 자격도 있어."


 과일주를 같이 부딪치곤, 관리자는 그대로 쭉 마셨다. 지아는 발갛게 물들은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요… 정말로, 행복하다고 느껴요." 누가 봐도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꿈꾸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날부터 나와 모두를 위해 헌신했던 자네에게 감사하네."

 "후후… 앞으로도 더욱 헌신하고 싶은 걸요. 좀 더 가까이서…."


 '…음?'


 관리자는 지아를 보고는 생각했다. '설마 벌써 취한 건가?'


 특이하다. 그렇게 생각했던 관리자는 지아의 접시에 담긴 요리를 봤다. 과채 샐러드에 블루베리 파스타에, 하얀 소스에 치즈와 감자를 섞은 롤. 거기다 자기처럼 도수가 낮은 과일주. 아무리 봐도 이걸로 취한 것 같진 않은데….


 관리자는 나이프로 자르고 포크로 먹다가 세실리아의 접시를 보았다.


 …그냥 햄버거에 도넛, 거기다가 케이크다.


 "…세실리아. 그렇게 먹으면 건강하지 못하네."


 "응? 뭐, 이런 날엔 먹고 싶은 거 먹어도 상관 없잖니?" 우물거리며 먹는 그녀의 뺨에 하얗게 크림이 묻었다. 지아가 닦아주면서 말했다. "하지만 고모님은 평소에도 그렇게 드시잖아요."


 "뭐 어때~"


 "아이처럼 설탕하고 빵만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네." 옆의 지아도 매우 적극적으로 거들었다. "그래요, 관리자님 말씀이 맞아요. 나중에 합성 영양제만 잔뜩 먹어서 보충할 게 아니라, 음식을 고르게 먹어야 한다구요."


 "시, 시끄럽네! 나는 카운터란 말야!"


 지아가 말했다. "하지만 고모님의 워치는 차원 이동을 하는 기능이지, 영양결핍을 고쳐 주는 것이 아니라구요?" 관리자가 말했다. "카운터라고 해도 결국 인간이라네. 소다 같은 것 좀 그만 마시게나."


 "정말, 지아도 사장도! 무슨 엄마랑 아빠야?!"


 "아…."


 잔소리 좀 그만 하라는 말에 가까웠지만, 지아는 그녀의 말을 듣고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눈길을 돌렸다.


 "……."


 그리고 베로니카가 로자리아와 함께 음식을 담아 가져왔다. 거기다가 머신 갑도 집게 팔로 여러가지 음식들이 담긴 큰 쟁반 둘을 들고 왔다.


 관리자가 말했다. "…뭐야 이게." 로자리아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맛볼 만한 것은 전부다 담았지! 어차피 이런 기회도 적을 텐데, 상관없지 않겠느냐?"


 "아니… 이러면 뷔페의 의미가 없잖아."

 "흥! 타국의 여왕이 찾아왔는데 이 정도의 대접은 해야 하지 않겠나?"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냐.


 그리고 자기 몫의 음식을 담아서 가져오는 힐데도 멍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대체 다 뭐냐, 로자리아." 로자리아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쯧쯧… 그게 뭐냐? 그 정도 밖에 먹질 않으니 키가 자라지 않는 거다, 꼬마 힐데."


 "너 임마… 그렇게 마구 먹으면 살만 찐다고. 돼지 로자."

 "난 마왕이라서 살 안 찌거든?"


 "아니, 그보다 넌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 왜 키는 나랑 비슷한데?"

 "흥… 작은 쪽이 귀엽잖아?"


 "뭐라는 거야 정말…." 힐데는 한숨을 쉬면서 관리자의 옆에 앉으려고 했었지만, 머신갑과 베로니카가 늘어놓는 쟁반들에 밀려 결국 가은의 옆에 앉으면서 짜증난단 표정을 지었다. "다 먹지도 않을 걸 굳이 챙겨와… 진짜 욕심쟁이인 것은 여전해." 로자리아는 마치 아이처럼 웃으면서 바로 관리자의 옆에 앉았다.


 "자, 잠깐! 왜 그렇게 투덜거리는 건데?"

 "밥맛 떨어지니까 말 걸지 마라, 진짜 짜증나니까."


 여자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힐데는 평상시랑 다르게 진짜 진심으로 언짢은 느낌이다.


 '뭐야… 힐데 주제에.'


 하지만 그런 건 그냥 아무래도 좋다.


 로자리아는 포크로 햄버그 스테이크를 꽂더니, 관리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기, 관리자. 먹여줘."


 "…뭐?"

 "자. 먹여줘."

 "싫어."


 "한번만, 응?"


 그리고 별 생각도 없이 포크를 집어서 입에다 넣어주는 관리자. 로자리아는 좋아하며 싱글거렸다. "헤헤…. 이런 것도 괜찮구나." 매우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걸 꿈꿔온 그녀였다.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고 공주님이 되고 싶어했던 그녀에겐 내심 이런 어리광도 마음에 들었다.


 "저거 먹고 싶어."

 "뭐야, 저거?"


 관리자의 팔에 몸을 기대고는, 손가락으로 이것 저것 가리키면서 부탁하는 로자리아. 튀김, 쿠키, 미트 볼에 떡볶이에… 그녀다운 식성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계속 날카로운 눈초리로 쳐다보던 힐데가 말했다. "야, 넌 네가 집어 먹지 뭘 하는 거야?"


 "하지만 팔이 안 닿아~" 그렇게 말하며, 로자리아는 살짝 앙탈 부리는 목소리로 팔을 살짝 뻗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힐데는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젖히곤 한숨을 쉬었다.


 "너 염동력 쓸 수 있잖아."

 "그게 뭔데?"


 소세지를 씹던 힐데가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장난 치냐?"


 "……."


 잠시 쳐다보던 로자리아. 그리고 갑자기 니야 웃음을 지으며 말하였다. "어라… 혹시 질투하는 거야, 힐데?"


 "뭐, 뭣?"

 "정답 아냐?"


 "……?" 혼자 뭐가 뭔지 모르겠단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사슴 고기를 씹는 관리자.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로자리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가, 그런가. 항상 남자 따위 필요 없다고 차갑게 말하던 힐데에게도 이제야 봄이 왔구나…."


 "무, 무슨 질투야 대체?! 혼자 이상한 말 하지 마! …읏?"


 전력으로 부정하는 힐데 옆에, 마지막으로 레지나가 옆에 앉으면서 접시를 상에다 올렸다.


 차갑다.


 본인은 의도한 게 아니라 하여도, 마치 인간 만한 얼음 덩어리가 자기 옆으로 툭 던져진 느낌이다.


 "힐데 씨는 역시 소세지를 종류마다 잔뜩 골랐네요. 독일인이라서 그런 걸까…?"

 "응… 어, 어…."


 하지만 기분 상할까 봐 옆으로 가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아니, 애초에 저쪽 자리는 베로니카와 머신갑이 앉으면서 꽉 찼었다.


 "베로니카 양, 거기에 있는 소스를 좀 줄래요?"

 "이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민초 소스 말고…."


 '…추, 추워….'


 진짜 최악이다.


 게다가 계속 응석부리는 로자리아를 보면 차라리 화장실에서 전부다 토해 버리고 그냥 나가고 싶은 느낌이다.


 식사 도중에 오후엔 무엇을 할지 묻는 관리자의 말에 여러가지 의견들이 말해졌다. 영화를 보거나, 스포츠 센터도 있으니 가볍게 테니스를 치자거나, 혹은 게임 센터에 가보자 하거나. 저녁은 미술관에 가서 그림들을 보는 걸로 끝맺자는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고 승강기를 타고 내려오면, 무슨 영화를 볼지 고민되었다.


 유럽풍 잔잔한 로맨스? 로자리아와 베로니카가 좋아했다.

 할리우드 액션? 의외로 세실리아와 베로니카가 좋아했다.

 가족 영화 애니메이션? 세실리아와 지아가 좋아했다.

 호러물 스릴러? 따분한 것을 지루해 하는 힐데와 에델이 좋아했다.

 슈퍼 히어로계? 로자리아와 힐데가 좋아했다.

 미스터리 다큐멘터리 장르? 지아와 에델이 좋아했다. 


 레지나는 딱히 별다른 의견을 표하질 않았다. 가은이야 모든 것이 새로우니 그렇다고 쳐도….


 '이거, 의견이 맞질 않는데.'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 걸 보면 어떻겠냐 물었지만, 이러면 다 같이 놀러온 의미가 없지 않냐는 말만 들었다. 의외로 자기가 보는 걸 같이 보겠단 모두의 말에 묘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관리자는 궁리하며 하나씩 쳐내었다.


 '세실리아는 공포 영화를 볼 수 없겠지. 또 베로니카 양은 슈퍼히어로 물에 아무런 지식도 없으니…. 미스테리 영화는 레지나 양도 지아 회장도 좋아할 것 같지만, 로자리아에겐 별로일 것 같기도 해.'


 '액션도 별론가…? 어차피 인생이 액션인 카운터들에게 굳이 저런 영화를 보여 줘도 말이야.'


 결국 관리자는 모두에게 로맨스와 애니메이션 둘 중 하나 고르라고 했다.


 눈처럼 하얀 머리의 아름다운 히로인이 차가운 마음을 가진 사업가 청년과 만나 그의 냉혹한 태도를 녹이고 고백하며 겨울 공원에서 키스하는 걸로 끝을 맺는 로맨스 영화.


 다른 하나는 신계와 마계의 합작으로 태어난 인공 생명체 소녀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녀의 집에 같이 동거하며 일어나는 트러블을 주된 플롯으로 삼는 애니메이션 영화.


 전자는 힐데와 레지나와 에델이 찍었다. 후자는 세실리아와 지아와 베로니카와 로자리아가 찍었다.


 '…로자리아 녀석, 또 무슨 변덕인가. 로맨스 좋아한다고 말했으면서.'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건 상관은 없었다. 후자로 결정.


 표를 끊어 십오 분은 기다려야 하는 와중, 가은이 말했다.


 "잠깐 게임 센터에 가도 될까요?"

 "몇 분 있으면 금방 시작하는데. 그렇게 지루한가?"

 "아니…."


 가은은 뜸을 들이다 이내 말했다. "인형 뽑기, 하고 싶어서요."


 "흠…."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모두와 함께 들어갔다.


 치즈를 뿌린 나초를 먹으면서 걷는 로자리아, 네크로노미콘을 안고 고개를 돌리며 에델과 말하는 레지나, 하품을 하면서 모자를 고쳐쓰는 세실리아, 그 옆에서 붕붕 떠있는 머신갑, 다소곳이 품위 있게 걷는 베로니카, 빌딩의 시설에 관해서 말하는 힐데와 지아.


 "이거예요."


 가은이 가리키는 크레인엔 하얀색 털이 바탕에 갈색 털이 섞인 고양이 인형이 있었다.


 "뽑아 보게."


 의외로 소녀다운 감성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관리자다. 하지만 몇 번 시도의 끝에 가은은 결국 뽑지를 못했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거… 잘 잡았다고 생각했을 때도 이상하게 들어올리질 못했어요. 안 되는 거 같아."


 옆에서 재밌단 듯이 보고 있었던 로자리아가 말했다. "그럼 내가 해볼까?"


 "……."


 관리자를 조용히 바라보는 가은. 결국 그는 동전 교환기에 카드를 넣고는 동전을 많이 뽑았다. "어차피 십 분 정도는 남았는데, 누가 인형을 뽑을 수 있나 내기해 볼까?"


 팔짱을 끼며 지루한 표정을 짓던 힐데가 말했다. "걸리면 뭘 주는데?"


 "뭐?"

 "내기라며."


 딱히 별 생각도 없던 관리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 애초에 뭘 받고 싶은데?"


 "글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힐데는 눈치를 보듯 우물쭈물 거리다가 말했다. "그냥 영화 볼 때 네 옆에 앉으면 안 돼?"


 평일 오후 극장이라 딱히 영화를 보는 사람이 없다. 이들을 빼고 대략 스무 명 정도?


 "몰라, 맘대로 해라."

 "음… 좋아. 아니 잠깐…."


 힐데는 잠시 좋다가 매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건, 관리자는 동전을 로자리아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하고 싶다고 했지? 네가 먼저 해봐."


 그러자 힐데가 말했다. "자, 잠깐! 야! 순서는 가위바위보 해서 정하게 해야지…!" 하지만 로자리아는 낚아채듯이 받으며 말했다. "그럼, 나 먼저!"


 그리고….


 예상대로 로자리아는 크레인을 대충 겨눴다가, 그냥 염동력을 쓰기 시작했다.


 "흐흥~♬ 낙승, 낙승!"


 …….


 이게 진짜?


 아깐 염동력이 뭔지 모른다며?


 왠지 방금부터 엄청 짜증났던 힐데는, 크레인이 고양이 인형을 집자마자 염동력에 의해 올려지는 것을 보곤, 그대로 로자리아의 발을 진심으로 콱 밟았다.


 "아, 아얏!!!!"


 툭.


 그리고 허탈하게 돌아가는 크레인.


 로자리아는 매섭게 고개를 돌리며 소리질렀다. "야!!!!!!! 너 진짜 뭐 하는 거야?!!!!" 하지만 힐데는 머리를 넘기며 고소하다는 듯이 웃었다. "훗…."


 "너 이게…?!"


 하지만 그때 지아가 뒤에서 말했다. "반칙을 쓰니까 그런 거예요, 로자리아."


 "뭐?"


 레지나도 말했다. "이런 게임에 그런 이능력을 사용하면 비겁하지 않겠나요?"


 "……."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로자리아는, 모두의 화살이 자신에게 꽂히자 그냥 분하다는 표정만 지으면서 뒤를 돌아 걸어갔다. "몰라, 그렇다면 너희들끼리 해보던가!" 그리고 신경질을 내면서 바닥을 쿵쿵 밟는 것이 묘하게 한솔과 같은 압박감을 줬다….


 도대체 뭐하는 것인가, 그렇게 피곤한 표정을 짓는 관리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가 하지?"


 딱히 특별한 의도는 없이 세실리아가 손을 들면서 말했다. "나!" 그냥 순전히 가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세실리아는 제대로 조준하였다. "음… 가자!"


 하지만 툭 누르며 내려갔던 크레인은, 잡는 것 같이 보였다가도 흔들거리며 빈손으로 돌아왔다.


 "아… 아깝구나! 가은이에게 주고 싶었는데…."


 …….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힐데도, 그리고 레지나도, 베로니카도, 심지어 지아도 실패하였다.


 확실히 잡았고 건져 올릴 수도 있었는데 왜 떨어진 것인가, 곰곰히 생각하는 지아의 뒤로부터 머신갑이 팔짱을 끼면서 말하였다. "후하하하하핫! 구원자가 바로 여기에 등장! 어떤가, 관리자! 다음은 내 차례라 할 수 있겠지?! 이런 건 운동 에너지와 위치 에너지와 마찰 에너지를 고도의 연산능력으로 동시에 계산할 수 있는 바로 나 이 순수 정밀 머신에게 맡기도록!"


 "…다음은 내가 해보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관리자에게서 동전을 받고는, 머신갑은 크게 외쳤다. "이 몸의 힘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타이머가 거의 끝나기 전까지 계속 직사각형 몸통을 돌리면서 보던 머신갑은, 갑자기 눈빛을 확 빛내며 외쳤다. "그렇구만! 거기였어!" 그리고 툭 누르면….


 베로니카가 중얼거렸다. "…어째서 꼬리를?"


 파묻힌 꼬리는 집게로 잡으려고 해봤자 흘리듯 놓치기만 하고 떨어질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곧, 집게가 꼬리를 꽉 잡고는 - 다른 인형들의 밑에 깔렸던 다른 검은 고양이를 들어올려 절묘하게 균형을 잡으면서 끌어 왔다.


 "말도 안 돼…."

 "흐음… 특이한 모양의 인형이군요."

 "고양이 꼬리에 다른 고양이가 붙어 있는 인형… 그래요, 저런 건 처음 보네요."


 그리고 툭 떨어져, 가은에게 인형을 주는 머신갑.


 "어떤가?! 후하하핫, 이 몸의 영도력과 위대함을 찬양하라!"

 "……."


 가은이 조용히 안으면서 말했다. "…고마워."


 조용히 웃는 그녀의 모습은, 과거 인형들과 장난감을 받고 분해하던 타락한 대적자였던 시절의 소녀와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다.


 "…음." 뭔가 딴죽을 걸 것 같았던 머신갑은 솔직하게 고마워하는 가은에게 살짝 어색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돌리곤 관리자에게 말했다. "자, 이제 영화 시작할 것 같은데, 빨리 가지!"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가는 힐데하고, 왠지 자신도 갖고 싶은지 인형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지아와, 지금 볼 애니 영화에 대해 묻는 레지나와, 캐릭터를 비롯해서 대강의 내용을 설명하는 베로니카. 가은은 인형을 마치 진짜 고양이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관리자의 뒤를 따라갔다.


 영화… 아니, 극장판 애니는 그럭저럭 재밌긴 했었다.


 모두가 피식 웃거나, 몰입하며 볼 수 있었던 장면이 있었다. 플롯은 정통 로맨스 같은 느낌에 판타지 설정을 섞은 느낌이 강했고, 음악과 작화는 인상적인 편이었다.


 영화관에서 나오며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도중에 관리자가 말했다. "매우 훌륭한 여가 시설이로군. 할 게 너무나 많아." 지아가 말했다. "건물 바깥엔 풀도 있어요."


 세실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용케도 이곳을 휴양지처럼 만들 생각을 다 했구나."


 그로니아에 대한 것은 잘 모르지만 이런 투자가 의미가 있는 것일까나, 그런 생각을 하는 세실리아였다.


 "음… 모노폴리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고모님."

 "…뭐?"

 "세계는 이제 새로운 번영의 시대에 접어들 거예요. 크던 작던, 모두 소중한 기회니까요."


 말은 예쁘게 하는 지아였지만, 그냥 막대한 자본력으로 아무거나 사들인다는 얘기다. 반대로 말하면 오히려 더 살 게 없어서 아쉽다는 뜻이랑 비슷했다.


 그런 얘기에 관심이 없던 로자리아가 물었다. "그래서, 다음엔 뭘 할 것이냐?"


 "역시 내가 멋대로 정하긴 좀 그런데… 여기, 종이를 줄테니 다들 하고 싶은 것에 원을 그리게."


 볼펜과 꼬깃꼬깃 접었던 종이를 안주머니에서 꺼내곤 모두에게 돌렸다.


 베로니카는 사격을 쳤었고, 레지나와 지아는 테니스를, 힐데는 스케이팅에, 가은은 드래곤 보트에, 로자리아와 세실리아와 머신갑은 메카 복싱 파이팅을 선택했다.


 베로니카가 물었다. "…이걸 다 할 시간이 있나요?"


 "…없는 거 같군." 관리자는 베로니카에게 말하였다. "베로니카 양, 미안한데 오늘 사격은 포기하면 어떤가? 나중에 자네랑 따로 이곳에 와서 하면 좋을 것 같네."


 "……!" 베로니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 우아하게 목례하면서 말하였다. "신경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인님."


 힐데가 말했다. "자, 잠깐!"


 레지나가 말했다. "…굳이 사격이 아닌 테니스를 포기해도 좋지 않을까요?" 지아도 말했다. "그것도 딱히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힐데가 다시 말했다. "아니, 포기한다면 스케이팅 쪽이겠지?" 하지만 관리자가 자르듯 말했다. "아냐, 다른 건 전부 간신히 시간에 맞을 것 같군. 게다가 테니스도 스케이팅도 재밌을 것 같지 않나?"


 "……."

 "……."

 "……."


 세실리아가 말했다. "말해두지만, 메카 복싱은 오늘 꼭 할 거니까 말이다! 사장, 그거 할 시간은 꼭 남겨둬!" 관리자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나도 뭔지 궁금하군."


 이후 승강기에서 내려 실내 테니스 장에 들어갔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나오는 모두들.


 가은, 지아, 베로니카, 세실리아, 머신갑, 레지나, 관리자, 로자리아… 힐데.


 가은은 룰을 모르고 왠지 관심도 없기에, 머신갑이 저쪽에서 앉아 같이 보면서 가르쳐 주기로 했었다. 세실리아 또한 스포츠엔 자신이 없어서 가은의 옆에서 앉아 있기로 했다.


 그리고 뒤는 평범한 매치였다. 베로니카, 관리자, 지아, 레지나. 서로 팀을 바꿔가며 공을 받을 수 있게 살짝 쳐가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그녀들이다.


 …힐데하고 로자리아 쪽과는 다르게.


 바로 옆에서 마치 테니스의 왕자처럼 마구 발키리의 힘과 마왕의 힘을 방출하며 서로 싸우는 그 둘.


 "손 좀 봐준지 한참 됬는데… 꽤나 건방지게 변했잖아, 브륜힐데?"


 쾅!


 "여태까지 봐준 것이 누구더라? 발할라에 있었을 당시가 기준이면, 그때의 난 널 벌레처럼 밟아서 죽였을 거다."


 콰앙!


 "호오, 내가 마왕이 된 이후엔 정정당당한 일기토를 걸 생각은 못 했었던 네가… 꽤 하찮은 도발 아니냐."


 퍼엉!


 "뭣하면 지금이라도 싸울까? 응? 최강의 마왕이라고 모두가 치켜세우니 적이 없는 거 같나?"


 펑!


 이젠, 아예, 라켓을 두 개 잡고서 혼돈의 힘을 덧씌우는 힐데하고, 티아라를 쓴 본모습을 보이는 로자리아가 염동력을 비롯하여 온갖가지 기술을 사용하며 더이상 테니스가 아니게 되어졌다.


 단지 한 번이라도 미스를 낼 경우가 완전패배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었다. 그냥 자존심 싸움이 아닌가.


 …….


 다음은 드래곤 보트가 되었다.


 딱히 특별한 건 아니고, 단지 보트에 같이 타서 노를 젓는 단순한 협동 스포츠.


 열받은 힐데와 로자리아를 어떻게든 화해시키기 위해 자신과 같은 팀에 묶었다.


 1팀은 관리자, 로자리아, 힐데, 가은.


 2팀은 지아, 세실리아, 레지나, 베로니카.


 하지만….


 '너희 둘, 좀 제대로 하면 안 되냐….'


 로자리아는 팔짱을 끼고서 짜증난단 듯이 말하였다. "노예 같은 발키리 주제에… 빨리 안 젓냐? 응?"


 처음엔 관리자와 가은이 젓고 있으니 딱딱한 표정으로 묵묵히 젓는 척만 했던 힐데는 화났는지 탕 놓으면서 말했다. "아까 내 공을 받아치느라 너무 무리해서 팔이 안 움직이나 하고 봐줬더니…. 해보자는 거냐?"


 "하! 그깟 나약한 서브는 도마 여동생도 받을 수 있을 걸?! 웃기지도 않는 소리하고 있어!"


 "안 아프면 조용히 닥치고 젓기나 해."


 "어따 대고 명령이냐? 응? 망국의 공주야. 응?"


 그러면서 로자리아는 조롱하며 발로 힐데의 옆구릴 밀었다.


 "이게 진짜!!!!" 화난 힐데는 바로 날개를 뿜어내면서 솟아오르곤, 레긴과 파프닐을 천공에서 불러와 쥐었다.


 그리고 로자리아도 다시금 그 전력을 보이면서 불타는 칼을 뻗어내었다. "후후후후… 후하하하! 주제를 알아라, 나약한 발키리!"


 "아…."

 "…결국 이렇게 됬군."


 천공에서 빛과 어둠을 휘두르며 날뛰는 힐데, 그리고 화산과도 같은 장검을 재빠르게 맞대는 로자리아. 고개를 들어서 둘을 바라보던 가은과 관리자는 조용히 노를 저었다. 진 건 당연했다. 문제는 시합이 끝나도 계속해서 싸움질을 하고 있던 둘이지만….


 결국 올림피안을 불러 겨우 중재했었던 관리자는 다시 건물 실내 스케이트 장에 가서 릴레이 스케이팅을 하기로 결정해, 팀을 나누었다. 이번에는 힐데하고 로자리아 둘이 다른 팀이 되게.


 1팀은 관리자, 지아, 세실리아, 힐데.


 2팀은 레지나, 베로니카, 가은, 로자리아.


 오프닝은 레지나가 봐줬던 것인지, 관리자가 이런 것도 잘했었던 건지, 어쨌거나 둘이 처음 시작해서 거의 동시에 골까지 왔다. 서로 칭찬하며 관중석에 앉아 지아가 살짝 빠르게 오는 걸 구경하다가….


 가은이 세실리아를 앞지르면서 대등한 느낌이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또, 저들 둘은 빙판 위에서 계속 싸웠던 것이다.


 "아얏…! 넌 스포츠맨쉽도 없는 거냐?!" 그냥 부딪치고 가는 로자리아를 보고 힐데가 뒤에서 외쳤다.


 "아~"


 다시 엄청나게 화난 힐데는 아예 스케이팅이 아닌 카운터의 힘으로 얼음을 밟고 달리듯 쫓아오며 외쳤다. "아~ 가 아니잖아!! 부딪치면 사과라도 제대로 하라고!!!!"


 의도한 건 아니라 로자리아는 대충 대답하였다. "미안…… 하다……."


 "아니 진짜 이 녀석이?!!!" 힐데는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그대로 땅을 박차곤 로자리아의 뒷통수에 하이킥을 먹였다. 그렇다, 날선 스케이트 화로 점프킥을 그대로 꽂았던 것이다.


 "크허억?!"


 "죽어! 죽으라고! 지금 당장 세라펠이 있는 명계로 보내 주마!!!"


 마치 진심으로 죽으라는 듯이 날카로운 신발로 계속해서 밟는 힐데. 계속 맞던 로자리아는 힐데의 얼굴에 스케이트 화를 집어 던졌다.


 "우욱!"


 얼굴에 제대로 맞아 코피가 나는 힐데. 여기저기 베이면서 얼굴에 피가 났었던 로자리아는 그대로 다시 전력을 개방하며 그대로 칼등을 힐데의 뺨에다 쳐버렸다.


 "방금 것은 아팠다고… 바보 힐데!!"


 "아프라고 때린 거니 당연하지, 멍청이 로자리아!!!"


 그렇게 말하며 힐데도 다시 천공에서 레긴과 파프닐을 받아, 날개를 급격히 펴냈다. 그리고 바로 싸우는 둘. 방금 전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이었다.


 "또 시작이군… 둘 다, 그만해라!"


 로자리아가 다루는 화염검의 성질 때문에 경기장 바닥 자체가 녹고 있었다. 관리자는 올림피안을 다시 불러서 둘을 간신히 멈추곤, 서로가 받은 상처도 치료하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어….'


 둘의 관계가 매우 걱정스러워진 관리자는 마지막으로 메카 복싱 파이팅에서, 자신들은 관전하고 로자리아하고 힐데 둘이 결판을 내는 걸 보는 게 어떤가 제안하였다. 그냥 여기서 대충 풀고 매듭지으면 좋겠지.


 세실리아가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쨌건 분위기가 그랬기에 모두가 받아들였다.


 그리고 넓직한 다리와 몸통에 육중한 양팔을 달은 흰색과 검은색 머신이 양측에 배치된 가운데.


 라이팅이 켜지면서, 좌측에서 힐데를 비추었다. 그녀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서 로봇을 움직여 링에 들어오는 가운데 활공하는 머신갑이 마이크를 잡고 말하였다. "인 디스 코너~ 위 해브 브륜힐데 더 발키리!"


 그리고 라이팅이 저쪽에도 켜지면서, 우측에서 로자리아를 비추었다. 상당히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도 로봇을 움직여 링에 들어오는 가운데, 머신갑이 똑같이 말했다. "앤드 댓 코너~ 위 갓 로자리아 더 다크 로드!"


 …….


 보통 이럴 때엔 관중석에서 선수의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두가 조용히 할 뿐이다.


 "규칙은 단순하다네! 아웃 판정이 날 때까지 상대 로봇을 계속 때리면 승리! 그럼!" 그렇게 말하곤 머신갑은 붕붕 날면서 링 주위를 돌았다.


 "진짜 옛날처럼 싸우는 건 오랜만이다… 박살내 주겠어, 꼬마 힐데."

 "부숴지는 건 네 자존심이다, 최약의 마왕."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로자리아는 단순히 주먹을 들고서 큰 공격을 먹이려 달려들었다. 의외로 파일럿 기술이 있는 건지, 힐데는 그녀가 오는 방향에 타이밍을 재면서 하단 공격을 했다.


 "뭐, 뭐야?! 잠깐, 계속 밀리잖아?"


 판정상 큰 피해는 없지만, 공격 자체가 아예 먹히지 않는 걸 보며 당황하는 로자리아. 힐데의 로봇에 계속 인치 차이로 공격이 닿지 않고 있는 것이다.


 "…흥." 비릿하게 웃으면서 차가운 미소를 짓는 힐데.


 뭔가 열받은 로자리아가 말했다. "네겐 이게 복싱처럼 보이느냐? 하찮은 잡기술이 없으면 진정한 마왕의 힘에 맞서지 못하는 발키리 나부랭이답구나!"


 "패배자의 헛소리군."

 "칫…."


 관중석에서도, 둘의 기체로부터도 볼 수 있다. 잔여 에너지는 힐데는 MAX, 로자리아는 753까지 떨어졌었다. 둘 다 1000에서 시작했다. 누가 봐도, 이대로 계속 한다면 로자리아가 질 것이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하지만 전투센스도 출중한 로자리아다. 몇 번 움직이곤 금새 매뉴버에 익숙해져서, 그대로 방금 전까지 똑같이 달려드는 척 페인트를 걸었다가….


 "진짜 질리지 않는군… 음?"


 그렇게 중얼거리는 힐데를 향해, 급속으로 활공 부스트를 하며….


 "?!"


 그대로 몸통 박치기를 했다!


 "큭, 무슨?!"

 "걸렸구나, 힐데!"


 그리고 둘 다 넘어져, 피격판정에 의해 둘 다 살짝 데미지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바로 로자리아의 기체가 힐데의 기체에 올라탄 상황이었다.


 "그 빈약한 철덩이가 네 무덤이 될 것이다, 브륜힐데에에에에!!!!"

 "으윽…!"


 라이트 암이 힐데 기체의 몸통을 좌측으로 치고, 그리고 레프트 암이 힐데 기체의 몸통을 우측으로 치고. 계속 반복되어 힐데의 라이프도 상당히 떨어졌다. 반격의 기회를 보던 힐데는, 신나게 북치듯 때리다 양쪽 손을 겹쳐 내리찍으려는 모습을 보고선, 기체의 무릎으로 로자리아 기체의 고간을 차버렸다.


 "큭… 방심했어!"


 떨어트린 힐데는 숨을 몰아쉬곤, 그대로 부스팅을 하면서 외쳤다. "어쩔 수 없지… 진심으로 간다."


 "오, 온다!"


 로자리아는 힐데가 라이트 암을 들어올리며 가속하는 것을 보고서는, 양팔로 앞을 막았다. 하지만….


 "이 초심자가!" 그렇게 말하며, 힐데는 자세 그대로 붕 부스팅을 했다. 그리고 킥을 먹였던 것이다! 바로 뒤로 밀리면서 자세가 풀리는 로자리아. 기교 있는 움직임을 통해 착지하자마자 바로 튕기듯이 기체를 돌진시켜, 힐데는 방금 전 자세 그대로 펀치를 먹였다.


 "제, 제법이잖아…?!"


 당했다.


 링에서 떨어질 위기다.


 여태까지 맨몸으로 싸우는 것이 효율적이라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애초에 힐데는 자동차는 물론이고 함선조차 능숙히 조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로봇이라고 했어도 아이들도 쉽게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진 기계였기에, 힐데가 이 정도로 날뛸 수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기계라고는 만져본 경험도 없었던 로자리아가 조종실력에서 이길 수 있을리 없었다.


 "끝이다, 로자리아!"


 '으으… 힐데 따위에게 질 순…!'


 그리고 로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염동력을 썼다.


 기체가 갑자기 붕 멈추더니 그대로 상승했던 것.


 "…뭐야?!" 갑자기 마리오네트처럼 떠오른 로자리아의 기체를 보고선, 급히 멈추는 기체.


 링의 모서리 부분에서 간신히 정지한 힐데는 로자리아를 올려보며 말하였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냐, 로자리아? 넌 지금 졌다. 규칙 위반이야!"


 "흐, 흐응… 이게 규칙 위반이라?"


 찔리는 게 있는지 말을 더듬는 로자리아. 어떻게 넘길 수 있지 않는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당연하지. 진짜 바보냐? 로봇을 조종해서 싸우는 경기에 자기 힘을 쓰는 게 허용될 것 같아?!"


 아직도 염동력으로 기체를 띄운 상태로 로자리아가 말했다. "규칙은 아웃 판정이 날 때까지 상대 로봇을 때리면 되는 거 아니었느냐?"


 "뭐?"


 "…그렇잖아? 복싱 머신간 데미지 계산은 오직 기체간의 접촉에 의해서 이뤄지는 거고, 그걸 목적이라 하면…."


 흠….


 대충 변명하고 있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도 맞지 않던가?


 "무슨 궤변이냐!"


 …아하. 이거 먹힐 수 있을 거 같아.


 어차피 이런 게임에 딱히 세부적인 조항이 없을 거라고 짐작했던 로자리아는 의기양양하게 미소지으며 머신갑에 고개를 돌리며 물어봤다. "좋아, 그렇다면 그냥 확실히 묻지. 야, 거기 깡통로봇! 상대방의 기체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아도 다른 힘을 쓰면 안 된단 규칙은 없지?!"


 일부러 살짝 말을 꼬아서 했다.


 머신갑이 말하였다. "으음… 알파트릭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발행하였던 서류에 그런 조항은 없긴 해도."


 "없으면 된 거 아니냐?"

 "다만 역시 그건 좀…."


 로자리아가 지아를 보고 말했다. "너, 신 지아. 알파트릭스 총책임자인 너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음… 글쎄요."


 지아의 대답은 의외였다. "상대방의 기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능력은 전부 허용된다는 규정으로 이해하여도 될 것 같네요." 힐데가 놀라며 물었다. "잠깐, 회장!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규칙에 대한 디 팩토 한계에 의해서 그런 거예요. 만일 가은 고모님처럼 독심술을 사용하거나, 호라이즌 씨처럼 미래예지를 쓴다면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원론적으로 카운터들은 전부다 신체강화의 영향을 받는데, 기체가 부딪치거나 흔들리거나 그럴 때에 일반인보다 안정적으로 대처하기가 쉽다는 점도 있어요."


 "그, 그렇지만…."

 "호오."


 "또, 굳이 형평성을 위해 카운터들에게 시계를 벗으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까… 만일 공정한 경기를 원하면, 대다수의 스포츠처럼 처음부터 일반인과 카운터의 리그를 나눠야만 해야겠죠. 다만 이런 경우, 힐데 씨도 로자리아 씨도 카운터급이라 할 수 있으니까 큰 문제라고 생각치 않아요."


 "……."


 침묵하는 힐데와 그것을 듣고서 좋아하는 로자리아. "역시나 정말로 현명하구나, 음! 들었느냐, 브륜힐데?!"


 "후우…." 그리고 묵묵히 재개하는 힐데.


 당연히 이후의 싸움은 그녀에게 불리했다.


 염동력을 써서 날아올린 로자리아의 기체를 때릴 수 있는 수단이 없고, 마치 독수리와 같이 눈치만 보다가 쪼아대듯 내려찍고 얄밉게 재빨리 상승하는 움직임에 힐데가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이게 대체… 이딴 것도 복싱이냐?"


 중얼거리는 힐데에게 로자리아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하! 패배자의 헛소리구나, 정말로!"


 "………………."


 힐데는 차분히 생각했다.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세 개… 녀석이 내려올 때 모먼트에 맞춰 공격하는 것과, 녀석에게 반칙패를 유도하는 것과, 아니라면 링아웃을 유도하는 건데….'


 어느쪽이건 어려워 보였다.


 염동력을 쓰는 것이 하급 침식체면 모를까, 상대는 로자리아다. 아까부터 전혀 기체 자체의 부스팅은 쓰지도 않고, 자기 염동력으로 마치 옥좌에 앉은 때처럼 엄청난 기동력을 보이는 것이다.


 '하아… 오로치가 권할 때에 마법 하나라도 배워야 했었나….'


 잠깐.


 녀석의 염동력은 어떤 원리였지?


 갑자기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직감에, 힐데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생각했다.


 '로자리아는 정신을 집중해 사방에서 압력을 주면서 잡는 거야. 그렇다면….'


 힐데는 정확하게 꿰뚫어 보았다. 그녀가 기절해 있던 오비탈 베이스 낙하 저지작전 때에, 로자리아는 올림피안 주피터 기본형에 손을 대고 짓뭉개려 하였는데 - 그것과 동일한 기술을 쓰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게 먹힌다면!'


 그리고.


 다시, 로자리아의 기체가 떨어트리듯 주먹을 내지르면서 내려올 때에.


 힐데는 기체를 살짝 상승시켜 부스팅을 한 뒤, 자신의 날개를 펼쳤다.


 "뭐… 뭣?!"


 자신과는 달리 어떤 보조적인 기술조차 없는 힐데. 그걸 알았기에 어떤 역공조차 할 수 없을 거라 짐작하며 안심했던 로자리아는 힐데가 갑자기 묘한 움직임을 보이자 당황했다.


 "이 녀석, 지금 뭘 하려는… 우왓!"


 그때에 볼 수 있었다. 아예 조종을 포기한 채로, 힐데는 자신의 카운터로서의 힘을 완전히 방출해 강철 덩어리를 그냥 밀어내듯이 양손으로 조종판을 잡고서는 날개에서 힘을 방출하며 그냥 밀어내는 거다.


 "염동력을… 아니, 잠깐…!"


 그렇게 하면 질 거다.


 당연히 알 수 있었다. 사방으로 움켜잡아 쥐고 흔들듯이 움직였던 로자리아였다. 만일 이 상태로 염동력을 쓴다면, 힐데의 기체에 접촉이 될 것이고 곧 자신의 패배가 될 것이다.


 "끝이다, 로자리아!"

 "우웃… 질까 보냐!"


 최강의 마왕으로서 힘이 힐데보다도 강할지 모를 로자리아지만, 힐데는 이미 전력으로 잡아 밀어내면서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 힘싸움을 역전하기엔 역부족이다.


 '으, 윽! 이, 이렇다면…!'


 반대로, 자신의 힘으로 기체를 돌려 버린다면…!


 "우웃?"

 "나 혼자 질 거 같아?!"


 로자리아는 전력으로 기체를 옆으로 쾅 차면서 돌렸다. 정면으로 받아내야 이길 수 없을 걸 아니, 회전시킨단 도박을 건 것이다. 그리고….


 쿠궁!


 링 바깥에 떨어진 두 기체. 옆으로 같이 엎어져, 크게 먼지가 일으킨 곳에 콜록거리며 둘이 일어났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머신갑을 보며 외치었다. ""어이, 머신갑! 누가 이겼냐?!""


 …….


 여태까지 계속 양안 카메라로 촬영하던 머신갑은 눈에서 홀로그램을 비추며 말했다. "둘 다 멋진 승부였군! 음! 좋아, 다시 리플레이를 보여주겠네!"


 힐데가 말했다. "아니… 결과를 묻고 있잖아."


 "무승부라네."


 로자리아가 말했다. "…뭐? 정말?"


 의도치 않은 결과다.


 자세히 프레임 단위로 보여주는 영상엔 정말로 두 기체가 동시에 바닥에 접촉하였다.


 "…칫. 운이 좋았군, 로자리아." 뭔가 살짝 아쉽단 듯이 말하는 힐데.


 "흥, 마지막까지 요행을 부리곤… 정말 시간낭비였다." 말투는 그래도, 왠지 재밌었단 듯이 만족한 웃음을 짓는 로자리아. 그리고 기지개를 쭉 피고서는 말했다. "아~ 또 배고파졌어. 관리자, 저녁 먹을 시간이지?"


 팔짱을 끼고서 고심하던 관리자가 말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잠깐." 그리고 지아를 보며 물었다. "지아 회장, 저녁에 미술관을 연다고 했었지. 지금 입장할 수 있는가?"


 "네, 아마 그럴 거예요."


 관리자가 말했다. "그래. 지금 가면 우리 밖에 없을 거야. 살짝 보고서 바로 식당에 가지."


 로자리아가 말했다. "아… 돈까스 먹고 싶은데."


 "보여줄 게 있어서 그래. 조금만 참아라."


 그리고 관중석에서 모두가 일어나 나갔다.


 해가 떨어진 저녁, 고요한 달빛이 비춰지는 투명 승강기에 탔었던 모두는 딱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띵동, 소리를 내며 지하에 내려온 그녀들.


 미술전의 테마는 개척이다. 전통적인 미국 서부 시대하고, 이면세계를 처음 발견했었던 자료를 참고한 상상화, 그리고 이면세계의 침식체들을 상대로 싸우는 태스크 포스와, 구관리국의 몰락과 신생관리국의 기상에 더해서, 화성을 넘어서 행성을 테라포밍한다거나 혹은 스페이스 콜로니를 건축하는 광경.


 관리자가 둘러보며 말했다. "이것이 인간의 힘이다. 이젠, 단지 노력할 의지만 있다면 언제라도 닿을 수 있는 미래기도 하지."


 과연….


 참 그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힐데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진짜 한결 같은 남자다.


 그러던 그녀는 훑어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었다.


 '이건….'


 구관리국이 침공을 받을 당시를 그려내었던 상상화.


 "……."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악몽과도 같았던 그 상황과… 전혀 떨칠 수 없던 기억.


 그런 힐데의 뒤로 로자리아가 찾아와 말했다. "그래… 이것도 오래전의 일이라 잊어 버리고 있었어. 진짜, 그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지. 설마 관리국이 다시 부활하여 우리들과 동맹을 맺고 타락한 대적자를 무찌르게 됬다니."


 "로자리아."


 "하지만 그것이 전쟁이다. 전쟁의 천사인 네가 잊진 않았겠지. 하지만…." 로자리아는 무겁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우리들에게 맞서서 용감히 싸웠고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여왕으로서 경의를 표하지."


 "……."


 로자리아는 그렇게 말하곤 떠났다. 힐데는 그곳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그림을 볼 뿐이다.


 관리자는 레지나와 함께 걸으면서 그림들을 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미 불멸자였던 관리자하고, 에델이 빙의된 이후로 불멸자가 되었던 레지나. 둘에게 있어 미래는 후세대에 남기게 될 유산이 아닌 자신들이 직접 이뤄야만 하는 숙업이었다.


 "우주 진출에 관해 흥미로운 그림들이 많이 보이네요. 관리자님은 어떤 방식을 취하실 건지요?"


 "시간이 좀 걸릴지 모르겠지만, 테라포밍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우리의 우주는 다른 평행세계들과 달리 이면세계의 위협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니까."


 스페이스 콜로니는 사실 거대한 깡통에 들어가서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침식체가 날뛰거나 그걸 제압하기 위해 화기들을 쏘는 것이 생활기반 자체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거다.


 "거기다가, 인공제어 시스템이 침식되면 저지하지 못할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겠지."


 에델이 말했다. "테라포밍은 기반을 형성시키면 끝나는 거니까, 주피터의 양자확정을 사용해서 빨리 마칠 수도 있겠네요. 스페이스 콜로니와 달리 복잡하게 주의하며 관리할 필요도 없겠지요."


 "…아니. 그런 방식으로 하진 않겠네."

 "네?"


 "사람은 역사를 보고 과거에 어떻게 성공했는가 배운다네." 관리자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나타나서 인공신성을 통해 테라포밍을 완료했다. 그렇게 들으면, 모두가 언제나 날 의지하게 되겠지. 그래선 안 돼. 내가 없더라도 스스로서 완전한 관리국이 되지 않으면 안 되니까."


 "……."


 "그리고, 나를 제외한 인류 스스로 그런 개척을 했다는 경험을 익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방법은 하나 뿐만이 아냐. 여러가지 있고, 또 방법을 몰라도 그 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정신에 가까우니까."


 에델이 중얼거렸다. "그것은…."


 진정한 지식이라고, 비슷한 게 아닌가.


 "후후…."


 레지나가 고개를 돌렸다. "에델?"


 "아뇨, 아무것도 아니예요."


 어쩌면 마왕이었을 때보다, 이들 둘을 바라보는 지금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


 저녁 식사 때엔 딱히 아무런 일도 없었다. 힐데도 로자리아도 무언가 누그러진 태도였고, 관리자는 와인을 따르면서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거나, 혹은 임의의 주제로 화제를 돌리기도 했었다. 어쩌다가 로자리아가 궁니르에 대한 말을 꺼냈는데, 관리자는 그걸 듣곤 우리 쪽에서도 그걸 회수해서 발할라를 재건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였다.


 로자리아는 식사를 마치곤 다시 본세계로 돌아갔다. 다음 번에도 이런 모임이 있으면 꼭 부르란 당부와 함께.


 코핀으로 돌아왔던 모두. 세실리아는 가은이 새로 살 집을 안내해 주겠다면서 나갔고, 관리자도 머신갑과 베로니카에 부탁하여 몇 개 안 되는 짐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관리자는 사장실에 그대로 남았다.


 오늘 열 시에. 알파트릭스 건물 옥상에서 중요한 말이 있다고, 지아가 그때 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건 기다려 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관리자는 레지나와 함께 여러가지 소소한 얘기를 하면서 그로니아의 여론을 살펴보다가, 어느새 조용히 숨소리만 내는 레지나에게 눈을 돌리었다.


 사장실의 소파에 앉은 채로 잠들은 레지나를 조심스럽게 뉘이고는 이불을 덮어주는 관리자.


 "……."


 관리자는 팔짱을 끼고는 무언가 생각하다, 에델을 보고 말했다. "에델, 잠깐 괜찮겠나?"


 "네에…?"


 관리자는 맞은 편에 앉으면서 그녀를 보았다. 에델 또한, 영혼인 상태로 소파에 앉는 척을 했다.


 "오늘 보니, 가은의 에고는 완전히 무너져서 전혀 다른 인격으로 변했어. 그럼에도 마신 티폰과의 연결은 끊어지지 않았지. 그렇기에 티폰이 봉인됬다 해도 힘 자체는 남아 가은을 원상태로 수복시킬 터이고…."


 "그건, 언젠가 다시 예전의 자아로 각성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겠죠."


 "정확해."


 다시 그 타락한 대적자가 된다면…. 보통 염려가 될 사안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것만이 아냐. 티폰의 몸에서 제일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외신 가아그셰블라의 정수… 자네의 힘이지. 혹시나 마왕의 힘이 대적자의 역을 가지는 그녀를 의도치 않게 자극하게 된다면 위험할지 몰라."


 에델은 골똘히 생각하며 말했다. "하지만 제 정수를 분리하면, 그건 결국…."


 "그래, 자네가 부활하는 계기가 될 수 밖에 없지. 그렇지만 자네는 그것을 싫어하지 않나?"


 "그러네요. 겨우 레지나 님과 하나가 됬는데…."


 "왠지 묘한 표현이군." 관리자가 이어서 말했다. "내가 티폰을 완전히 없애지 않은 것도 사실 자네를 의식해서 그랬던 거네."


 "으음… 사실은 제 정수건 뭐건 없애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요."

 "그렇게 지금의 상태가 좋은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어떤 설명도 의미가 없네요."


 관리자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똑바로 뜨면서 말했다. "…정확하군."


 잠시 에델하고 여러가지 말하다 보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게 되었다. 관리자는 외투를 걸치고는, 그대로 올림피안을 불러서 타곤 약속 장소로 갔다.


 달이 떠있는 밤에.


 우윳빛의 부드러운 달빛이 고요하고 차분하게 고운 긴 흑발을 늘어트린 여성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어둠처럼 어언 나타난 올림피안에서 휙 떨어져 내리는 관리자.


 "그래서, 하고 싶다는 얘기는…?"


 지아는 싱긋 웃더니, 그대로 팔을 잡고는 안기면서 말했다. "잠시, 이렇게 있어 주세요."


 "……."


 "달이, 아름답죠?"


 "그렇군."


 "몇 달 전에 리플레이서들이 로스트 쉽을 낙하해, 세상이 뿌연 연기로 뒤덮였을 당시에…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대체 뭔지, 그리고 이런 상황에 뭘 해야만 하는 것인지… 정말 깊게 고민했어요."


 "……."


 그들은 잠시 아무런 말도 없이 지상을 보았다. 지아는 꼭 잡으며 말하였다. "관리국의 리더쉽이 사라졌던 이후… 델타세븐, 프리드웬, 나나하라 같이 선한 사람들도 서로 협력하는 것을 주저했죠."


 지아는 관리자를 올려봤다.


 변함없이 날카로운 검은 눈동자에, 매우 인간적인 마음을 가졌지만 또한 냉정하고 공격적인… 적이 누구라도 전혀 기죽고 겁먹지 않고, 부하란 개념이 없이 아군을 언제나 친구로서 독려하고 집단을 이끌어 승리했던 남자였다.


 "그리고 몇 달 동안에, 저도 알게 되었어요. 설령 우리끼리 힘을 합쳤어도 절대 쉽게 이길 수 있을 적이 아니었던 걸. 어쩌면, 관리자님이 이곳에 오신 건 사실… 운명일지도 몰라요. 그래요, 저도 운명의 상대를 찾은 걸지도요."


 지아는 팔을 풀고는, 빙글 돌면서 그의 앞에 섰다.


 새하얀 보름달이 그녀의 머리 위에 떠있어, 그리고 푸르른 도시의 야경을 비추는 가운데. 지아가 보석 같이 아름다운 눈을 몽상에 잠기듯 빛내며 말했다.


 "이곳은 관리자님이 지켜낸… 그리고 만드신 세계랍니다."


 "……."


 "너무나도 아름답다 생각해요. 그러니까… 기억하시나요?"


 "그래. 부탁을 하나 들어준다고 했지."


 지아는 후후 웃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는 입술을 살며시 열었다.


 그림자 속에서,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정의 코핀 컴퍼니.


 거대한 기사가 이제 간다고 할 때, 힐데는 그를 멈추곤 마지막으로 같이 가주었으면 하는 곳이 있다고 말했다. 여러가지 색의 꽃을 고르고는 바구니에 담아 하늘을 거니는 힐데. 따라가는 한솔도 이제야 발키리가 자신의 업을 내려놓는 순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 관리자는 이 장소를 몰랐다. 구관리국 정예병이 죽은 뒤에, 그들을 일일이 묻어줬던 것은 힐데였다. 하나 하나 정성스레 꽃을 내려놓으며 옛날 게르만인 언어로 기도하며, 마지막에는 어눌한 한글로 이수연이라 적혀진 비석에 스칸디나비아의 보라색 꽃을 바쳤다.


 "…듣고 있니, 수연아? 네가 꿈꾸던 평화로운 세상을 내가… 우리가 만들어 냈단다. 너를 잃었던 그때 다짐했었지. 모든 것을 끝내고서 여기 다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도 너처럼 전장에서 싸우다가 죽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 이젠 됬어. 너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란다. 거기서 우리가 만들 새로운 세상을 지켜봐주렴."


 그렇게, 힐데는 마침내 장갑을 벗고선, 흉측하게 상처 입은 손을 스스로의 빛으로서 치유했다. 하지만 무릎 꿇은 그녀의 눈에서는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흐느꼈다. "……미안하다."


 그런 힐데의 뒷모습을 보면서 화염 기사는 단지 침묵하며 삭막하고 냉혈하게 초록빛 안광을 비추다가, 그녀가 일어서자 마지막 인사를 교환하곤 어둠과도 같이 사라졌다. 그것으로, 펜릴은 의무를 다하고 해체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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