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감사의정권] 엘리시움 피날레







구가하라.


아름다운 음악과 숭고한 믿음으로 뒤덮인 축복받은 세계에서 태어난 이는 얼마나 행운인가.


찬미하라.


그런 영화로운 세계의 정점에 군림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이는 얼마나 위대한가.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찬사이자 갈 길 잃은 노랫가락이 회한의 너머로 휘날려 사라진다.


한 편의 아픈 추억을, 마음 속에 싸늘하게 남은 쐐기를, 몇번이고 다시 새긴다.


그래.


선율과 신앙으로 천년왕국을 구현했던 우리 세계는 그 영광이 무색하게도 멸망의 뒤안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모든 것은 도둑같이 찾아온 역병과 전쟁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재앙의 첫째 해에, 엘리시온은 여섯 개의 대륙 중 절반을 잃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의 눈에서 빛이 떨어졌으며, 우리 세계에 드리운 영광은 퇴색되었다.


둘째 해에, 교단이 직접 통치하는 영지만을 남긴 채 엘리시온의 모든 토양과 바다가 역병과 죽음으로 물들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의 입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삶을 부르짖는 단말마의 비명만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음악이었다.


우리는 도둑같이 찾아온 이 재앙을 혹독한 시련의 시기라 불렀으며, 희망은 꺾여 부숴졌다. 너희는 멸망당해 마땅하노라고 우리를 향한 어떤 거대한 악의가 그렇게 속삭여오는 듯 했다.


그러나 셋째 해에, 역병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이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 부르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힘을 성흔이라고 불렀다.


무한한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존재한다 했던가. 성인들을 중심으로 우리는 다시금 내일의 햇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강력한 성흔을 가진 성인들이 나타나 절망에 빠진 이들을 구해냈다. 내게도 성흔이 내려졌고, 그로 인해 나는 우리 세상의 희망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섯째 해에, 우리는 성인의 헌신에 힘입어 우리의 음악과 신앙을 날카로운 검으로 벼려냈다.


영광의 전투를 통해 우리는 하나된 신앙으로 단결했다. 꺾이지 않은 우리는 구원을 노래했으며, 마침내 역병의 피조물들과 재앙의 권세를 꺾고 빛나는 승리를 쟁취했다.


하지만 승리의 독에 취해 오만해진 나는 가장 기본적인 약속을 살피지 못했고, 그로 인해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나니.


당장의 현재를 위한답시고 내게 있던 소중한 인연을 배은망덕하게 져버린 그 날, 내가 쌓아올린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물리쳤던 지옥이 다시 우리 세상을 삼켰다.


내 마음을 옥죄는 후회의 사슬이 어떤 겨울보다 차갑고, 내 기억에 남아 울부짖는 백성들의 원한이 어떤 고문보다도 괴롭도다.


그 모든 과오야말로 나를 영겁의 세월동안 묶어둔 채 안식에 들지 못하게 하는 가장 깊은 원죄일지라.


그러니, 들으라. 멸망을 마주한 다른 세계의 이들이여.


이건 새벽을 깨우는 위대한 정적이요, 마땅히 돌아봐야 할 것을 살피지 못한 죄인, 나 에클레시아의 이야기이다.









(1) 성전




"만상의 오묘한 진리와 드높은 산의 굳건함이 그분께서 자아내는 선율 안에 있으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모든 축복을 아우르시는 이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희망이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 이면세계에서 발견된 경전, 17장 3절 ~ 5절.







엘리시온

서부 대륙, 아에라리움













"위대한 정적을 위하여!"


"와아아아아아!!"


"죽음의 선율로 저들을 징벌하라!"



풀 한포기 자라나지 않고 검게 변색된 죽음의 땅 한 가운데, 바야흐로 마왕 타기리온과 인간의 군세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병기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소음과 함성,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덮을 만큼 격렬하면서도 웅장한 음악소리가 난잡하게 섞여 휘날린다.


지상에선 전사들이 역병체들과 뒤엉켜 정신없이 무기를 휘둘러댔다. 하늘에선 금색으로 치장된 휘황찬란한 코러스 함선이 쉴 틈 없이 지상을 향해 소리를 쏘아내기에 바빴다.


전투의 혈기와 광기 속에서도 그들은 누구 하나 정신을 놓는 일 없이 마치 경도된 것처럼 전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엘리시온의 인간들은 악기의 형태를 한 무기와 냉병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것도 세계를 반쯤 죽여놓은 마왕의 군세 앞에서.



"깊게 전진한 단원들은 재집결하여 다시 돌격하라!"


"선율에 몸을 맡겨라!"



전사들은 관현악단의 대형을 갖춘 채 역병체들과 전열싸움을 벌였다.


현악기들이 전열에 서 적과 정면으로 대치했고, 금관악기와 목관악기들이 후열에서 아군을 보조하고 적을 괴롭혔다.


악단의 중심에는 거대한 오페라 가수의 형상을 한 기계 유닛이 아름답고 당차게 노래하며 전사들의 전의를 고취시켰다.


그 모든 움직임을 유기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악단의 지휘자.


엘리시온 세계에 있어 하나의 악단은, 하나의 군단이었다.


그리고 이 대지에 모인 60개의 악단. 도합 60만의 대군단이야말로 엘리시온의 인류가 모아온 성전군의 총 전력이었다.


그에 반해 타기리온의 군세는 수평선을 가득 메우고도 부족하여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60만이라는 숫자가 초라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규모였다.


명백한 숫적 열세다. 엘리시온의 인간들 역시 그것을 모르고 이 싸움에 임한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항상 열세였다. 힘의 구도는 타기리온의 침공이 시작된 재앙의 첫째 해부터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 열세에서 다가오는 두려움이 있을텐데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불확실성 투성이의 지옥이 주는 두려움이 있음에도, 60개의 악단은 어디 하나 진형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로 난전을 벌여가고 있었다.


엘리시온은 음악으로 시작되어 음악으로 명맥을 이어온 세계.


악단에서 각각의 악기들이 자아내는 연주는 마치 마법과도 같이 엘리시온의 전사들을 응원했다.


오보에의 연주가 발놀림을 기민하게 만들어주고, 트럼펫의 나팔소리가 보호막을 씌워주고, 콘트라베이스의 연주가 아군을 치유한다.


중앙에서 노래하는 가수 형태의 기계 유닛은 자신을 뒤따르는 성가대 유닛과 함께 찬송을 목놓아 불렀다.



오, 놀라우신 은혜여, 완전하신 정적이여,

장대한 숙명을 지신 그 팔로 우리를 감싸사,

우리 가는 순례길에 영광으로 축복하소서.



가수가 미성으로 선창하자 단원들이 후창한다. 모두가 노래를 부르며 역병체들과 맞섰다.


그 찬송이 인간의 정신을 자극하여 두려움을 말소하고, 전투를 통해 환희를 느끼게 만든다.



그는 우리의 요새시요, 우리의 반석이시며,

우리를 건지시는 이시요, 힘과 방패이시니,

우리가 주를 의지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는도다.



인간에게 내재된 힘은 무궁무진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악단은 성인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보통의 인간 수준을 뛰어넘는 강함을 각 개인에게 부여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용기의 화신이었고, 하나이자 전체였으며, 군단이자 악단이 되어 무아지경으로 싸웠다.


바이올린을 든 단원의 활이 검처럼 휘둘러져 역병체들을 토막냈다. 어떤 단원은 연주의 파동을 에너지로 형태화하여 날려보내기도 했다.


바순을 든 단원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음울한 곡조를 들은 역병체들은 행동이 굼떠지거나 대열을 무너뜨려 혼란을 야기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근거리의 적들은 바이올린을 든 단원들이, 원거리의 적들은 금관악기를 든 단원들이 차례차례 처치했다.


호른과 튜바, 심벌즈가 일제히 우렁찬 파열음을 내지르자 역병체들은 원거리에서 쓸려나갔다.


죄수용 갑주에 들어간 죄수들도 악단의 곁에 섞여 전열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본디 그들은 죄수 신분이기에 최전선에 투입되어 고기방패로 쓰고 버려지는 역할이었으나, 인류의 생존을 다루는 오늘의 전투에서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든든하고 명예롭게 악단을 지켜내고 있었다.


역병이 몰고온 재앙을 딛고 엘리시온의 문명은 소리를 정제하여 무기로서의 성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악기들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는 그리 말할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데 특화된 역병체들에게 음악으로 대항한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만 음악이란 것은 파장의 한 형태. 파장이라는 개념을 파괴의 영역으로 끌어온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코러스 함에 좌표를 송신해라!"



한 악단의 지휘자가 지휘봉으로 거대한 역병체들이 다가오는 지점을 가리켰다.


세 자릿수의 코러스 함 중 선두의 세 함선들이 재빨리 기동하여 전송된 지점의 좌표를 향해 함포 포문을 개방했다.


코러스 전투함 역시 음악을 중시하는 엘리시온 문명의 산물답게 에너지나 열 계열 무기는 일절 탑제하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이 함선에는 악기가 자아내는 선율을 극도로 불안정하게 폭주시켜 외부로 발사하는 음폭주 엔진이 탑제되어 있었다.


안에 타고 있는 연주자들이 동시에 한 점으로 연주를 집중시켰고, 뒤이어 공기를 찢어가를만큼 거대한 소음의 파동이 코러스로부터 발사되었다.


아니, 그것은 소음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폭력적인 무언가였다.


콰아아아아아앙!!!


산이 무너지는 듯한 소음과 천지를 뒤엎는 듯한 파동의 여파가 대지를 찢어갈랐다.


거대한 역병체들은 주변의 역병체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그것들이 광포한 비명을 내질렀으나 파동의 음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다른 한 쪽 전장에선 성인들이 맹활약하고 있었다. 성인들은 각자의 능력을 발현시켜 역병체들을 물리쳤다.


이들의 주 목표는 어려운 전황을 두들겨 교착 상태를 푸는 해결사 내지는 마왕의 단말과 같은 상위 역병체들의 요격이었다.


성흔의 힘에 의해 번개가 내리고, 얼음이 나부끼며, 검기와 태풍이 몰아친다.


그 중에는 성흔의 축복으로 엘리시온의 사람들은 다루지 않는 화약 무기나 에너지 병기를 손에 쥔 이들도 있었다.


연주의 힘을 받은 성인들이 신속하게 역병체들을 정리하고, 코러스 함에서 음파폭격과 힘을 북돋아주는 연주가 뒤따른다.


적재적소에 개입하는 성인들의 공격에 막다른 곳에 몰린 악단은 재집결하여 대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악단만으로는 벅찬 역병체들일지라도 성인들의 힘 앞에서는 철거되는 건물처럼 맥없이 무너졌다.


그 광경을 본 성전군 전체가 더욱 열광하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형제 자매들이여! 이것이 우리의 총 전력이다!"


"저들에게 안식을!"


"종말의 악장을!"


"죽음을!"





Next :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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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쨩이 너무너무 꼴려서 못참고 음악학원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져보고 싶었음.


근데 엘리시온 세상에 대한 정보가 풀린건 없다보니 작중 세부 설정들은 내가 멋대로 머리 굴려서 내놓은 것들이 대다수임.


감안하고 봐준다면 정말 댕큐합니다.


4달만에 써보는 글인데 이거 대회에 완결 지을수있을지 모르겠다 ㅅㅂ 1주일에 1번밖에 글 못쓰지만 최대한 달려볼게.


난잡한 글 항상 봐줘서 너무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