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돌이킬 수 없는,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갈 곳 없는.
"세상 모든 거짓말이 악의로부터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억하라. 때론 거짓말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태풍이 될 수 있음을."
엘리시온
필하모닉 홀, 제 83회 공의회 개최 중
a.m. 11:45
"....그러니까 예하께선, 큰 공을 세운 이교도 아이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생존자 수색을 명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겁니까?"
수도의 중심부이자 가장 거대한 건물인 필하모닉 홀.
지휘자들과 주교, 추기경들이 한데 모인 가운데, 추기경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렇다."
이교도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자매를 찾을 겸 생존자를 수색하고 전쟁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의 있는 자는 입을 열라는 말에 공의회장은 순식간에 격론이 오가는 갑론을박의 장으로 변해버렸다.
"예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금 교단 직할령은 전후 복구 사업에 전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생존자 수색을 위해 인력을 추가로 차출하면 수도를 복구하는 것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옳으신 판단입니다. 관점에 따라선 생존자 수색과 난민의 수용 역시 전후 복구 사업의 일환이지요. 난민들을 받아들여 복구 사업에 힘을 보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반대하는 이들은 반대의사를 개진하고, 충성하는 이들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대체로 원정을 함께 나섰던 지휘자들은 에클레시아의 뜻을 전적으로 따랐다.
반면에 수도에 남아 내치에 힘썼던 이들 모두가 에클레시아를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예하. 이교도 아이의 부탁이지 않습니까. 모든 영광을 아우르시는 분께서 한낱 이교도 따위와의 약속에 그리도 연연하셔야 한단 말입니까? 성도들은 이를 납득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옵소서."
"말씀이 지나치시구려! 그 아이가 위기 속에서 우리 원정군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나는 똑똑히 봤습니다! 용기에는 마땅히 보상이 따라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옳소!"
"어허! 이런 불경한 이들이 있나! 어찌 신성한 악단을 지휘하는 이로써 이교도를 옹호하는가? 긴 원정 탓에 역병의 기운으로 마음이 오염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파울루스 추기경님. 저는 사실을 말하는 것 뿐입니다! 권위 뒤에 숨어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정의를 좀먹는 족속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저 자가, 추기경님께 저런 무례한...!"
"무례하다니! 위대한 정적께서 직접 피를 흘리셨다면 그에 상응하는 존중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신성 모독이다!!"
"지금 해보자는 것인가!!"
시끌시끌. 논쟁은 격화되어 서로를 비방하는 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필하모닉 홀이라는 이름에 맞지 않게 사분오열되어 다툼을 벌이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조화로이 모이는 공간이라는 이름의 뜻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항상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일념 하에 하나된 신앙으로 단결해오던 엘리시온의 공의회가 처음으로 분란에 흽쌓였다.
난무하는 욕지거리를 듣다못해 에클레시아는 일어나 가만히 손을 들었다.
필하모닉 홀 내부에서 벌어지던 다툼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가장 계율이 높은 추기경으로서 행사하는 권위는 아무리 이념이 다르다 한들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에클레시아가 입을 열었다.
"성전에 참여했건, 여기를 지켰건, 그대들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아이의 공헌이 없었다면 우리의 승리도 없었음을."
은혜로운 목소리가 갈등으로 과열되었던 마음을 감싸 어루만진다.
반응이 정 반대로 갈리는 것은 예상했다.
그러나 이렇게 논의할 수 있는 것도 마왕을 쓰러트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할 말을 신중히 고른다. 눈부신 공에 대한 상벌은 계층을 막론하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정의를 들이밀고, 감정이 아니라 도의에 기대어 정면으로 논파한다.
"그 아이가 기지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내 목숨은 거기서 버려졌을 것이다. 복구 작업은 고사하고, 이 공의회는 열리지도 못했을 것이며,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 모두가, 살아서 내일의 아침 해를 볼 수 없었으리라."
"....."
"이교도 따위라 하였느냐? 그 이교도 따위가 나 위대한 정적의 목숨을, 나아가 이 세계 전체를 구했다. 그 모든 공을 단지 출신이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 부정할 생각인가?"
"예하...."
"답하거라. 그 모든 공이 단지 출신의 천함으로 부정당할 수 있는가?"
좌중에 침묵이 감돈다. 아무도 섣불리 답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에클레시아가 마왕 타기리온을 토벌하는데엔 원정군을 끝까지 살려놓은 이교도 소녀의 공헌이 컸다.
에클레시아만이 아니라 그 전장을 직접 겪은 모든 원정군 악단의 단원과 지휘자들이 그를 기억했다.
'이교도라고 해서 행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도 쉽사리 부정할 수 없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으로 마음을 묶는다.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에 깃대는 것으로 순종케 한다.
"이 안건은 투표로 정하도록 하라. 그대들이 인간으로서 갖는 선한 마음을 나는 믿노라."
"그리 하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
............
투표 결과. 찬성 623 대 반대 377로 결정을 지은 뒤, 공의회는 휴회되었다.
휴회된 틈을 타 에클레시아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다음 번 공의회 때 나눠야 할 안건들을 천천히 검토하였다.
식량 생산의 문제, 의약품 부재, 난민 수용, 그리고 동쪽에서 새로 창궐했다는 역병의 보고까지.
다음 공의회에 물을 것과 가능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을 분류한다.
똑똑-
"예하. 최고 지휘자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라 하라."
집무실의 문이 열린다. 느리면서도 사뿐히 내려앉는 듯한 걸음이 들려온다.
맹인의 몸으로 최고 지휘자의 자리에 오른 자. 네퀴티아가 에클레시아의 앞에서 몸을 숙여 공손히 예를 갖췄다.
"위대한 정적을 뵙나이다."
"음."
"예하. 연구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소득이 있었는가?"
"어느 정도는요. 혹 시간이 되신다면 지금 연구실로 모실까 하는데, 괜찮으실런지요?"
에클레시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일어나 네퀴티아를 따라 건물을 나섰다.
이전에 그녀는 네퀴티아에게 멘탈 프린팅이라는 연구를 비밀리에 승인한 바 있었다.
인위적으로 성흔을 가진 성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전력이 부족했던 엘리시온에게 있어서 이보다 매력적인 연구는 없었으니까.
타기리온을 쓰러트린 지금에 와선 딱히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겠지만 성과가 나왔다니 지켜볼 필요는 있으리라.
엘리시온
신전 내 비밀 실험실
p.m. 5:19
"....이게, 다 무엇인가...?"
비현실적인 풍경에 에클레시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실험실에서 그녀를 맞이한 것들은 수십, 수백 가지의 인간의 뇌가 담긴 통이었다.
성흔의 인위적인 각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작 자신을 반기는건 성흔을 일깨워낸 전사들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들이 만들어낸 마계의 저편이었다.
"네퀴티아여....! 무슨 짓을 한거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대입한 값에 가장 근접한 결과물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오차 조정을 위한 공정이니까요."
그로테스크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말을 차마 잇지 못한 채 에클레시아는 정처없이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뇌가 담긴 통들에는 각각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수많은 통들을 지켜보다 말고 에클레시아는 어느 한 통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사고가 굳어 정적이 찾아왔다.
에클레시아는 그 순간 실감했다. 여길 찾아와선 안되었음을. 이 이름을 봐서도 안되었음을.
거기에는 이교도 소녀가 찾아 헤매던 자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 알아버리고 마셨군요. 때가 되면 제 입으로 이실직고할 생각이었습니다만."
"....."
"그이가 전쟁 영웅이 된 이교도 꼬마의 자매라는 것은 뒤늦게서야 알았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에클레시아는 손을 떨며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쾅!! 하고 주먹이 떨어지며 책상 하나를 조각내었다.
책상에 얹어져 있던 악보들이 흩날리고, 혐오감이라는 이름의 깃털이 머릿속에 휘날린다.
성인의 인격을 주입하여 성흔을 각성시키는 실험이라기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하여 허가해줬다.
그러나 그 결과가 이런 추악한 외도일 줄이야.
사람을 잔뜩 죽인 것도 모잘라,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이까지 잔혹하게 매장하다니.
누가 봐도 인간이 할 만한 짓이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 아이에겐 알리지 말아주시길."
".....알리지 말라?"
혐오감과 분노를 연료 삼아 에클레시아가 일갈했다.
"지금 그대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는 하는건가!? 알리지 말라니! 이런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어찌 반성하는 기색 하나 없단 말인가!!
멘탈 프린팅이 이런 추악한 기술인줄 알았다면 절대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야! 자비와 조화를 강조하는 교단에서 어찌 이런 끔찍한 외도를 걷는단 말인가!!"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해야한다고,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설령 외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미안한 듯 쳐진 눈매가 초점 잃은 눈 대신 그녀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퀴티아는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
"예하. 예하께서 서쪽으로 원정을 떠나신 동안 동쪽에서는 새로운 역병이 창궐했습니다. 연구의 목적은 아직 달성하지 못했지만, 연구의 부산물을 통해 동쪽의 역병을 저지할 수 있었죠."
"그 가증스러운 연구로 엘리시온을 지켜냈노라, 그리 말하고 싶은겐가?"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어차피 연구에 사용한건 자원한 이교도와 배교자들 뿐이기도 했고요."
"사람이 죽었어!! 이교도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신자들과 같은 사람이란 말이다!!! 역병체도 아닌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눈은 보이지 않지만 항상 미소를 짓고 있던 네퀴티아의 얼굴이 이 순간만큼은 그 미소에 광기가 잔뜩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앞을 보지 못하기에 자신이 저지른 바를 보지 못하고, 항상 웃고 있었기에 무엇이든 기쁘게 행한다.
맹목이 광신을 낳고, 최고 지휘자로 택함받은 이의 고결함을 광신이 잡아먹는다.
"예하. 이교도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심으로서 오래된 관행을 바꾸고자 노력하시는건 잘 알지만, 어차피 이단으로 낙인찍힌 순간 그들에게 기다리는건 죽음 뿐입니다.
희망 없는 삶을 이런 형태로나마 바쳐 세계 수호에 공헌했으니, 원정군이 죽어나가는 동안 그들도 실험을 위해 희생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타기리온은 이제 죽었어!! 마왕은 없고, 세상은 안전하단 말이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그렇게 보고 싶으신 겁니까?"
"네퀴티아!!!!!!"
"대국적으로 보십시오, 예하!!!!"
격렬히 분노하며 언성을 높이는 에클레시아를 향해 네퀴티아 역시 크게 언성을 높혔다.
숭배받아 마땅한 이 앞에서 언성을 높이다니 엄연히 불경죄로 사형감이다.
그러나 그런 용기와 무모함이 네퀴티아로 하여금 최고 지휘자의 소임을 맡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압니다. 예하께서는 너무나 고결하신 나머지 이교도들에게마저 그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신다는 걸요. 한때 이교도였던 자로선 한없이 기쁩니다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예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마왕이 격퇴되었음에도 아직 역병의 위협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요."
"....."
교단 직할령 동쪽으로부터 다시 시작된 역병의 발원으로 인해 직할령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다던 그 보고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니다.
현실이 아무리 잔혹하다 한들 인간이 인간으로서 남을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선을 지키기 때문인 것을.
"그런데 예하께선 위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가운데, 이교도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며 아까 공의회 내에서 큰 분란을 조장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된 믿음 아래 역병을 막아내는 것보다 그 아이와의 약속이, 나아가 이교도와의 화합이 그리도 중요합니까? 그것도 저로 인해 더는 지켜낼 수 없는 약속이지 않습니까?"
"더 큰 것을 위한다는 기치로 자신의 악행을 감추려 드는가? 그것이 교단의 가르침이었느냐? 대답해라, 최고 지휘자!!"
"감추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죄인이지요. 지금 당장 화형당해도 손색이 없는."
"뭐라? 독사의 자식이여! 평범한 죄인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거늘, 지금 그게 죄인으로서의 태도라고 생각하느냐!! 뻔뻔한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이교도들의 처우를 개선하실 생각이시라면 역병을 전부 몰아내어 세계를 구원한 이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 때에 가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죄로 저를 처형대에 세우시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처형당하겠습니다. 아니, 예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제가 자처하지요.
허나 지금은 아닙니다. 아직 역병의 전조가 남아 이 땅을 괴롭히고 있으며, 아직 잃어버린 여섯 개의 대륙 중 단 하나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하나되어 뭉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수용소 출신의 무지한 저조차도 작은 도리를 지키겠다며 큰 일을 그르치시는 것은 위에 서는 자의 법도가 아닌 줄 아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기를."
그 눈에 보이는 것은, 악의가 아닌 선의.
그 입이 담는 것은, 선의가 아닌 광기.
"이.....!!!"
손이 들어진다.
당장에라도 네퀴티아를 내려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에클레시아는 그러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그녀를 죽인다면 아마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최고 지휘자 씩이나 되는 이의 급사에는 조사가 들어갈 것이고, 그 과정에서 정쟁에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
대대적으로 진상을 밝히는 것도 생각해봤으나, 이 비인간적인 연구를 승인한 것이 에클레시아 자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것 역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간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하나 된 엘리시온을 만들어가야 하는 중요한 국면에서 이는 또 다른 분열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했다.
내가 독사의 새끼를 키웠구나.
오갈 데 없는 분노를 털어내기 위해 에클레시아의 몸이 계속 부르르 떨려갔다.
"....이 일은 추기경들을 소집하여 논하기로 하겠다.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에겐 크게 실망했도다."
그 말만을 남기고 에클레시아는 그녀답지 않게 빠른 걸음으로 실험실을 도망치듯 나섰다.
◇
살풍경했던 신전에서 나오자 선선한 저녁 바람이 에클레시아의 피부를 감쌌다.
아직 분노가 다 가시지 않은 몸을 이끌고 에클레시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 실험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또 다른 재앙을 만든 것과 다름 없었다.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이교도 소녀와의 약속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엘리시온의 사람들은 본인들의 중심부에서 이러한 마경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긴 알까.
그 이교도 소녀도-
"앗! 예하!"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이교도 소녀가 밝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화들짝 놀랐으나 에클레시아는 티내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 뒤, 이교도 소녀를 맞이했다.
"좋은.... 저녁이구나 소녀여. 다시 만나는군."
"그.... 회의는 어떻게 됐나요? 저희 언니. 찾아주실 수 있는건가요?"
"아...."
때가 되면 제 입으로 이실직고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이가 전쟁 영웅이 된 이교도 꼬마의 자매라는 것은 뒤늦게서야 알았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가슴이 쿡쿡 저리고 쑤신다.
네퀴티아가 건넸던 끔찍한 진실이 마음을 옥죄고 독을 쑤셔넣는다.
진실을 말해. 마음 한 켠이 그리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어.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야.
자신이 승인한 실험이었고, 그로 인해 네 자매가 죽었다고 해. 책임을 다할테니, 정말 미안하다고 말해.
그것이 지배자이자 구원으로서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거야.
하지만 감당할 수 있을까? 마음의 다른 한 켠이 그리 속삭였다.
자매를 찾겠다는 일념 하에 마왕까지 꺾은 아이가 교단의 인체실험으로 자매가 희생당했음을 안다면, 과연 그 칼끝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기껏 마왕을 없애고 세계를 구해냈는데, 또 다시 세계를 피에 휘말리게 둘 셈이야?
만약 진실을 듣고 이 아이가 엘리시온을 대적한다면? 그땐 이 아이도 죽일건가? 실험으로 희생된 자매처럼? 그렇게 죽여서 묻을 것인가?
생각해라. 에클레시아. 양 쪽의 마음이 동시에 말을 걸어온다.
세계의 정점에 선 이로서, 마지막 희망으로 굳게 선 이로서, 무엇이 최선의 선택일지. 무엇이 신자들을 위한 선택일지.
"....."
천 년 같은 몇 초가 지난다. 입술을 세게 깨문 나머지 피가 입술을 적신다.
에클레시아는 평소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선택을 내린다.
"....그래. 차후에 교단 차원에서 실종자를 수색하기로 하였다. 그대의 자매를 찾는데 총력을 기울이라고 전해둘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선택한 것은 거짓말.
꿈에 그리던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소녀의 눈이 샛별처럼 밝아졌다.
소녀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에클레시아의 마음은 수명이 다해가는 별처럼 타들어갔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하!"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지만, 기뻐해주니 고맙구나."
가증스러운 거짓말.
성도들의 뜻을 아울러 법도를 행하는 위정자爲政者가,
성도를 위해 거짓을 무기로 휘두르는 위정자僞政者가 되어간다.
"아뇨! 드디어 언니를 찾을 수 있게 되서 정말 다행이에요. 예하가 없었더라면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을걸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의 이 평화는 너의 도움으로 이뤄낸 거니까."
추악한 거짓말.
소녀와 한 마디를 나눌 때마다 열 개의 가시가 마음을 뚫고 차갑게 박힌다.
소녀와 한 번의 웃음을 나눌 때마다 백 개의 저주가 마음에 날아와 부딪힌다.
"아! 저녁 먹으러 가야 하는데! 다음에 뵐게요! 밥 굶으시면 안되요 예하님??"
"끼니 걱정은 굶주린 이들을 향해 하도록. 내 걱정은 말거라."
이젠 되돌릴 수 없다. 자신은 선택을 했고, 이 선택으로 얻은 평화가 어디까지 유지되는지는 자신의 역량에 달렸다.
더 많은 생명과의 약속을 위해, 한 생명과의 약속을 부정한다.
지킬 수 없게 된 약속이라고 합리화하며 죽어버린 과거 속에 묻고 보지 않으려 든다.
괜찮아. 에클레시아. 넌 옳은 선택을 한 거니까.
너만을 믿고 따르는 2천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를 위해, 지배자로서 당연한 선택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는 수 밖에 없었다.
기분 탓일까. 이교도 소녀에게 손을 흔들며 하는 인사가 마치 작별 인사처럼 느껴졌다.
갈림길로 갈라져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이를 향한 마지막 인사처럼.
-그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었던 것인데.
모든 이들을 떠안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짐을 졌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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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 2개 정도? 만 쓰면 완결될거야. 그렇다면 다음 화가 무엇을 다루게 될지..... 알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