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감사의정권] 엘리시움 피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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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회의 머리 된 자




"그분께서 택하심을 받은 이들로 말미암아 이르시되,


인도에 힘입어 하나된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 무너진 이 땅에 교회를 세우자.


한 마음 가운데 서로 모여 교제하고, 찬송하며, 기도하는 이 곳이야말로 교회ekklesia일지라."



- 이면세계에서 발견된 경전, 14장 12 ~ 14절






재앙을 잘라낸 이교도 소녀는 바람을 다시 거두며 악단의 지휘자들 앞에 당당히 섰다.



"이교도 소녀....?! 그대가 여긴 어떻게...."


"마왕과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었나?"


"설마 예하께선.... 설마...."


"아니요!!"



소녀가 뺵 하고 소리치자 지휘자들은 깜짝 놀라했다.


피골이 상접하여 패배에 찌든 그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은 떨고 있었다.


이런 상식 선을 넘어선 지옥이 열린 것에 대해, 큰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항상 고결했고, 자신들이야말로 군단의 중추임에 명예를 과시했던 지휘자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아뇨. 결단코 아니에요! 예하께선 그리 간단히 쓰러지실 분이 아니란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건 당신들이잖아요!"



정론이다.


에클레시아의 곁을 보필하며 악단을 지휘해온 그들이라면 에클레시아가 그리 쉽게 최후를 맞을 만큼 약하지 않다는걸 안다.


다만 전장의 참상과 종 멸절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다보니 자신들의 마음이 약해진 것 뿐.


세상을 통째로 찢어버릴 것 같은 저 살아 움직이는 멸망 앞에서, 평범한 인간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 여기에 온 이유는..."


"예하로부터의 전언이에요. 전 악단의 단원들, 성인들, 지휘자들, 원정군의 모두에게 전하는."


"전언... 이라고?"


"추가적인 지시가 있다 한들, 이제 원정군은 궤멸된 상태다.... 이제 와서...."



지휘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상황은 절망적이다. 하물며 전언이랍시고 달려온 이가 이교도 아이다.


뭔가를 쉽게 믿을 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건 이교도 소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뇨. 아직 희망이 있어요. 아직 포기하면 안ㄷ..."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한 지휘자가 피 섞인 고함을 토해내며 핏발 서린 눈으로 이교도 소녀를 노려보았다. 제4 포르테 악단의 지휘자였다.



"기도도, 음악도, 전술도, 용기도, 무엇도!! 저 걸어 움직이는 재앙들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단 말이다!! 이 이상 뭘 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이미 붕괴된 원정군을 무슨 수로 살리겠다는 거냐!! 무가치하게 죽어 나자빠지는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거냐? 응? 대답해봐라 이교도 꼬마!!"


"4악단 지휘자님, 고정하시죠...! 아직 어린 아이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면 다요?! 무지하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다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오!! 고작 성흔의 힘 좀 있는 주제에, 무엇을 안다고 우리에게 설교를 하려 든단 말이더냐!"



절망에 찬 분노를 토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만큼 지휘부의 손상이 심각했다.


부숴진 그들의 마음을 잇고,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자신에겐 에클레시아와 같은 카리스마도,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언변술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이교도이지만.


해야만 하니 앞으로 걸어나간다.



"그래도.... 해야죠. 뭐라도 해야,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예하께 힘이 되는게 아니었나요?


저희의 신앙이 예하께 힘이 되어준다면서요. 그러면 살아야죠. 살아서, 버텨서!!! 어떻게든, 도와드려야죠...."


"....."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요. 아직 모든 단원 분들이 죽은 건 아니라구요."



낫을 고쳐잡고 소녀는 굳은 결의로 눈에 불을 붙였다.








"예하를 도와, 이 전쟁을 이길 거에요. 방금 잘라버린 그 마왕의 단말들처럼. 모조리 잘라내고 전부 구할거에요."


"무리다.... 원정군은 더 이상...."


"할 수 있어요!!!!!"



소녀가 다시 한 번 빽 하고 소리쳤다. 날카로운 소리에 지휘자들 모두가 소녀에게로 이목을 집중했다.



"아직 안 끝났다고요.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서 예하께서 미리 마련해뒀던 전언이란 말이에요.


예하께서 아직 타기리온과 싸우고 계세요. 저희가 여기서 이렇게 엎어져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예하께서....?"


"아직....!"



지휘자들은 고원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 전보다 푸르른 광휘의 세기가 훨씬 약해진 것이 보였다.


미약하지만 꺼지진 않은 빛이 지휘자들의 마음을 한 차례 뒤흔들었다.



"저 빛은....!"



아아. 위대한 정적이시여.


아직 싸우고 계셨나이까.


빛이 저렇게 탁해질 정도로, 저희와 함께 힘겹게 싸우고 계셨나이까?



"예하....!"


"....."


"여러분께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 전언을 듣지 않는다면 예하는... 예하는 누가 도와드려야 하나요?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예하께 힘을 보태드려야 해요. 그러기 위해, 제가 여기 있는 거고요."



지휘자들은 숙연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초 간의 침묵을 깨고 제50 델리카토 악단의 지휘자가 말했다.



"....들려주게. 소녀여. 예하께서 남기신 말이 무엇인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하께서 여러분께 항상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고 계시나요?"


"""....!!!"""



그 말을 듣자 지휘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를 바라봤다.


지휘자 뿐만 아니라 일반 단원들조차도, 그 이야기를 듣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 두 마디.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자리에 있는 원정군 모두의 꺾여진 마음에 파문이 인다.



"정말, 그 말씀을 남기셨단 말인가...?"


"네."


"정말로....?"



소녀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물론 거짓이다. 에클레시아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고, 이미 타기리온과의 격전 가운데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모두의 목숨을 지옥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것이 될지라도, 해야 한다.


에클레시아의 힘은 곧 엘리시온 원정군 모두의 총체.


그녀를 부활시키려면 원정군을 먼저 부활시켜야 했다.


이 전쟁은 사기가 꺾이지 않아야 이길 수 있다. 그것이 소녀의 판단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예하께, 힘을 빌려주세요."



소녀는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는 숙명으로 감싸 진실로 만들었다.


결연한 소녀의 눈동자는 스스로가 에클레시아라도 되는 양 누구보다도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이상의 말은 서로 오가지 않았다. 


모든 지휘자들은 침묵 속에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감정은 부끄러움, 분노, 회개, 열정.


어떻게 잊겠는가.


매일 미사를 드리면서도, 전투훈련 중에도, 항상 들어왔던 말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주먹을 꽉 쥔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지휘봉을 든다.


모든 지휘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즉시 코러스 함들을 향해 통신을 전달했다.


단 두 마디를.



"예하로부터의 전언이다!! 전 악단은 들으라!!"









너희가 선 이 땅이, 곧 우리의 교회다.










"뭐라고...?"


"예하께서... 전언?"


"지금?"


"지켜보고 계셔...?"



전장 곳곳에서 마음이 꺾인 단원들이 하나 둘씩 절망의 늪으로부터 고개를 치켜들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던 시야가 점차 넓어진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 모두가 고원 지대에서 희미해져가는 푸른 빛의 광휘를 눈에 담았다.



"예하...!"


"예하... 흐윽....!"


"아, 아아아...!!"



모든 이들이 느낀 것은 에클레시아를 향한 회개의 감정.


그리고 힘을 보태야 한다는 사명감.


여기서 나자빠져 있을 수는 없다는 결사의 의지.



[반복해서 전 악단에게 전파한다! 예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가 선 이 땅이, 곧 우리의 교회다.




전 원정군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식어버린 마음에 불이 붙는다.


신앙이라는 이름의 불은 꺾인 마음을 녹여, 새로운 형태로 다시 빚어낸다.



"이.... 이 땅이....."


"교회....."



[너희가 선 이 땅이!!!!]


[곧 우리의 교회다아아아!!!!]



".....!!!!!"



그러자 죽음과 패배만이 감돌던 지상에서 다시 전율이 일었다.


희망을 잃었던 단원들의 눈빛이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며 변한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공포에 절은 비명 대신 투지를 불태우는 거센 함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두 손을 모아, 눈물을 머금고, 단원들은 기도를 상달했다.


지금 이 순간.


원정군이 부활한다.



"일어나... 일어나!!!!!"


"형제 자매들이여!! 일어나라!!!"


[기도하라! 찬양하라! 교회되어 위대한 정적을 지켜라! 하나되어 싸워라!!]


"일어나 기도하라!!!"


"이 땅에 교회를 세워라!!"



악단의 단원들이 다시 결집하기 시작했다.


무기를 다시 들고, 두 명이서 손을 잡고, 열 명이서 오를 이루며, 악기별로 대열을 재정비한다.


원정군의 붕괴는 상식 이상의 재앙에 의해 음악이라는 구심점이 파괴되었기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본래 하나된 의지로 단결하길 선호하는 엘리시온 인간들의 특성 상,


구심점을 새로 잡아준다면 다시 각성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위대한 정적을 위하여!!!!"


"함께 싸우시는 그 분을 위하여!!!"


"일어나라!!!!"



아직 끝난게 아니다. 원정군의 부활을 시작으로 재차 거점을 형성하여 이 일대를 하나의 성지로 만들어야 했다.


소녀는 지휘자들에게 재차 지시를 내렸다.



"계속해서 코러스 함에게 추가 명령! 전 함선, 음파를 쏴서 거대한 단층을 만들어야 해요!!"


"위치는 어디인가?"


"제 바람이 떨어지는 곳을 기점으로 쏴주세요!"



소녀는 즉시 날아올라서 바람의 기둥을 일으켜 저 너머를 향해 내리꽂았다.


바람이 떨어지는 즉시 수 십 척의 코러스 함이 포문을 열고 음파를 발사했다.


공간을 찢어발길 기세로 발해진 음파폭격은 파동에 닿는 역병체들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킬 뿐 아니라, 아예 폭격 범위 내의 단층을 허물어버렸다.


아에라리움 평원에 거대한 분단선이 생겨나며 무한한 역병체의 파도가 끊겼다.


됐다. 지금이 곧 전환의 국면.



"지금이에요! 성인 분들의 별동대를 전부 내보내서, 단절된 역병체들을 한번에 밀어붙여 거점을 확보합니다!"



이교도 소녀의 말과 동시에 각종 대단위 능력들의 비가 뒤에서 쏟아져 내려온다.


역병체들의 파편이 사방에 휘날리고, 온갖 천재지변이 현현하여 대지를 쓸어댄다.


비록 타기리온의 단말들에 의해 많은 수가 줄었지만, 나아갈 방향을 인지한 그들의 칼날은 녹슬지 않았다.



"성인들까지... 아직 남아 있었는가!"


"이기고 있다....?!"


"이건, 도대체...."



일시적으로 전황이 바뀐다.


전장의 모든 지휘자들 역시 그 변화를 파악해내고 본능적으로 각 악단들에 명령을 하달했다.



"전 악단에게 전파한다! 진형을 갖춰라!"


"성전을 위한 기도를 울려라!!"



우우우우우웅-



코러스 함과 아직 남아있는 성가용 기계유닛이 성가를 연주한다.


지휘자들이 지휘봉을 든 채 선율을 수놓고, 단원들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마음을 정련하고 기도를 입에 올렸다.


무너졌던 음악의 질서가, 악단의 군기가, 회복되어간다.


울려퍼지는 성가와 기도가 전장을 장악하며 노래를 듣는 이들을 위로하고 응당 향해야 할 곳으로 마음을 쏟게 한다.




만물 가운데 정적을 노래하시는 이여!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저희들이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간절히 구하오니.


멸망의 시련 가운데에 강퍅해진 심령들을 신성한 선율로 녹이시며 헤아려 주시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저희가 맹세하고 약속한 말들을 낱낱이 기억하게 하셔서,


그 약속을 이행하는 저희들이 될 수 있도록 은총 가운데 함께 싸워 주소서.




기도를 중보하면서도 지휘자들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군략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교도 아이가 마치 능수능란한 장군과도 같이 악단의 지휘권을 장악하다니.


아무리 지휘체계가 무너져 원정군 전체가 붕괴될 뻔한 긴급 상황이었긴 하나, 이런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에 가까웠다.


기도는 계속 이어졌다. 소녀가 만들어낸 이 새로운 거점을 향해 남은 생존자들이 포위망을 뚫고 서서히 집결했다.


아에라리움 평원은 더 이상 전장이 아니라 교회 그 자체였다.


엘리시온 정교의 교리 상, 교회는 위대한 정적의 신성한 몸이 되며 에클레시아는 교회의 머리 되는 존재.


성도들이 하나되어 교제하고 기도하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한, 머리 되시는 주께서 임재하실지니.



위대한 정적이시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대의 피와 의로우심과 그대를 향한 믿음 아래 하나되게 하사


시련의 한복판에서 죄와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신앙과 열정으로 분깃을 삼아 담대히 싸우게 하옵소서.



기도로부터 이어져가는 소망이 정적에 잠긴 이를 향해 기적을 행한다.


기도가 무너진 육신에 다시 힘을 불어넣고,


기도가 빛을 잃고 꺼져가던 의식을 붙들어 다시 깨운다.



두근-



쓰러진 에클레시아의 눈이 번쩍 뜨인다.


부활을 알리기라도 하듯, 푸른 빛의 기둥이 힘차게 하늘을 뚫고 솟아올랐다.


희망의 푸른 빛이 꺾이지 않고 다시 고고하게 봉화처럼 타오른다.



"보라!! 예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


"예하!! 우리들의 간구를 들으소서!!"


"저희의 부르짖음에 권능의 오른손 들고 화답하소서!!"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익숙한 기도.


익숙하면서도 너무나 애달프게 들려와서, 긍휼한 마음이 들게 만드는 기도.


죽음 앞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원정군 전체가 상달하는 구원의 외침.



"그런, 가.... 그대들은.... 아직도....."



아직도 날 위해 싸워주고 있었구나.


너희를 도살장으로 이끈 것이 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날 위해 마음을 바치고 있었구나.


아직도, 아직도....


눈물이 흘러나와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미안하다. 그대들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


압도되어, 일신의 나약함이라고만 생각하여,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굴복하고 말아서.


그러니.








- 이제, 더는 굴복하지 않겠다.




검 전개

Luce Sacra



푸른 빛의 광휘가 기둥 형태로 에클레시아의 주변에서 화산처럼 분출된다.


주변의 빛들이 에클레시아가 든 양손검을 향해 모여들었다.


에클레시아의 푸른 검은 그녀가 등지고 있는 2천여 만 명의 영혼의 힘을 에너지 형태로 변환시키는 보구.


신앙을 힘으로 바꿔, 그녀의 무한한 힘을 현실에 물리력으로 행사할 수 있게 만든다.


밝게 빛나다 못해 작열하는 태양처럼 타오르는 청광의 검이 검은 장막으로 둘러쌓인 고원 지대를 눈부시게 밝혔다.



"어떻게 부활한건진 모르겠지만... 부질없는 목숨을 계속 이어가는구나. 미물이여."


"내가 싸우는 연유는,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이니."


"자신이 나약한 존재임을 그 목을 거둬 끝을 맺어야 깨닫는 것이더냐?"



타기리온이 다시 힘을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다시 느껴도 공포로 몸이 저릴 만큼 거대한 힘.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동안 그대들이 날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이젠 내가 그대들을 위해 바칠 때.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에클레시아는 땅을 박차고 포탄처럼 타기리온에게 쇄도했다.


지금껏 자각하지 못했던 것을 마음에 품는다.


내가 이 세계를 위해 싸운다면 이 세계 역시 누군가를 위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품고 싸울 때, 비로소 기적이 일어남을.


그렇게 항상 설교해왔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클레시아, 나 자신이었을 터인데.


수 십만의 목숨을 제물로 흘려내고 나서야 깨닫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소용 없다고 말했거늘! 몇 번을 다시 깨어나도, 설령 죽었다 깨어나더라도! 너희 세계는 승리에 닿지 못한다!!"



엘리시움 피오레

크레도 Credo



거창함이나 화려함 없이 그저 위에서 아래로 발해지는 종베기.


신앙고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숙연히 적의 숨통을 끊는 기본 되는 검술.


소중한 이들 하나 하나를 마음에 새기며, 몇 개나 되는 세계를 떠안은 듯한 출력에 맞선다.


검 대 검이 충돌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충돌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베기와 맞베기.


찍어 누르기와 흘려내고 반격.


흘러내며 뚫고 들어오고, 그 궤적의 흠을 비틀어 역공.



키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신으로 추대된 인간과 멸망을 이끄는 신 사이의 검격이 대지를, 하늘을, 세계를 찢어 발긴다.



"까불지 마라!!!"


".....!!!!!"



엘리시움 피오레

콜로라투라 Coloratura



경쾌하고 빠른 쾌검의 난무가 타기리온을 덮친다.


아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도 격렬한 힘과 힘의 충돌. 힘의 극한.


거기에 검술이나 보법은 그저 거들 뿐. 순수한 힘이 부딪히며 그 응축된 살기를 서로의 목을 향해 겨눈다.


고원 지대에서 흘러나오는 힘의 격류로 인해 고원이 깎여나간다.


지형이 바뀔 정도의 싸움은 끝없이 몰려들던 역병체들로 하여금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지게 했다.


반대로 엘리시온의 악단들은 계속 기도문을 제창하며 에클레시아와 타기리온의 싸움을 경외로운 눈빛으로 지켜봤다.


무기가, 힘의 형태가 부딪힐 때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소리가 난다.


'파괴' 라는 개념을 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런 소리일 것이라고. 이 전장에 있는 모든 존재가 자신했다.


저게 정녕 한 인간이 벌일 수 있는 싸움이 맞긴 한 걸까.


거기 있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이미 자연재해.


아까 자신들이 마왕의 단말들을 통해 겪었던 살아 움직이는 멸망이 이번엔 우리 쪽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가가각!! 콰아앙! 쾅! 콰드드드득-



에클레시아의 검이 타기리온의 본체에 직격하며 땅이 내려앉는다.


어째서지? 타기리온은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속도도, 힘의 총량도, 출력도, 내가 훨씬 우월하다.


그런데.


고작 몇 천 만명 분의 영혼에 불과한데, 아까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어째서 내가 밀리는거지?!


계속되는 에클레시아의 맹공에 타기리온은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날벌레 주제에, 신성한 의무를 방해하지 말란 말이다!!!!!!"




6i 타기리온

권능해방 Yetzira

Purgatorium 卍靈歸一




땅이 뒤집힌다.


타기리온이 딛고 있는 대지에서 타기리온과 똑같이 생긴 역병체, 마왕의 단말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까 그가 발했던 권능으로 인해 이 단말체들 역시 타기리온과 똑같은 출력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단말들은 저주를 쏟아내며 검을 뽑아들고 에클레시아를 향해 사나운 기세로 돌진했다.


한 개체만으로도 이미 반칙에 가까운데, 수백 수천 마리의 단말들이라니.


저리 번거롭게 하지 않더라도 객관적으로 본다면 여전히 타기리온이 우세하다.


다만, 달라진 것은 단 한 가지.


강함이니 출력이니 그런 것에 기대지 않고 앞으로 가기로 했다.


영웅이란 많은 것들을 마음에 품고 지키는 자. 그 강함의 원천은 품은 것을 인지하고 나아가는 발걸음에서부터 기인하니.


내게 맡겨진 소임을 따라, 앞으로.


내게 바쳐진 기도에 응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 모두에게 희망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걸 위해서라도-


내딛는다.


춤춰라. 나의 영혼.




엘리시움 피오레

포스타 데 템페스타 Posta de Tempesta

카덴챠 Cadenza




폭풍과도 같이.


춤에 회전을 더해 회전을 거듭하여, 사각이 없는 검술로 사방을 공격한다.


거대한 푸른 빛의 광휘를 두른 검과, 역겨운 어둠으로 가득한 검들이 재차 부딪힌다.


세계가 뒤흔들리고 대지가 지층 째로 토막나며, 공간을 찢고 가른다.


격류가 지나는 궤도 상의 모든 것을 존재하지 못하게 으스러뜨린다.


부딪히고, 깨부수고, 베어넘기고, 꿰뚫으며, 공중을 날아, 다시 베고, 찌른다.


무대 위의 무용수와도 같이 자유롭게, 모든 생명의 기대를 등에 안고.


앞으로.


앞으로.


베여도, 찔려도, 앞으로.






"아아아아아아아!!!!"



꺾일까보냐.


에클레시아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무참히 분쇄해나갔다.


마침내 최후의 한 놈을 반으로 쪼개버리며 다시 타기리온의 앞에 다다른다.


공중에 뜬 채, 에클레시아는 재차 공격을 위해 자세를 다잡았다.




포스타 데 코로나 Posta de Corona




왕관을 쓴 이의 고고한 자세를 취하고, 검을 두 손으로 잡아 기도하듯 앞으로 끌어모은다.


이때까지의 어떤 빛보다도 더 찬란히 빛나는 신성한 광휘가 그녀의 푸른 검을 향해 한없이 응집되어간다.



"오냐!!! 와라!!! 그 존재 째로 으스러뜨려주마!!!"



쿠오오오오오오오-



타기리온 역시 검에 역병의 기운을 잔뜩 담아 폭주시켰다.


거대한 빛의 군세와 어둠의 군세가 한 자리에 모이니, 신들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듯 두 힘이 격렬하게 휘몰아쳤다.


검은 장막조차도 으스러뜨릴 만큼 강력한 두 힘이 공간을 좀먹는다.


이 빛에, 삶을 담았다.


백성이 고통받고, 땅이 황폐해지던 모든 고통을 담았다.


지난 6년간 각자의 소중한 것을 뒤로한 채 이 땅에 피를 뿌리며 스러져갔던 모든 목숨을, 그 의미를.


눈부신 빛에 담아, 그저 폭발시킨다.


이는 그대들에게 바치는 헌사獻詞요,


그대들의 안식을 기도하며 내가 드리는 예배禮拜이니.


양 손에 가득 깃든 빛을 앞으로 뻗으며 힘차게 내리친다.







엘리시움 피오레

피날레 Finale

대속하시는 주 Agnus Dei







"오, 주여....."



순간 온 전장의 소음이 잦아든다.


모든 존재가 그 싸움에 시선을 빼앗긴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눈이 부실 정도로 발해지는 청색의 빛.


빛이 떨어져내린다. 떨어져서 죄악의 근원 되는 것을 눌러 부수고 찢는다. 오직 정적만이 이 소음 가득했던 전장을 가득 메웠다.


인지를 초월한 광경 앞에서 인간은 모든 사고가 멎기 마련이다.


위대한 정적이 자아내는 한순간의 장엄함을 그저 모두가 목도하게 된다.


그 정적이야말로 이 원정에서, 생지옥이 된 세상 속에서 한때나마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강제로 떠올리게 했다.


더는 찾을 수 없을거라고 믿었던 찬란한 희망의 빛을.


안식을 받아들여라. 세상 모든 악이여.




세상에 남는 것은 어둠을 살라먹는 빛의 찬란함.


에클레시아의 검이 타기리온의 반신을 베어 가른다.




"네 놈, 감ㅎ-"



거기서 끝나지 않고 변칙적인 가속, 바로 방향을 틀어 제 2격.


또 한번의 심판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킨다.



다 카포 Da cap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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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빛이 가시고, 타기리온이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타기리온에 의해 소환됐던 역병체들은 형체를 잃고 사라져갔다.


그것들의 조각이 가을에 휘날리는 티끌처럼 하늘로 정처없이 흩어졌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마왕을 두동강 낸 당사자조차도 눈을 감고 양 손을 검 손잡이에 모은 채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은 마치 그간 스러졌던 엘리시온의 모든 무고한 생명들을 향해 올리는 기도와도 같았다.


이윽고 에클레시아가 눈을 떠 칼을 한 손으로 드높이 들어올려보였다.


위대한 정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한 병사의 함성이 시작이었다. 뒤이어 전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너 나 할것없이 하늘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됐어!! 이겼어!!!"


"이긴거야? 정말?!"


"형제들이여! 우리가 승리했노라!!"


"이겼다!!!!!!"


"위대한 정적께 영광 있으라!!"


"영광 있으라!!!"



마침내, 엘리시온의 인류는 실로 거대한 승리를 쟁취해내었다.






- 서력 2079년 5월 18일.


엘리시온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던 타기리온은 위대한 정적의 심판에 의해 무저갱의 저편에 떨어졌나니.


전사들의 헌신에 영광 있으라. 자애로운 선율에 영광 있으라. 위대한 정적에 한없는 영광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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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기리온 컷!!!


너무 고봉밥이라 미안하다!!!!!!!!


그래도 읽어주는 너희가 너무 고마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