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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검게 물들다




"왜냐고? 세계를 핑계로 네가 전부 잃게 했으니까!


내 마음에 있는걸, 모두, 검게, 너희가 전부 검게 물들였잖아!!"




- 리아 자일, 나이트런, 나이트폴 66화 中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에클레시아는 추기경들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네퀴티아의 선을 넘은 연구 결과를 공유했다.


놀랍게도 결과는 만장일치로 처벌의 반대, 그리고 멘탈 프린팅 연구에 막대한 지원을 쏟을 것이 결의되었다.


이교도들을 포옹하기보단 멸시하며, 아예 죽이는 것마저 보편화되어있던 엘리시온의 풍조가 불러온 결과였다.



"....그렇게 되었군요."


"처벌을 면했다고 해서 본인에게 죄가 없음이라 착각하지 말도록."


"죄인이지요. 역사가 쭉 이어진다면, 전 역사상 최악의 학살자로 기록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네 뜻은 알겠지만, 그 이상 입을 놀리지 마라."



모든 것을 어그러뜨린 주제에 죄인을 자처하는 꼴이 가증스럽다.


에클레시아가 으르렁대자 네퀴티아는 고개를 가만히 숙이며 그 분노를 겸허히 수용했다.


오래 전부터 각오한 일이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리기로. 자신이 피에 미친 악귀가 되는 것조차 받아들이기로.


총애를 받아왔던 이에게서 더 이상의 찬사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었다.


앞으로도 쭉 이렇게 독기가 오가는 관계로 남을 수 밖에 없겠지.



"성황 직을 받아들이기로 하셨다지요?"


"그렇다. 때가 된다면 누군가는 권위를 통해 이 미친 짓을 막아야 하니까."



에클레시아는 네퀴티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네퀴티아는 냉혹하고도 서슬퍼런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매도한다 하여, 그 악행이 전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널 지켜볼 것이니 명심하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겐 절대로 이 실험이 알려져선 안될 것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하."



네퀴티아는 숙연해진 채로 나지막히 말했다.




........


............




이교도 소녀는 교단 측에서 제공된 집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2주가 지나고, 3주가 지나도, 언니를 찾았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매주마다 수도의 바깥으로 함선과 생존자 수색대가 정찰을 나섰지만 그녀에게 전해지는 소식은 없었다.


소녀는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에클레시아가 찾아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언제까지나 그녀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마왕은 죽고 세상은 이전보단 안전해졌다. 게다가 남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니 자신이 직접 찾아나서도 괜찮으리라.


이교도 소녀는 마음을 굳히고 하늘을 날아올랐다.










엘리시온

교단 직할령 남부

국경도시 르비딤




여러 차례의 수소문 끝에 소녀는 이교도들을 받아 개종시키는 곳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언니를 찾고 있는데 이교도들이 어디에 주로 많이 모이는지 아느냐' 는 소녀의 질문에 수도에서 만났던 원정군 소속 악단 단원들은 '개종시설을 찾으라' 고 조언해줬다.


수도에서 지내기 위해 필요한 기초적인 교리나 규칙들을 교육하는 시설이라나.


주로 국경 지대에 있다고 하여 소녀는 가장 사람이 많이 몰렸다는 남부의 국경도시 르비딤에 도착했다.


도시 내부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난민의 행렬이 도시 외곽에 가득했다. 악단 단원의 복장을 한 병사들이 바쁘게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쪽으로 와라, 저쪽으로 가라 하는 등의 안내방송이 줄지어 이어졌다.


이교도 소녀는 먼저 이교도들이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공중에서 파악하기로 했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이들은 교단 직할령에 거하는 사람, 꾀죄죄한 옷차림을 한 이들은 난민 내지는 이교도였다.


찾다 보니 이교도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신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기가 개종시설이로군. 소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신전을 향해 강하해갔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마왕 토벌의 공을 세우신 분이라도, 여기엔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엑."



하지만 애석하게도 경비를 서고 있던 단원들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소녀는 입을 삐쭉 내세우며 터덜터덜 하늘을 다시 날아오를 수 밖에 없었다.



"에휴.... 경비가 이렇게 삼엄하다니. 개종시설이란건 원래 다 이런건가...?"



아까 하늘에서부터 봤을 때도 이 시설의 경비 병력은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단순 정착을 위한 교육과 개종이 이뤄지는 시설인데 무엇이 문제가 된다고 이렇게 병력이 많지? 그새 흉악범죄라도 발생한건가?


뭐가 어쨌든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소녀는 언니가 와있을 법한 지역을 전부 돌며 찾아낼 생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경비가 삼엄한 것은 신전 외부.


그렇다면 하늘에 떠 있다는 점을 적극 활용하여 내부로부터 잠입하면 그만이다.


소녀는 사람이 가장 없는 땅으로 착지하여 신전 한복판으로 몰래 들어갔다. 예상대로 외부만 경비가 삼엄했다.


신전 내부는 수속을 위한 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수속이 끝난 이들은 한 곳에 모여 물과 음식을 배급받았다.


대부분의 인력들이 이 난민의 행렬들을 관리하기 위해 곳곳에서 난민들을 신경쓰고 있었다.


사람이 굉장히 많고 떠들썩해서 이교도 소녀에게까지 신경쓸 교단 사람이나 악단의 사람은 없었다.



"거기! 물이랑 들 것 가져와!"


"괜찮습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갑자기 대열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가 오랜 여정으로 인해 지쳐서 쓰러진 듯 했다.


기회였다. 소란을 틈타 소녀는 난민수속 통과대를 슬쩍 통과해서 빠르게 저 너머로 사라져갔다.


들키지 않으려면 빨리 움직여야 한다. 소녀는 일단 직감이 따르는 대로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돌아 거대한 복도를 지나니, 으리으리한 회랑이 드러났다.


회랑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왼쪽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보였다.


지하 계단을 내려가자 칠흑 같은 어둠이 시야를 완전히 가렸고,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덮쳤다.



"난민들을 받고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는 곳이라더니.... 왜 이렇게 으스스하지?"



소녀는 살짝 몸을 떨었다. 지하 창고 같은 곳일까. 그렇다면 이렇게 서늘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려던 찰나-



"?!"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들켰다간 바로 끌려갈 것이다. 전쟁영웅이라 한들 자신은 이교도이기 때문에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다.


재빨리 소녀는 옆에 있는 기둥의 뒷편으로 몸을 숨겼다.



"...지휘자님. 새로 작성한 악보가 효과가 있어요. 실험은 굉장히 순조롭습니다."


"추기경들께서 위험을 감수하시고 몰래 지원을 해주셨으니,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야만 하겠죠. 수고했습니다."



소녀는 어둠 속에서 보이고 들리는 것을 통해 그들이 악단 사람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60만 원정군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소녀의 기억 속에는 최소한 60인의 지휘자들은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방금 지휘자라고 불린 사람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그보다도 실험이라니. 개종 시설에서 실험을 얘기할 건덕지가 있던가?



"실험 규모에 따라 새로운 시설이 준비되고 있다고 해요. 여기는 어떻게 할까요?"


"보는 눈이 많은데 옮기는 것은 위험하죠.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도 있으니, 그냥 폐기하도록 하세요."



다행히 자신이 숨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않고 지나가는 듯 보였다.


소녀는 속으로 안도했다.


들킨다고 해서 보통의 이교도처럼 즉시 사형에 처해지진 않을 테지만, 괜히 구설수에 올라 에클레시아에게 불똥이 튀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안도한 나머지 긴장이 풀려 소녀는 뒤에 있는 벽에 몸을 기댔다.




위잉- 철컹.


동- 동- 동-




등치에 꾹 눌리는 느낌이 나더니 거대한 기계음이 들리며 사방에 불이 켜졌다.


어두웠던 복도가 밝게 빛나고, 기둥들에 빛이 들어왔다. 악단 사람 둘의 발걸음도 멈췄다.



"음? 지정된 시간 외에 설비는 사용해선 안된다고 교육하지 않았나요?"


"누구야! 누가 멋대로 설비를 작동시켰어!"


"힉....!"



당황한 소녀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몇 차례 휘저었다.


저 너머에서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들켰다간 끝장이다.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한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어?"



소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밝게 빛나는 기둥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용액이 들어가 있는 거대한 기둥 형태의 튜브였다. 어둠 속이라서 기둥인 줄 알았을 뿐.


기둥 밑부분에는 글씨가 쓰여 있는 금속의 판이 붙어 있었다.



"이름이.... 적혀있네? 이건..... 에?"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은 자신이 가장 찾고 싶었던 사람의 이름.



"언니....? 정말 언니야....?"



삶의 이유이자 현재의 목표였던 이름.


자신의 언니의 이름이 쓰여 있는 통 안에는 뇌 하나가 전극들이 연결된 채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아, 아아.....!"



온 세상이 어둠으로 물든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받아들일 수 있는 선을 넘어버린 사실이 오감을 통해 쏟아지며, 그 정보의 소용돌이로 사고가 과열되어 멎는다.


노이즈만이 껴 마비되고 고장난 사고 가운데 드는 생각은 오로지 의문, 단 한가지.


이게, 뭐야?


왜?


왜 언니가 이런 모습으로 있는거지?


와 같은 끝없는 의문들. 갈 곳 잃은 의문은 주인에게로 다시 돌아오며 또 다시 의문의 잔향을 낳는다.


왜? 어째서? 왜 이런거야? 왜? 왜?


어째서? 어째서? 어쨰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쨰서? 어째서?



"아아아.... 아아, 아아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호흡이 멋대로 거칠어진다. 고장난 사고가, 마음이, 방향을 잃고 멋대로 폭주하며 이성을 마비시킨다.


잔혹한 진실을 담으면 담을수록 소녀의 세계가 무너져내린다.


아니야. 이건, 이런건.... 거짓말이야.


툭, 투둑,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소녀의 눈에서 흘러내린다.



침입자를 찾았습니다!


두 손 올리고 실험체로부터 떨어져!



뭐?


실험체? 우리 언니가? 왜?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거짓말이어야해사실일리없어거짓말일거야거짓말이야거짓말거짓말거짓말거짓말이야거짓말이야!!!!





"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자리에는 귀기어린 표정을 한 채 울부짖는 한 마리의 짐승이 있었다.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토해지는 소녀의 절규는, 감상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마구 소리치는 소녀를 대변하듯 바람이 폭주했다.


격렬한 바람의 칼날이 실험실을 전부 토막칠 기세로 휘몰아치며 벽을, 천장을, 나아가 이 신전 전체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오오오오오오, 하고 하염없이 울부짖었다.



순순히 투항ㅎ.... 잠깐, 그 이교도 아이...


당신이 왜 여기에....



이교도 소녀를 잡으려는 사람들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날카로운 바람이 그들의 목을 치고 지나갔다. 스프링쿨러처럼 피가 튀겼다.


달려드는 사람이 사라지자 이교도 소녀는 재빨리 낫으로 언니의 뇌가 담긴 용액통을 부숴, 뇌를 챙겨 품에 안았다.



"거기 서!!"



거센 바람으로 움직이는데 제약이 걸리지만, 살짝의 연주만 할 수 있다면 잠시나마 발을 묶는 것은 가능하다.


바이올린을 꺼내 연주를 하려는 셰나를 향해 바람의 칼날이 날아와 서 있던 바로 옆을 박살냈다.


간담이 서늘해져 셰나는 침입자인 이교도 소녀를 노려봤다.



"....!!"



셰나는 깜짝 놀라 무심코 눈을 피하고 말았다.


그 얼굴은 셰나가 그동안 숱하게 봐와서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표정. 엇나간 듯한 웃음.


내일에 대한 희망도, 소중한 것도,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비어 끝없는 심연으로 인도하는 얼굴.


소녀의 검게 변한 눈에서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인간으로서 흘리는 마지막 눈물인 양, 눈을 통해 검은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쾅!!!



셰나가 기세에 눌려 눈을 피한 그 짧은 순간.


노도와 같은 기세로 쏘아진 바람의 칼날이 실험실 복도 천장을 뚫고 나가 신전 천장을 부쉈다.


소녀는 자매였던 이의 뇌를 품에 안은 채 빠른 속도로 공중을 향해 날아올라 유유히 사라졌다.


소녀가 벗어나자 바람도 함께 가셨다. 실험실은 재난 상황에 울리는 경보기의 소리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뭐하고 있나요, 셰나. 실험이 들키면 안됩니다. 1층의 난민 수속소에는 지반 침식이 일어났다고 보고하고 대피시키세요!"


"네! 다들 움직여! 절반은 1층! 절반은 이곳 자료를 전부 챙겨서 여길 폐쇄한다!"


"예!!"







......


..........








소녀는 무작정 공중을 날아 아무 곳으로나 향했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머나먼 저 편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소녀는 사람이 사는 땅을 지나 이미 까맣게 죽어버린 대지를 지나치고 있었다.


죽어버린 눈을 한 채 소녀는 묵묵히 날았다.


그 눈에 담긴 수심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 눈에 응어리진 절망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



얼마나 비행했을까. 소녀는 이쯤 이동했으면 됐겠거니 하고 속도를 천천히 낮췄다.


자신이 일으킨 소란을 문책하기 위해 심문관들이 파견되겠지만, 르비딤은 애초에 교단 직할령의 끝단에 위치해 있던 도시.


이미 교단 직할령을 벗어나 한참을 날아가던 차라 심문관들이 자신을 찾을 확률은 손에 꼽았다.


정처없이 날아가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격전지였던 아에라리움 대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죽은 허허벌판에는 아직도 역병체들과 사람의 시체가 가득했다.


이교도 소녀는 에클레시아가 격전을 벌였던 고원 지대에 착지했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고이 품에 끌어안고 있던 언니의 뇌를 그 위에 올려놓고 다시 눈에 담았다.



"언, 니...."



죽은 땅,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은 우리 언니.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소녀는 뇌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다녀왔어요, 언니.... 미안해요.... 미안해...."



언니와의 추억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단 둘이 허름한 집에서 하루하루를 단란하게 살아가던 날. 저녁 식사의 따뜻함. 날 어루만지는 가족의 손길.


이젠 더는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째서 이렇게 되버린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언니를 찾기 위해 성전군에 의탁한 것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아니면....



"더 빨리 찾지 못해서 미안해요, 전쟁을 더 빨리 끝내지 못해서 미안해요... 예하만 철썩같이 믿고 언니가 이렇게 죽게 내버려둬서, 그래서.... 정말 미안해..... 미안해....!!"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비행만 해왔다. 소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그러나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


세상을 구한게 다 무슨 소용일까.


멸망으로부터 살려낸 엘리시온 사람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내 사람은, 내 가족은, 살아 돌아올 수가 없는데.



"윽.... 끄으윽, 으으으으윽.... 으흑, 으으으....!!!"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단전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의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속 시원하게 절규라도 내지르고 싶었지만, 이젠 내지르는 것조차도 되지 않았다.


신음할 때마다 아파서,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를 수 조차 없을 만큼 아파서, 그저 독한 열병에 걸린 듯 신음하는 것뿐이 할 수 없었다.



"언니... 있잖아요? 나, 세상의 주인 되시는 분을 만났어.... 마왕을 토벌하면 언니를 찾아주겠다고, 그러셔서.... 전력을 다해 도왔어....


좋은 사람들, 엄청 많이 만났어... 엄청 강해지기도 했어.... 이제 더는 예전의 꼬맹이였던 내가 아니다? 멋지지...?"



덩그러니 남은 뇌를 쓰다듬으며, 정처없이 말을 건다.


칭찬받고 싶었는데. 만나서 힘껏 끌어안고 자신의 여정을 한껏 자랑하고 싶었는데.


그랬었는데.



"아. 대답, 못해주는구나. 괜찮아요 언니.... 피곤했을 테니까.... 쉬고 있어요. 헤헤. 우리 언니. 다시 보니까.... 너무 좋다. 헤헤헤...."



이전까지의 자신은 인간이 선의로 가득 차있다고 믿었다.


자신을 이교도라며 싫어하던 인간도 있었지만, 자신을 좋아해주던 인간도 있었으니까.


인간은 참으로 잔혹했다. 소중한 것을 잃는 것은 그토록 싫어하면서, 정작 남에게는 그러한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안겨주다니.



"헤헤헤.... 히히, 큭.... 크흐윽, 으으으윽...... 으으으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고장난 사람처럼 소녀는 웃다가 울길 반복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그녀의 마음은 이미 망가진지 오래였다.


소녀는 다시 오열한다. 그저 목놓아 운다.


들을 사람 없는 말은 갈 곳 없는 바람이 되어 죽어버린 땅 가운데 허무하게 사라졌다.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했는데, 의미가 없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오열하고 있는 자여.



"?!"



자신 외에는 이 고원에 아무도 없을 터인데. 들려올 리가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대에겐 슬퍼할 권리가 있다.


그대에겐 정죄할 권리도 있다.


그대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권리가 있다.


이 끔찍할 정도로 불합리한 운명을 끊고,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했을 것을 받을 자격이 그대에겐 충분하다.



근래 처음으로 듣는, 마음에 이불을 덮어주는 듯한 사려 깊고 따뜻한 말.


하지만 소녀의 마음은 그런 말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만큼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뭘 받을 수 있는데요?"



소녀는 허공을 향해 되물었다.



"내 모든 것이나 다름없었던 우리 언니가 이렇게 죽었어요.... 시체도 찾지 못해서, 이렇게 덩그러니 뇌만 가지고 나올 수 밖에 없어서...!! 언니를 애도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는데...!!"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거웠다. 분노가 목을 타고 울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받을 수 있다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내 세상이 송두리째 사라졌는데, 이제 와서?


네가 뭔데.



"운명이니 잃어버린 것이니 뭐니, 관심 없어... 그딴 거!!! 언니를 살려줄 수 있는게 아니면, 사라져버려!! 꺼져!!!! 꺼지라고!!!!!!"



소녀는 목이 떨어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지르고 싶어도 아파서 지르지 못했던 고함이, 격한 분노로 인해 마음이 자극받자 튀어나온다.


체한 사람이 엎드려 음식물을 뱉어내듯, 이교도 소녀는 악에 받혀 고레고레 소리쳤다.


실험실에서 언니의 뇌를 발견했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 온 몸을 내던지듯.



"헉, 헉... 허억...."



살릴 수 있다면 어찌 할 텐가?



"....뭐?"



한참을 조용해져 있다가 말고 소녀의 귓가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 들려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어서 소녀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무심코 되물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자격 있는 자가 운명을 끊고 거듭난다고 하였다.


운명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세계의 법칙을 거스른다는 것.


그 여정의 끝에는 어떤 형태의 소원이든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설마....."



살릴 수 있다. 스러진 목숨일지라도.



"....!!!"



일시적으로 이교도 소녀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에클레시아의 원정군에 간택받아 합류한 이후로 단 한번도 보지 못한 언니를,


모든 것이 끝나고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했음에도 생이별하고 만 언니를, 다신 못보게 된 이를, 다시 볼 수 있다고?


그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선택할 여지가 남아 있지 않던 소녀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삶의 의미와도 같았던 언니는 사망. 그리고 언니를 죽인 것이 자신이 그토록 믿고 따랐던 엘리시온의 사람들.


그런 자신에게 언니를 살려주겠다며 손을 내미는 이가 있다.


생각지도 못한 희망에 잠시나마 이성을 찾은 소녀의 사고가 재가동된다.


그러나 그 방향성은, 원래의 사람을 좋아하던 이의 것이 아니라 복수귀의 것에 가까웠다.


역겨운 족속들.


자신들은 죽고싶지 않아서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정작 이교도들을 향해서는 적극적으로 말살하려 든다.


그 광기에 나의 삶이 희생됐고, 최후에는 언니가 희생되고 말았다.


그 모든 미친 실험을 승인한 것은, 엘리시온의 사람들을 통틀어 가장 으뜸된 그 분이겠지.



"예하...."



아아. 그렇구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사고가 명쾌해지며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된다.


나에게 모든 것을 줬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앗아간 이가 드디어 보인다.


갈 길을 잃고 쌓이기만 했던 증오가 비로소 방향을 잡는다.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던 사실이 고개를 든다.


증오가 생기 없는 몸에 수혈되어가며 동시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기회를 받아들이겠는가?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소녀는 그 말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언니를 살려줘."



그 실험만 없었더라면 언니가 죽었을 일도 없었을 텐데.


아니, 엘리시온의 사람들이 이교도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만 않았더라도, 언니가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언니의 죽음, 나의 슬픔, 그동안 억울하게 죽어온 이들,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엘리시온이라는 세상이 존재했기 때문인거야.


그러니, 진실을 파해치겠어.


이 모든 광기에 연루된 이들을 내 손으로 전부 끊어내겠어.



"도와줘. 이 증오스러운 세상을, 내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이 천국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내 손으로 묻어버릴 힘을 줘."



그러자 소녀의 눈 앞에 검은 조각 하나가 나타났다. 갑옷의 한 부분인 것 같이 보였다.


소녀의 자매의 뇌 옆에서 검은 조각이 웅웅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나를 잡거라.



소녀는 그 말에 따라 손을 뻗어 검은 조각을 잡았다.


소녀가 조각에 손을 가져가자 조각이 바스라져 가루가 되어 휘날린다.


휘날리는 가루가 소녀의 몸을 타고 휘감으며 형체를 가진 연기처럼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여러 변화들이 일어났다.



"??!!!"



쿵, 하고 시야가 뒤집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느껴졌다.


별들의 움직임, 세계 너머의 어떤 존재, 시간의 배열, 사건의 동시성, 인과율, 생명의 법칙, 높으신 이의 뜻, 하사받은 권능....


인간의 인지를 한없이 초월한 지식들이 소녀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여섯 번째 클리포트의 마왕, 타기리온.


나의 지식은 그대의 힘이 되어 원하는 미래를 개척하겠고,


나의 마지막 사명은 비로소 끝맺어져 그대에게로 이어지니.




폭풍이 일어나 이 아에라리움 평원을 감쌌다. 검은 하늘이 열리며, 어둠이 이교도 소녀를 덮으며 내려왔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진동한다. 모든 죽어있는 잔해들이 죽음의 세계 한복판에서 초월적인 존재를 목도한다.


엄청난 양의 힘이 집중되며 소녀의 머리 위로 헤일로가 형성된다.


이 순간, 존재의 격상이 일어난다.


그래. 언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다른건 어찌되든 좋아.





"....나는 내가 소망하는 바를 이루고, 그 대가로 이 운명을 짊어지겠어요.


별이 사그라들고 태양이 그 빛을 잃는 묵시의 날까지. 기꺼이."



새로운 힘이 몸을 타고 흘렀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힘이.


지금이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죽은 이를 살리는 것일지라도.


소녀는 언니의 뇌를 집어들고 기도하듯 거기에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눈을 떠요. 언니.



잠들어 있던 클리파 차원이 새 주인의 강림을 축복하듯 공허한 울림을 노래하고,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벼려져 왔던 한 자루의 신의 힘이 죽었을 이의 영혼을 입고 수육한다.


무형의 존재가 형체를 갖춘다. 흰 백발이 휘날린다. 밤의 한 자락같은 검은 드레스가 땅을 덮는다.


소녀보다 머리 두 어 개는 더 큰 키의 여성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소녀 앞에 서 있었다.



"언니.....!!"



소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드디어,


드디어 만날 수 있어.

















그러나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소녀가 원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아아! 위대한 왕이시여! 그 존안을 이렇게 뵈오니 하해와 같은 영광이옵니다!"


"언니....?"


"하명하실 일이 있다면 말씀하여 주소서! 기쁘게 따르겠나이다!"


"......아니야."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건 아니야.


이건.... 이건..... 내가 생각했던 그런게 아니잖아....






-나의 마지막 사명은 비로소 끝맺어져 그대에게로 이어지니.

이로써, 순환은 깨어지지 않고 지속되리라.




Next :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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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열하다 못해 미쳐버린 댕시쨩이 잘 느껴졌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마왕의 힘을 얻어도 죽은 이를 온전히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했고.... 댕시쨩 폰지사기 당해버렸고.....


이 글을 쓴 내가 나쁜놈이지 에휴